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뻐꾸기 소리
손 정 모
창문 너머로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꿈결처럼 감미롭게 흘러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 창문 밖을 내다본다. 꽃은 실연기처럼 너울대며 십 리까지도 그윽한 향기를 날려 보낸다. 만물(萬物)을 홀리려는 듯 꽃은 눈부신 자태로 연신 요염하게 나부댄다. 아카시아 수풀 어디선가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작년인 2010년 3월 26일에 남한 초계함인 천안함이 어뢰에 격침되었다. 북한 어뢰(CHT-02D)에 맞아 두 동강이가 난 채로 가라앉아 버렸다. 천안함에는 수중 음파 탐지기가 분명히 장착되어 있었다. 공격한 북한 잠수함은 길이가 25미터에 중량이 130톤에 이른다고 했다. 또한 어뢰의 크기는 7.35미터에 이른다고 했다. 바늘 크기도 아닌 25미터 크기의 잠수함을 탐색해 내지 못했다. 그랬으니 어뢰는 더더구나 찾아내지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해양 연구원의 ‘해양 탐사부’에서 근무하는 선임 연구원인 나다. 그 사건 이후로 나에게도 국가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20개월 이내에 첨단 수중 음파 탐지기를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내 아래에 소속된 연구원이 다섯 명이다. 여섯 명이 머리를 짜내어 신형 탐지기를 개발해야 한다. 물론 명령은 국방 과학 연구소나 과학 기술원에도 하달되었음을 안다.
한 해를 넘기면서부터 상당히 많은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신형 탐지기에서 비중을 둔 영역은 교란파(攪亂波)의 발생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어뢰를 쏜 잠수정에서는 교란파를 발신했다고 추정된다. 교란파란 탐지기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전자기파(電磁氣波)를 의미한다. 북한 신형 잠수함에는 교란파를 발신할 장비가 장착되었다고 간주된다. 교란파를 발신하면 기존의 탐지 장치로는 탐색하기가 어려워진다. 초계함이 고스란히 당했던 핵심 원인이 교란파 탓이라 여겨졌다.
내 나이 서른하나다. 아직까지 총각의 상태로 미국에서 건너오자마자 중책을 맡고 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태평양 동쪽의 버클리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해양학(海洋學)에 관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국내로 건너왔다. 연구원에서는 해양 탐사에 관련된 전자장비의 개발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나를 괴롭힌 영역이 교란파와 뒤엉킨 정상파의 분리였지? 여기에 대해서는 기초 실험도 여러 번 실시했어. 그랬는데도 매끄러운 결과를 얻지 못해 답보 상태이잖아? 잠시 영감을 떠올리려면 뒷산을 산책해야겠군.’
공휴일인 토요일인데도 연구를 위해 연구원에 출근했다. 연구실의 출입문을 잘 잠그고는 건물 뒷산으로 올라선다.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펼쳐진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고향 마을을 떠올린다. 유년시절의 꿈을 불태웠던 마을은 삶의 강력한 에너지의 근원이다. 전남 진도읍 산월리의 산월 마을이 내 고향이다. 마을 북동쪽 700미터의 직선거리에는 연대산 주봉이 치솟아 있다. 차도로 마을 북서쪽 1.5킬로미터의 거리에는 쉬미항이란 항구가 있다.
마을 앞에는 논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가 드러누워 있다. 길이가 1.8킬로미터이며 평균 폭이 600미터에 이르는 면적을 차지한다. 유년시절의 마을에는 37가구가 살았다. 마을 서쪽으로 300미터 거리에는 소쿠리처럼 산으로 파고든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는 방화곡(芳花谷)이라 불린다. 마을 뒤로는 연대산(해발 257m)이 광활한 영역에서 웅장하게 치솟아 있다.
산길을 오를수록 산은 점차 가팔라지고 있다. 온 사방에는 소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길길이 치솟아 있다. 숲은 절반은 소나무이고 절반은 아카시아나무로 여겨질 정도다. 시야에는 눈송이처럼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온통 산야를 뒤덮고 있다. 5월말이라 꽃이 질 무렵인데도 향기가 넓게 퍼지면서 전신을 휘감는다. 게다가 뻐꾸기의 울음소리마저 더욱 구성지게 흘러든다.
고향을 떠올리면 내겐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얼굴이 먼저 밀려든다. 아버지, 아버지! 긴 세월 동안 이 단어만큼 두려우면서도 버거웠던 단어는 없었다.
어릴 적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37가구 중에서 내 또래의 아이들은 다섯 명이 있었다. 넷은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으며 나만 빠져 있었다. 입학할 무렵에 내가 장기간 혹독한 몸살을 앓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쨌건 다른 애들은 학교에 다니는데 나만 뒤쳐져 집을 지켰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이 늘 부러웠던 나였다.
봄이 되었어도 날씨가 쌀쌀한 입학식 날이었다. 나는 가슴 부푼 심정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들어섰다. 운동장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그 넓은 면적에 눈알이 팽 돌 지경이었다. 그렇게 넓은 마당은 생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입학식을 시작한 뒤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귀가해 버렸다. 당시에 한 학년은 두 학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학년 1반의 담임은 여선생님이었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제나 내 이름이 불리겠거니 여기고 차례를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선생님이 출석을 다 불렀는데도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출석을 부른 뒤에는 다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말없이 대열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날 오후였다. 아버지가 대나무 뿌리를 주워 들고는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집 울타리가 대나무였기에 대 뿌리는 흔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 어머니마저도 나 때문에 매를 맞았다. 맞을 때엔 이유도 모른 채 마구 맞았다. 어렸지만 너무나 분해서 치를 떨며 울었다. 우니까 울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아버지한테 재차 맞았다. 그래서 입학하던 날은 이유도 모른 채 엄청나게 맞았다.
뻐꾹! 뻐뻐꾹!
하염없이 우는 뻐꾸기의 머릿속으로 할머니의 영혼이 정말 파고들었을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기운을 잃게 만드는 애절한 울음소리. 뻐꾸기의 목에서 피가 끓어 넘치는 듯하여 뇌수가 흔들릴 지경이다. 아카시아나무 사이로 치솟은 자작나무의 둥치를 붙들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최소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이라도 알아두고 싶어서다.
매를 맞은 다음 날부터 나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갔다. 담임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진호야, 선생님이 어제 널 본 기억이 있어. 네가 원래 2반에 편성되어 있었거든. 네 어머니가 1반으로 바꿔 달라고 입학식 전날 내게 부탁했었어. 그걸 깜빡 잊고 네 이름을 그만 빠뜨렸더구나. 나중에야 알아차리고 반 친구들과 함께 네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어. 하지만 너는 사라지고 없더구나. 선생님이 실수했으니까 애들과 잘 어울리도록 해, 알겠지?”
얼굴이 곱상한 처녀 선생님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첫 날 겪은, 학교와 집에서의 충격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원래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손가락을 꼽으면서까지 기다린 나였다. 그랬는데 첫 날의 충격으로 모든 학업에서 흥미를 잃고 말았다. 선생님을 대하거나 친구들을 대하여도 전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느닷없이 휴대전화가 호주머니에서 떨어댄다. 귀에 갖다 대니 상희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여기는 연구원 주차장이야. 연구원에 나왔다는 얘길 듣고 왔는데도 안 보여서 전화해. 오늘과 내일은 주말 연휴일이잖아? 오늘과 내일은 나랑 같이 있어 줄래?”
울적한 기분에 젖어 있었는데 연인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서 반갑다. 모든 걸 떨치고 상희에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았어. 여기는 연구원 뒷산이야. 거기 주차장에서 기다려. 내가 금방 내려갈게.”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오솔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상희는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우주공학과(宇宙工學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여인이다. 나보다 세 살 연하이며 항공 우주 연구원의 선임 연구원이다. 미국에 머물면서 비슷한 지역이라서 자주 만나다 보니 연인이 되었다. 얼굴은 수수하고 성품은 소탈하여 서민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따스한 느낌을 주는 상희가 내겐 소중하기 그지없다.
내가 연구원 주차장에 내려섰을 때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상희가 활짝 웃으며 손을 번쩍 든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 달려가서 손을 맞잡고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본다. 상희를 향해 입을 연다.
“대부도로 나가는 게 좋겠지? 거기에 가서 맑은 바람을 쐬는 게 좋겠어.”
상희가 고개를 끄떡이며 흔쾌히 동의한다. 내 차의 조수석에 상희가 오른 뒤에 차를 대부도로 몬다.
초등학교의 입학식을 맞이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내 이름이 2반에 편성되어 있더라는 얘기는 친구들이 마을에 전했다. 마을의 또래 친구들은 2학년들이었기에 쉽게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마을 친구들의 얘기를 전해들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는 거였다. 입학할 때부터 2반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학교에 가서 학급을 바꾸도록 말하라고 어머니한테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입학식 전날에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말했다. 반을 바꿔 달라고. 이런 얘기를 나중에 듣고서야 매를 맞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학급의 변동으로 인해 출석부에서 내 이름이 선생님의 실수로 빠뜨려졌다. 끝내 호명되지 않았기에 극도의 실망감과 분노를 느꼈던 나였다. 나는 소외감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곧바로 학급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렇게 하교했다가 아버지한테 엄청나게 맞았다. 왜 학급을 떠났느냐고 한 마디만 물어봤어도 덜 억울했을 것이다. 무작정 대 뿌리를 들고 고함을 치며 후려 패던 아버지였다.
그 날 이후로 학교의 모든 수업에서 흥미를 잃어 버렸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충분히 적극적으로 잘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엉뚱한 생각으로 출발 시점의 활기(活氣)를 꺾어 버린 아버지였다.
호명 대상에서 내가 제외되었음을 느꼈을 때부터 반항은 시작되었다. 그 반항이 아버지만에 대한 반항이었다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기능의 활기찬 내 운명에 대한 반항으로 변질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점차 학년이 높아질수록 나 스스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양 연구원으로부터 시화 방조제까지는 차도(車道)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방조제를 건너 대부도 공원 언저리의 해변을 거닐기로 한다. 대부도 공원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다. 나란히 해변을 걸으면서 상희가 내게 말한다.
“탐지 장치의 설계는 잘 되어 가니? 나는 2단 로켓에 부착될 정밀 전자기기(電子機器) 설계로 머리가 지끈거려. 과학 기술원 출신의 과학자들이 결성한 M산업과도 몇 차례 만났어. 거기는 위성 제작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실력을 갖춘 회사거든. 서로 도우며 연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보다 참신한 착상이 필요해. 이래저래 너도 만나고 싶기도 해서 너를 찾았어.”
말을 마치면서 그녀가 내 손을 잡는다. 나도 그녀와 손을 잡고는 나란히 해변을 걷는다. 길이가 1.5킬로미터에 이르는 백사장과 730미터에 이르는 해안의 솔숲이 장관이다. 파도가 밀려와 출렁일 때마다 하얀 포말이 해변으로 흩날린다. 크기가 손가락 마디보다도 작은 게들이 산발적으로 백사장 위를 나다닌다. 물결에 떠밀려 미역과 파래 토막이 여기저기로 흘러 다닌다.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일요일 오후에 딸기를 따 먹으려고 산등성이를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제법 많은 딸기 맛을 보았다. 그랬는데 하늘에 서서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는 지형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산등성이를 더듬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내리는 골짜기를 오르내리느라고 옷에 흙이 묻었다. 그러다가 빗줄기가 급격히 굵어지자 흙이 묻은 채 집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서 있던 아버지가 나한테 말했다.
“대나무가지를 꺾어 와.”
마침 어머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울타리를 이루는 대나무가지를 하나 잡아챘다. 힘껏 잡아채야만 대나무가지가 몸체로부터 찢겨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꺾인 대나무가지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그랬더니 다짜고짜 대나무가지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노여움과 짜증이 치밀어 올라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때리지 마세요! 훗날 내가 아버지를 먹여 살릴 텐데 왜 때려요?”
이유 없이 매를 맞는 것에 대한 당찬 반발이었다. 아버지가 돌연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그냥 사립문 밖으로 나갔다. 찰나 간의 일이라곤 하지만 마음이 영 불안했다. 세숫대야에 물을 길러 얼굴과 발을 씻는데도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희가 내 손을 놓고는 대부도의 모래바닥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 개펄에도 바지락이 있을까? 호미가 있으면 한 번 캐 봤으면 좋겠어.”
나는 ‘해양 수산’이라는 음식점에서 호미 두 자루를 빌린다. 그녀에게 조개 캐는 요령을 들려주고는 나란히 개펄을 파기 시작한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생일 때였다. 마침 아버지는 볼일이 있어서 광주로 나가고 없었다. 내가 듣지 못했던 얘기를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들려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갑이며 나보다는 마흔 살이 많았다. 아버지가 5살 때에 할머니가 집을 나가 버렸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찾았을 때엔 할머니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혼자서 키웠다. 그런 할아버지마저 아버지가 7살 때에 사망했다. 건설 공사장에서 일하던 중에 신축 건축물이 붕괴되어 압사(壓死)했다. 할아버지는 4대째의 독자였다. 그랬기에 아버지한테는 가까운 친척이라곤 없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다.
그랬어도 앞날이 암울하여 11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밀항선을 탔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사방으로 떠돌면서 삶을 영위했다. 그러다가 청년 시절부터는 공사장 노무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서른 살이 되자 짐을 꾸려 귀국했다. 귀국할 무렵에는 돈도 어느 정도 번 상태였다. 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번 돈으로는 항구 부근에 집을 한 채 샀다. 그 때부터 부산항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당시에 어머니는 부산항 공사장에 딸린 음식점의 주인으로 일했다.
어머니의 경우는 2살 무렵에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잠시 돌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아버지가 집을 수리하느라고 딸인 어머니를 처가(妻家)에 맡겼기 때문이었다. 여름철 폭우가 장기화되던 날에 마을 뒷산에 산사태가 났다. 그 때 토사물이 마을을 뒤덮어 밤중에 부모를 잃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무 교육마저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랬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용케 한글과 산수 정도까지는 터득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산항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결혼했다. 그 때의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는 정착할 마을을 찾아 진도로 찾아 들어섰다. 정착하던 그 해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라는 사람이 진도를 찾아왔다. 하룻밤 내내 대화를 하더니 사랑채에서 묵고 다음 날에 떠났다. 친구라는 사내가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내에게 부산에서 모았던 대부분의 돈을 빌려 주었다.
그 이후로 사내한테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중에서야 사내가 곧바로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돈을 긁어다가 외국으로 달아난 거였다. 그 사실을 안 뒤부터였다. 아버지는 극도로 실망하여 한동안 폐인처럼 침묵하고 지냈다.
어머니는 잠시 찻잔에 물을 따라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 돈은 제법 거액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을에 오면서 집을 샀다. 마을의 논 세 마지기와 방화곡의 밭 다섯 마지기도 샀다. 그리고는 낚시점과 배를 두 척 정도 살 예정이었다. 부산에서 노무자 생활을 그만둘 시기였다. 해상 화물을 부리던 중에 화물에 척추가 부딪혔다. 그 결과로 척추 넷째 마디가 심하게 탈골이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완치는 어렵다고 했다. 다시는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얘기였다.
그 길로 노무자 생활을 접게 되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얘기를 들은 이후였다. 보다 일찍 듣게 되었으면 더 빨리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봐 내가 캔 조개만 해도 몇 마리야? 꽤 재미있네.”
상희가 캐낸 조개를 치켜들고 꽤나 호들갑을 떨어댄다.
“이야, 정말 제법 많이 잡았네. 조개 캐기가 쉽지 않은데 대단해, 정말.”
썰물로 빠져 나갔던 바닷물이 밀려드는 시각이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해양 수산’으로 걸어간다.
아버지한테 때리지 말라며 짜증을 부렸던 날로부터 며칠 지난 시점이었다. 이웃집 영수의 어머니를 마을의 공터에서 만났다. ‘모산댁’이라는 영수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뒷산 언덕에 매 놓았던 염소를 몰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진호야, 네가 아버지를 먹여 살리겠다고 말했다면서.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랬으니 다시는 안 때리겠다고 나한테까지 얘기했지.”
나는 아버지의 말을 믿기로 했다. 무서운 성격인 만큼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유년의 시간은 잘도 흘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선생님을 따라 광주에 갔다. 도내 어린이 그림 대회를 실시한다고 해서였다. 나는 학교 대표로 대회에 출전했다. 대회 현장에서 시골 풍경을 그리라는 진행자의 지시를 받았다. 나는 농부가 소를 몰며 쟁기로 논을 가는 풍경을 그렸다. 그림을 그려 제출하고는 학교의 인솔 선생님과 함께 귀교했다. 2주일쯤 지나서 도내 최우수상인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 날 이후로 그림에 대한 내 위상은 대단히 높아졌다.
그림 분야에 있어서는 무섭기 그지없는 아버지까지 내 실력을 인정했다. 내 집 논에 세워진 허수아비의 얼굴들은 죄다 내가 그렸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당신의 얼굴을 그려 보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망설일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당당한 자세로 연필을 들었다. 전라남도가 인정한 그림의 꼬마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도 아버지는 반듯한 자세를 취해 주었다. 그림이 완성된 뒤였다. 아버지의 얼굴에 만족한 표정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짐을 실어 나르는 데는 손수레(rear car)를 이용했다. 손수레에는 서너 지게 분량의 나뭇단도 실리곤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지게에 무거운 짐을 지지는 않았다. 지게를 지더라도 작은 부피의 짐만을 지곤 했다. 평야에는 농로가 잘 뚫려 있었다. 그래서 거름이나 비료 및 농산물까지도 손수레로 실어 날랐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워서 배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갈 때엔 이웃집 영수의 아버지 배를 탔다. 함께 작업에 참여하여 얼마간의 어획물을 배당받곤 했다. 배당받은 어획물을 읍내 시장에 팔아서 생계비에 보탰다.
내가 부모의 얼굴을 제대로 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 탓에 부모는 새벽부터 거의 논밭에서 살았다. 내가 학교에 갈 때에는 혼자서 일어나 밥을 챙겨 먹었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했을 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다로 갔거나 어머니와 함게 읍내 시장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농작물과 해산물을 거두느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늦게 시장으로 갔다. 얼마 안 되는 수확물일지라도 다 팔고서야 귀가했다. 그러자니 귀가 시간이 늦을 수밖엔 없었다.
저녁이 되어 온기라곤 없는 방바닥에 앉을 무렵이었다. 구멍 뚫린 창호지로 햇살이 날아들었다. 햇살 자국의 흔적으로 벽에는 점 모양의 원들이 일렁거렸다. 뒷문으로 스며드는 것은 대숲이 바람에 휩쓸리는 소리였다. 바람소리를 들을 때마다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듯했다. 벽에서 한동안 맴돌던 빛의 점들도 사라지면 적막에 휘감겼다. 멍하니 뜬 눈에 졸음이 밀려들 무렵이면 현기증에 시달렸다. 허기진 뱃속이라 현기증이 쉽게 일었다. 몸이 앞뒤로 흔들리다가는 기력이 떨어져 방바닥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승용차 앞에 섰을 때다. 상희가 나를 향해 말한다.
“오후에는 연구 업무 때문에 과학 기술원에 가 봐야 해. 내 차까지 좀 태워 줘.”
나는 고개를 끄떡인 뒤에 조수석에 그녀를 태운다. 그런 뒤에 차를 몰아 해양 연구원으로 달린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7월 초순이었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선단(船團)을 이루어 가거도 해상으로 고기잡이에 나섰다. 가거도에서 서쪽 100킬로미터 일대가 여름철 조기 떼가 몰리는 어장(漁場)이었다. 기상청 일기예보에 따르면 서해에 약간의 풍랑이 일 거라고 했다. 약간의 풍랑 정도는 어민들한테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14척의 배가 가거도로 고기잡이에 나섰다. 아버지는 영수의 아버지 배에 올라타고 바다를 향해 떠났다.
오후 3시 무렵에 긴급한 뉴스가 전해졌다. 서해 해상에 돌발적으로 태풍이 발생하여 밀려든다는 소식이었다. 기상청에서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기상 이변이라고 했다. 순간 풍속이 초속 40미터를 넘어선다고 했다. 14척의 배도 긴급히 뱃머리를 가거도로 돌려 대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태풍에 휩쓸렸다고 한다.
그 날의 사고로 마을에서는 23명의 어민들이 실종되었다. 끝내 시신도 찾지 못한 채였다. 가족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아버지를 잃은 뒤부터였다. 집안의 경제 사정은 현저하게 쪼들렸다.
어머니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급격히 살이 빠지며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아버지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였다. 하도 힘을 못 쓰기에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몇 가지의 검사를 거친 뒤였다. 의사가 나를 불러 어머니의 병명이 폐암이라고 했다. 암 세포가 많이 전이된 상태여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단지 마지막까지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도록 하라고 말했다. 길어야 한 달가량 생존하리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에 처참했다.
해양 연구원 주차장에서 상희가 그녀의 차를 몰고 떠난 뒤다. 나는 내 숙소인 연구원 아파트로 발길을 옮긴다. 아파트로 들어서서 내 방의 책상 위에 앉는다. 고개를 들어 서가(書架)를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지난 4월 20일에 찍힌 사진 액자가 진열되어 있다. 고향의 방화곡 부모의 묘소 일대가 촬영된 사진이다.
지난 3월 하순의 일이었다. 구입한 연구 서적들을 옮겨 놓기 위해 서가를 정리할 때였다. 서가의 귀퉁이에, 올해 초에 생가(生家)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유품이 보였다. 나는 유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보자기를 풀었다. 책 4권과 공책 2권이 눈에 띄었다. 책으로는 족보 1권과 불경(佛經) 2권과 관광 책자 1권이 있었다. 공책 1권은 어머니의 것이었고 빚을 갚은 내역이 적혀 있었다. 다른 공책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승선 일자와 영농비 지출 내역을 기록한 내용들이었다. 아버지의 공책을 넘기다가 보니 담배의 은박지로 덮어씌운 부분이 드러났다.
은박지는 시선을 끄는 용도로만 부착시킨 모양이었다. 은박지 아래의 약도(略圖)에는 생가 주변의 방화곡 (芳花谷) 일대가 그려져 있었다. 약도의 북서쪽 귀퉁이 부분에 붉은 점이 삼각형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약도 아래로는 ‘내력의 실마리’라고 적혀 있었다.
내력의 실마리라? 은근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글이라 생각되었다. 약도 속에 표시된 장소가 아버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튿날이 일요일이기에 토요일 오후에 곧바로 진도를 향해 출발하기로 했다. 실내 정리를 간단히 하고는 목욕실로 들어섰다. 일단 간단히 몸을 씻고는 승용차를 몰고 갈 작정이었다.
남도에서는 4월 초순부터 중순에 이르기까지 배꽃이 눈부시게 만발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부터의 내 기억에는 아버지의 정기적인 외출이 기억났다. 배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부터 2∼3주간을 어디엔가 다녀오곤 했다.
3월 하순의 연휴라 진도로 내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서 몸을 닦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차를 곧장 달리면 저녁나절에는 진도에 닿으리라 예상되었다. 마음을 정하자 외출 준비를 하여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윽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서해안고속도로에 올라타고부터는 마음을 편안하게 취했다. 목포를 거쳐 진도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지 세 달 뒤에 어머니마저 폐암으로 숨졌다. 그 때가 10월 초순이었다. 아버지가 외지에서 들어왔고 독신이어서 친척이라곤 없었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무사히 치렀다.
막상 어머니까지 땅에 묻고 나니 세상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수능을 치르려고 준비해야 할 상황에서 앞길이 막힌 터였다. 밤 새워 번민해도 해결할 길이 없었다. 학교를 찾아 휴학 처리를 했다. 그런 뒤에 이장을 찾아 눈물로 하소연했다. 이장이 꽤 오래 부인과 상의하더니 내게 말했다. 이듬 해 2월까지 이장의 집에서 머물면서 일손을 도우라고 했다. 그러면 대학에 진학할 길을 열어 주겠다고 덧붙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부산항에 막 들어왔을 무렵이었다. 할머니의 생사가 궁금하여 할머니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남 김해의 낙동강 나루의 마을에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귀국하기 두 달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낙동강 강변의 고사목에 올라 삭정이를 잘라 나뭇짐을 꾸릴 때였다. 물가로 휘늘어진 나무에 올랐다가 나뭇가지가 찢기면서 익사했다고 한다. 그 때가 4월 중순이어서 사방에는 배꽃이 지천으로 만발한 시기였다.
3월의 산하(山河)를 가로지르며 나는 곧바로 저녁나절에 진도에 도착했다. 이장과 마을 사람들을 찾아 인사를 한 뒤에 읍내로 나갔다. 생가(生家)는 그간 사용하지 않아서 폐가(廢家)가 되었기에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읍내 여관에서 숙박하며 이튿날 아침에 방화곡을 찾기로 했다.
3월 하순의 기온은 여전히 서늘했다. 이튿날 나는 승용차를 몰아 산월 마을에 들어섰다. 동네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 방화곡을 향해 걸었다. 나는 방화곡이 있는 연대산의 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에서는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방화곡 일대는 눈을 감고도 오를 지경으로 정이 든 곳이었다.
휴학한 이후에 이장의 조수를 하며 그 해를 보냈다. 이듬해 3월부터 다니던 학교에 복학했다. 광주에서 1년간 생활할 하숙비와 대학 등록금까지 이장이 지원해 주었다. 이를 토대로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나는 경쟁률이 치열한 광주의 국립 C대학교의 해양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는 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뛰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부터는 자립하여 공부했다.
묘소에 두 번 경건히 절을 한 뒤였다. 나는 방화곡에서 약도를 펴서 지형을 면밀히 살폈다. 적색 삼각점이 그려진 곳은 방화곡 북서쪽 골짜기 일대였다. 묘지에서 대략 50미터의 거리쯤에 작은 동굴(洞窟)이 하나 보였다. 어른이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높이이고 길이는 6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동굴 입구는 싸리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동굴의 존재마저도 잊힐 정도였다. 휴대용 손전등을 비추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넘어서자 의외로 천장의 높이가 키 높이를 넘겼다.
굴의 벽면을 살펴보니 흙을 인공적으로 판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도 전시에 방공호를 파다가 만 듯했다. 안쪽 끝의 동굴 벽면에서였다. 두 뼘 길이의 정방형 판자에 페인트칠을 해 놓았다. 바탕은 백색으로, 삼각형은 적색으로 나타낸 거였다. 판자의 뒤쪽 벽면에 축구공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보였다. 구멍 속에는 보자기에 싸인 뭔가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를 대한 듯 보자기에 절을 한 뒤에 보자기를 풀었다. 의외로 한 권의 공책이 눈앞에 드러났다. 표지에는 ‘방화비록(芳花秘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생에 기억할 만한 일들만 적힌 일기장이었다. 기록된 글씨는 모두 붓으로 쓴 거였다. 공책의 분량은 32장이었으나 촘촘히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시기에만 일기를 썼다는 게 드러났다. 그리고 각 기간마다 서체가 조금씩 달랐다. 어느 기간의 서체에서도 정성을 기울여 쓴 흔적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떠난 지 일 년 만이었다.
영산강 강변의 장자골에 어머니가 산다는 소문이 들렸다.
형편이 어려워 몇 해가 지나서야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장자골에 갔을 때엔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는 강 건너 뻐꾸기 소리만 하염없이 들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도 찾아 볼 어머니가 있어서 덜 서러웠다.
어머니마저 이사 간 뒤로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조차 못 찾는 이 땅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일이면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게 된다.
내가 나중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기나 할까?
일본에 가는 것도 마냥 두렵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 벙어리가 될 텐데 그게 두렵다.
그래도 슬퍼서 고개를 못 드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머니, 그렇게도 저와 아버지가 싫었어요?
그렇게나요?
글을 읽던 중에도 가슴으로 서러움이 짙게 차올랐다. 어머니의 정을 상실한 어린 소년의 피끓는 정감이 남실대는 글이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히 조숙했다는 게 드러났다. 사용하는 용어와 관념의 세계가 그 나이의 소년을 초월했다고 여겨진다. 어린 나이임에도 처절한 상실감을 체험하여 처연한 심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어린 소년이 내 아버지였다니? 아버지가 환생한다면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따뜻이 포옹해 주고 싶었다.
어머니, 어쩌다가 낙동강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봉조차 못하게 되었습니까?
저는 어머니를 잊기가 버거워 일본까지 가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어머니와 저의 인연은 도대체 어디까지였던가요?
어쩜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까지나 말입니다.
필체가 상당히 세련된 것으로 봐서 시간이 꽤 경과된 모양이었다. 공책을 뒤로 넘기자니 낯익은 그림이 나타났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렸던 아버지의 초상화가 꽂혀 있었다. 오래 전에 사라졌던 그림이라고만 여겼다. 그랬던 것을 의외로 대하니 가슴이 마구 떨렸다. 요즘의 관점으로는 무척 조잡한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을 지금까지 기지고 있었다니! 아버지에 대한 여태까지의 반발심이 숭배의 감정으로 전환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다가 놀랍게도 그림의 뒤에는 아버지가 쓴 글귀가 보였다.
진호가 그림에서는 저마저도 충분히 실력을 인정하는 자식입니다.
진호 앞에 서서는 할머니의 관점으로 줄곧 진호를 바라보았습니다.
진호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저는 줄곧 진호의 할머니였습니다.
제 얼굴에 깃든 할머니의 모습을 진호가 일부라도 그리기를 소망했습니다.
마침내 진호가 그림을 다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가슴이 떨려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그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저는 가슴이 벅차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놀랍게도 그림에는 제가 마음속으로만 찾아 헤맸던 어머니가 살아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뻐 진호를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를 그림에서나마 상봉(相逢)시켜 준 진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쩜 이럴 수가? 내가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구나. 아버지, 당신의 속내를 너무 몰랐던 자식을 이제라도 용서해 주세요. 정말 드릴 말씀이 ⋯.’
생각에 잠기다 말고 설움이 북받치면서 눈시울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흔들리며 울음이 터졌다.
“죄송합니다. 아버지이! 흐흐흑! 으흐흐흑!”
내 머리의 두뇌 조직에 마구 경련이 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동굴을 찾았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나는 아버지가 할머니를 찾아 나섰던 경로를 세밀하게 탐색했다. 유난히 그런 일에 감각이 탁월하다는 사람을 사서 동행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할머니가 고사목에서 실족했다는 낙동강의 위치까지 확인했다. 강나루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고 물줄기가 합류되어 소용돌이가 드센 지점이었다. 실족한 지점 부근의 강변에는 고목이 된 배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그 배나무 아래에는 주막집이 얼마 전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배꽃이 필 무렵이면 넋 나간 듯 집을 나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길게는 한 달씩이나 머물던 곳이 그 주막이라고 했다. 나루터 주변에 현재까지 살던 노인이 내게 들려준 내용이었다. 노인은 아버지와 주막에서 자주 만나 우정을 나누었다고 들려주었다. 노인은 내 얼굴을 보더니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거듭 말했다.
노인으로부터 충분히 설명을 듣고는 나루터를 떠나왔다. 그러다가 지난달인 4월 중순경이 되었을 때였다. 나루터 마을의 이장에게 나무 값을 치른 뒤였다. 고목이 된 배나무를 굴삭기로 팠다. 할머니가 실족되었던 강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고목이었다. 그것을 화물차로 진도의 대연산 방화곡으로 날랐다. 부모의 묘소 남향받이에 배나무를 심었다.
꽃망울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배나무를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대었다.
‘아버지! 이제는 배꽃 필 시기가 되어도 여기서 어머니랑 같이 보내세요. 낙동강 주막 앞의 배나무가 바로 앞에 있잖아요? 어머니! 그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어요? 이제라도 아버지와 함께 배꽃 그늘 아래서 오붓이 함께 지내세요. 이제 소자는 떠날게요. 되도록 자주 올게요. 그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정작 발길을 돌리려고 하자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물러야 할 곳이 방화곡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며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지난 4월의 회상에서 깨어난 뒤다. 나는 서가에 놓여 있던 고목의 사진을 찬찬히 지켜본다. 5월 하순이라 방화곡에는 철쭉꽃이 만발할 시기라 여겨진다. 배나무의 생존 여부도 확인하고 꽃의 궁전을 둘러보리라 작정한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 휴대전화가 떨어댄다. 귀에 대니 상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과학 기술원에서의 내 용무는 끝났어. 아까 약속했던 대로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해. 그래서 너랑 함께 네 고향 마을에 가 보고 싶어.”
이튿날 오전 8시에 상희와 함께 안산을 출발하기로 약속한다.
이튿날 오전 8시에 약속대로 상희와 함께 안산을 출발했다. 마침내 정오 무렵에 마을 주차장에서 내려 방화곡으로 들어선다. 계곡 전체에 불길처럼 일렁이는 철쭉들의 군영을 바라볼 때다. 상희의 얼굴에 감격하는 기색이 역력히 내비친다. 달뜬 목소리로 상희가 외치듯 말한다.
“우와, 여기가 진짜 꽃 대궐이네! 저 꽃들이 모두 철쭉이야? 이만저만한 장관이 아니야.”
이윽고 부모의 묘소 앞에 도착했다. 나는 상희와 함께 무덤을 향해 두 차례의 절을 한다. 컵에 막걸리를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봉분에 차례로 뿌린다. 그리고는 내가 무덤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미래의 며느리와 함께 왔습니다. 곱게 봐 주시고 앞날에 복을 많이 주세요.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상희도 이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님과 어머님! 며느리로서 인사 올리러 왔어요. 예쁘게 잘 봐 주세요. 앞으로 애비랑 호흡 맞추어 잘 살게요.”
말을 마치자 상희가 나의 손을 쥔다. 둘이 손을 맞잡은 채 이식한 배나무를 살펴본다. 배나무의 잎에 녹색의 윤기가 흐른다. 배나무 가지마다 풋풋한, 작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러다가 상희가 사진기를 꺼내 방화곡 일대를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봉분을 향해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아버지! 그 동안 배꽃 아래에서 어머니랑 잘 지내셨어요? 저승에서나마 할머니를 만나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어머니! 오늘 며느리 본 느낌이 어떠세요? 저랑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에요. 앞으로는 자주 내려올게요. 이렇게 함께 있으니 정말 행복해요.’
송이송이 무리를 지어 골짜기를 뒤덮은 철쭉을 둘러볼 때다. 상희가 꽃송이마다 입맞춤을 하듯 정성스레 살펴본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통꽃에 선홍의 색조를 띤 철쭉이다. 솔바람에 떠밀려 꽃송이들이 바람에 간들댄다. 간들대는 바람결 사이로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밀려든다. 안산의 아카시아나무 숲 속에서부터 줄곧 들리던 울음소리다. 그 울음소리가 진도의 방화곡까지 이어지지 않았는가?
‘어제 안산 뒷자락에서부터 들렸던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나를 여기까지 내몰았을까? 할머니와 아버지의 영혼의 교신이 줄곧 뻐꾸기의 울음소리로 내게 전해졌을까? 그 울음소리가 아버지의 영혼에서부터 내 발길까지의 여로(旅路)를 탐색했던 근원이었을까?’
생각에 잠기는 중에서도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쉼 없이 흘러든다. 골짜기를 뒤덮은 나뭇잎들이 밀려드는 바람결에 연신 물결처럼 남실댄다. 나뭇잎에 이는 파동(波動)마저도 영혼들의 쉴 새 없는 속삭임으로 느껴진다.
골짜기에서 분출되는 은은한 파동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전신으로 밀려든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자꾸만 내부로부터 울음이 터질 듯한 기분이다. 바람결에 간들대며 일어서는 만발한 철쭉의 군영을 바라볼 때다. 홀연 골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더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환영(幻影)으로 밀려든다. 근엄하면서도 당당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이 시야에 밀려든다. 상희와 나를 활짝 웃으며 반기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러다가 환영이 시야에서 서서히 스러진다. 아쉬운 마음이 뭉클 치솟는다.
어느새 상희가 내 손을 맞잡으며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내 영혼을 다스리던 부모의 숨결이 상희의 손길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콧등이 시큰대며 눈시울에 이슬이 맺혀 흐른다. 창졸간에 일어난 환상적인 정경으로 가슴이 온통 먹먹하다. 세상은 고요에 잠겨 청량한 솔바람 소리만 산자락 가득 파드득거린다.
<작가 약력>
1955년 경남 진주 출생, 이학박사(서울대, 1989)
월간 ‘문학21’ 및 ‘순수문학’ 소설 부문 신인상 등단
월간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등단
‘월간문학’ 평론 부문 신인상 등단
제6회 문학세계 문학상 대상 수상(2009)
장편: ‘달 그림자’ 외 4편/ 단편: 문예지에 47편 발표
현, 경기 광명 진성고 교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사 편찬위원
(연락처: 010-6265-1141)
|
첫댓글 소설읽기의 재미를 한껏 부추긴 쾌작입니다..동굴의 은익품을 예상과 빗나게 한 高段手에 경탄했습니다.
대선배님이신 김 선배님께서 제 작품을 읽고 격려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언젠가 뵙게 되길 바랍니다 .^^
이렇게 멋진 소설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손정모님의 약력이 궁금해서 찾다가 이 글을 읽게되었습니다
8월 29일 인사동에서 만납시다 훌륭한분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건강하셔요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