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사 책을 읽다보면 오와(應和)의 종론宗論(963년)이 언급됩니다.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 상대적으로 자세하여 아래에 인용해 둡니다.
오와(應和)의 종론은 『응화종론기병은각주장(應和宗論記並恩覺奏狀)』에 의하면 961년(오와 원년)에 천태의 료겐(良源, 912~985)이 6종의 장로들로부터 전달된 불안한 상황을 천황에게 상주하면서 시작한다. 그 배경에 료겐의 활약이 있었다고 추측되는데, 료겐은 “여러 종이 함께 진여의 오묘한 경지를 드러낸다면 어찌 우열이 있겠는가.”라고 했다고 전해지며, 각 종의 장로가 그 요청에 응해 장계를 올렸다. 법회가 실현되기까지는 2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963년(오와 3) 8월 21일부터 5일간 『법화경』의 강설과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남도의 법상종, 삼론종, 화엄종의 승려와 북경의 천태종 승려가 직무를 맡았고 궁중의 청량전에서 법회가 거행되었다. 당시 에이산(叡山) 측에서는 료겐, 법상종 측에서는 고후쿠지의 주잔(仲算, 935~976)이 각 진영의 대표자로 참가했다.
8월 23일 아침 강좌에는 료겐이 강사가 되었고 질문자는 법상종의 헤이슈(平州)가 맡았다. 이때 『법화경』 제4권이 설해졌는데 료겐의 강설은 “왕과 공경公卿 중에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가 기록될 정도로 참가한 이들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마지막 날인 8월 25일의 아침 강좌에는 법상종의 주잔이 질문자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논의 내용이 매우 탁월했다고 한다. 천황은 저녁 강좌의 질문자도 주잔이 맡도록 요청했다. 이에 주잔은 일분무성一分無性에 대해 주장을 펼쳤다. 『법화경』 「방편품」의 유명한 문구인 “한 사람도 성불할 수 없는 이는 없다.”는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을 “불성이 없는 한 부류는 성불하지 못한다.”고 바꿔 읽어 법상의 오성각별성을 논증하는 근거로 내세웠다고 한다. 이때 “료겐은 입을 다물고 앉아서 쳐다볼 뿐이고 모두가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대일본불교전서』 128, 88c)고 전한다. 그 후 남도 6종의 장관은 법상종에서만 맡게 되었다.
그런데 “불성이 없는 한 부류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해석은 억지로 끌어 붙인 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료겐의 태도에는 법상과 천태의 대립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려는 정치적 배려가 작동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큰 세력을 가진 4대사 승려들의 융화를 꾀해야 할 조정에서 취한 정책이 남도 북령北嶺의 승려가 동등하게 직무를 맡는 법회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미노와 겐료蓑輪顯量 지음, 김천학 옮김, 『일본불교사』(동국대학교출판부. 2017) 76-77쪽.
*4대사大寺: 남도南都의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 히에이산(比叡山)의 엔랴쿠지(延曆寺), 미이(三井)의 온조지(園城寺).
*아래는 일본 야후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자료입니다.
応和宗論(読み)おうわのしゅうろん.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応和宗論
おうわのしゅうろん
宗論の名。村上天皇が応和3 (963) 年8月に天台宗の 10師と法相宗の 10師を宮中に招いて法華講を開いたときに起った論議のこと。天台側は一切の衆生は成仏すると主張したのに対し,法相側は五性各別 (ごしょうかくべつ) によっていて,成仏しないもののあることを主張した。この論争のなかで特に天台側の良源と法相側の仲算の間の論争が激しく有名。良源が『法華経』の「無一不成仏」という一文をあげて「一として成仏せざるなし」と読んで皆成仏を主張したのに対し,仲算は「無の一は成仏せず」と読んで仏性のないものは成仏しないと解釈した。この論争はついに決着がつかなかったが,2人とものちに,おのおのの宗の最高位に達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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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大百科事典 第2版の解説
おうわしゅうろん【応和宗論】
963年(応和3)に宮中で,天台・法相(ほつそう)両宗の学匠が一切成仏(いつさいじようぶつ)・二乗不成仏をめぐって行った論議をいう。村上天皇は,8月21日から25日までの5日10座,南都北嶺の高僧各10人を清涼殿に招き法華会を催したが,その第2日夕座(ゆうざ)に問者であった天台の覚慶は,一切すべてのものが成仏できると主張したのに対し,講師であった東大寺の法蔵が,成仏できるのは菩薩と不定(ふじよう)の一部に限定されると法相宗の立場から反論して論争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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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の解説
応和宗論おうわのしゅうろん
963年(応和3)8月21日から5日間、村上(むらかみ)天皇御願の『法華経(ほけきょう)』書写の成就にあたり、宮中清涼殿(せいりょうでん)に南都と北嶺(ほくれい)の碩学(せきがく)各10人を招いて『法華経』の義理を講ぜしめた際、法相(ほっそう)と天台の両宗間で行われた教義論争。
北嶺の天台宗はいっさいの衆生(しゅじょう)はすべて成仏(じょうぶつ)するという一切皆成(いっさいかいじょう)説を主張、南都の法相宗は衆生が先天的に備えている素質に5種あるという五姓各別(ごしょうかくべつ)説にたって、成仏しないものがあることを主張した。講経は毎日朝夕2座行われ、両方から講師と問者が相互に出て論義問答したが、第3日朝座に天台の良源(りょうげん)が南都の法蔵(ほうぞう)を論伏するに及び、第5日朝座には南都の仲算(ちゅうざん)が天台の寿肇(じゅちょう)を痛論し、ついに勅令により同日夕座には良源と仲算が討論し、激論を戦わせた。『元亨釈書(げんこうしゃくしょ)』巻4、『扶桑略記(ふそうりゃっき)』巻26などには、良源の勝ちとしてあり、『応和宗論日記』、『本朝高僧伝』巻9などには仲算の勝ちを伝えるが、勝敗は決しなかったというのが真相であろう。この問題は、仏教における本覚門(ほんがくもん)思想と始覚門(しかくもん)思想、理想主義と現実主義との対立ともいうべきもので、その止揚解決は鎌倉仏教にゆだねられたとみることができる。[薗田香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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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典 小学館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について 情報 | 凡例
첫댓글 本覚이냐 始覚이냐, 理想이냐 現実이냐하는 문제는 지금도 우리의 뇌리를 사로잡는 근원적인 물음이네요.
이런 과정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