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9일 밤 첫눈이 내렸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습니다. 지금은 오후라 많이 녹았지만 아침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설경이 예봉산 산자락 밑에 있는 덕소중학교 교정 앞으로 펼쳐졌습니다. 예봉산과 검단산 풍경이 교무실 창밖으로 늘 보이는데 희끗희끗 눈이 내린 풍경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깨끗하게 해줍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얀 눈이 덮혀 있는 운동장이 하얀 바다 같이 보입니다.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시게 반짝이는 드넓은 운동장 바다는 설원 평야와 같이 평화롭습니다.
나는 첫눈이 내린 줄도 모르고 일찍 잤는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다고 어제 늦은 밤까지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온 아들이 말해서 알았습니다. 요즘은 아침 7시가 지나도 밖이 깜깜합니다. 날이 늦게 밝으니까 잠을 더 많이 잡니다. 꿈속에서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 꿈을 꿉니다. 마음으로는 정말 새벽을 사모하는데 하루 종일 수업할 체력을 감당하려면 도저히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체력이 약한 나로서는 충분한 휴식과 깊은 잠으로 체력을 유지하고 사는데 추운 새벽을 가르고 나가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마음으로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첫눈이 내려서 그런지 학생들도 마음이 즐거운가 봅니다.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서 장갑을 끼고 눈 장난을 하고 들어옵니다. 수업 시간 내내 조용히 소설 ‘흰 종이수염’을 읽으면서 칠판에 판서한 내용 적고 낱말을 찾습니다. 1950년대 6.25전쟁 직후의 고달픈 삶의 모습을 다룬 소설로 동길이네 가정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와 전쟁 직후 우리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물질적 궁핍과 정신적 황폐에 시달리는 50여 년 전 우리 민족의 당시 실상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안정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 수 있음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 소설에서 ‘흰 종이수염’의 상징적 의미는 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참담한 삶,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오른팔을 잃은 아버지의 노력,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 우스꽝스럽지만 비극적인 분위기를 만듦 등입니다. 징용 갔던 아버지가 2년 만에 돌아오는데 동길이는 아버지의 한쪽 팔이 없는 것을 봅니다. 친구들이 아버지를 놀리고 사친회비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옵니다. 극장 앞에서 움직이는 광고판을 보는데 동길이는 아버지가 흰 종이수염을 달고 활동사진 선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를 놀리는 창식이를 동길이가 때려눕힙니다.
지금 6,70대 노인들은 6.25 전쟁 직후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분들입니다. 소설 속의 동길이는 지금 우리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이기에 마치 아버지의 유년 시절을 보는 것 같습니다. 수제비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 시절의 비참한 실상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절대 빈곤은 절대 불행입니다. 절대 빈곤은 지구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절대 빈곤층이 10억 명이라 합니다. 5세 이하 유아사망이 1천 만 명이라 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은 온 천하가 설경입니다. 어제보다 더 많은 눈이 밤새 내렸습니다. 길이 빙판길이라 차 운전하고 오는 분들이 무척 고생을 했다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분들도 덕소역에서 내려 다들 30분씩 걸려 걸어오셨습니다. 덕소 길은 고개길이라 눈이 오면 얼어서 차들이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올해까지는 집 가까운 학교에 근무하여 이렇게 눈이 오는 날도 설경 감상만 하면 되지만 5년 만기가 되었기에 내년부터는 어디로 다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와부중학교로 가고 싶은데 국어과 자리가 나야하고 나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분이 내신을 내면 나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내년 판도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마음을 비우고 순리대로 보내주시는 대로 가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덕소 설경이 너무 아름다워 어제 학교에서 수업 비는 3교시에 글을 쓰다 백종용 목사님께 처음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달력을 보니 어제 11월 20일이 내가 도곡교회에 온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날마다 감격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 행복은 지속되리라 확신합니다. 교회 가는 날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말씀 듣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고 그 은혜에 힘입어 글을 쓰는 아침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나는 하루 종일 행복하고 하루 종일 즐겁고 하루 종일 기대감과 설레임 그리고 기다림에 잠깁니다. 그토록 사모하던 새로운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한 달이 일 년 같고 한 달이 하루 같습니다. 백 목사님과의 만남, 도곡교회산악회 카페에 글 올림, 백 목사님께서 주보 ‘목회 서신’란에 글 쓰는 기쁨 주심, 신남주 선생님 교회 등록하고 계속 다니기로 마음 정함, 빠리바케트 빵집 앞에서 만난 임진혁 학생 중고등부 출석하고 계속 다니겠다고 해서 보라색 성경책 줌, 11월 11일 네 명의 학생과 함께 예배드림, 11월 18일 아들과 함께 예배드림, 신권사님과 정권사님께서 글 읽으시고 눈물 나게 감동받으셨다고 내 손을 잡으심 등 참 감격적인 일들이 한 달 동안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수요일이 언제 오나 기다렸습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좋습니다. 내가 찾도록 찾던 세계가 드디어 도래한 것입니다. 억지로나 인색함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기다림으로 설레임으로 감사함으로 하루를 살아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설경 속의 글 스케치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