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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함께 만드는 유토피아
강영환(시인)
시인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한 숱한 사물을 대한다. 그 만남 속에는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과의 사연, 사물과의 사연들이 나의 삶을 만들어 준다. 시인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들은 시인에게 대상이 되어 주어 삶을 들여다보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시를 사물과의 갈등구조로 파악한 이는 R. 버크이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대상을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버크는 시는 시인의 정서적 긴장과 갈등을 변장된 형식 즉 상징을 통해 극화된 것이며 긴장과 갈등의 일부가 형식화되고 독자는 드러난 외양(작품)에 주의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시에서 찾고자하는 것은 시인이 내면에 간직해 온 그 만의 사물을 드러낸 의미일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간직해 온 메시지를 시에 담거나 상징을 통해 숨겨 놓는다. 명은애 시인이 외부의 대상과 만났을 때 반응하는 태도도 대상 속에 숨겨 놓고 작품 속에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해내거나 대상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자아와의 만남을 꿈꾼다. 버크가 말하는 갈등이기보다는 명시인은 사물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쪽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과의 갈등구조를 화해형식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땅거미 내려앉은 키 작은 지붕 골목을 지고사는 고단한 외등이 낡은 전봇대에 기대섰다 아침밥을 먹던 발자국이 어둠을 밟고 돌아오는 지친 노동을 쪽창 아래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늙은 어머니 잔기침에 잠 못 들고 부석거리는 이불 소리에 밤새 달빛을 쓸고 있는 싸리나무 듬성한 나무문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바쁘게 늙어가는 골목이 굽어보는 달동네 한 수 아래 아파트 기울어진 하늘을 품고 산다 —「하늘 아래」 전문 이 작품이 대상으로 하는 장소는 키 작은 지붕들이 엉켜있는 달동네(산동네)다. 골목을 지고 사는 외등이 고단하게 전봇대에 기대 서있고 아침을 먹고 출근했던 발자국들이 어둠을 밟고 돌아와 쪽창 아래 신발처럼 벗어놓았다. 간간이 들리는 늙은 어머니 잔기침 소리가 들리고 그것이 걱정되어 잠 못 드는 손이 이불을 끌어다 덮는 부스럭 소리에 밖에서는 고요히 내린 달빛을 싸리나무가 쓸고 있다. 판자로 듬성하게 얽어놓은 나무 대문이 삐걱거린다. 바쁘게 늙어가는 골목이 굽어보는 달동네 아래쪽에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들은 기울어진 하늘을 품고 산다. 이 작품은 몇 개의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엮여져 있는 서정시다. 비교적 부유하지 못한 산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의 고단한 삶에 따뜻한 배려와 정감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녹아있다. 명은애 시인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인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삶과 직결된다. 이 작품집에서 만나는 그의 시는 인간의 삶을 근간으로하는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서정시가 대부분이다. 낯선 이미지들로 낯익은 서정을 끌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대상 속에서 자신의 서정적 자아를 끄집어내어 재구성해 보는 방법론이라고 본다. 노을이 지면 거리를 적시는 신장기증 전단지들은 어둠이 밝힌 시간을 덮고 쉼없는 비질은 하늘을 쓸고 있다 —「광고 속으로」 부분 신장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이용하여 그들을 농락하는 전단지가 수없이 뿌려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보여주기도 하고 책방에서 만나는 그녀라는 대상에서는 춤추는 그녀는 우주선을 만들고 그리고 신전을 짓고 사막에서 어린 왕자와 모래성을 쌓기도 한다 —「그늘막」 부분 그가 만드는 이미지들은 책이 만드는 세계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말문을 닫다」에 이르면 알콜 중독자 노인이 술추렴에 빠질 때 그의 부인은 친정행 보따리를 싼다. 하지만 서로간에 이해를 통해 평생을 살아왔고 결국 알콜성 치매로 정신줄을 놓은 노인을 보살펴야 하는 부인은 끝내 보따리 매듭을 묶지 못하고 ‘친정행 말문’을 닫고 만다는 주어진 운명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온 여인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노인의 삶의 행태로 보아서는 몇 천 번이고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떠나야 맞는 일이겠지만 한 번 이어진 인연의 끈을 모질게 싹뚝 자르거나 정분을 털어버릴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화해 형식으로 끝맺음 한다. 시침이 움직일 때마다 격리되는 기침 소리가 들린다 사막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종아리에서 걸음이 빠져 나갔다 —「잃어버린 시계」 2연 명은애 시인은 두번째 시집에서도 시간 탐구가 주요 화두였다고 했다. 시간이란 바로 존재에 대한 접근법이며 시간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시인은 사물들에 내재한 시간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한다. 그것이 본질에 다달으려는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터득한 것같다.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사물이 지닌 본질에 접근해 간다. 거기에는 사물이 그저 사물이 아닌 자신의 서정적 자아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십오 그램 비밀이 흐르는 기린 목 라르고* 음율에 저당 잡힌 걸음 더치 눈물 한 방울 떨구었다 삼킨 카페인에 혀가 잠 못 드는 밤 몸 안을 지배하는 악마 데스위시 뼈만 남은 입술을 태운다 본질이다 바닐라부터 시나몬까지 달콤한 연인의 입술보다 더 달콤해 비엔나 젓는 스푼이 소용돌이를 헤어나지 못한다 실연에 베인 입술 잠재우는 소슬바람이 늑골을 지날 때 기억도 조작할 수 있는 초이스 향이 의자에 앉았다 —「본질에 빠지다」 전문 이 작품은 커피에게 가는 길을 밝히고 있는 작품이다. 커피의 본질을 천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객관적인 지식 정보이기보다는 주관적 정서에 의해 발견해낸 커피의 본질이다. 시적화자가 경험했던 몇 가지 커피들—더치 커피, 데스위시, 바닐라, 시나몬, 비엔나, 초이스 등 누구나 한 번쯤 접해 보았을 그들에 대한 친근감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본질은 커피가 아니다. 단지 대상으로써 커피 속에 숨어있는 그 어떤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것이 커피를 대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 속에 숨어있고 그것을 들추어냄으로써 보다 진지한 커피맛에 젖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종내에는 그 대상 속에 이입된 자아를 통하여 물아일체를 구현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햇빛은 쉴 새 없이 처마 아래로 드나드는데 엄마 앉았던 마루 끝자리는 그늘진 구멍만 조각보로 앉았다 바닷물을 펴서 말린 소금을 만지작거리던 손바닥 파도에 찢긴 창백한 살점에 하얀 핏방울이 떨어진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 내일 또 보자’ 그 내일이 수없이 지났지만 잘라내지 못한 그늘이 시든 언어로 손을 붙잡고 있다 2월을 가린 마스크 포박된 숫자들 위에 파편이 튀고 시한부로 탄생한 마른 꽃도 걸음이 묶여 마루 끝자리에 조각보로 앉았다 —「슬픈 카네이션」 전문 어버이날을 맞아 어머니 집을 방문한 시적 화자는 엄마가 앉았던 마루 끝자리에서 구멍난 조각보 만한 햇살을 발견한다. 정작 어머니 사시는 집에는 많은 햇살이 들고는 있지만 화자의 눈에는 어머니가 앉은 자리만한 햇살밖에 볼 수가 없다. 그 크기는 햇살로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바닷물을 펴서 말려서 소금을 만들 듯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지나왔다. 육신은 세찬 파도에 찢겨 소금처럼 하얗게 창백해 졌고 하얀 핏방울은 삶의 흔적으로 떨어진다. 엄마는 자식이 안쓰러워 자꾸 집으로 돌아가라고 채근하지만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어머니 가슴에 달아주려고 가져온 카네이션이 어머니 앉았던 자리에 조각보가 되어 떠나지 못하고 앉아 있다는 이미지로 가슴 아픈 어버이날을 보여준다. 대개가 다 그런 작품들이지만 우리 삶의 모습들을 그려낸 이미지들로 「발뒤굼치」는 층간 소음이 발생하는 아파트 생활자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이미지다.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비워내기」는 벚나무가 꽃잎을 떨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길을 떠나기 위한 자기의 준비 모습이라고 새롭게 해석하기도 한다. 일상에서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많이 그려낸다. 그것들은 제 3자적 시점에서 그려낸 객관성 높은 관찰이라고 본다 그런 작품들로는 「명희」 「어둠을 읽다」 「끝모를 장마」 「하늘 아래」가 있으며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된 사건 사고를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그려낸 작품들로는 한증막에서 감전사고를 당한 사람과 하수구 배수관 공사로 맨홀 속에 들어갔다가 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노동자를 그린 「시계를 맞추다」 외가 있고 우리 현실 속에서 쉽게 접하는 인간의 모습들을 들추어 보이는 작품도 다수를 점한다. 「길 위에서의 잠」 「문이 닫히다」 「며느리 밥풀꽃」 「영도다리」 「눈치보기」 「견고한 안개비」 「나르지 않는 안개」 「언어사냥」이며 특히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소녀의 슬픈 영혼을 위무하는 시 「꽃을 심다」와 재개발 지구에서 쫓겨나야 하는 철거민의 애환을 담은 작품 「허물어진 주소」가 유독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 주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읽을 수가 있다. 그 외에도 태풍 몰아치는 거센 풍파를 이기고 살아온 밀양댁의 모습 「별을 보다」 틀바늘질로 생계를 꾸리며 살아가는 여인과 그 따뜻한 이웃들의 모습을 담은 「잃어져버린 귀」가 눈길을 끈다. 창가 탁자 위에 엉켜져 있는 시간은 무채색이다 앞머리를 습관적으로 넘기는 그녀 얼굴을 볼 틈이 차단되었다 햇살에 표백된 사유는 입에서 귀로 전해져 아귀 맞는 퍼즐로 만들어졌다 파스텔톤 염료가 뿌려진 어둠이 살찌는 동안 바람도 키가 자랐다 서쪽으로 난 창에 저문 구름이 물들어 지나갈 때 눈에 새겨둔 갯내 나는 이름 하나 창턱에 걸터 앉았다 잠에서 깨면 유채색이다 안부가 궁금한 미루나무 한 그루 맥락 없는 메아리를 퇴고한다 —「소외」 전문 주체적 자아를 탈색 시켜 이미지 만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담아낸 「낙엽을 줍다」 「시간도둑」 「몰운대 계단」 「통점이 낸 길」 「태풍과 함께」 「몰운대를 걷다」 등의 작품과 함께 명은애 시인의 사고의 출발점이라고 할 여행에 관한 시들이 있다. 여행은 누구나에게 정체된 답답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이 시집의 2부에 편집된 시들은 낯선 곳에 여행가서 느끼는 새로운 이미지들과의 교감을 담는다. 객관적인 시각이 아닌 주관적인 시각이다. 여행시들은 주관적인 시각일 수밖에 없다. 시로서 성립될 조건이 바로 주관적인 진술과 묘사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가서 주관적 감정이 강하게 작용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이미지들은 객관성을 취하려 애를 쓴다. 독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속내를 비쳐보인다. 누워 있던 집시여인이 일어났다 눈에 초원의 헛바람이 들어 배고픈 눈동자는 시간마다 베란다 유리창으로 들어온 빛에 고개를 돌린다 몰운대 해무를 가르고 김해공항으로 가는 앵무새 날개에 고비사막 붉은 물빛이 무지개로 달렸다 노을이 질 때마다 이마에 자라던 게르에서 각질이 떨어지고 주머니에 넣어둔 입김을 만지작거리며 손가락을 뒤집을 때마다 보라색 립스틱이 묻은 마스크가 쏟아져 나온다 허공에 케리어를 묶어 둔 날 여권 갈피에 끼워 둔 지도를 찾아 싹트지 않는 탯줄을 잘랐다 초원으로 떠나야 한다 —「떠나며 산다」 전문 시적 화자는 자신을 짚시여인으로 분류한다. 짚시는 초원을 떠돌며 생활하는 여인이다. 그들의 삶 자체가 초원 위에 있는 떠돌이 삶이다. 시적 화자도 방랑벽이 있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바깥세상 햇살만 봐도 어디로 떠나고 싶은 방랑벽이 회를 발동시켜 ‘허공에 케리어를 묶어 둔 날/ 여권 갈피에 끼워 둔 지도를 찾아/ 싹트지 않은 탯줄을 잘랐다/ 초원으로 떠나야 한다’ 이런 모습을 사람들은 여행 중독이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시적 화자는 여행에 중독된 모습이다. 지금은 방안에 누워 있지만 짚시 여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초원으로 떠나야만 삶이 만들어 진다. 짚시와 사막과 공항과 캐리어와 초원의 이미지들은 바로 떠남이며 여행이다. 그것을 통해 떠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준다. 시집 뒤쪽에 자리 잡은 몇 편의 산문시들은 서사구조를 지니면서 가까운 이웃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유기견을 데려와 이름 붙여주고 키우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일육이」 화장지를 수레 가득 싣고 팔러 다니는 뇌병변 장애인을 도와주는 미담을 담은 「뒤를 보다」 책읽기를 싫어하는 친구 숙이가 어른이 되어 책방주인이 되어 책속에 파묻혀 사는 모습을 그린 「책방골목 숙이」 할머니와 삼촌과 고모와 어머니와 오빠, 동생들의 관계를 들추어내어 고단한 어머니의 삶을 힘겹게 살아왔던 모습을 회상해 보는 작품 「젖은 손바닥」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집을 장만하지 못한 아들을 위해 날마다 복덕방에 나가서 집을 계약하는 안타까움을 형상화해낸 가슴 아픈 작품 「할머니의 외출」 보육원에 온 지 일년 만에 다시 해외 입양을 떠나야하는 아이의 기구한 운명을 외출로 그려보는 「칠년 만의 외출」 등 산문시는 이렇듯 담고 있는 스토리와 의미가 아프고 쓰린 지금-여기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보육원 선생님 손에 이끌려 욕탕 뜨거운 물에 잠긴다 버틸 재간이 없는 아이는 까닭 모를 때를 밀고 부유물 밀리는 욕탕 언저리에서 한 번 더 때를 밀었다 다음날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신생아때 아현동 골목에 버려진 아이 엄마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먼 곳으로 첫 외출을 한다 —「칠년 만의 외출」 전문 명은애 시인의 사색은 현실 밖에 있지 않고 현실 그 자체에 있다. 생활 속에 있으며 늘 시인의 삶과 일치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높은 상징이나 현란한 은유와 같은 시적 기교를 발휘하여 숨기지 않더라도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 명은애 시인은 제 3자적 시점을 견지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생각이 객관적 상관물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견해가 탈색되어 시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시인이 대상을 만나는 태도도 진술보다는 묘사에 가깝게 다가서 있어 이미지들로 의미 전달을 쉽게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미지의 연결만으로 의미를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지의 치밀한 내적 결합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미지만이 아름답다고 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의미의 연결이나 이미지 결합이 문학적 논리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명은애 시인의 작품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소박하고 정겹다. 자신의 생각을 넣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감을 개성 있는 이미지로 보여준다. 독자들은 그렇게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 깊이 있는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시집의 상재를 축하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