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 재료를 올려놓으니 어릴적 기억이 새록 새록 납니다.
[말머리]
집안어르신이나 동네 어른들께서 탁배기잔 앞에하고 한담이라도 할랴치면
휴전되고 막 십삼사년이 지나가는 싯점인지라 ,거리에는 구걸하는 절름발이, 안대
(눈가림대)한 사람등에 업혀 갈고리 흔들며 지나가는 상이군인들이 넘쳐났고 동네
어른들 술안주로가끔 올라 오는 화제는 솜털 보숭이 가짜 김일성의 남침에
분개해하고 대독립투사김일성 장군을 욕보인 허수아비 김성주에 또한번 치를 떠는
동네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범민련 공동 대표라 하는 칠순의 노망들린놈이 평양에서
수령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것을 보면 안타깝고 한심하기 그지 없읍니다. 따라서
역사가 바로 쓰여져야 하고 바로 가르쳐져야 함의 당위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김일성장군(1888~1942)은 어떤분?]
(1)장군의 프로필
생몰연대는 김성주의 통역관이었고 북한 정권 내에서 북한군 작전국장까지 역임한 상장 유성철
(1991년에 74세)의 증언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학술적으로 증명된부분을 따를 것임.
서울 출생(함경남도 북청설도 있음?). 본명은 김 광서,아명은 현충,별명은 경천.
일본 육사 출신 기병장교(중위)로 근무중 1919년에 이응준,지석규(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
(2)활약상
망명후 신흥 무관 학교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에 전념하며 1920년대 주로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 중국마적,러시아 백군과 전투를했으며 그당시 백마 를 타고
신출 귀몰하며 전장을 누볐던 일화가 전설로 남아있고 철기 이범석 장군과 흡사한
면모 입니다.
김좌진,지청천,홍범도장군과 함께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표적인 독립투사입니다.
1922년 10월에 러시아 적군에게 무장 해제 당하고 1937년에 카자흐로 강제 이주된후
집단농장에서 노역중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1939년 간첩죄로 체포되어 1942년
아르항 겔스크 감옥서 옥사함.김성주 통역관이었던 유성철은 김일성장군이보천보 전투에 서
전사 하셨다고 증언하나 학 계의 정설은 아님.
1959년에 사후 복권 되었고 1998년8월 국민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음.
또한 후손에 의해 기증 발굴된 장군의 일기가 <경천 아 일록> 이란 제명으로 숭실대
한국 문예연구소 학술자료 총서 제1권으로 간행되어 장군의 무장 독립투쟁사 연구에
일조를 하고 있다.
[꼭두 각시 수령 김일성의 진실은?]
(1) 허수아비의 프로필
본명은 성주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12대조부 김계상이 전주 에서 평양으로 이주해
계속 세거해 왔고 시조 김태서는32대조상으로 경순욍의 4남 김은열의 8세손인바
경순왕의 40대손이 되겠다.부친은 김형직(일제하 군인?), 모친은 강반석
(목사집안)이고 동생 김영주(1920년 8월생)가 있다.
부모가 소극적 항일 운동한 기록은 확인되나 조부 김응우 가 의병장(?)이었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때 큰역활을 했다 하나 가소로울 따름이다.(서해의 극심한 간만의 차이로 대동강 모래톱에 얹혀 꼼짝못하던 제너럴 셔먼호를 상대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겠읍니까? 평양백성과 움직이지못하는 배한척 불태우기를~~~
역사 날조에 그렇고 그런 종자 들이니!!)
(2)역사 날조의 실체
빨치산 세대로 김성주와 동고 동락하고 6.25 도발에 대한 <스탈린의 작전 명령서>를 번역해서
한국 전쟁의 도화선을 당겼던 유성철이 타쉬켄트 에 거주하며 1991년 자신의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를
<고려일보>에 연재 하며 증언하길 보천보 전투는 진짜 김일성 장군이 수행하였고 전투중
전사 하셨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소련 침공 나치군이 퇴각한 1943년봄 소련은 제88특별 저격여단이란 유격부대를 편성해 항일유격대로
활용했는데 여단장인 중국인 주보중 대좌 휘하에통신대대,보병대대, 경리중대,후방군위소등 4개부대의
편제였고 김성주대위는 제1대대장이었고 제2,3대대는 중국인과 고려인빨치산으로 편성 되었으며
제4대대는 강건대위가 지휘했으며 유성철은 당시 통역관으로 김성주를 보좌 했고 1943년부터 하바로프스크한곳에만 진주하고 있어 김성주와 그부대는<조선해방전투>에 참여할수 없었음을증언했다. 부대규모는
유격대 특성상 보병1개대대가 십수명 내지 20여명 내외의 분견지대라는표현이 맞겠다.
대신 1937년 여름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끈 유격대는 대담하게 압록강 건너 보천보 파출소를 급습하게되는데 이를 날조하여 유일체제구축을 위한 선전선동에 동원하고있었다.
로마넨코 군정장관에 의해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김성주는 해방직후 1945년9월19일(추석날)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김정숙과 꼬맹이 김정일을 데리고 조용히 귀국한다.
동고동락한 유성철의 회고록<피바다의 비화> 보다 보천보 전투 와 백두산 밀영의 역사 날조 에 대한 더 실체적인 반증자료가 어디에 있겠읍니까?
또다른 생생한 증인이 있으니 지금은 생존해 계신지도 확실치 않은 김성주와
동갑내기인1991년 당시 알마아타에 거주 하셨던 박일 ( 1944년~1987년알마아타
국립대철학과)교수로 로마넨코 군정 장관의 지시로 1946년10월부터 1948년 1월초 까지
<소련 공산당 약사>를 교재로 김성주 를 개인지도 했는데 가르친 내용이 마르크스-
레닌 사상이었고 차후 레베제프대장의<김일성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라는 책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주체 사상>날조에 처음부터 관여해서 초고를 완성하고도 하도 허구 투성이라 출판을 못했다고 증언.
박일씨증언에 의하면 개인지도시 출생지가 어디냐?고 물으면 유라(알아서 뭐 하겠느냐?)며 대 답을 회피했고 더욱 가관인것은 자신이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지점을 지도 에서 지적을 못 하였다하니
무엇을 시사 하는 증언 이겠읍니까?
이런인연으로 러시아어에 능통 했던 박일교수는 김일성대 초대총장에 임명되기도 합니다.
[마무리]역사가 왜곡 날조 되게 되면?
역사가 다시 쓰여 질때까지 구제받지못하는 피해 집단이 양산되고
정통성 부재로 한치의 국가 발전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좋은예로 나치파시즘과 광개토대왕 비문까지 변조해 가며 자행한 일본의 민족적 파시즘이 자국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평가 해보면 자명한일입니다.
맹목적 좌파들이 진실로 심기일전하여 대오각성해야할소이연(所 以 然)이 여기에
있다. 민족 정기 바로 세워 국가 발전 이룩하자!!
참고;Jun.12.1991 매일신보,Mar.11.1992 국민일보Jun.24.2008 매일경제
나는 참! 행복합니다. 늘! 감사합니다BeHappy. Apr.8.2012 어기여차 강 경 순
첫댓글 남북문제를 해결할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려면
우리모두가 위대한 국민이 되어야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