골고다(Golgotha)와 갈보리(Calvary)산
아람어의 ‘굴갈타 (Golgoth a)’에서 온 헬라어이다. ‘해골의 장소’라는 뜻이다. 『신약성서』 중 「마태복음」 27장33절이나 기타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그리스도가 처형당했던 장소이다. 아마도 두개골 모양을 한 언덕과 바위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 듯하다. 라틴어 칼바리아(calvaria:해골), 칼바리오(calvario)와 뜻이 같다. 전승하는 바에 따르면 여기는 인류의 원조인 아담의 묘소이기도 했다. 영어로는 갈보리(Calvary)로 읽는다.
골고다(Golgotha)는 아랍어이고, 영어로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갈보리(Calvary), 라틴어로는 칼바(Kalva, Calva)로 표시한다고 하며 해골이라는 뜻이다.
즉 골고다 언덕과 갈보리 산은 같은 장소를 말하며 예수님 당시에 이곳은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거의 나무가 없이 큰 바위로 이루어진 해골모양의 언덕으로
황량한 채석장이었으며 유대인의 십자가형이 행하여지던 처형 장소이자 무덤 지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저서 정확한 골고다의 언덕의 위치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현재의 기념 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다와 예수님 무덤이라는 역사적인 신빙성은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63년경에는 로마가 지배하게 되었고, 이때 로마황제의 총애를 받은 헤롯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7년)가 왕이었으며,
기원후 33년(31년설도 있음)에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시었다. 그 후 44년경에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의 직속령이 된다.
1차 유대 독립항쟁(66-70년)이 진압되어 유다는 로마의 속주가 되고 종교의 자유등 유대인의 모든 특권이 박탈당하게 되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117-138년)가 즉위하자 제국을 순시하면서 아테네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을 짓게 하였고,
130년에는 예루살렘을 순시하면서 로마인의 도시로 건설하고, 성전 터에는 제우스 신전을 세울 것을 명했다.
이것이 제2차 유다 항쟁(132~135년)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2차 유다 항쟁을 진압 한 후 루푸스 총독은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을 바꾸고, 골고다 언덕을 평탄하게 하고
135년에는 로마의 최고 신 제우스와 그의 아내 비너스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옛 성전도 제우스 신과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섬기는 신전으로 개축하여
로마인의 도시로 건설하였다. 2차 유대 항쟁을 이르킨 후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게 되고,
이 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요르단과 시리아 등지로 피신하게 된다.
그 약 200년 후 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재위306~337년)는 313년에 기독교의 종교자유를 인정하는 “밀라노칙령”을 포고하고
박해 시 몰수했던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의 재산을 돌려주게 되면서 예루살렘과 갈리리 호수 주변등 이스라엘 전 지역에 교회가 복구된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황후(St. Helena)는 324년에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 중에,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 자리가 바로 골고다와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설명을 듣게된다.
AD 135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등 에 로마식의 주피터신전을 세웠고,
예수님의 무덤위에는 비너스 신전을 세운 것이 오히려 하드리안의 표시가 되어,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찾고자 원하는
헬레나 황후의 명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메카리우스(Bishop Mecarius)는,
편평하게 지형이 변해버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쉽게 찾아내게 되고
신전 지하실에서는 예수님의 못 박히셨던 나무 십자가도 발견하게 된다.
헬레나 황후는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326년에 황제의 명에 의해 그 로마의 신전은 다시 헐리게 되고
골고다와 예수님의 무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발견된 주요 장소를 아울러 그 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대성전의 건설이 시작되어
10년만에 완공하여 335년에 봉헌하고, 이곳을 지구의 중심으로 선포했다.
4세기에 건설된 이 첫번째 성묘교회는 두개의 건물로,
첫번째 건물은 현재 건물의 모양 상 앞 제대가 위치하는 곳에 해당하는 로툰다 Rotunda로 이 돔 구조물 안에는 예수의 무덤 유적을 감싸는
이디큘 Aedicule (작은 건물)을 세워 예수님의 무덤을 기념하는 교회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부활교회 Anastasis Rotunda라고 불렸다.
또 다른 건물은 십자가가 섰다고 믿어지는 골고다 언덕 유적과 연결되었던 대성전 Great Basillica으로
순교자 기념교회 Martyrium, 열주 아트리움 Triportico 등으로도 불렸다.
이 첫 성묘교회는 페르시아가 614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파괴되고 불탔으며, 보관되어 있었던 성십자가등을 빼앗기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강성해지자 헤라클레이오스(Ηράκλειος)황제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630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십자가를 재건된 성묘 교회에 반환했다.
이슬람세력이 강성해지자 634년 다마스커스를 점령했고, 637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묘교회는 이슬람세력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초기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타 종교인에게서 추가 세금을 걷는 대신 도시의 기독교 유적지의 파괴와 주거지로의 사용을 금지하여 관대하다는 평가도 얻고
경제적 실익도 얻는 왕권을 위한 정치적 정책을 펴서 성묘교회를 비롯해 이스람이 점령했던 중동 대부분의 교회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순례와 모임에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그동안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1009년 당시의 지배자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성묘교회를 파괴 할 수 없는 부분 외에 모든 것을 파괴한 이 사건으로
기독교 세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이 사건은 훗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