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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韓江, 1970-), 창비, 2007년 10월 30일, 247쪽 - 번역서: Vegetarian
*** 난 하루 종일 내 일로 부산에 있었다가 다음날 올라왔다. 10월 14일 월요일, 저녁까지 뉴스를 몰랐다. 저녁 어제가 구월 보름인데 오늘 뜬 달도 보름달 같다. 부산 사람들은 낮에 조국의 사태 뉴스를 듣고 맘이 허 하단다. 오늘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 소설 나머지 부분을 다 읽었다. 삶이 뭔지 주인공은 꼭 식물로 돌아가려는가? 불교에서는 한 줌의 재, 유가에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52ULE)
** 아내(영혜)가 꿈을 꾸고서 고기 냄새조차 싫어하며 냉장고에 모든 고기를 버렸다. 게다가 잠자리의 남편에 살갗에서도 냄새난다며 멀리한다. 발단은 다른데 있을 것이다. 억압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고기가 되기 싫다? 즉 고기를 먹지 않겠다. 긍정적으로 다른 삶을 살겠다. 달리 말하고 달리 살겠다. “같잖은 이야기”일까.
** 영혜의 꿈과 식물되기에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던 추억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거부 그리고 영혜의 거식증(拒食症)에는 트라우마 같은 추억들이 있는데, 변형된, 왜곡된, 압축된, 또는 새로이 정교하게 생성되는 추억들이 드라마처럼 과정을 겪으면서 만들어지고, 스스로 식물되기가 그 과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환상 또는 망상에 빠진다. 그렇다고 착란이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자의식이 남아 있다.
소설은 이 자의식을 약화시키고 망상을 확대하는 듯이 보이지만, 망상 속에서 실재성은 프로이트의 ‘집같지 않음’/ 낯선불안(Unheimlich, L'inquiétante étrangeté, Uncanny)으로 표현된다. 살아온 것이 집같지 않다. 플라톤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방황하는 원인)를 효라(공간), 매트릭스(자궁), 유모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 방황하는 원인은 이데아를 아는 데미우르고스가 다룰 수도 없고 이해할 수 도 없는 상태(위상)와 같은 것이며, 속 좁은 이성이 아페이론(무한정한 것)이라 부른다. 그 ‘낯선 불안정’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기에는 일반 인간이 너무 지성적이고 주지주의적이다. 어째거나 살아가면서 망각 속에 밀어넣어야 하는데, 영혜는 새록새록 솟아나는 듯하다. 이러한 생성을 수용하고 그 권능을 이해하라는 것이 자연주의이다. 아마도 불안정한 모태(자궁)는 노자의 현빈(玄牝)도 같은 의미일 수 있다. 대부분 거부했던 이 방황하는 원인이 권능자체라고 본 것은 니체이다. 이 ‘권능자체 되기’를 니체는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에게 속삭이는 것이라 한다. 영혜에게 속삭인 것은 형부이었을 수 있었다. 언니 인혜는 속삭일 수 없다. 또는 사회와 지성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소설처럼 당연이 정신병원으로 이송하겠지만 말이다. (52ULE)
*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이다. 한 등장인물 영혜의 삶의 세 종류의 절편들이다. 사회와 가족에서, 예술에서, 정신병동에서 부모와, 형부와, 언니와 연결된 삶에서 영예의 수동성의 심화과정이다. 폭력에 대해 저항하는 내재화는 그 자신의 삶을 갉아 먹는다. - 영원한 산보자, 여행자로서 살아갈 ... 그래서 정승판서를 마다하고 각설이(걸승)로 나서는 이야기가 예전에는 여럿 있었다. 지금도 있다. 청담동에 4년 넘게 길거리에서 지내는 여인이 있다. 잘 짜여진 세상에 빈틈을 용납하지 않으면 밖이나 안이나 정신병동과 같은 감옥이다. (52ULG)
** 구성의 설정에서, 장인은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폭력의 일상화에는 전쟁의 상흔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전두환의 광주 항쟁의 진압에도 전쟁의 상흔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정. 군대식 아버지 밑에서 따돌리는 아이는, 영혜는 가정에서 따돌린 셈이다. 결혼하여 계속되는 꿈들을 꾸고 난 뒤에 거부하는 의식은 점점 확장되어 간다. 채식주의로서 또한 왕따가 되고, 형부와 관계에서 가족관계에서도 왕따이며, 정신병동에서도 홀로 지낸다.
소설에서는 한 사람의 배제를 통해서 겉보기에 평온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불편과 은폐의 연속으로 가장된 평온이다. 영혜의 수동성은 가정을 갖고 난 뒤에도 드러나, 육식의 거부이다. 육식은 폭력의 상징인 셈이다. - 3부작으로 가족(사회)에서 왕따, 애정(언니)에서 왕따, 병원임상에서 왕따, 이 마지막 과정에서 혼자인 자신과 유일하게 공명하는 비와 햇볕. 이 3부작은 근원으로 귀착, 니체의 표현을 빌면 디오니소스의 아리아드네를 미로(라비린스)에 실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녀에게는 귀도 실도 없이 내쳐졌다. (52ULF)
*내용 중에서******************
채식주의자(09-65)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9) [첫문단 시작인데 여주인공의 수동성을 드러낸 표현이다.]
말문이 막혔다. 요즘 채식 열풍이 분다는 것쯤은 나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알고 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생각으로, 알레르기니 아토피니 하는 체질을 바꾸려고, 혹은 완경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된다. 물론, 절에 들어간 스님들이야 살생을 않겠다는 대의가 있겠지만,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가. 살을 빼겠다는 것도 아니고, 악몽 한번 꾸고는 식습관을 바꾸다니. 남편의 만류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저 고집스러움이라니. (21)
*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그럼 그걸 감춰준 사람은 누굴까. 그건 분명히 나나 당신이 아닌데.‥…삽이었어. 그것만은 확실해. 커다란 흙삽으로 머릴 쳐서 죽였어. 둔중한 울림, 금속과 머리가 부딪치던 순간의 탄성(彈性)‥… 어둠 속에서 고꾸라지던 그림자가 생생해.
이번 꿈이 처음이 아니야. 무수히 꿨던 꿈이야. 술에 취하면 예전에 취했을 때 기억이 나는 것처럼, 꿈속에서 지난 꿈 생각이 나. 수없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였어. 가물가물한, 잡히지 않는․‥…하지만 소름끼치게 확고한 느낌으로 기억돼.
이해할 수 없겠지.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그게 언니라 해도, 아니, 엄마라 해도.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 밖엔.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굴곤 했지. 그렇다고 어제 꿈에 죽거나 죽인 사람이 얼마나 언니였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비슷한 느낌. 오싹하고, 더럽고, 끔직하고 잔인한 느낌만이 남아 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 (36-37, 강조는 천야) [낯섬 / 야릇한 불안('Das Unheimliche', fr. L'inquiétante étrangeté, en. The Uncanny:) - 들뢰즈에 따르면 이 낯섬은 왕관을 쓴 폭군같은 다양체로서 자연(la nature 본성)이다. 플라톤은 아페이론을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고민이라도 했었다. 칸트는 사물자체를 애써 모른 채하며 내버렸다, 마치 소설에서 영혜를 버리듯이. 이 속 좁은 이성이 버린 사회가 근대 사회이다. 푸꼬가 이 버린 과정을 “말과 사물”에서 쓰면서, 니체를 엿보았다. 니체는 이것을 버린 우월한 자들로서, 국가주의자(비스마르크), 유일신앙의 종교권력자(바울), 문화권력주의자(바그너)들이 만든 사회가 야만적이고 참담한 사회(le tragique)라고 했다. / 오싹하고, 더럽고, 끔직하고 잔인한 느낌, /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느낌] /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 이 긴 문장을 인용한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중요한 근원(샘, 빛)일 것이다. 꿈을 적은 것은 둘째문단이다. 그리고 작가는 꿈의 과정(정교하게 만들기)을 그 다음 세 문단으로 기록했는데, 넷째 문단과 다섯째 문단에서 “운하임리히(낯섬)”에 대해 잘 표현했다. (52ULF)]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 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65: 채식주의자 마지막 문단)
몽고반점(69-147)
[여기서 그는 주로 형부이고 그녀는 채식주의자 혜영이다]
처제의 외꺼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와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처제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드는구나, 자매이고 닮은 부분이 많은 데도 미요하게 느낌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스쳐가듯 했을 뿐이었다. (78-79) [정념(passion)은 느낌이다. 감각이라기보다 감정이라기보다 감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년 전 여름의 초입. 처제는 그의 집에서 손목을 그었다. 그의 가족이 평수를 넓혀 이사한 뒤 처가 쪽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점심을 먹던 자리였다. ... 그러나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의 장인이 반항하는 처제의 뺨을 때리고, 우격다짐으로 입 안에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은 것은 아무리 돌아봐도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 그러나 그보다 선명하고 섬뜩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 순간 터져 나온 처제의 비명소리였다. 고깃덩어리를 뱉어낸 뒤 과도를 치켜들고 그녀는 가족들의 눈을 차례로 쏘아보았다. 흡사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그녀의 눈은 불안정하게 희번덕이고 있었다. (81) [타인의 얼굴이 짐승처럼, “낯선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은 내면(심층)의 발현을 느낄 때이다. - 왜 가깝게 느끼지 못하는가? 속좁은 이성 즉 지성의 한계이다.]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 들을 일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이다. /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 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83) [조국 사건으로 기자들이 갑질 폭력을 일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까?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 1994-2019년 10월 14일)의 자살도 마찬가지로 현 사회의 사건이다. 그 폭력의 상층이 교회 그리고 언론과 검찰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불구경하는 구경꾼처럼 나는 무구하다고 주장한다. 목사, 기자, 검사. - 인민이 악플을 단다고 말하지 말라. 부추기는 자들이 나쁘다.]
워낙에는 말이 없는 성격이었던 처제는 종일 베란다에 나가 늦가을 햇볕을 쬐며 낮 시간을 보냈다. ... / 그런 그녀가 자살을 기도했고, 심지어는 사람들 앞에서 토플리스 차람으로 태연히 앉아 있었다는 – 그것은 자살기도 뒤의 일종의 착란증상이었던 것 같았다 – 것을 믿기 어려웠다. (85) [토플리스(상반신 탈의): topless [형용사] 여자가 (옷을 입지 않고) 상반신을 드러낸[노출시킨] 모습]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점차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다. (92-93) [수도승은 담담할지 모르지만, 싯달다를 비롯하여 생명성을 지닌 쪽은 프란체스코나 나옹이나 경허처럼 온화할 것 같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104) [프랑스 감독 리베뜨(Jacques Rivette 1928–2016)의 누드모델(La Belle Noiseuse, 1991)(출연자 Michel Piccoli, Jane Birkin, Emmanuelle Béart)을 생각나게 한다. 이 모델은 수동적이었다가 몸의 연출을 스스로 해나간다.]
P는 날큰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 “그런데 형답지 않다. 이거 정말 발표할 수 있겠어? 형 별명이 오월의 신부였잖아. 의식있는 신부, 성직자 이미지‥…나도 그걸 좋아했던 건데.” / P는 뿔테 안경 너머로 그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 “형도 이제 변신하려는거야? 그런데 너무 과격한 변신 아냐? 물론, 내가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지만.” (135) [P는 한 때 그와 사귀는 여자 화가이다. 이제는 결혼하였지만.] [처제 영혜가 먼저 몸에 꽃을 그리고, 이제는 형부인 비디오 작가가 몸에 그림을 그린다. - 프랑스 영화인데 제목은 잊었지만 여인이 천(옷감)에 희열을 느끼는 것을 알고자, 남자도 천에서 희열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영화가 있었다.]
“‥…늘 달라요. 어떨 댄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썩어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요.” /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박명 속에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 그녀는 말했다. /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 “그러니까‥…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142-143) [내면성은 본인도 잘 모르지만 생명성으로 올라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정하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앰뷸런스의 사이렌, 터져 나오는 비명과 탄성, 아이들의 고함, 골목 앞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그는 들었다. 여러 개의 급한 발소리들이 층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고 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147, 「몽고반점」 마지막 두 문단) [루이 말(Louis Malle, 1932-1995) 영화감독의 <데미지(fr. Fatale, en. Damage)>(1992년 작)을 떠올렸을까? 숙명이나 경국지색은 여성에 속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예술성에서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무불꽃 (151-221)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 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 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161) [자아의 반성에서 거울효과] ㅓ
병원에서 정상으로 판명된 그는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구 개월의 소송과 지루한 구명운동 끝에 풀려났으며, 잠적해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영혜는 폐쇄평동에서 나오지 못했다. 첫 발광 이후 잠시 말문을 열었던 영혜는 다시 침묵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대신, 아무도 없는 양달에 쪼그려 앉아 무슨 말인가를 중얼 거렸다. (168-169) [여기에서 양달, 즉 햇볕은 생명의 근원인데, 이 소설에서 영혜에게 중요한 동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첫째 채식에 대한 집안의 거부, 둘째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남자의 만남에 대한 언니의 거부, 결국 사회와 가정이 혜영에 대한 거부, 병원의 거부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햇볕일 수 있다. (52ULF)]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신경증 거식증[(拒食症)]의 경우 십오에서 이십 펀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 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쪘다고 생각하죠. 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증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 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에요. 중증의 정신분열증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 못했습니다. 차라리 피독망상[(被毒妄想)]이 있는 경우엔 설득할 수 있지요. 보는 앞에서 의사가 같이 음식을 먹는다거나. 하지만 김영혜씨는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 자체가 불분명하고, 약도 전혀 효과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쉽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데피‥… 저희 병원에선 그걸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요. (171) [일반 병의 정도가 넘어섰다는 것인데..]
알코올 중독과 함께 경조증을 치료받는 희주씨다. 다부진 몸매, 쉰 듯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동그란 눈 때문에 귀염성 있게 보이는 여자다. 이 병원에서는 기능이 좋은 환자들에게 치매환자를 돌보게 하고 보호자로부터 용돈을 받도록 주선하는데, 영혜가 계속 식사를 거부해 거동이 불편해지자 그녀 역시 희주씨에게 신세를 져왔다. (182)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 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 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221, 마지막 문단) [누구나 마지막에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
(6:10, 52ULG)(6:15, 52ULJ)
# 참조 1: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단식광대(Ein Hungerkünstler, fr. Un champion de jeûne, 1922)」
<풍부하든 빈약하든 각각의 언어활동은 언제나 입, 혀, 이빨의 탈영토화를 함축한다. 입, 혀, 이빨은 음식물에서 자신의 일차적 영토성을 발견한다. 소리의 분절에 몰두함으로써 입, 혀, 이빨은 탈영토화된다. 따라서 먹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는 {이것이나 저것이냐 라는} 어떤 이접(離接, 선택)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먹는 것과 글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먹으면서 글쓰고, 나아가 쉽사리 먹으면서 말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지만,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우선 단어들을 음식물과 경쟁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 내용과 표현간의 이접, 말하기 특히 글쓰기는 먹지 않는 것[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카프카는 음식물에 대해, 특히 동물성의 음식물 내지 고기에 대해, 그리고 백정에 대해, 이빨에 대해, 더러운 또는 금을 씌운 이빨에 대해 항상적인 강박을 보여주고 있다.(주1) 그것은 펠리체와 카프카 사이에 있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먹지 않는 것은 또한 카프카가 쓴 글들 안에서 항상적인 주제다. 그 글들은 단식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다. 백정에 의해 감시당하는 「단식광대(Ein Hungerkünstler, fr. Un champion de jeûne, 1922)」는 자신의 이력의 마지막을 날고기를 먹는 야수 옆에서 – 이로써 관객들을 짜증나는 선택지 앞에 서게 하는데 – 마치게 된다. (51-52) (50QLB)
(주1) 카프카에게 이빨은 항상적인 주제다. 백정이었던 할아버지, 정육업에 대한 어깨 너머식 교육, 펠리체의 턱뼈, 마리엔바트에서 펠리체와 잘 때를 제외하곤 지속되었던 육식의 거부. Nouvel Observateur(72년 4월 17일)의 꾸르노(Michel Cournot, 1922–2007, [프랑스 기자 영화감독])의 글 “Toi qui as de si grandes dents”을 참조. 이는 카프카에 대한 아름다운 텍스트다. 우리는 먹는 것과 말하는 것 간의 유사한 대립을, 그리고 무의미라는 비슷한 출구를 루이스 캐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참조2:***
G.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1993.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
X. Bartleby, ou la formule
# 참조3: <한.위키>
《채식주의자》는 한강이 집필한 대한민국의 소설 작품이다. 2007년 10월 30일 창비에서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에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영어판이 포르토벨로 북스에서 출간되었다. 2016년 5월 16일에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였다. 서울을 배경으로 하여,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이 자신의 모든 존재를 지워버린 영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편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2010년에 개봉하였다.
평가
이 책은 주인공이 문자 그대로 식물로 변하는, 한강의 또 다른 단편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영감을 받았다.[1] 작가 로라 밀러(Laura Miller)는 잡지 《슬레이트》(Slate)에서 한강의 단순한 서술 스타일을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교하였다. 밀러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이 작품을 "사회적 반항"이라고 평하였다.[2] 《뉴욕 타임즈》는 이 작품은 계몽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채식주의 작품들과는 다르다고 평가하며, 이 작품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생의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케리드웬 더비(Ceridwen Dovey)의 소설 《블러드 킨》(Blood Kin), 미국의 작가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이란의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공포 소설 《눈먼 부엉이》(بوف کور,), 〈단식 예술가〉("Ein Hungerkünstler")와 같은 독일어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과 비교하였다.[3] 맨부커상 선정 위원회는 이 작품을 "불안하고 난감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 《채식주의자》는 현대 한국에 관한 소설이자 수치와 욕망,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갇힌 한 육체가 다른 갇힌 육체를 이해하려는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시도들에 관한 소설"이라고 평가하였다.[4]
1.“Han Kang's The Vegetarian wins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BBC》, 2016년 5월 16일, 2016년 5월 17일에 확인함
2. Miller, Laura (2016년 2월 2일), ““I’m Not an Animal Anymore””, 《Slate》, 2016년 5월 17일에 확인함
3. Khakpour, Porochista (2016년 2월 2일). “‘The Vegetarian,’ by Han Kang”. 《The New York Times》. 2016년 5월 18일에 확인함.
4.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쾌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