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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후(2005년 1월) 정기 인사로 인근 삼정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부임하지 마자 나는 교장선생님의 양해를 구하여 교직원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만들었다. 교감선생님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웃학교에도 공문을 보내 회원을 모집하였다. 교감선생님의 파워 때문인지 첨엔 젊은 교사들 대부분이 참여하여 인원이 제법 되었는데 2학기 때 그 교감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자 참여인원이 줄어들어 동호회는 1년간 겨우 버티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체육관이 없어서 지하 다목적실에서 매주 1회 연습을 하였다. 연습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알루미늄새시로 칸막이 공사도 하였다. 강사는 전임학교 축제 공연 때 나의 파트너가 되어주었던 그 분이 맡았다. 룸바, 자이브, 차차차를 배웠는데 한번 해본 경험이 있는지 대부분 잘 따라 하였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그 강사 분은 나에게 모던을 함께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나 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위인 그 분은 댄스스포츠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라틴은 거의 마스터 했지만 모던은 마땅한 파트너가 없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한탄을 하였다. 나 또한 라틴보다는 왈츠를 비롯한 모던댄스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부산에 있는 블랙풀 댄스스포츠학원에서 매주 2 Time 정도 강습을 받았는데 승용차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이라 표 나지 않게 배우러 다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특히 운동신경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남보다 몸이 뻣뻣한 편인데다, 더구나 평소 음악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는데 공식적으로 개인지도를 받는다고 한들 제대로 된 동작이 쉽게 나올 턱이 없었다.
학원에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 있을 제1회 블루비취컵 전한국 아마추어 댄스스포츠선수권대회에 왈츠 1종목으로 한번 출전해 보라는 원장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멋도 모르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왈츠 베이직을 하다가 1, 2, 3 기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대회용 루틴을 짜서 지도를 받았다. 스텝이야 금방외어서 따라할 수 있었지만 몸동작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는데 원장선생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며 같은 동작을 힘들게 자꾸만 반복시키니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음악에 맞추려하니 스텝이 안 되고 스텝에 신경을 쓰니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또한 스텝은 겨우 되더라도 몸동작이 따라주질 않았다. 머리, 팔, 다리, 몸통, 엉덩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레슨 중 끊임없이 외치는 원장선생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빨리 레슨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원장선생님이 지도에 열을 올리다가 나를 보고 어찌 그리 못하냐는 듯 혀를 끌끌 찰 때는 정말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비싼 돈 주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생각되어 그냥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수없이 일어났으나 배움의 과정이 그런 것을 어찌하랴? 앞으로 당신 보다 더 잘할 테니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꾹 참고 견디었다.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 신체 과학적 원리에 따라 남녀 파트너가 몸동작을 전후좌우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모던 댄스의 묘미에 감탄을 하면서도, 도대체 처음에 어떤 놈이 이렇게 어려운 동작을 만들어 내서 나를 이처럼 고생시키나 하는 생각에 원망이 되기도 하였다.
평소 안하던 운동을 해서 그런지 왈츠를 배우는 동안 무릎과 발바닥 앞부분이 아파서 파스를 바르고 다녔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경기대회에 임박해서는 음악에 맞춰 대충 왈츠 흉내를 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드디어 대회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나에겐 큰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직 아내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대회가 일요일인 관계로 아내 몰래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차라리 평일 같으면 직장에 연가를 내고 집에 안 들키고 갔다 올수도 있을 텐데 함께 교회에 가야하는 일요일이라서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공교롭게도 내가 주일오전 예배의 기도당번으로 되어있었다. 우리가족은 집 가까운 개척교회에 다녔는데 우리교회는 아직 장로가 없다보니 평신도들이 집사라는 이름으로 매주 순번을 정하여 주일 낯 예배시간에 대표기도를 하였다.
나는 신앙심이 그렇게 독실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본뜻을 벗어나는 것 같은 한국 교회의 형식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이 날 교회에 빠지는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내에겐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아내가 알면 큰일이 날 것 같은데….
수없이 고민을 하다가 편지로 고백하기로 결정하였다.
2005년 9월 4일 대회당일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이불위에 장문의 편지를 남겨놓고 살짝 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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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에게
부인! 아침에 일어나 내가 없더라도 놀라지 마시오.
나 오늘 댄스대회 출전하러갑니다. 다른 모임에 간다고 적당히 둘러 댈 수도 있었지만 내가 나쁜 짓하는 것도 아니고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해서 솔직히 고백한다오.
아마 당신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으로 생각되오. 미리 얘기를 했어도 너그러운 당신이 허락을 했을 테지만 만에 하나 말다툼이라도 있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편지를 남기고 살짝 나간다오.
나 당신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 고민 많이 했소. 망설이다가 이렇게 고백하니 이해해주기 바라오.
내가 댄스스포츠를 배우려고 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역시 건강 때문이오. 세계에서 한국인 40대 사망률이 최고 높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당신도 느꼈겠지만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일하면서 운동량이 부족함 때문인지 4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눈에 띠게 나타났소. 죽는 것이 겁나는 건 아니지만 당신과 아이들을 생각하니 건강을 지키며 좀 더 살아야 될 필요가 있어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소.
그런데 하필이면 댄스스포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신도 얼마 전에 댄스스포츠대회 구경하면서 내게 말했듯이 모던댄스로 춤추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던가요? 아름답고 재미있고, 지금 내 나이에 신체에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이 댄스스포츠라고 생각했소. 예전에 댄스하면 춤바람을 연상하며 좋지 않게 평가되었지만 댄스스포츠는 이젠 올림픽 공식종목이 될 예정이고 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될 만큼 일반화 되었소.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 몸담고 있는 공무원조직에서 나보다 능력이 못하고 경력이 낮은 사람도 먼저 승진하고 출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초연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나도 속상할 때가 많이 있소. 댄스스포츠는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적격이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처세술이 좋아 나보다 앞서나가고 출세하고 돈 잘 벌고 더 잘 살수는 있지만 이 것(댄스)만큼은 나를 따라 올 수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신체적 조건과 상당한 인내심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오직 노력과 실력으로만 우열이 나타나기 때문이오. 아마 세월이 지난 후에는 모두들 나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말하기가 참 거시기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실망 때문이오. 나는 우리 애들이 나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랐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것에 크게 실망하였소. 한때는 속상해서 남 몰래 울기도 했소.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착하고 건강하게 커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내 욕심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되오. 이제는 반성하면서 지금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오.
- 중 략-
부인!
오늘 나는 전국 아마추어 댄스스포츠경기대회 모던 댄스 왈츠 1종목에 출전한다오.
처음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내 목표는 금년 내에 왈츠, 탱고, 퀵스텝을 배우고 익혀서 내면 봄에는 대회 3종목에 출전하는 것이오. 그리고 내면 말까지 3종목 외에 폭스트롯과 비엔나왈츠를 모두 배워서 5종목까지 마스터했으면 하오. 더 나아가 이건 정말 꿈이지만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오.
부인!
미리 말 안하고 오늘 갑자기 편지를 남겨서 정말 미안하오.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는 갔다 와서 얘기하리다. 마칠 때까지 전화도 받을 수 없으니 꼭 전할 말이 있으면 메시지로 남겨주시오. 금년에는 참아주고 내년에 3종목 출전할 때부터는 당신이 함께 다니며 도와주시오. 그리고 평생교육강좌 열심히 하시오. 어느 정도 되면 앞으로 우리 둘이 루틴을 짜서 함께 운동을 합시다.
그리고 오늘 일은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우니 교인들에게는 말하지 마시오. 오늘 기도는 000집사하고 순서를 바꿨소. 내가 없다고 예배 빠지지 말고 오늘 하루 잘 부탁하오.
“미안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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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편지를 써놓고 도중에 파트너를 만나 멀리 거제에 있는 경기대회장으로 떠났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서 연습을 하였는데 아무래도 집안일이 신경이 쓰였다. 벤치에서 쉬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요란한 진동과 함께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가슴이 쿵하고 떨어졌다
"들어오지 마라, 죽여 버린다."
연속해서 몇 통의 메시지가 더 들어왔는데 내용이 아주 험악하였다.
뒷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아내가 화를 낼 줄은 알았으나 반응이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 아내에게 미리 얘기하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험한 말을 내게 해서 되겠는가? 이왕 그렇게 된 것 화가 나더라도 좀 참고 응원의 메시지나 보내줄 것이지……
어쨌거나 경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응원은 못해줄망정 이처럼 사기를 꺾어 땅바닥에 처박아버리는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우리 순서는 오후에 있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져서 연습도 잘되지 않고 점심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경기 시작 전에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로부터 메시지가 한통 날라 왔다. "사태가 조금 진정됐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경기 잘하고 오세요. 화이팅!"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마냥 철부지로만 알았던 녀석이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주니 참 대견스럽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왈츠 1종목 순서가 되었다. 아들의 메시지에 용기를 얻어 플로어에 들어섰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그동안 배우고 연습했던 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4팀이 출전했는데 1종목이라서 그런지 다른 팀보다는 우리가 좀 더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잘 나가는가 싶더니 3코너를 돌때 쯤 다른 팀하고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 뒤로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더니 어찌해야 될지 몰라 갈팡질팡하였다. 남은 음악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던지 진땀을 흘리며 음악이 끝날 때까지 동작을 멈추고 쩔쩔매다가 퇴장하고 말았다.
관중들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파트너에겐 너무 미안하였다. 파트너는 그 시기에 남편의 해외출장에 동반하여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댄스스포츠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나와 함께 대회에 출전했던 것이다.
파트너에 대한 미안함과 아울러 애써 노력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데 대한 허전함과 허무함이 물밀듯 밀려오는 가운데 분기탱천한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두려움도 함께 엄습하였다.
4팀 중 3등한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저녁식사 후 파트너와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먼저 아이들에게 메시지로 집안 분위기를 탐지하니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다는 답신을 받고 용기를 내서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그동안 내 입장을 변호하며 아내를 잘 구슬려 놓았는지 몰라도 염려했던 큰 다툼은 일어나지 않고 잠간의 냉각기와 견딜만한 바가지를 거친 다음 다시는 다른 여자와 함께 춤을 추거나 대회에 출전해서는 안 된다는 아내의 훈계를 듣고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