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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序)․설(說) Ⅱ 기존 통설 習合 1. 창작 방법의 재정비 2. 민족문학론의 등장 3. 실학파 문학의 새로운 방향 Ⅲ 작품분석 -풍자를 통한 구성의 절제된 미학 1. 일신수필 서문 2. 15일 개다. 3. 北鎭廟記 4. 車制 5. 그 外 Ⅳ 문학적 기반 1. 연암과 그 배경 2. 일신수필의 위치 3. 여정 |
Ⅰ 서(序)․설(說)
나 박지원은 신지식이다. 1780년(정조 4년) 7월 15일, 우리 일행은 신광년에서부터 산해관 까지 모두 오백 육십 이리를 아흐레 동안, 하루 어림잡아 60여리(약24km)를 역사의 수레바퀴와 함께 했다. 무더운 여름, 대륙의 흙먼지와 태양(熱天), 황하의 흙탕물을 가로지르며 때론 모기와 벌떼와 이름 모를 자연의 움직임에 긴장하며 누구를 위한 경종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의로운 투쟁을 했다. 행동하는 자의 드넓은 가슴으로 감히 우미목매한 나라를 구원해 보고자 우린 모든 장르를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장르가 되어 23일에서야 그 수레바퀴의 진흔(盡炘)을 떼어낼 수가 있었다. 수필의 단초가 되려고 작업을 한 것도 아닌데 후세인들이 그렇게 많은 분석을 해주시니 굳이 한 말씀 드리자면, 참 언어가 부재하고 한문과 한글 표현의 괴리 속에서 그 미학과 시학의 한계를 넘나들며 곤혹스러운 순간이 닥쳐와도 선비로서의 그 정신과 행위에 아우르는 발림이나 너름새를 해야만 했다. 음주가무가 웬말이며,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 땀에도 아랑곳 할 수가 없었다. 고행이 아닌 수행, 이런 점에서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라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용후생을 향한 열망은 신지식․신사고의 전령이 되어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건 문학적인 힘을 빌어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게 바로 수필이다. 내가 비즈니스를 해서 그 정보를 입수하려고 했다면 스파이에 불과했을 터. 오성을 자극하는 감각의 전이현상을 절제의 여백에 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표현을 여정․견문․감상을 피력하며 사상과 인용의 현학적 허세도 부렸다. 그래도 모이고 모인 종이 보따리가 보따리장수처럼 이끌려 왔다. 중국은 중국이다. 난 YM MOTORS 회장도 아니고, 현재의 박지원처럼 몇 백억을 주무르는 정치가도 아니다. 그저 우국충정에 불타는 개혁가라면 몰라도...
이러한 작업을 하는 주변의 이야기 또한 수필일 수도 있고,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굳이 달리 표현해본다면 수필을 주변문학, 쪽지문학(쪽지가 모여 된 문학), 짜투리 문학, 여백문학, 정보문학.... 오히려 감성을 숨기는 은은한 문학, 모든 장르를 포용할 수 있는 장르로서의 수필이 진정한 단초이지 않을까. 수필의 역사 또한 다분히 수필적인 스타일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이제 古隨筆을 통해 역동하는 대륙의 역사와 문학의 의의를 탐닉하려 한다.
Ⅱ 기존 통설 習合
1. 창작 방법의 재정비
시대상황에 아우르는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새로운 표현방법을 개척해야 하는 이유는 낡은 이념의 지배를 거부하고 삶의 진실을 나타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삶의 진실이 새로운 형상화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낡은 이념과의 싸움에서 예상되는 피해는 줄이고, 승수효과를 확대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 불가결한 과제였다. 그래서 비물하고 유의하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해 정공(正攻)이 아닌 측공(廁攻)이나 역공(逆攻)을 하는 작전을 구상하고 실천했다. 실천의 성과는 전(傳)이라고 한 여러 작품,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구석구석에서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호질〉(虎叱) 같은 것이 그 정점에 해당한다. 작전을 어떻게 구상했는가는 다음 글에서 알아 볼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면 전쟁하는 법을 알 것이다. 글자는 비유하자면 사졸이고, 뜻은 비유하자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고사(故事)라고 하는 것은 전쟁터이며 성루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서 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의 행진과 같으며, 운(韻)으로써 소리를 내고 수식으로 빛을 내는 것은 악기를 울리고 깃발을 날리는 거동과 같다. 조응(照應)하는 것은 봉화대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기(遊騎)이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라 해서 문단의 붉은 기치라는 말로 표제를 삼은 글에서 이렇게 서두를 꺼낸 다음. 글 쓰는 것이 전쟁과 같다는 논의를 한참 더 전개했다. 박지원으로서는 기존의 관념을 되풀이하며 확인하려들지 않고, 용납 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까지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문학을 하고자 했기에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 무엇인가. 힘써 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용구의 맨 끝에서 비유를 유기라고 했는데, 유기는 유격전요원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유격전 전술 같은 창작방법을 성과 있게 활용했다. 낙척하고 불우하게 되어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이문위희(以文爲戱)했다든가, 꼭두각시놀음 같은 불평지기(不平之氣)를 써서 장난거리로 삼았다고 하며 작전상 후퇴를 하고, 가르침을 베풀려 하고 위엄을 차리려는 진지한 문학을 아주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기발한 비유와 예기치 않던 풍자를 마음껏 희롱한 것이 그런 전술이다.
그런가 하면, 〈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는 관왕묘(關王廟)에 모셔 놓은 관우(關羽)의 소상을 보고 어른이야 두려워하지만 순진한 아이들은 콧구멍을 쑤시는 장난이나 한다고 했다.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서는 거울에 비친 상이나 그림자는 실물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좌우가 반대이고 길이가 수시로 변할 수도 있으니 헛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과거의 명문을 본뜨는 것으로 행세거리를 삼는 짓이 얼마나 허망한가 따지기 위해서 끌어온 비유이다. 기존의 규범에 대해서 반역을 한다고 소리를 높이면 바로 억눌리고 말 터이니, 잘못된 이치를 따져서 시비를 가리는 논법마저도 이렇게 까지 기발하게 구상해서,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먹는”무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도록 했다.
2. 민족문학론의 등장
방언을 문자로 옮기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히 문장이 이루어지고 진기(眞機)가 발현된다. 답습을 일삼지 않고, 남의 말을 빌려오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온갖 것들을 표현해낼 수 있다.
박지원은 이덕무의 문집에 붙인 <영처고서>에서 이렇게 까지 주장했다. 한시를 지으면서 국문시가와 다름없는 문체와 표현을 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벼슬이나 땅이름 같은 것들을 중국에서 가져와 “나무 짐을 지고 소금을 사라고 외치는” 짓을 그만두고, “글자는 같아도 글은 다르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경우에 아주 어려운 문제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글자는 그대로 쓰고 문법도 바꾸어놓지 못하면서 한문을 우리 글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용어․표현․문체를 어느 정도까지 우리말에 가깝도록 고쳐 놓을 수 있다 하겠으나, 한문으로서의 요건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러자는 것은 아니다. 중세 보편주의와 연결되어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근대 민족주의를 추구하자고 했으니,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다운 고충이 있었다.
3. 실학파 문학의 새로운 방향
박지원은 문인으로서의 사명을 깊이 의식하면서 영달을 위한 문학이 아닌 비판을 위한 문학을 마련했다. 낙척(落拓)해서 불우하게 된 형편에 세상의 잘못을 다지고 진실을 추구하자면 문학 창작에 힘쓰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홍대용이 사상에서 이룬 바를 문학을 혁신하는 데서 실현하고자 했다. 기존의 권위를 넘어서서 새로운 창작 방법을 개척하느라고 고심에 찬 노력을 했기에 문학론이 작품이고, 작품이 문학론이다. 예사롭지 않은 착상과 표현으로 창작방법을 따진 글을 문집의 요긴한 대목마다 넣어놓고, 자기를 따르던 후진들의 문집 서문을 여럿 써서 새로운 문학을 위한 선언문으로 삼았다.
박지원의 문학은 한문학이다. 국문문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한문학에만 힘쓰면서, 글자는 전에 쓰던 것과 같을 수밖에 없지만 글은 독특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그 방법을 철저하게 추구했다. 그렇게 하자니 언어표현의 가능성을 깊이 따져야만 했다. “천하의 연고와 만물의 정에 두루 통달한 것이 언어”라고 하는 기본 전제를 마련하고 “언어는 분별이므로, 분별하고자 하면 형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방법을 삼았다. 언어가 진실과 합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 점에서는 유가의 오랜 언어관을 따랐다 하겠으나, 진실은 표현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지 않고 분별하고 형용해야 비로소 구체화된다고 한 것은 새로운 착상이다. 분별과 형용이 장식의 수단이 아니고 탐구의 방법이라 해서 문학관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했다. 그리고, “천지는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된다.”는 진보적인 관점에서 전에 없던 탐구를 하고자 해서 참신한 문체를 마련했다.
옛사람의 글을 흉내 낸다든가, 고법(古法)에 구애된다든가 해서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대의 진실을 문제 삼으려면 상스러운 말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 방언을 문자로 옮기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히 문장이 이루어진다 하고, 답습을 일삼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표현하자면서 복고적 사고방식과 결별하자는 주장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새로운 경험을 직설적으로 전달하자는 말은 아니다. 글쓰는 것은 재판과 같고 전투와 같다 하고, 효과적인 표현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Ⅲ 작품분석
-풍자를 통한 구성의 절제된 미학
‘지나치게 간결한 표현도 숭고를 저해하오. 숭고는 너무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면 손상되기 때문이오. 이 말은 적절한 압축을 의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작은 조각들로 절단하는 것을 의미하오. 절단은 의미를 저해하지만 간결은 곧장 핵심이 나아가기 때문이오. 반대로 장황한 표현은 때 아니게 늘이는 까닭에 생기가 없소. 진부한 표현들도 장대함을 망쳐놓을 수 있소. 헤로도토스의 일례와 더불어, 마찬가지로 테오폼포스도 페르시아와의 아이귑토스 원정을 탁월하게 묘사한 다음 몇 마디 진부한 말로 모든 것을 망쳐 놓고 있소.’ 라고 하면서 아래의 글을 실었다. 다분히 수필의 은은함이 기록되어져 있다.
“아시아의 어떤 도시 또는 어떤 종족이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대지의 산물이든 예술에 의 하여 완성된 것이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치고 어떤 것이 그에게 선물로서 운반되지 않았던가? 거기에는 수많
은 값진 덮개들과 외투들이-더러는 자주빛이었고, 더러는 수를 놓았으며, 더러는 흰색이었다-그리고 필요한 것
이 모두 갖춰진 수많은 황금 천막들과 수많은 예복들과 값비싼 침상들이 있지 않았던가? 거기에는 또 은제 그 릇들과 금세공품들과 술잔들과 포도주 희석용 동이들이 있었는데, 더러는 보석이 박혀있었고 더러는 정교하고 값지게 만들어졌음을 그대는 볼 수 있었으리라. 그밖에도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무구(武具)들과-더러는 헬라스 의 것이었고 더러는 야만족의 것이었다.-셀 수 없이 많은 짐 나르는 짐승들과 잡기 위하여 비육(肥育)한 제물용
짐승들과 다량의 향신료와 수많은 자루와 포대와 파피루스 두루마리와 그밖에 다른 필수품들이 있었다. 거기 에는 온갖 종류의 소금에 절인 고기가 무더기로 저장되어 있어 멀리서 다가가는 사람들은 그 무더기들을 자신 들 앞에 솟아 있는 둔덕들이나 언덕들로 오인했다.”
1. 일신수필 서문
연암은 서문에서 그의 창작에 있어서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발문(跋文)과 같은 격식을 취한다. 그의 사상과 철학적 기반에 대해 일화를 통해 담담하면서도 역설적이고 호소력 짙게 피력했다. 그건 논평 아니 논평이었다.
한갓 말한 것과 들은 것만을 가지고 이들과 서로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다. 더구나 그의 평생 동 안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에야 말할 나위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성인이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말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 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十를方世界)를 보살핀다”하면, 그는 곧 환망(幻妄)된 말이라고 배격할 것이며, “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 을 둘러 다녔다”하면, 그는 괴이하고 허탄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와 함께 천지 사이의 크나큰 구경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아, 공자께서 2백 40년 간의 역사를 필삭(筆朔)하여 『춘추』라 이름하였으나 이 2백40년 간의 옥백(玉帛)․병거(兵 車)의 일은 곧 하나의 꽃피고 잎지는 삽시간의 광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 슬프다. 내 이제 글을 빨리 써서 이에 이르러 생각하니, 이 한 점의 먹을 찍는 사이는 눈 한 번 감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건만, 눈 한 번 감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벌써 소 고(小古)․소금(小今)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옛이라는 것과 이제라는 것도 크게 눈을 한 번 감 고 숨을 한 번 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그 사이에 온갖 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한다 는 것이 그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묘향산(妙香山)에 올라가 상원암(上元庵)에서 묵을 때 밤이 다하도록 달이 마치 대낮 처럼 밝았다. 창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니, 절 앞에는 자욱한 안개가 달빛을 받아 수은 바다가 되었 다. 그런데 그 수은 바다 밑에서는 은은히 코고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중들이 서로,
“저 하계에는 한창 큰 천둥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다.” 하였다.
며칠 뒤에 산을 떠나 안주(安州)에 이르니, 지난밤에 과연 급작스런 비와 천둥 번개로 한 길이나 되는 물이 평지에 흐르고, 민가들이 해를 많이 입었다. 이를 보고 나는 슬픈 생각에 말을 멈추고, “어젯밤에는 내가 구름과 비 밖에서 밝은 달을 껴안고 누워 있었느니, 저 묘향산을 태산에 비한다 면 겨우 한 개의 언덕이나 지나지 않을 뿐이나 이토록 높낮이가 심한 세계를 이룩했는데, 하물며 성인이 천하를 봄에랴.”하고 중얼거렸다.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한 이가 만일 공자의 처지를 조금 더 넓게 보지 못하고 세 번이나 아내를 내 쫓았으니, 백어(伯魚)가 일찍 죽었느니, 노나라․위나라에서 봉변을 당했느니 한다면, 이는 실로 땅 물 바람 불 등이 별안간에 모두 빈 것이 된다는 것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또 그들은 성인과 불씨(佛氏)의 관점도 오히려 땅에서 떠나지 못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지구를 어루만지고 창공 을 거닐며 별을 따는 등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의 보는 것이, 유교와 불교보 다 낫다고 함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그들 모두 이국에 와서 말을 배우며, 머리털이 희도록 남의 글을 익혀서 썩지 않는 업적을 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대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벌써 지난 경지이니, 그 경지가 지나고 또 지나서 쉬지 않는다면 옛날 이를 방자하여 학문을 하던 사람들에게서도 무슨 고증을 취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경하게 글을 지어서 남들이 이를 반드시 믿어주게 하고자 함이다. 그 리하여 그들 서양사람은 우리 유가(儒家)에서 이단을 치는 이론을 보고 그 실마리를 주워서 억지로 불교를 배격하고, 또 그들은 불씨의 천당과 지옥의 선을 좋아하여 찌꺼기를 들이켰을 뿐이다.
2. 15일 개다
① 북진묘 탐방, 신광년까지의 여정 ② 정리록을 인용한 행보 추이, ‘이날은 몹시 더웠다.’ ③ 북경에서의 제일 장관인 것에 대한 견문을 대화체 형식으로 열거한 후 『춘추』의 사상과 내용에 대해 밝힌 후 자신의 입장 역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에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 나라의 유치한 풍속부터 개혁시켜야 한다. 밭 갈기․누에 치기․그릇 굽기․풀무 불기 등으로부터 공업․상업 등에 이르기까지도 다 배우며, 남이 열을 하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 그 다음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예리한 무기를 매질 할 수 있도록 한 연후라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나와 같은 사람은 하류의 선비이지만 말 한마디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왓조각에 있고, 또 똥부스러기에 있다.” 라고 하련다.
이어 이에 대한 감상을 묘사적 서술로 표현 ④ 다리 머리에 새긴 공하와 패루에 대해 언급, 인용 ⑤ 희대(戱臺)에 대해 언급 후 광녕성의 함락으로 천하의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여운으로 남김.
3. 北鎭廟記
북진묘 뒤에는 수많은 산봉우리가 마치 병풍을 친 듯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큰 벌이 트였으며, 오른편에는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광녕성은 마치 슬하의 아이들처럼 앞에 놓여 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마치 푸른 띠를 두른 듯한데, 그 속에 잠긴 탑이 유달리 희게 보인다.
① 지형과 관련지어 묘사가 이어지고 ② 웅장하고 괴걸한 사당의 모양 서술하며 순(舜)임금의 봉선(封禪;천자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일)에 대해 그 유래와 나라가 동북 방향에서 일어난 연유로 북진의무려산의 중요성에 대해 서술 ③ 사당 앞 다섯 문의 패루-기둥․서까래․기와․추녀 등 모두가 석재라는 사실적 묘사 서술 ④ 묘문에 대한 상세하고도 사실적인 묘사 서술 ⑤ 조그마한 정자에서의 한가로움-대화, 그 풍류
문득 바위에 의지해 있는 조그마한 정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흙으로 쌓은 섬돌이 두 층이고, 띠 이엉에 끝을 약간 가지런하게 베었다. 그 깨끗하고 그윽함이 마을을 퍽 즐겁게 해준다. 거기서 잠깐 앉아... (사당을 지키는 도사 세 명과의 나눔의 대화)
任君摘取莫傷枝 留待明年再到時
4. 車制
①사람이 타는 태평차(太平車)․짐을 싣는 대차(大車)․뒤에서 한 사람이 칫대를 잡고 밀게끔 되어 있는 독륜차(獨輪車)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후, 『주례』 인용-“임금의 부를 물었을 때 수레의 많고 적음으로 대답했다.” 수레 중에도 천백 가지 제도가 있어 언급 불가-융차․역차․수차․포차 등 ②인용 서술의 조화, 일찍이 담헌 홍대용․참봉 이광려와 수레 제도에 대한 얘기 언급-거동궤(車同軌;모든 수레의 궤도가 다 같다. 『주례』)-일철․전철․성문지궤(『맹자』)에 대해 지속적인 독백으로 열변 토로-“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다.”(『중용』) ③ 이용후생에 대한 견문을 역설과 대화와 감상을 통해 서술-한갓 글만 읽을 뿐이지 참된 학문에는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④ 견문 서술
밭에 물을 대는 것으로 용미차․용골차․항승차․옥형차 등이 있고, 불을 끄는 것으로는 홍흡․학음 등의 기구가 있으며, 전쟁에 쓰는 수레로는 포차․충차․화차 등이 있다. 모두 서양의 『奇器圖』와 강희제가 지은 『耕織圖』에 실려 있고 그 글은 『天工開物』․『농정전서』에 있으니,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 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극도에 달한 가난도 거의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절정의 학식과 정보를 알고 중국에 가서 확인을 했을 것이 타당하겠다. 그는 경제적 기반조성을 위해 자동차 산업을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길이 안 좋아 수레가 못다닌다.’ 는 기존의 의견에 ‘거동궤처럼 같은 궤적으로 다니면 길이 난다’ 는 진보적 발상을 이미 홍대용 등과 중국에 가기 전에도 의기투합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일신수필에서의 핵심은 바로 이 수레 제도에 있다. 이용후생이나 우국충정으로 본다면. 그런데 그는 계속적으로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집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설득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그리고 여정․견문․감상을 일화를 혼용, 구준히 유지하고 있다.
이제 나는 내가 본 불 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 전하련다.
북진묘에서 달밤에 신광년으로 돌아오면서 보니 성밖의 어떤 집이 저녁 나절에 불이 나서 금방 겨 우 불길을 잡은 모양이다. 길 위에 수차 세대가 있어 곧 거두어 가려는 것을 내가 그들을 잠깐 멈추 게 하고 먼저 그 이름을 물었더니, 수통차라 한다
⑤ 이어 물건을 찧고 빻는 데 쓰이는 아륜, 가루치는 요차(搖車), 누에고치를 켜는 소차(繅車)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 후 감상을 피력했다.
사람의 손놀림은 이미 그 타고난 바탕대로의 성질과 맞지 않아서, 빠르고 디딘 것이 고르지 못하다. 어쩌다가 홀치고 섞갈리면 실과 고치가 성낸 듯 놀랜 듯 뛰어 내달려서 실 켜는 널빤지 위에 휘몰리 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무거리가 나서 덩이가 지면 저절로 광택을 잃게 되며, 실밥이 얽히어 붙으면 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하므로, 티를 뽑아 정미롭게 하려면 입과 손이 모두 피로하다. 이를 저 고치 켜는 수레에 비교한다면, 그 우열이 또 어떠한가.
⑥ 길에서 날마다 상여를 만났다 한다. 인구수에 비례한 듯. 상여에 대한 상술-문화적 차이 드러냄
중국에는 모든 일이 간편하지 않은 것이 없어 하나도 헛됨이 없는데, 이 상여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본받을 것이 못된다.
5. 이어, 戱臺․市肆․店舍․橋梁에 대해서 표현을 같이 하고, 16일, 개다...23일, 이슬비 내리고 곧 개다., 姜女廟記에 이어 將臺記에서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제도를 모를 것이며, 관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서는 장수의 위엄을 모를 것이다....
.... 서쪽 층계로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쳐다보니, 모두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을 모르고 있다. 대개 오를 때에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밝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 위험함을 몰 랐는데, 내려오려고 밑을 내려다보자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니, 그 허물은 눈에 있는 것이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한창 위로 올라갈 때에는 한 계급, 반 계급이라도 행여나 남에게 뒤떨어질 세라 남을밀어젖히면서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외롭고 위태로워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되자 않는 법이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그 렇다.
마지막으로 山海關記에서 인용․유래․서경․묘사․사실적 서술의 필법을 구사하며 다음의 글로 일신수필의 화룡정점을 찍었다.
아, 슬프다. 몽념이 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으려 하였건만 진나라를 망칠 호胡는 도리어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서중산이 이 관을 만들어 되놈을 막으려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서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다. 이리하여 지금 같은 천하가 무사한 때를 당해서는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으니, 난들 이관에 대해서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Ⅳ 문학적 기반
1. 연암과 그 배경
박지원은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로서 북학파의 대가로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본관 은 반남(潘南)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열서너 살 때 조부가 죽자 결 혼하여 처숙(妻淑)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하고, 서른 살부터는 홍대용(洪大容)과 사귀어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연암집(熱河日記)』을 비롯해 『과농소초(課農小抄)』,『담총외 기(談叢外記)』등과 한문소설『양반전』, 『호질』, 『허생전』등이 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이용후생하는 실생활, 즉 벽돌, 수레 등의 편 리한 제도에서부터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 을 서술하여 그곳의 실학사상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제도를 하루 속히 받아들일 것 을 열망하였다. 1637년 당시 인조가 청태종에게 군신의 예를 올린 삼전도의 치욕 이후 효종이 추진 했던 북벌론의 의지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당시, 본질은 사라진 채 권력자들의 당리당략을 위한 논쟁으로 전락하게 되자 비록 적대적인 감정이 쌓여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발전된 문명을 수용 함으로써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비판,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기도 관찰사와 예조참판, 면천 군수와 양양부사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출 세에만 연연하지 않으면서 다독, 다작, 다상량을 했다. 또한 여행을 즐겨 유득공, 이덕무 등 뜻이 통하는 벗들과 함께 국내의 평양, 송도, 묘향산, 천마산, 속리산, 가야산, 화양, 단양 등 여러 명승지 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연암은 중국 여행에도 관심이 컸는데, 44세 되던 1780(정조 4)년에 삼종형 진하사(進賀使) 박명원 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사신으로 임명되면서 마침내 기회를 얻는다. 형의 권유에 따라 자 제군관 자격으로, 서삼종제(庶三從弟)인 박래원도 동행하여 중국 여행길에 오른다.
2. 일신수필의 위치
『열하일기』전 26권 중 제3권에 실려 있다. 그 체제를 살펴보면,
서(序) : 누가 서문을 썼는지는 밝히지 않음. 그 기록에 있어 참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고 한다.
제1권-도강록(渡江錄) : 압록강에서 요양까지 15일 동안의 기록. 중국 땅의 실용적 면에 감탄
제2권-성경잡지(盛京雜誌) : 십리하에서 소흑산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제3권-일신수필(馹迅隨筆) : 신광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5백 62리) 9일간(7/15~7/23)의 기록. 수레 의 제도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제도에 관한 기록. 앞에 서문을 달아 '이용후생'에 관한 논평
제4권-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해관에서 연경에 이르는 11일간의 기록. 여기에 <虎叱> 수록
제5권-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열하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열하로 떠날 때의 애처로운 이별의 심사를 그림
제6권-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의 태학에서 6일 동안 머문 기록. 당대 명망있는 학자들과 조 선과 중국의 문물제도에 관해 논하고 있다. 홍대용의 지전설도 중국인에게 전하고 있는 내용
제7권-구외이문(口外異聞) : 고북구 밖의 기문이사를 적은 부분
제8권-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
제9권-금료소초(金蓼少抄) :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
제10권-옥갑야화(玉匣夜話) : <허생전> 수록
제11권-황도기략(黃圖記略) : 황성에서 화포도까지의 견문 수록
제12권-알성퇴술(謁聖退述) : 순천부학에서 조선관까지의 기행
제13권-앙엽기(像葉記): 홍인사에서 이마보총까지의 30여 군데 명소 기록
제14권-경개록(傾盖錄): 열하의 태학에서 사귄 여러 사람들에 대한소전(少傳)을 기록
제15권-황교문답(黃敎問答) : 황교와 서학, 지옥설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말미에는 북쪽 오랑캐들에 대한 주의심을 환기하였다.
제16권-행재잡록(行在雜錄) : 청나라 황제의 행재소에서의 견문 기록
제17권-반선시말(班禪始末) : 원나라 때부터 중국 황제들이 번승(番僧)들에게 베푼 정책 설명
제18권-희본명목(戱本名目) : 청 황제의 만수절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 기록
제19권-찰십윤포(札什倫布) : 열하에서 직접 보고 들은 활불 반선에 대한 기록
제20권-망양록(忘羊錄) : 열하의 태학에서 사귄 윤가전, 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해 논한 기록
제21권-심세편(審勢篇) : 조선인들의 다섯 가지 망령됨과 중국인들의 세 가지 어려움에 대하여 논함
제22권-곡정필담(鵠汀筆談) : <태학유관록> 중 윤가전과 나눈 이야기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하 여 기록
제23권-동란섭필(銅蘭涉筆) : 동란재에서 머물 때 쓴 것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 양금(洋 琴) 등에 관한 잡록
제24권-산장잡기(山莊雜技) : 열하산장에서 보고 들은 일들 기록
제25권-환희기(幻戱記) :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재주를 구경하고 소감을 적음
제26권-피서록(避署錄) : 열하의 이궁(離宮)인 피서산장에 있을 때의 기록.
3. 여정
연암 일행은 5월25일 임금께 하직인사를 하고, 6월24일 압록강을 건너 책문, 요양, 산해관, 통주 등 지정된 조공길을 따라 8월1일 북경에 도착해 5일간 체류한다. 가는 도중에 폭우를 만나 여정이 순조롭지 못했으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급류를 건너야만 했다고 한다. 이때 청의 건륭황제는 피서 산장이라고 명명한 열하(熱河)의 별궁에 머물고 있었는데, 8월4일 뜻밖에 만수절(萬壽節: 임금의 생 일) 행사를 그곳에서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리하여 연암 일행은 이전에 조선 연행사들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열하 일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당시 북경에서 열하까지는 400여 리나 되는 험준한 산길이었다. 이들 일행은 만수절 안에 열하에 당도하려고 밤낮으로 강행군을 하여 하룻밤에도 9번이나 강물을 건넌다(「열하구도하기」). 드디어 8월9일에 열하에 도착, 7일간을 체류한다. 열하의 본이름은 무열하(武熱河)인데 현재 북경에서 230 킬로 지점에 있는 하북성(河北省)의 승덕현(承德顯)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건륭 황제가 피서산장이라 이름 붙인 별궁을 완성한 뒤 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북경 다음으로 정치적 중심지가 됐다. 그리하여 한 때는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몽고, 티벳, 위구르,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서 온 외교사절들로 성시를 이룬 곳이다. 이렇듯 연암이 여행했을 당시 청나라는 세계 최대의 문화국가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중국의 선진 문물은 큰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8월20일 북경으로 귀환, 9월17일 북경을 출발, 10월27일 120일만에 서울에 도착, 복명(復命)한 후, 곧바로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한다. 중원에 들어가는 도중 열하에 이르러 그곳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에 가서는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거기서 듣고 본 문물․제도를 돌아와 열하일기로 엮는다.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소와 농기구, 돈과 종이 등을 보내 저술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격려 덕분인지 연암은열하일기한 편으로 당대에 명성이 절정에 오르게 된다. 명확한 정본(定本)이 없고 당시 판본(板本)도 없이 많은 전사본(傳寫本)만이 유행하고 있다.
Ⅴ 意義
아직은 무어라 결론을 지을 수 없는, 아니 결론짓고 싶지 않음에 그 가능성과 의미를 부여해 보고, 序의 設과 일신수필의 논평과도 같은 서문에서 그 의식을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당시에 이미 연암체(燕巖體)라고 일컬어진 박지원의 문장은 정통에서 벗어난 패관잡서(稗官雜書)수준에 머무른다고 폄하되는가 하면, 문풍(文風)을 어지럽히고 질서를 혼란시킨다는 점을 우려한 정조가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금지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 변명을 하느라고 박지원은 자기가 불우해진 탓에 ‘이문위희’(以文爲戱)를 했을 따름이고 “문장을 빌려 꼭두각시놀음 같은 불평지기(不平之氣)를 써서 장난거리로 삼았”으니 반성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변명에 또 다른 주장이 암시되어 있다. ‘이문위희’는 말하자면 ‘이문위교’(以文爲敎)를 내세워 글로 교화를 베풀겠다는데 대한 반발이고, 풍자와 익살을 일삼는 하층 예술의 새로운 동향과 연결되어 있는 자세이다.
〈열하일기〉는 여느 연행록과는 구별되는 구조와 표현을 갖추고 있다. 사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서술시점을 다양화해서 기존의 관념을 타파하고 현실을 재인식할 수 있게 한 수법이 놀랍기에 예로부터 기문(寄文)이라고 일컬어 왔다. 한 예를 들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사당을 지날 때, 그 두 사람이 무왕이 은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으므로,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기어 수양산에 들어 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은 그 충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신 일행도 고사리를 먹었다는 일을 서술한 데 다각적인 풍자가 들어있다.
자기는 고사리를 먹고 배탈이 났다고 하면서 빈정대기 시작하더니, 그전에 고사리를 준비하지 않아 담당 관원이 매를 맞고, “백이 숙제야, 나 하고 무슨 원수냐 !” 하고 외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다시 옛날의 기억을 더듬는 다면서, 셋방살이하는 처지인 어느 시골 훈장이 학동들을 거느리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죽은 날 송시열의 사당에 참배하고 서쪽을 향해 ‘되놈’을 삿대질했다는 일화를 들었다. 생각이 막히지 않은 족자라면 백이숙제에서 부터 연원을 찾는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 하고 사람 죽일 노릇인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잡담처럼 열거되어 있어. 말썽이나 일으킬 위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풍자 대상에 포함되기 알맞았다.
여행에서 겪은 일과 관련이 된다 해서 삽입해놓은 수많은 일화는 과거 어느 때에 작자가 실제로 목격했던 일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서 전해들은 말일 수도 있고, 필요에 따라서 지어낸 사건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든지 <열하일기>가 단순한 견문기가 아니고, 복합적인 구성과 심각한 주제를 가진 다면적인 작품일 수 있게 하는 데 긴요한 구실을 한다. 그래서 당시까지 글 종류를 나누어놓았던 기준을 무너뜨렸으며, 오늘날의 분석방법마저 겉돌게 하기 십상이다.6)
연암의 풍자방식은 4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7)
(1) 당대 사회의 중심적 결함을 지적하는 핵심찌르기 방식
(2) 풍자적 의도를 감추는 방식
(3) 여러 비유를 사용하여 풍자효과를 극대화시키거나 다양한 어휘 즉 일상어․비속어․경구․속담 등을 활용하여 세부묘사를 생동감있게 대리풍자케 하는 방식
(4)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여항인을 등장시켜 대리풍자케 하는 방식
물론 이 4가지가 연암이 활용했던 풍자방법론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웃음’의 문제는 다루 지 못했다. 연암의 글을 보면 다양한 웃음의 형태가 드러나는 바, 작품에서는 판소리에서 보듯 통 쾌한 웃음이라기보다 경멸과 조소에 가까운 형태를 보인다. 풍자의 목표가 아마도 치유할 수 없는 자기 계급의 결함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고민을 연암은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의 평생은 항상 ‘객기’ 때문에 병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다스리는 공부로 손가짐이나 언행으로도 방어하지 못하고, 예의에 어긋나면 보지 말고 듣지 말라는 등의 경계로도 무장하지 못했 습니다. 그러다보니 귀, 눈, 입, 코, 어느 하나도 도적놈의 소굴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는 문장력 또한 뛰어났다. 특히 그 동안의 수많은 보수파 학자들의 보수성에 젖은 지리멸렬한 문장을 초월하여 새롭고 산뜻하였으며, 착상이 독특하고 풍부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엉성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은 웅장 화려하고 통쾌무비하기에 우리나라 한문학사에 전무후무하다고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 숭고의 가치와 장르의 넘나듦이 가히 인문과학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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