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지난 3월 고도(古都)보존 4개 도시를 발표했다. 앞으로 10년간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보존할 도시는 경주, 부여, 공주, 그리고 익산이다. 천년고도 경주, 백제의 왕도인 부여와 공주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익산은 왜 선정이 됐을까.
익산은 경주나 부여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 한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3개 왕조가 명멸한 왕도다. 민족의 아련한 마음을 보듬는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왕도이고, 백제의 수도이고, 고구려의 꿈이 서린 (소)고구려의 도읍지다.
익산은 고대로부터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천혜의 요지다. 북동쪽으로는 멀리 노령산맥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북쪽과 남서쪽으로는 금강과 만경강이 풍족한 평야를 만들어내고 있다. 탤런트 배용준은 미륵사지 관람 중 전시된 커다란 곡식 항아리를 보고 “당시에는 생활이 풍족했던 것 같다”는 표현을 했다. 평야와 강과 산이 어우러진 익산은 물산이 풍부하고, 일찍부터 일본 및 중국과의 뱃길도 열려있었다. 그래서 고대에는 마한의 실질적인 왕이 익산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고조선 - 백제 - 고구려를 잇는 왕도
고조선 유민의 익산 결집도 교통의 요지, 높은 생산력에 주목한 결과다.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 준왕은 BC 194년에 침략군 위만에게 왕검성이 함락되자 탈출을 한다. 배를 타고 남하한 준왕은 익산의 마한 세력을 물리치고, 고조선을 다시 세웠다. 또 미륵산에 1800m에 이르는 견고한 돌로 된 성을 쌓았다. 미륵산성에서는 당시의 돌화살촉, 포석환 등이 발굴됐다.
익산은 백제 무왕 때 최전성기를 맞는다. 무왕 40년인 639년에 백제는 익산으로 천도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익산에만 남아있는 지명인 ‘왕궁’은 그때의 일을 말해주고 있다. 왕궁면과 금마면 일대에는 왕국의 수도 유적과 유물이 널려 있다. 왕도임을 알려주는 수부(首府) 표기의 기와, 미륵사지, 왕궁터, 제석사지 등이다. 남북 490m, 동서 240m규모의 장방형의 기획도시인 왕궁터에서는 현재 40여개의 건물터 등이 발굴됐다.
고구려의 유민들이 대륙의 꿈을 다시 꾼 곳도 익산이다. 고구려 왕족인 안승은 670년에 신라의 지원으로 익산에 고구려를 세웠다. (소)고구려로 불리는 왕국에는 신라 지역에 있던 고구려 유민 절대 다수인 수만 명이 참여했다. 안승을 따르는 4천여호, 연정토의 세력권인 700여호, 신라에 억류돼 있던 고구려 전쟁 포로 7000명 등이다. 일본에 9차례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계승국임을 알린 (소)고구려는 684년에 비운을 맛보았다. 신라에 의해 오금산성(익산토성)이 함락되고, 많은 유민이 다시 남쪽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신화의 고향, 계속되는 역사
백제 유일의 궁터가 있는 익산은 유적지형 도읍지다. 이에 비해 부여나 공주가 박물관형 왕도이다. 왕궁 터에서는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다양한 금제, 유리공예품, 공동화장실 등 이 발굴됐다. 왕국의 곳곳에는 신화가 여전히 계속된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미륵사지 석탑에 숨은 백제의 꿈, 무왕이 천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던 말발굽 흔적이 남아있는 정원석,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남녀 인석 등이다.
(관련기사)
무왕의 염원을 계승하는 이한수 익산시장
익산이 우리나라 고도 중 하나로 선정될 때의 주역 중 한 명이 이한수 익산시장이다. 그는 2006년 취임 때부터 행복하고 잘사는 익산을 꿈꿨다. 그 모델을 백제 무왕으로 삼았다. 역사도시, 문화도시의 유산을 바탕으로 산업도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겠다는 의지였다. 그는 역사를 통한, 관광을 통한 행복한 시민, 잘사는 도시를 생각했다. 고대도시 조성도 그 일환이다. 그는 이제 세계문화유산으로 익산이 선정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 미륵사지의 소원 전설은 무엇인가.
“백제시대부터 미륵사지 석탑에서 소원을 빌었다. 석탑을 오른쪽으로 일곱 번 돌면서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어왔다.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에도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7번 오른쪽으로 돌며 경배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하다’고 기록돼 있다.”
“미륵사지 연못은 백제멸망 직후에 조성되었다. 이 곳에서 두 기의 인골이 발굴됐다. 주인공은 신라 장수의 아들과 백제 왕족의 딸로 전해지고 있다. 서로를 간절히 원했던 이들은 투신을 했고, 1400년이 지난 1976년에 발굴됐다. 남자 168cm, 여자 165cm의 장신이었다.”
- 백제 등 역사 복원에 관심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백제 무왕을 따라 하고 싶다. 그래서 ‘무왕 정신’을 생각했다. 무한한 익산사랑, 개인적인 무욕의 시장생활, 무한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다. 익산으로 천도해 강력한 백제, 잘사는 백제를 만든 무왕은 익산인에게는 특히 위대한 군주이다.”
- 익산이 종교의 고향이라는데.
“익산은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가 공존하는 종교의 도시다. 또 4개 종교의 성지가 있다. 숭림사, 원불교 중앙총부, 나바위성당, 두동교회 등이다. 4대 성지순례를 통해 휴식과 안식을 취할 수 있다.”
- 여성 친화도시라는데.
“익산의 여성정책은 백제시대부터다. 미륵사는 왕비의 청에 의해 무왕이 지었다. 이 전통은 여성친화도시 1호로 이어졌다. 시는 여성의 안심보육, 여성의 일자리 알선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2008년 이후 2500명의 여성이 취업을 했다.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지난해 강남구, 수원시 등 27개 지자체 360여명의 공무원이 찾아왔다.”
- 익산이 동북아 식품 수도로 각광받는데.
“산업 중심인 새만금을 지원하는 익산에는 국제적인 식품단지가 조성된다. 2015년까지 국내외 식품기업 145개, 민간연구소 10개 이상이 들어선다. 총 예산은 5,535억원이 드는데 약 4조원의 생산유발과 총 2만2,000명의 일자리 창출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