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등재 이야기
백남오
‘진등재’는 내 고향 ‘머릿골’에서 ‘초계’로 넘어가는 큰 고개의 이름입니다.
유년 시절에는 행정구역이 ‘합천군’이라 온몸으로 넘나들어야하는 삶과 애환의 안부였답니다. 동심의 희망이 녹아있는 꿈의 능선이기도 했지요.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바라만 볼 수 있는 의령군과 합천군의 군계능선일 뿐만 아니라 그 시리고 막막한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그리움의 능선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현장은 산상의 평원입니다. 고개 너머로는 넓은 ‘초계들판’이 시원한 평야를 이루고 사이사이로 자리 잡은 수 십 개의 저수지와 마을들이 광활하고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답니다.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새로운 세계여서 뛰노는 어린가슴을 억누르기가 어려웠지요. 뒤로는 작은 ‘머릿골 마을’과 계단식 전답이 척박한 삶의 터전임을 구체적으로 대변해주며 대조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고개하나를 경계로 전혀 별개의 두 세상이 존재함에 어린우리들은 혼란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여름이면 이곳에 소떼들을 모아놓고 질펀한 놀이판을 벌입니다. 공기놀이, 꼰 도우기, 땅따먹기, 물구나무서기, 잠자리잡기, 말타기, 기마전, 씨름대회, 아이스 케키, 그래도 심심하면 초계들판을 향하여 욕하기 대회를 시작합니다. 이때 욕하기는 말로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연기를 동원하여 온몸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신나고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물론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놀이일 뿐이었지요. 왜 그런 놀이를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하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훗날, 누구나 그런 유형의 어린 날의 놀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생각해보게도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스름 그늘이 내리면 소떼를 몰고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 그 시절 여름날의 하루 일과였습니다.
당시 진등재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육, 칠십 년대 만해도 5일만에 서는 초계장을 보기위해 오르내렸던 애환서린 곳이요, 행정구역이 합천군에 속했던 ‘권혜국민학교’ 어린이들이 우유급식을 위해 반드시 올라야만 했던 고난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 재를 넘어서 면소재지가 있는 큰집격인 적중초등학교에 가서 우유 한 박스를 등짐에지고 왕복 40리길을 다시 넘어오면 유년의 하루해가 꼬박 저물었습니다. 내가 지금도 큰 산을 오를 수 있는 힘은 아마도 이때부터 다져진 체력일 것입니다. 대학신입생 시절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따라 초계장에서 소한마리를 팔고 진등재를 넘어오며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던 대화들이 그리움으로 흐릅니다. 이처럼 민초들의 거친 숨결과 추억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꿈의 터전이 ‘진등재수필문학회’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니 그 감회가 각별하고도 감격적입니다. 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청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새봄의 길목에서, 마산대 수필창작교실 문우들이 열정을 담아 문학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척박한 땅의 애환서린 진등재는 이제 문학의 성소와 희망의 상징으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문학사에서도 수많은 동인들이 나타나서 뜻을 같이하는 문인들의 토론장과 사랑방이 되어주고, 빛나는 등불역할을 한 것처럼 진등재 문학회도 허접한 수필가들의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사람의 정이 그립고 서러운 옛 추억이 밀려드는 이 시대, 진등재 수필문학의 깃발을 올리는 것은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진등재를 통하여 유년의 꿈을 추억하고, 그 아득한 시절의 어린영웅들을 만나고, 고단한 현실을 위무하며, 미래의 소망을 가슴깊이 품어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개성과 빛깔로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풍경들을 문학을 통하여 풀어낼 것입니다. 누구와도 차별화 되는 자기언어의 집을 지어 후손들에게 작품으로 물려주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걸어야할 원대한 문학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비록 작은 씨앗하나 땅에 묻는 심정으로 출발하지만 언젠가는 커다란 나무로 무성한 수필문학의 숲을 이루어 한국수필의 큰 줄기가 될 것입니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우리 시대를 넘어 대대손손 유구히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온갖 풍상과 역경을 겪고 다져진 진등재의 단단한 능선이 그 뿌리가 되었으니 세상의 어떤 풍파에도 철옹성보다 견고하게 견뎌 내리라 믿습니다.
진등재수필문학회의 창립회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작은 한걸음부터 출발하려 합니다.
참으로 맑고 높은 겨울하늘 속으로 그리움의 화살하나 쏘아 올려 봅니다.
첫댓글 진등재수필문학회 창립총회를 준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문학행사에는 언제나 문학작품 낭송이 필수요건이기도 하지요
그에 마추어 수필한편 써 보았습니다
아직도 많은 퇴고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수필은 총회때 낭송작품으로 쓴 것인데 아직 읽으실분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선생님이 좋을까요
추천부탁드립니다. 스스로를 추천하면 더욱 좋을 테지요
감사합니다.
진등재수필문학회 창립을 앞두고 진등재의 역사와 애환과 추억을 단아한 수필 한 편으로 그려 내셨네요
^^문학의성소^^희망의상징^^
그렇습니다 머릿골에서 바라본 진등재는 제게영험함과 커다란 신비로움 으로 다가왔습니다
곧 창립될 진등재 수필문학회는 우리가 단순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오는 소중한 여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새 출발 하려는 진등재 수필문학회에 대한 교수님의 애정어린 마음 한 자락도 이해 할 것 같습니다
오는 정월 대보름에는 진등재에도 환한 달빛이 교교하게 흐드려 지겠지요
문학회의 찬란한 이름으로 우뚝 설 꿈의 능선,그리움의 능선,희망의 능선 진등재를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 속으로 그려봅니다.
새로운 설레임이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피어날 봄꽃처럼 가슴속에서 움트고 있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 큰 공감대로 다가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괜히 가슴이 설렙니다. 진등재수필문학회의 창립회원이 된다는 것이 말입니다.
교수님의 열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냄니다. 파이팅!
유년의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가시는 교수님이 참 대단하십니다.
진등재 수필문학회의 창립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