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중경(重慶)은 1949년이전 무한삼진(武漢三鎭)이었다
1.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 히사오(1883-1984)는 일본 동경(東京)에서 태어난
음악 전문가이다. 특히 1921년 일본 궁내성(宮內省) 아악부(雅樂部) 강사의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조선궁중음악에 대한 연구조사를 실시해 우리에겐 더없이 귀중한 조선(朝鮮)아악(雅樂)에 대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다나베 히사오는 아악(雅樂)과 관련된 기록뿐만 아니라, 창덕궁(昌德宮)의 비원(祕苑)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비원(祕苑)이 넓은 것도 놀랐다. 안내자는 모두 10리(里)나 된다고 한다. “그것의 아주 일부인 1리(里) 반만을 안내하겠습니다” 하기에 더욱 놀랐던 것이다.----어쨌든 그림으로 그린 듯한 궁전 누각이 연못에 가까이 있는 것은 당(唐)의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유연(遊衍)을 생각나게 했다.
비원을 나왔을 때는 벌써 저녁무렵이 되었으므로,----동물원은 상야(上野)의 동물원보다도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다. 코끼리와 범, 사자가 넓은 곳에서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악어도 많이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안내자와 함께 하마의 우리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세 마리의 하마가 나를 보고 화를 내고 덤벼들려고 해서 몹시 서둘러 우리 밖으로 나와 버렸다.
1921년이면 대륙조선의 반도강제이주가 시작되었으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명확히 대륙의 종남산(終南山) 아래 한양(漢陽)의 남산자락에 있었던 시절로 아직 대륙조선의 관계기관 대다수가 모두 대륙에 남아있을 시기였다.
비원의 크기가 대체적으로 얼마만 했는지에 대해 길이가 약 5km에 달한다고 기록하면서, 당시 조선 창경궁(昌慶宮)에 세워졌던 동물원에 어떤 동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해 주고 있다.
또한 이 반도 창덕궁(昌德宮)뒤쪽 400m길이의 조그마한 동산이 지명이동된 가짜임을 단번에 우리는 간파해 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기도 하다.
2.
전변상웅(田邊尙雄)은 1923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을 방문하게 되는데, 일본 동경(東京)을 출발해 북경(北京)으로 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현재의 일본열도와 중국(中國)의 지도를 놓고 보면, 동경에서 출발해 황해(黃海)를 가로질러 북경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나베 히사오는 남경(南京)을 거쳐 무한(武漢)까지 기선(汽船)으로 이동한 후, 경한(京漢)철도(鐵道)를 타고 북경으로 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하관(下關)과 관련하여, 일본의 시모노세키 즉 하관(下關)과 한족(漢族)의 강역인 남경(南京)의 하관(下關)이라는 지명이 각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 남경이 구한말 일본의 하관(下關)이었던 사실은 정확하며, 모택동에 의해 한족의 강역이 대륙전체로 퍼지면서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아래쪽에 위치했던 남경과 하관을 조선의 강역으로 옮기면서 지금과 같이 형성되었을 뿐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또한 청(淸)나라에서는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마관(馬關)이라 칭해 청일전쟁(淸日戰爭)후 이루어진 조약을 마관조약(馬關條約)이라 하기도 한다.
이전의 글에서 중경(重慶)의 위치와 관련하여 현 운남성(雲南省)의 판츠화시(攀枝花市)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있었던 중경이며, 장개석은 이 지역에 거점을 삼아 미얀마의 삼림(森林)지대를 통해 물자를 보급받았음을 살펴 보았다.
장강(長江)일기라는 저서를 통해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은 중경(重慶)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중경시내의 큰길들은 대부분 동서(東西)로 달리고 있다.
둘째, 도시전체가 양자강을 가운데에 끼고 있고 강 언저리는 대부분이 경사로 되어 있다.
셋째, 양자강(揚子江)이 중경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뚫고 지나가고, 양자강의 한 지류인 가릉강(嘉陵江)이 중경 북쪽에서 흘러내려 시내 동쪽에서 본줄기인 양자강(揚子江)과 합류한다.
이의 기록은 정확히 현 판츠화시의 지형과 정확히 일치하고 지명이동된 현 중경과는 어떠한 일치도 보이지 않고 있다. 즉 모택동이 옮겨놓은 허구역사의 중경일 뿐임을 알아들을 일이다.
그렇다면, 현 중경이 1949년 지명이동 되기전 이 지역에는 어떤 역사의 도시가 존재했을까?
다나베 히사오는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려주고 있다.
3.
다나베 히사오는 시모노세키에서 바로 남경(南京)으로 간다. 그가 간 남경은 현 사천성(四川省)의 아래쪽 양자강이 수십km의 거대한 강폭을 자랑하며 흘러가는 언저리에 존재했을 것으로 비정되며, 바로 이곳이 남경학살이 일어났던 역사적 현장이 된다.
모택동은 사천성의 각 지명들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사천성의 가장 좌측에 존재했던 남경(南京)이라는 지명만을 장강의 하구쪽으로 배치하여 가장 우측으로 옮겨 놓았다. 아마 이것은 남경의 대안(對岸)에 있던 포구(浦口)에서 북경으로 가는 기차가 놓여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맞추기 위해, 지명이동된 현 북경과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물색하면서, 조선의 부산(釜山)아래의 시모노세키를 남경으로 지명이동 시켰음을 간파해 낼 수 있다.
구한말(舊韓末) 청(淸)의 북경(北京)은 현재 주천(酒泉)으로 증언되고 있다. 물론 이 북경은 한(漢)당(唐)송(宋)의 장안(長安)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며, 청(淸)의 북경은 조선의 백두산인 현 알타이산의 서쪽에 존재했던 것이 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힘에 밀려 현 주천지역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후의 글에서 다시 논하고자 한다.
중경(重慶)이었던 판츠화시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면 의빈시(宜宾市)가 나오는데, 오(吳),월(越),촉(蜀) 지역의 중심으로 모든 물산을 집결시켜 양자강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데 아주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역사상의 주원장(朱元璋)이 명(明)을 건국한 후 도읍으로 정하기에 손색이 없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남경의 대안(對岸)에 있었던 포구(浦口)를 통해 양자강을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파양호(鄱陽湖)를 마주하고 구강(九江)에 도착하며, 비파정(琵琶亭)과 유명한 대야(大冶)의 철산(鐵山)과 적벽(赤壁)을 마주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다. 모두 현 사천성(四川省)의 양자강 줄기에 연해있는 지명들인 것이다.
4.
우한(武漢)이란 지명은 1949년에 생긴 이름으로 이전에는 한구(漢口), 우창(武昌), 한양(漢陽)의 세 도시로 나뉘어 있었던 것인데, 대륙조선이 반도로 옮겨가고 모택동의 역사조작에 의해 무한(武漢)이란 신조어가 생긴 것임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나베 히사오는 무한(武漢)삼진(三鎭)을 기술하면서, 이 도시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한구(漢口)의 기온이 5월2일 인데도, 무척이나 덥고 여름은 완전히 열대지방 이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무창(武昌)지역에 유명한 황학루(黃鶴樓)가 있는데 이미 당시에는 소실(燒失)되어 없고, 겨우 큰 돌탑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면서 고탄대(古彈台)-탄금대-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둘째, 중요한 논점은 바로 한수(漢水)다.
즉 한수(漢水)는 옛날 견당사(遣唐使)가 거슬러 올라가 사천성(四川省)에 들어가 촉(蜀)의 벼랑길을 통해 도읍(都邑)인 장안(長安)으로 갔던 수로(水路)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이사벨라 버드비숍이 기록한 <漢水만이 여러 지류와 運河를 통헤 漢口에서 약 2,000km 떨어진 內陸까지 貨物을 날라다 준다. 하지만 도중에 몇 군데 넘지 않으면 안되는 위험한 급류가 도사리고 있다.> 는 글과 정확히 맥락이 닿는 글인데 여기에 다나베 히사오는 이 한수(漢水)가 바로 사천성(四川省)에 있다는 결정적인 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현 사천성의 가릉강(嘉陵江)이 한수(漢水)이고, 원래의 가릉강은 운남성(雲南省) 판츠화시의 동쪽끝에서 양자강과 합류하는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거대한 강을 이름하고 있었음이다. 구한말의 북경(北京)을 주천(酒泉)으로 비정시 현 중경(重慶)에서 주천(酒泉)까지 직선거리 1,400km로 굽이굽이길을 감안한다면 얼추 1,800-2,000km에 이르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사벨라 버드비숍(1831-1904)여사의 기록과 다나베 히사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역사상의 무한(武漢)삼진(三鎭)은 바로 현 사천성 중경지역을 말하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명확히 간파해 낼 수 있게 되었다.
현 무한(武漢)지역에 만들어 놓은 황학루(黃鶴樓)는 사천성 현 중경지역에 있었던 역사적 유물을 모택동의 공산당정권이 역사조작을 위해 옮겨놓은 것임 또한 알수 있는 부분이 되겠다.
한족(漢族)의 호북성은 사천성에 있었던 파양호(鄱陽湖)의 북쪽을 말하며, 하남성(河南省)은, 조선 황해도(黃海道)의 구월산(九月山)으로 비정되는 대륙 육반산(六槃山)의 좌측에 위치한 황하(黃河)줄기의 아래쪽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명(明)청(淸)으로 이어지는 나라들의 강역의 경계를 말하고 있으며, 이 호북과 하남의 경계에 대별산(大別山)이 큰 구분을 짓고 존재했고, 이 청(淸)나라의 대별산이 조선이 빠져나간 장강 위쪽의 태백산(太白山),지리산(智異山)등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지명이동되어 그 가증스런 낯짝으로 일백년을 내려오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제 북경(北京)의 역사적 변천을 밝히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5.
2021.09.30.송계(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해수면을 올려보니 울릉도나 제주 일본이 더욱 맞아 보입니다
해수면 시물레이션을 통해서도 볼수 있고. 또한 대만에서 발간된 여러 자료에도 구한말 해안선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숨겨지고 감추어진 많은 자료들을 하나씩 우리가 찾고 발굴하여 세상에 내놓는 일에 너나가 없이 같이 동참해야 할 큰 일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창경궁에 세워졌던 창경원이 원래 대륙한양에 만들었던 것을 이주후 한반도에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진거네요.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역사를 중원대륙으로 시야를 넓혀서 보면 될 것 같네요.
이래서 지명고찰이 역사연구에 있어서 기본중의 기본이군요. 송계님의 지명고찰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지명고찰을 통해 하나씩 우리 선조의 강역을 고증하다 보면 과거 연구의 오류를 솎아내면서 더욱 정밀하게 진실의 모습에 다가설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던 홍수전과 동학의 창시자인 최수운 선생의 일대기가 어쩜 그리 비슷한 지…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점도, 학원 강사를 한 것 까지, 홍수전은 선교사에게서 어떤 책을 받은 것과 최수운 선생은 금강산에서 온 스님에게서 비전을 받은 것 까지, 전국토를 여행한 것도, 또 사망한 년도까지 똑같죠. 최수운 부친과 최수운 선생의 일대기가 홍수전과 참 일치하는 점이 많이 있네요. 태종 이방원과 영락제의 일대기가 비슷한 점이 많듯이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한쪽의 사실을 다른 쪽에서 베낀 흔적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하나의 주제로 기준점을 정한후 20세기 초중반에 3개의 버젼(대륙,반도,열도)으로 나눠 자리를 펴게 된거지요.이때의 기준점
이자 초석이 된 것이 바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태동 시점이라 가능 했습니다.서양사 역시 그래요.모두가 씨족 중심의
가족사나 가문사의 확대 버젼을 오늘날 각나라의 국사라고 칭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지요.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선 어울리지
않는 봉건.독재.세습.지주,독선의 향기가 풀풀 나지요.
@상선거사 그럼 20세기 초중반에 24사,25사를 쓸때 동양3국의 역사 아니 세계역사를 다시 쓸때 어떤 기준점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개연성 허구로 소설을 쓴 걸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물론 그 기준점은 진짜 사실 이겠지요.
@항하사 상당이 소설이지요.元史와 신원사가 완성되는 때가 1938년쯤 됩니다.세계의 이권을 나누는 자본 세력들의 공로가 컸지요.일본서기를 보면 허구적 소설에 더 가깝지요.우리는 기독교와 서양에 경도되어 백인들이나 서양기준의 역사와 상식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옛날 서당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삼국사기.고려사.이조실록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상선거사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우리역사로 알고 배웠다는 말씀이지요. 율곡선생이 조선시대 어린이들이 통감절요를 역사로 공부해야한다고 격몽요걸에서 말씀 하시데요.
@항하사 항하사란 數에서 極다음에 오는 갠지스 강가의 모래를 뜻하는 恒河沙 인가요.?
@상선거사 원래는 ganges(영어발음은 갠지스, 한글발음은 강에서)의 모래란 의미로 恒河沙로 만들었는데,즉 강가의 모래 수만큼 많은 인연이 있겠다 싶어 만든 이름입니다.
@항하사 그렇군요.불가의 얘기군요.자치통감 절요로 역사 공부를 한사례는 율곡 이이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1960년대 학교 안가고 서당과 항교에 다니던 사람들도 같았습니다.율곡도 반도가 아닌 대륙남방의 절강사람이고 이황은 복건 사람이지요.대륙조선사 전부를 반도에 꾸겨 넣다보니 대륙의 대석학들이 반도의 서당 선생들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