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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정가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예찬건
제3회 正歌와 함께하는 북촌 풍류한마당 공연
- 해설이 있는 공연 -
장소: 북촌사랑방 전통한옥 내 (북촌창우극장 옆)
시간: 2010년 2월 21일(일) 오후 4시
주최: 한국정가학교(한국정가반주단과 가객들 다수)
주관: (사)대한시조협회 광진구지회
식전 행사
북촌 풍류 한마당 공연의 장을 열면서 .......................................................... 낭송:이혜숙 배경음악----상령산--거문고:박헌용 피리:천하수
가곡은 전통적 정가(正歌)에 속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가악(歌樂)으로,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 그리고 민속 성악인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성가(聲歌)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가(正歌)는 본래 정악(正樂)에 포함되는 가곡(歌曲) · 가사(歌詞) · 시조(時調)를 모아 일컫는 이름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발생이 오래고 예술적으로 정제된 노래가 바로 이 가곡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맥을 끊길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와 아악생 들에게 금하 하규일 선가의 지도아래 가곡과 가사가 전수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가곡, 가사와 같은 정가란 노래가 궁중에서 흔히 불리던 노래라고 오해들 하고 있으나, 이는 엄연히 민간풍류음악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겠습니다.
고종시대의 유명한 가객 박효관, 안민영을 위시하여 청구영언을 지은 김천택과 해동가요를 지은 김수장을 비롯한 가객들은 모두 민간에서 풍류를 즐기던 중인이상의 양반계층들이었습니다.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시조가단의 중진인 김천택(金天澤) 등(等)을 중심(中心)으로 한 시단(詩壇)인 경정산가단을 비롯하여, 노인계, 승평계 등은 모두 가단의 이름들이다. 이들 가단에 소속된 가객들은 철따라 명산대천을 찾아가서 수려한 풍광을 감상하고 즐기면서 즉석에서 시조시를 짓기도 하고 이를 시조창과 가곡의 선율에 얹어 부르면서 풍류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제 2010년 새해를 맞이하여 옛 조선의 도읍지 한양에서 비교적 한옥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이곳 북촌한옥마을에서 그간 도외시된 정가의 민간풍류음악에의 기원을 찾아서 다시 그 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가객과 악사들이 모여 북촌 풍류한마당이란 이름으로 우리 고유의 노래문화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비록 생업에 쫓겨 더러 부족한 점이 있다할지라도 어여삐 봐주시고 항상 정진하는 가객들이 될 것을 약속드리면서 오래 오래 풍류한마당이 이어가길 기원합니다.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오후 4시
한국정가반주단과 가객일동 올림
연주회 개최 선언 낭독 : 김진이 (북촌예술단장)
“ 2010년 2월 21일 오후 4시 지금으로부터 제 3회 정가와 함께하는 북촌풍류한마당 공연을 시작합니다!”
공연프로그램 사회 및 해설: 이혜숙(소리여울 정가반)
1. 세악합주곡 “천년만세”
연주:한국정가반주단
2. 남창가곡 평조 우락 “조다가...”
노래:박헌용, 고진문, 주상필
3. 여창가곡 평조 우락 “바람은...”
노래:이미숙, 이승희, 전춘자, 손윤숙, 박종화, 추이분
4. 남창가곡 평조 언락 “벽사창이...”
노래:주상필, 고진문, 이종세
5. 석암제 시조창
노래: 석정순, 박종화, 추이분 장구-이미숙 대금-예찬건
6. 남창가곡 반우반계 편락 “나무도...”
노래: 김태식, 이종세, 고진문
7. 여창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모란은...”
노래:이미숙, 이승희, 전춘자, 손윤숙, 박종화, 추이분
8. 남창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진국명산”
노래:이종세, 김태식, 고진문, 주상철
9. 가사 백구사
노래:이종세, 김태식, 박헌용, 주상필, 고진문
반주: 대금-허병상, 피리-천하수 장구-예찬건
10. 남창가곡 평조 우편 “봉황대상...”
노래:이종세, 김태식, 임병순
11. 가사 죽지사
노래: 예찬건, 장구-이종세, 대금-허병상, 피리-천하수
12. 다같이 정가를 배워봅시다. "공후인"(일명:공무도하가), “황조가”, “안시성”
공후인: 작시- 여옥(고구려의 여류음악가 곽리자고의 처)/ 작곡- 죽헌 김기수 님
황조가: 작시- 고구려의 유리왕 / 작곡- 죽헌 김기수 님
안시성: 구전요(고구려때 안시성 전투를 예시하던 노래)
노래지도: 예찬건 반주: 한국정가반주단
13. 선비춤................................................................ 무용- 고진문
출연진: 한국정가반주단 단장/지도: 예찬건(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이수자)
회장- 국사봉 박헌용(거문고) 총무 - 쥬필 주상철(피리) 악장 - 천하수 박신철 (피리)
악보담당- 김태식 (단소) 홍보담당 - 고진문 (장고) 재무담당- 장유 허병상님 (대금)
노래 - 이미숙 (광진구지회 부회장님 겸 시조사범)/이종세 (광진구지회 수석이사/ 광진구지회 정가반 회장)/전춘자 (광진구지회 회원)/이승희 (여류가객)/손윤숙 (여류가객)
특별출연: 석정순(광진구지회 수석고문) / 박종화 (시조명인) / 추이분(시조명인)
공연이력
제1회 정가와 함께하는 북촌 풍류한마당 공연 (2010.1.9 토 15시)
제2회 정가와 함께하는 북촌 풍류한마당 공연 (2010.1.30 토 15시)
제3회 정가와 함께하는 북촌 풍류한마당 공연 (2010.2.21 일 16시)
공연 곡목해설 - 정가의 저변확대와 정가에 대한 노랫말의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오늘 연주되는 곡목들에 대한 해설은 읽어만 보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상세한 해설을 정리하여 실었습니다.
해설수록순서
1. 세악합주곡 천년만세
2. 남창가곡 평조 우락
3. 여창가곡 평조 우락
4. 남창가곡 평조 언락
5. 남창가곡 평조 우편
6. 남창가곡 반우반계 편락
7. 남창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8. 여창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9. 가사 백구사
10. 가사 죽지사
11-1.공후인(공무도하가), 11-2.황조가, 11-3. 안시성
1. 세악합주곡 “천년만세” 연주: 한국정가반주단
계면가락도들이[界面加樂還入]·양청도들이[兩淸還入]·우조가락도들이[羽調加樂還入]의 3곡을 묶은악곡이다. 악기는 대금·세피리·해금·가야금·거문고·양금·단소·장구 등으로 편성되고 영산회상(靈山會相)이나 별곡(別曲) 뒤에 이어서 연주하기도 한다.
계면가락도들이는 장별(章別) 구분 없이 42장단으로 이루어진 곡으로 뒷부분의 11장단은 사실상 제4~14장단을 반복한 것이다. 장단은 12/8박자로 타령·군악과 같으나 속도가 조금 빠르다. 음계는 황(黃:Eb)·중(仲:Ab)·임(林:Bb)·무(無:Db)·청황[潢:Eb´]·청태[汰:F´]로 구성되는 계면조이다. 계면가락도들이는 계면조인 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명 계면환입·계면가락덜이·계면가락·계면가락제이(界面加樂除耳)라고도 했으며, 〈삼죽금보〉에서는 속칭 사언환입(詞焉還入)·굿거리로 표기했다. 양청도들이와 우조가락도들이는 보허자(步虛子)의 파생곡으로 밝혀진 바 있으나 계면도들이와의 관계는 불명확하다. 양청도들이는 두 청(3音)의 연속으로 된 도들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곡은 보허자의 파생곡인 6/4박자의 웃도들이 한 장단 가운데서 주요음 2음을 뽑아내고 두 청 앞에 각각 거문고 제1현인 문현(文絃)음을 끼워넣는 방법에 의해 연주한다. 즉 이곡은 한 장단에 문현음 2개와 주요음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우조가락도들이는 우조, 즉 평조선법(平調旋法) 가락에 의한 도들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음계는 황·태(太:F´)·중·임·남(南:C´)의 5음음계이다. 이 곡도 보허자에서 파생한 곡이며 6박 2개를 한 장단으로 한 12/8박자의 조금 빠른 타령장단이다. 7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1장의 선율과 4장의 선율은 완전히 동일하다.
2. 남창가곡 평조(平調) 우락(羽樂) [우락시조(羽樂時調)·우조낙시조(羽調樂時調)] (조다가 낚시대를 잃고)
초장 : 조다가 낚시대를 잃고,
2장 : 춤추다가 되롱이를 일희.
3장 : 늙은이 망령(妄伶)으란 백구(白鷗)야 웃지 마라.
4장 : 십리(十里)에
5장 : 도화발(桃花發) 하니 춘흥(春興) 겨워 하노라.
현대어 역
초장 : 졸다가 그만 낚싯대를 잃어버리고, 춤추다가 비옷(도롱이)을 잃어버렸구나.
중장 : 늙은이가 정신이 흐려져서 한 일을 두고서 갈매기야 웃지 말아라.
종장 : 십리에 복사꽃이 피었으니 봄철에 절로 일어나는 흥취를 참기 어렵구나.
작자 : 미상
남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 열 아홉번째로 부르는 곡으로, 계면조(界面調) 계락(界樂) 다음에 이어진다. 16박 한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창가곡 삼수대엽에서 파생된 곡이다.
‘우락(羽樂)’이라는 말은 ‘우조(羽調)’, 즉 ‘평조 선법에 의한 낙(樂)’이란 뜻인데, ‘우락시조(羽樂時調)’라고도 불린다. 가곡의 제목에 ‘낙(樂)’이 붙은 곡은『가곡원류(歌曲源流)』에서 ‘낙시조(樂時調)’의 풍도로 ‘요풍탕일 화란춘성(堯風湯日花爛春城)’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담담하면서도 흥청거리는 듯한 멋을 지닌 곡이다. 이 음반에서는 =48 정도의 속도로 연주되었다.<1분75정>
가곡을 남녀창(男女唱)이 교대로 노래할 때에는 생략되는 곡이다.
3. 남창가곡 평조(平調) 언락(言樂) [얼락(乻樂)·엇락(旕樂)·지르는 낙시조·언낙 시조] (벽사창이 어른어른커늘)
초장 : 벽사창(碧紗窓)이 어른어른커늘
2장 : 임(任)만 여겨 펄떡 뛰어 나가 보니
3장 : 임은 아니 오고 명월(明月)이 만정(滿庭)한데
벽오동(碧梧桐) 젖은 잎에
봉황(鳳凰)이 와서 긴 목을 휘어다가 깃 다듬는 그림자로다.
4장 : 마초아
5장 : 밤일세만정 행여 낮일런들 남 우일번 하여라.
현대어 역
초장 : 비단으로 바른 창 밖이 어른어른하기에, 임이 온 것으로 생각하고 얼른 뛰어서 밖으로 나가 보니,
중장 : 임은 오지 않았고, 밝은 달빛이 뜰에 가득한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이 내려 앉아서 긴 목을 휘어 깃을 다듬던 그림자였구나.
종장 : 다행히도 밤이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낮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을 웃길 뻔하였구나.
작자 : 미상
남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 스무번째로 부르는 곡으로, 평조(平調) 우락(羽樂) 다음에 이어진다. 16박 한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얼락(乻樂)’, ‘엇락(旕樂)’, ‘지르는 낙시조’, ‘언낙 시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가곡의 제목에 ‘낙(樂)’이 붙은 곡은『가곡원류(歌曲源流)』 ‘낙시조(樂時調)’의 풍도로 ‘요풍탕일 화란춘성(堯風湯日花爛春城)’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화창한 봄 꽃동산처럼 마냥 즐겁고 조금은 흥청거리는 듯한 기분을 준다. 또한, ‘언(言)’은 하나의 창법에 또 다른 창법이 섞이고, 소리를 높이 질러대며 노래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언락(言樂)’은 ‘지르는 낙시조’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첫머리에서는 ‘높은 소리로 질러대며 시작하여’ 장중하고 시원한 맛을 풍기다가, 후반으로 진행되면서 ‘즐겁고 흥청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창법과 악상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에서는 =48 정도의 속도로 연주되었다.<1분60정>
4. 여창가곡 평조(平調) 우락(羽樂) [우락시조(羽樂時調)]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초장 :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2장 : 궂인 비는 붓듯이 온다
3장 : 눈 정(情)에 거룬 임을 오늘 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板) 첩 쳐서 맹서(盟誓) 받았더니 이 풍우 중(風雨中)에 제 어이 오리
4장 : 진실(眞實)로
5장 : 오기곳 오량이면 연분(緣分)인가 하노라
작자 : 미상
여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 열 한번째로 연주되는 곡으로, 계면조 평롱(平弄) 다음으로 노래하며, 16박 1장단으로 되어 있다. 우락은 전통음악연주회에서 여창가곡 1곡만을 노래할 때 자주 선택되는 곡이기도 하며, ‘우락시조(羽樂時調)’라고도 불리운다.
‘우락(羽樂)’이라는 말은 ‘우조(羽調), 즉 평조 선법에 의한 낙(樂)’이란 뜻인데, 원래 가곡에서 ‘낙(樂)’은 남창가곡 중 ‘삼수대엽(三數大葉)’에서 파생된 곡으로, 『가곡원류(歌曲源流)』같은 옛 가집(歌集)에는 남창가곡 ‘계락’의 풍도(風度)를 요풍탕일(堯風湯日) 화란춘성(花爛春城)이라고 적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담담하면서도 흥겨운 맛을 지닌 곡으로, 빠르기도 =45 정도여서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리듬감을 감지할 수 있는 곡이다.<1분55정>
한편, 평조 이수대엽, 중거, 평거, 두거 등의 4장 첫 장단의 첫 번째 박은 한결같이 남려(南, c')로 시작했다가 4번째 박에 이르러서야 청황종(潢, eb')으로 높이 질러대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에 비해, 우락에서는 4장 첫 번째 박부터 곧바로 청황종(潢, eb')을 노래하게 구성하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5. 남창가곡 평조(平調) 우편(羽編) [편(編)] (봉황대상 봉황유러니)
초장 : 봉황대상(鳳凰臺上) 봉황유(鳳凰遊)러니,
2장 : 봉거대공 강자류(鳳去臺空 江自流)로다.
3장 : 오궁화초 매유경(吳宮花草 埋幽逕)이요, 진대의관 성고구(晋代衣冠 成古丘)라.
삼산(三山)은 반락청천외(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 백로주(二水中分 白鷺洲)로다.
4장 : 총위부운 능폐일(摠爲浮雲 能蔽日)하니,
5장 : 장안(長安)을 불견(不見) 사인수(使人愁)를 하더라.
현대어 역
초장 :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었다더니, 봉황은 가고 빈 대엔 강물만 흐르고 있네.
중장 :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솔길을 뒤덮었고, 진나라 귀인은 옛 무덤을 이루었네.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렸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가운데로 나뉘었네.
종장 : 뜬구름이 해를 모두 가렸으니, 장안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근심케 하는구나.
작자 : 미상. 이백(二白)의 시(詩)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 한글로 토를 단 것.
가곡의 제목에 ‘편(編)’이 붙은 곡은 ‘엮음(編)’이라는 뜻처럼 촘촘하게 많은 노랫말을 담아서, 가곡의 기본 장단인 16박 장단 대신 10박 한 장단으로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한다는 정보를 담고 있다. ‘우편(羽編)’은 ‘우조(평조)로 된 엮음(編)’이라는 뜻으로, 장형(長型)의 시조시(時調詩)를 노랫말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늘어난 가사는 3장과 5장에 편성하여 노래하며, 남창가곡 중에서 비교적 단순한 선율로 구성된 곡이다. 이 음반에서는 =64 정도의 속도로 연주되었다.<1분70정>
이 곡은 남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나, 남녀창(男女唱)이 교대로 노래할 때 모두 연주되지 않는 곡이다.
6. 남창가곡 반우반계(半羽半界) 편락(編樂) [편락시조(編樂時調)·편(編)] (나무도 바히 돌도)
초장 : 나무도 바히 돌도 없는 뫼에
2장 : 매게 휘좇긴 가톨의 안과
3장 : 대천(大川) 바다 한가운데 일천석(一千石) 실은 배에
노(櫓)도 잃고 닻도 끊고 용총(龍驄)도 걷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뒤섯겨 자자진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千里萬里) 남고 사면(四面)이 검어 어득 저뭇
천지적막(天地寂寞) 까치놀 떳는데 수적(水賊) 만난 도사공(都沙工)의 안과
4장 : 엊그제
5장 : 임 여흰 나의 안이사 엇다가 가흘하리요
현대어 역
초장 : 나무도 바위도 없는 민둥산에서 매에게 쫓긴 꿩의 속마음과,
중장 : 넓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일천석이나 되는 짐을 실은 배가
노도 잃고, 닻도 잃고, 돛대도 꺾어지고, 키까지 빠져버려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바람은 불어 물결이 치고 안개까지 뒤섞여 자욱한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아득하게 멀기만 한데,
사방이 점점 어둑어둑하게 저물어가고, 천지는 고요하여 폭풍우가 막 몰려올 듯이 까치 노을이 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무서운 해적까지 만나게 된 도사공의 절망스런 마음과,
종장 : 바로 엊그제 임과 이별한 나의 심정을 그 어디에다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작자 : 미상.
남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 스물한번째로 부르는 곡으로, 평조(平調) 언락(言樂) 다음에 이어진다. 10박 한 장단의 ‘편(編)’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락시조(編樂時調)’, ‘편(編)’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가곡의 제목에 ‘편(編)’이 붙은 곡은 촘촘하게 많은 노랫말을 사용하여 가곡의 기본 장단인 16박 장단 대신 10박 한 장단을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한다. 또한, 제목에 ‘낙(樂)’이 붙은 곡은 즐겁고 조금은 흥청거리는 듯한 기분을 주는 곡에 붙여진다. 따라서, ‘편락시조(編樂時調)’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편락(編樂)’은 ‘편(編)’과 ‘낙(樂)’의 성격이 조합된, ‘리듬이 촘촘하게 엮어진 낙시조(樂時調)’라는 뜻이다.
『가곡원류(歌曲源流)』에서 이 곡의 풍도를 ‘춘추풍우 초한건곤(春秋風雨 楚漢乾坤)’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곡의 구성과 노랫말에 있어서, 전반부는 평조 선법의 빠른 속도로 급박하면서 암울한 느낌을 표현하는데, 특히 3장 9번째 장단 5박부터는 장구의 채편 대신 복판을 연주하여 분위기를 더욱 급하게 몰아간다. 4장부터는 계면조로 조를 바꾸고 속도를 한껏 늦추어, 매우 슬픈 느낌을 전달하는데, 남창가곡 중에서 한 곡의 중간에 선법이 바뀌는 경우는, 이 곡 외에 ‘반우반계(半羽半界) 반엽(半葉)’, ‘계면조 계락(界樂)’의 2곡이 더 있다. 초장~5장까지는 10박 한 장단이고, 대여음은 16박 한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음반에서는 초장~3장까지를 =61로, 4장부터는 =36 정도의 속도로 연주하였고, 5장은 =56~61 정도의 속도로 연주하였다.<1분70정→1분30정>
7. 남창가곡 계면조(界面調) 편수대엽(編數大葉) [편 잦은한잎(자진한잎)·편·편대엽] (진국명산 만장봉이)
초장 : 진국명산 만장봉(鎭國名山 萬丈峰)이
2장 : 청천삭출 금부용(靑天數出 金芙蓉)이라.
3장 : 거벽(巨壁)은 홀립(屹立)하여 북주삼각(北主三角)이요,
기암(奇岩)은 두기(斗起)하여 남안 잠두(南案 蠶頭)로다.
좌룡 낙산(左龍 駱山) 우호 인왕(右虎 仁旺) 서색(瑞色)은 반공응상궐(盤空凝象闕)이요,
숙기(淑氣)는 종영출인걸(鍾英出人傑)하니, 미재(美哉)라.
아동산하지고(我東山河之固)여,
성대 의관 태평 문물(聖代 衣冠 太平 文物)이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로다.
4장 : 연풍(年豊)코
5장 : 국태민안(國泰民安)하여 구추황국 단풍절(九秋黃菊 丹楓節)에 인유이봉무(麟遊而鳳舞)커늘,
면악등림(面岳登臨)하여 취포 반환(醉飽 盤桓)허오면서 감격군은(感激君恩)이삿다.
현대어 역
초장 : 진국명산만장봉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 마치 금빛 연꽃 봉우리 같구나.
거대한 암벽은 우뚝 솟아 뒤쪽의 삼각산이고,
기묘한 모양의 바위는 불쑥 나와서 앞쪽의 남산이 되었구나.
중장 : 좌룡은 낙산, 우호는 인왕산,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서려 궁궐에 어려 있고,
맑은 기운이 모여 뛰어난 인재들이 태어나게 하였으니, 아름답구나.
우리나라의 산하의 굳음이여.
태평성대의 문화와 예의 바른 풍속이 오래 오래 계속될 견고한 성터로다.
종장 : 풍년이 들고,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들의 생활이 평안하여,
가을의 단풍과 국화가 피어나는 때에 상서로운 기린이 놀고, 봉황이 춤을 추니,
앞산에 올라 배불리 먹고 취하여 두루 돌아다니면서,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이다.
작자 : 미상
남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 스물두번째로 부르는 곡으로, 반우반계(半羽半界) 편락(編樂) 다음에 이어진다. 10박 한 장단의 ‘편(編)’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 잦은한잎(자진한잎)’, ‘편(編)’, ‘편대엽(編大葉)’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남창가곡의 제목에 ‘~수대엽(數大葉)’이라는 명칭이 붙은 곡은 평조와 계면조에 각각 초수대엽 · 이수대엽 · 삼수대엽의 6곡과, 계면조의 편수대엽 1곡이 있다. 편수대엽을 제외한 나머지 6곡은 모두 가곡의 기본 장단인 16박 한 장단으로 구성된 것에 비해, 편수대엽은 제목에 ‘편(編)’이 붙은 남창가곡인 반우반계 편락(編樂)처럼 촘촘하게 많은 노랫말을 사용하여 10박 한 장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늘어난 노랫말은 3장과 5장에 더 많은 장단을 분배하여 노래한다.
『가곡원류(歌曲源流)』에는 편수대엽의 풍도를 ‘대군구래 고각제명(大軍軀來 鼓角齊鳴)’이라고 적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계면조 선법이지만 계면조에서만 사용되는 일부 음 진행이나 창법이 사용될 뿐, 가곡 중에서 매우 경쾌한 곡에 속한다. 이 음반에서는 =67 정도의 속도로 연주되었다.<1분75정>
가곡을 남녀창(男女唱)이 교대로 노래할 때에는 생략되는 곡이다.
8. 여창가곡 계면조(界面調) 편수대엽(編數大葉) [화편(花編)·편(編)·편(編) 자진한잎] (모란은 화중왕이요)
초장 : 모란(牧丹)은 화중왕(花中王)이요
2장 : 향일화(向日花)는 충신(忠臣)이로다
3장 : 연화(蓮花)는 군자(君子)요, 행화(杏花) 소인(小人)이라
국화(菊花)는 은일사(隱逸士)요, 매화(梅花) 한사(寒士)로다
박꽃은 노인(老人)이요, 석죽화(石竹花)는 소년(少年)이라
규화(葵花) 무당(巫堂)이요, 해당화(海棠花)는 창녀(娼女)로다
4장 : 이 중(中)에
5장 : 이화(梨花) 시객(時客)이요
홍도(紅桃) 벽도(碧桃) 삼색도(三色桃)는 풍류랑(風流郞)인가 하노라
작자 : 김수장(金壽長, 1682 ~ ?). 자는 자평(子平). 호는 노가재(老歌齋). 병조서리(兵曹書吏). 김천택과 더불어 당대의 2대 가인(歌人)에 속한다. 서울 화개동에 노가재를 경영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여러 가인들과 활동하였고, 김천택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형성하여 창법(唱法), 작시(作詩), 가집(歌集)의 편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영조 39년에는 가집(歌集)『해동가요』를 편찬했고, 특히 사설시조를 가장 많이 창작하여 종래의 평시조와는 달리 민중들의 생활 감정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여창가곡만을 연이어 노래할 때 열 네번째로 연주되는 곡으로, 계면조(界面調) 계락(界樂) 다음으로 노래한다. 10박 1장단의 ‘편(編)’ 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화편(花編)’이라고도 불린다.
‘편수대엽(編數大葉)’은 가곡에서 빠른 속도인 ‘삭대엽(數大葉)’ 계열의 노래 중에서, 가사를 촘촘하게 붙여 노래하고, 장단도 16박 1장단에서 10박 1장단으로 축소하여 연주하는 곡을 뜻한다. 편수대엽에서는 장형(長型)의 시조시를 장별로 분배할 때 초장과 2장, 4장은 일반적인 시조시에서의 배열과 비슷하게 구성 하고, 3장과 5장에 더 많은 장단을 분배해 넣는다. 특히, 아무리 시조시의 글자수가 많아지더라도 4장만큼은 반드시 세 글자의 시어(詩語)만 배치하는 가곡의 전형적인 형식을 계속 지켜나가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이 음반에 함께 실린 평조와 계면조의 이수대엽의 속도가 =20 정도여서 도무지 리듬감을 감지하기 어려웠던 사람도 편수대엽에서는 =66 정도여서 충분히 리듬감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1분75정> 서양음악에서는 이 정도의 속도(Adagio)는, 매우 서정적이거나 슬픈 느낌의 곡에서나 사용할 속도이지만, 여창가곡 중에서는 가장 빠른 템포이고, 특유의 흥청거리는 듯한 리듬감과 월하선생의 산뜻하고 경쾌한 창법으로 인해 흥겨움을 안겨주는 곡이기도 하다. 또한, 이 음반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된 악기들 중에서 거문고와 단소, 양금의 연주도 이 곡이 가지는 청량감을 더해주고 있으며, 원래 슬픈 느낌을 준다는 계면조(界面調)의 곡이지만, 노랫말로 선택된 시조시(時調詩)도 꽃과 사람을 비유한 밝은 내용이고, 창법상 계면조에서 사용되는 특징이 나타날 뿐 매우 흥겨운 곡에 속한다. 『가곡원류(歌曲源流)』같은 옛 가집(歌集)에는 남창가곡 ‘편수대엽’의 풍도(風度)를 대군구래(大軍軀來) 고각제명(鼓角齊鳴)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편수대엽은 여창가곡 중에서 유일하게 음역이 2옥타브가 못되는 중려(仲, ab)~중청황종(㶂, eb'')으로 노래하고 있고, 다른 여창가곡에서 한결같이 최고음(最高音)이 등장하는 4장에서도 최고음보다 완전4도 낮은 청임종(淋, bb')까지만 나오는 점도 특이하다.
9. 가사(歌詞) 백구사(白鷗詞) ((백구야 풀풀) 나지마라)
一 : (백구야 풀풀) 나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성상(聖上)이 버리시니 너를 좆아 예 왔노라
오류춘광경(五柳春光景) 좋은데
백마금편화유(白馬金鞭花遊) 가자
二 : 운침벽계화홍류록(雲沈碧溪花紅柳綠)헌데
만학천봉비천사(萬壑千峰飛泉瀉)라
호중천지(壺中天地) 별건곤(別乾坤)이 여기로다
三 : 고봉만장청기울(高峰萬丈靑氣蔚)헌데
녹죽창송(綠竹蒼松)은 높이를 다퉈
명사십리(明沙十里)에 해당화(海棠花)만 다 피여서
四 : 모진 광풍(狂風)을 견디지 못하여 뚝뚝 떨어져서
아주 펄펄 날아나니 귄들 아니 경(景)일러냐
작자 : 작자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조(正祖) 때의 세도가였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0)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홍국영은 1772년 25세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가 춘방설서(春坊設書)를 겸하였다. 그 당시 권신(權臣),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등이 동궁(東宮, 왕세손으로 뒤에 正祖로 등극)을 위협하였는데, 이를 잘 막아내어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입어 도승지(都承旨) 겸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어 모든 정사(政事)는 그를 거쳐 윗전에 올릴 정도로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 받았고, 한편으로 누이를 정조에게 바쳐 원빈(元嬪)을 삼게 하고, 궁중의 숙위소(宿衛所)에 있으면서 이른바 세도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뒤에 정조는 여론의 귀추에 따라 그의 벼슬을 빼앗고 강릉으로 추방해 버렸다. 홍국영은 그곳에서 32세를 일기로 병사(病死)하였는데, 그때 홍국영이 강릉으로 귀양 와서 ‘백구사’를 지었다고 한다.
선가(善歌) 하규일(河圭一, 1867~1937) 선생이 전한 8곡의 가사(歌詞) 중 하나인 백구사는, 십이가사(十二歌詞) 중에서도 정대(正大)한 ‘군자(君子)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백구야 풀풀 나지 마라”로 시작되는 시가(詩歌) 문학으로서 백구사의 첫 5글자, 그것도 이 시가(詩歌)의 제목이자 “나지 마라”의 주어인 ‘백구(白鷗)’를 과감히 생략한 발상이 매우 신선하고 멋스럽다.
모두 8절(節, 마루)이고,=35~38 정도의 느린 속도로 6/박인데, 각 절마다 글자수에 따라 7~11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음은 황(黃, eb)·태(太, f)·중(仲, ab)·임(林, bb)·남(南, c')·무(無, db')로 계면조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가곡(歌曲) 우조(羽調)의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다. 꾸밈음을 포함했을 때 탁임종(亻林, Bb)~청임종(淋, bb")의 2옥타브 음역으로 육성과 속청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요성(vibration)은 아악(雅樂)적인 것과 서도(西道)적인 것이 혼용(混用)되어 있다. 전체 8절은 각 절마다 시조(時調) 종장(終章)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한결같이 중려(仲, ab)에서 황종(黃, eb)으로 하행(下行) 종지(終止)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고, 반주는 장구 장단에 대금, 피리, 해금이 노래 선율과 비슷한 가락을 연주하는 ‘수성(隨聲)가락’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음반에는 4절까지만 녹음된 자료가 실렸다.
세속(世俗)을 초탈하여 자연과 함께 벗하려는 지은이의 심정이 음악에 반영된 탓인지 전반적으로 곡상(曲想)도 태평스럽고 여유있어서 ‘군자의 노래’라는 별칭처럼 남성 가객이 노래했을 때 제멋이 나는 곡이라 할 수 있지만, 여성 가객(歌客) 특유의 시김새를 멋들어지게 구사하고 있는 월하선생의 백구사 또한 남성 가객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멋을 선사하는데, 특히 3절의 ‘명사십리에’ 부분에서 ‘명응···사···아···시이히이입··리히이···이이이··어이···’로 이어지는 육성에서 속청으로 시원하게 넘어갔다가 마무리 짓는 대목은 월하선생의 노래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10. 가사(歌詞) 죽지사(竹枝詞) [건곤가(乾坤歌)] (건곤이 불로 월장재허니)
一 : 건곤(乾坤)이 불로(不老) 월장재(月長在)허니
적막강산(寂寞江山)이 금백년(今百年)이로구나
後斂(口號) : 어희요 이히요 이히야 어이히야 일심정념(一心精念)은
극락남무아미상(極樂南無阿彌像)이로구나
야루 느니나 야루나
二 : 낙동강상(洛東江上) 선주범(仙舟泛)허니
취적가성(吹笛歌聲)이 낙원풍(落遠風)이로구나
後斂(口號) : 어희요 이히요 이히야 어이히야 일심정념(一心精念)은
극락남무아미상(極樂南無阿彌像)이로구나
야루 느니나 야루나
작자 : 이재(李縡, 1680~1746). ‘건곤불로월장재(乾坤不老月長在) 적막강산금백년(寂寞江山今百年)’라는 싯귀를 쓴 도암(陶菴) 이재(李縡)는 조선 영조 때의 학자로, 대제학, 이조 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신임사화 이후 설악산에 숨어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죽지사(竹枝詞)’라는 명칭은 고대 중국의 악명(樂名)으로 불려오던 것으로, 중국 촉(蜀)나라 땅 파유(巴喩, 지금의 하천성)에서 처음 부른 민요풍의 노래를 일컫던 말이었다고 하며,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자연이나 인사(人事)에 관한 향토색 짙은 시가(詩歌)를 노래한 것은 모두 죽지사라고 불려졌다고 하며, 우리 문학에도 성현의 죽지사 10수와 허난설헌의 죽지사 등이 전한다.
한편, 한국전통음악 중에서 12가사(歌詞)의 하나인 ‘죽지사’는 선가(善歌) 하규일(河圭一, 1867~1937) 선생이 전한 8곡의 가사(歌詞) 중 하나로, =35~38정도의 느린 속도로 6/박자이고, 모두 4절(節, 마루)로 구성되어 있는데, 1절부터 4절까지는 모두 동일한 선율이고, 매 절이 끝난 후 붙는 후렴(後斂)인 ‘입타령(口號)’ 역시 후렴 선율들은 서로 같다. 죽지사의 노랫말을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건곤장(乾坤章)’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1절 ‘건곤(乾坤)이 불로(不老) 월장재(月長在)허니 적막강산(寂寞江山)이 금백년(今百年)이로구나’의 노랫말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공령시(功令詩) 중 셋째 귀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구성음은 황(黃, eb)·태(太, f)·중(仲, ab)·임(林, bb)·남(南, c')으로, 평조 선법에 속하고, 꾸밈음을 포함했을 때 탁임종(亻林, Bb)~청임종(淋, bb")에 이르는 2옥타브의 폭넓은 음역으로 육성과 속청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요성(vibration)은 아악(雅樂)적인 것과 서도(西道)적인 것이 혼용(混用)되어 있다.
원래 가사(歌詞)는 시조창처럼 반주가 없어도 되고, 장구 장단 정도로 노래하는 경우가 많은데, 월하선생의 죽지사에서는 장구 장단에 대금, 피리, 해금이 노래 선율과 비슷한 가락을 연주하는 ‘수성(隨聲)가락’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음반에는 총 4절 중에서 2절까지만 녹음된 자료가 수록되었다.
일명(一名) ‘건곤가(乾坤歌)’로도 불리우는 죽지사는 그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꿋꿋하고 곧게 뻗어있는 대나무가 상징하는 선비의 굳건한 기개와 남성다운 호방(豪放)한 기상이 서려있는 곡으로서, 가곡 우조(羽調)와 비슷한 느낌을 주며, 주로 남성 가객(歌客)들이 애창하는 곡이었다.이지만, 월하선생의 카랑카랑하고 시원한 음색은 여걸(女傑)의 장쾌한 호령을 듣는 것마냥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이상 가곡, 가사의 해설 자료출처: 정가가사해설집-한국정가학교에서 발간한 정가의 노랫말 공부를 위해서 펴낸책자이자 교재임.>
11-1. 箜篌引(공후인)
公無渡河 (공무도하)
公竟渡河 (공경도하)
墮河而死 (타하이사)
公將奉何 (공장봉하) 麗玉(여옥)詩(시)
님은 물을 건느지 마오
님이 마침 건느시 다가
물에 빠져 돌아가시면
님은 장차 어이하리오 竹軒(죽헌) 譯(역) ·曲(곡)
공무도하가 (한국 고대가요) [公無渡河歌, 공후인]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기원전 3,4세기 경에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고대가요.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라는 것이 통설이다. 노래의 원모습은 알 수 없고 한역가만이 전하고 있다. 창작지역·채록자·문헌 등이 모두 중국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노래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낙랑군(樂浪郡)의 조선현(朝鮮縣)이 있었던 대동강 나루나 우리 민족과 관련된 어느 나루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우리 노래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노래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16세기말 또는 17세기 초의 저작으로 보이는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 五山說林草藁〉에서이다. 18세기 이후에는 여러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면서 이형상(李衡祥)의 〈지령록 芝嶺錄〉,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 등에 실려 전하게 되었다. / 설화의 내용을 살펴 보면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가 강가에서 배를 닦고 있는데, 머리를 늘어뜨리고 호리병을 찬 백수광부 하나가 강을 건너려 했다. 그 아내가 좇아갔으나 광부는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한탄하던 그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노래를 부른 뒤 자신도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아내 여옥(麗玉)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여옥은 공후를 타며 그 노래를 불러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노래의 전문은 2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채옹(蔡邕)의 〈금조 琴操〉에 실려 있으며 그 가사는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이 결국 물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公無渡河 公竟渡河 公墮河死 當柰公何)."이다. 문헌에 따라서 2번째 구의 '竟'이 '終'으로, 3번째 구의 '公墮'가 '墮河' 또는 '公'으로, 4번째 구의 '當'이 '將'으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다.
공무도하가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또는 공후인(箜篌引)은 고조선의 시가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 고대 문학 작품이다. 첫 구를 따서 공무도하가라 부르기도 하고, 하프와 비슷한 악기인 공후를 타며 부른 노래라 하여 공후인이라고도 한다. 사언사구(四言四句)로 된 짧은 한시의 형태로 전해지며, 그 원문과 한국어 음역은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 (공무도하)
公竟渡河 (공경도하)
墮河而死 (타하이사)
當奈公何 (당내공하) ”
정병욱은 이 노래를 한국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저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가신님을 어이할꼬 ”
원전과 배경 설화
진나라 최표가 지은 《고금주》(古今注)라는 책 외에 여러가지 다른 책에서 이 시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가 처음부터 한시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한국어나 그 방언으로 된 민요를 한역(漢譯)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금주에는 이 시가와 함께 그 배경 설화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 〈공후인〉은 조선진(朝鮮津)의 병졸인 곽리자고(霍里子高: 곽이라는 마을에 사는 자고)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타고 노를 저었는데 한 백수광부(白首狂夫: 흰 머리의 미친 사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들고서 거센 물줄기를 건너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따라가며 멈추라고 외쳤으나 미치지 못하고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에 공후(箜篌)를 가지고 두들기며 공무도하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소리가 매우 슬펐다. 곡을 마치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곽리자고가 돌아와서 그 소리를 아내 여옥에게 말해 주었다. 옥이 가슴아파하고 이에 공후를 가져다가 그 소리를 옮기니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삼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옥이 그 소리를 이웃집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하니 이름하여 〈공후인〉이라고 하였다. ”
— 진나라 최표, 《고금주》(古今注), 〈音樂〉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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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黃鳥歌(황조가)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琉璃(유리) 作詩(작시)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노니는데
이내 홀로 외로울서
눌과 함께 돌아가리 竹軒(죽헌) 譯(역)·曲(곡)
황조가 (유리왕 한시) [黃鳥歌]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화희, 치희, 유리왕한시, 삼국시대의문화, 고구려, 고대가요 /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 ?~18)이 지었다는 4언 4구의 한시.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조에 가사와 창작배경이 실려 전한다. BC 17년(유리왕 3)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어 2명의 여자를 계실(繼室)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는 화희(禾姬)로 골천(鶻川) 사람이고 한 여자는 치희(稚姬)로 한인(漢人)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질투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지어 각각 살게 했다.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간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는 또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으며 "너는 한 나라 비첩(婢妾)이면서 어찌 그리 무례한가"라고 말하자 치희는 이에 마음이 상해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말을 달려 쫓아갔지만 화가 난 치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쉴 때 황조가 날아와 노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창작연대는 동궁과 서궁의 축조에 소요되는 기간을 계산에 넣고, 봄인 것을 감안한다면 BC 15년경으로 추정된다. 노래의 전문을 해석과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펄펄 나는 꾀꼬리는/암수 서로 정다운데/외로운 이내 몸은/누구와 함께 돌아갈꼬."(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암수가 다정히 노니는 꾀꼬리의 모습과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심정을 대비한 단순한 내용이다.
이 노래의 작자와 창작과정에 대한 추정은 다양하다. 고구려 건국 이전에 이미 한자가 전래되어 유리왕이 애초부터 한자로 이 노래를 지었을 것이라는 유리왕의 한시 창작설을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 개인에 의해 창작되어 성적(性的) 제의(祭儀)에서 가창되거나 민요로 널리 불리던 것이 영웅활동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에 따라 당시의 영웅적 인물이던 유리왕의 사적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 당대에 널리 불린 민요를 유리왕이 단지 가창했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 유리왕의 창작설을 받아들이되 애초에 우리말로 지은 것을 후대에 한역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하다. 이 노래는 집단적·종교적인 특성을 지니는 원시종합예술 형태에서 점차 벗어나 개인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한국 최초의 서정시로 꼽힌다. 그러나 서정시가 아닌 서사적 형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치희 개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화희와 치희가 대표하는 두 종족간의 대립을 화해시키려다가 실패한 추장의 탄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 두 여인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을 고려하여 당시 경제생활 상태의 한 면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리왕의 성격이 호화스럽고 인접국과의 평화를 힘써 도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당시의 경제활동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노래의 성격을 서정성에서 벗어나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 자신이 이 노래를 지었건,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지어진 것이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져 민요화되었건 간에 이 노래는 짝을 잃은 외로운 심정을 표현한 서정성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리왕 창작설을 받아들인다면 이 노래는 남아 있는 고대가요 가운데 최고(最古)의 순수 개인서정시가 된다. 고대인의 순박한 서정성을 담은 서정시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황조가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조가(黃鳥歌)는 기원전 17년에 고구려의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노래이다. 삼국사기에 4언 4구의 한시 형태로 번역되어 전하고 있다.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
—유리명왕(瑠璃明王), 삼국사기
“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노니는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이병기·백철, 《국문학전사》(1957년), 41쪽
원문과 배경 설화
“ 유리명왕(瑠璃明王) 3년(기원전 17년)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후 송씨(王后 宋氏)가 죽자 대왕은 다시 두 여자들에게 장가를 들어 후처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골천인(鶻川人)의 딸이고,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나라(漢)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대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대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으로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하였다.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좇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친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하였다. ”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권 유리명왕편
11-3. 安市城(안시성)
새야새야 무당새야 안시성에 앉지마라
샛바람이 부는것이 눈동자를 가릴러라
친정사리 좋다더니 고초당초 더맵더라
비단백필 짜내다가 남의존일 하단말가 口傳謠(구전요)
“高句麗(고구려) 寶藏王(보장왕) 4년에 唐(당)나라 太宗(태종)이 三萬(삼만) 兵馬(병마)를 거느리고 安市城(안시성)에서 楊萬춘春(양만춘)에게 大敗(대패)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唐(당)나라에서 傳(전)해온 노래라고 하나 確證(확증)은 없다.”
*무당새 : 되샛과의 산새. 몸의 길이는 13cm 정도이며, 수컷은 등에 연한 회색에 검은색 얼룩무늬가 있고 암컷은 갈색이다. 땅 위를 걸어다니며 잡초의 씨와 해충을 잡아먹는다. 한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양-만춘 楊-萬春 [인명]고구려의 명장(?~?). 보장왕 4년(645) 안시성에서
중국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세민 (중국 당 [唐] 황제) [李世民, Li Shihmin, 태종]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정관의치, 중국당[唐]황제, 당나라의황제, 649년죽음, 599년태어남, 왕, 수·당
당 태종 太宗 (唐) 唐太宗 (병)Li Shimin (웨)Li Shihmin. 600~649.
중국 당(唐:618~907)나라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자 제2대 황제(626~649 재위).
묘호는 태종(太宗). 아버지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도와 당의 창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반란(618)을 주도했다. 재위기간중 돌궐족을 몰아냈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세민은 한족과 선비족(鮮卑族)의 혼혈인 귀족가문의 자손으로, 수(隋)나라 태원유수(太原留守)인 이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0세도 되기 전인 618년 아버지에게 무너져가는 수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권유했으며, 새로 세운 당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다른 11명의 경쟁자들을 무찔러 천하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26년 고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649년 죽을 때까지 제위에 있었다. 당시 중국은 선비족의 북조(北朝)와 한족의 남조(南朝)로 272년 동안 갈라져 싸우다가 590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수는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 때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 혼란을 틈타 이세민은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당을 창건하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수나라가 붕괴되자 각 지방의 유력한 무장(武將)들이 저마다 독립하여 천하를 장악하려고 서로 싸웠다. 남부지방은 이전의 남조를 계승한다는 취지하에 자립했다. 만리장성 밖의 유목민족 중 가장 강성했던 돌궐족은 중국으로 쳐들어와 변경에 괴뢰왕조를 세워놓고 본격적인 대규모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
6년간(618~624) 이세민은 돌궐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고 남부 지방을 정복했으며 다른 모든 경쟁세력을 물리쳤다.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던 많은 반란 지도자들은 패배하여 처형되었으나, 그중 일부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당나라의 작위를 받았다. 나라가 통일되어야만 평화가 오기 때문에 당의 중국 통일은 일반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세민은 궁중 내에서의 권모술수에는 능하지 못했다. 태자로 책봉된 세민의 형인 건성(建成)은 동생보다 무능했으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세민을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암살 음모를 꾸몄다. 이세민은 그를 지지하는 휘하의 장군들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이 음모를 사전에 봉쇄하고, 궁궐문인 현무문(玄武門)에 매복해 있다가 형 건성과 그 일행을 모두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을 '현무문의 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고조는 그 사변이 건성의 정권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세민(태종)에게 양위했다. 이 사건에서 태종은 정치적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한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는데, 나중에 이같은 일이 다시 생겨 왕권의 안정을 크게 해치게 되었다. 태종은 후계자 선택에서도 실패했다. 이는 이전의 관례와 정치적 압력 때문에 정비(正妃) 소생의 아들 중에서만 태자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정비인 장손황후(長孫皇后)와의 사이에 승건(承乾)·태(泰)·치(治)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자인 승건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승건이 어리석어 모반에 연루됨으로써 643년(貞觀 17)에 폐위되었다. 셋째 아들 치가 그다음 태자로 책봉되어 태종이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아 고종(高宗)이 되었으나, 그는 병약했을 뿐 아니라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무능하여, 그의 왕비가 된 야심많고 총명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잡았다.
태종은 통치자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옛 제도를 되살리고 개량했으며, 그의 권위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관리의 선발방법으로 과거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가장 중요한 개혁조치 중의 하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과거 소수의 귀족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권력은 훨씬 폭넓은 지식인 계급에서 선발된 관료들에게로 점차 옮겨졌다. 중국이 272년 동안이나 남과 북으로 나뉘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귀족문벌들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에, 태종은 이같은 권력구조의 변화를 의도했던 것이었다. 군대도 귀족가문에서 기르는 사병(私兵)을 점차 줄이고, 직업 군인을 징집하여 주로 변방에 주둔시켜 국방에 전념하게 했으며, 평범한 가문 출 신의 지휘관이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따라서 당나라 초기의 군제는 정권의 안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후대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태종은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교육을 진작시키고 관리가 될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지방행정조직·재정·조세·토지사용 등 거의 모든 방면의 제도를 재정비하게 했다. 당나라의 조정은 그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같이 훌륭한 태종의 치세를 가리켜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부른다.
공산주의 사가(史家)를 제외한 모든 후대 사람들은 태종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칭송해왔다. 그의 치세는 그후 중국의 역사·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문을 애호했던 태종은 직접 남북조사(南北朝史)를 편찬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비석에 새겨진 그의 글씨(溫湯碑, 晉祀碑)는 1,000년 이상이나 각급 학교에서 본받을 만한 서체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8세기의 중당(中唐)시대는 중국사상 가장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 중의 하나였는데, 이는 태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C. P. FitzGerald 글
보장왕
시 대 : 고구려
생몰년 : ?~682년(신라 신문왕 2)
고구려 제28대 마지막 왕. 재위 642년~668년.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이나 이 왕은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즉위 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또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를 계속하여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서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말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인 남생(男生) 형제간에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靜土)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기회를 엿보던 당나라는 667년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이때 육군은 요동지방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당에 투항한 남생과 합세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한편, 수군은 대동강구를 거쳐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보장왕의 직접 지휘하에 남산·남건 형제들이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이듬해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이후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 부흥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사천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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