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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ARTIST
Chung, Eui-boo
일반적으로 풍경화라고 하면 양화를 뜻하지만 정의부의 풍경화를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는 양화에서처럼 화려한 색채화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름의 풍경화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산수화라고 말하지만,
어쨋건 발상적으로는 그것도 양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낸 그림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단지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정의부(鄭義富)의 환상과 낭만적인 풍경
박용숙 / 미술평론가
화구를 꾸려들고 산행(山行)을 하는 화가들이 우리 사회에도 많다. 일종의 필드워-크라고 해도 되겠지만 문화적으로 볼 때 이런 현상은 선진국 단계로 올라설수록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의 서구미술의 동향으로 보면 이런 현상은 비 대상(非對象)회화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해도 될 만한 것이다. 이른바 추상실험으로는 결코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를 충족해 낼 수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처럼 문명상황이 복잡해진 도시인의 삶은 자연을 희생하면서 얻은 열매이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도시만은 그 자연에 구원의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산행하는 화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이 때문에 풍경화를 그리는 법이 다양해지고 미감의 깊이도 심오해 지고 있다. 정의부 화백의 풍경화를 보면서 이런 정황을 엿보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풍경화라고 하면 양화를 뜻하지만 정의부의 풍경화를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는 양화에서처럼 화려한 색채화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름의 풍경화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산수화라고 말하지만, 어쨋건 발상적으로는 그것도 양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낸 그림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단지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나는 정의부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독특한 색채미학이나 자유로운 공간 해석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풍경화의 역사가 전적으로 인류의 낙원 콤플렉스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풍경화의 기원은 낙원사상에 있으며, 이때 낙원이라는 말은 고대 이란어의 ‘Paradise’에서 왔다. 하지만 낙원은 결코 서양미술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전소설을 통해서 동자를 거느린 신선들이 사는 불로장생의 낙원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유럽보다도 더 먼저인 12세기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낙원에 대한 시를 지었고, 그 시(桃花源記)는 사실상 송나라시대의 모든 산수화가들의 바이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대가 훨씬 뒤가 되지만 18세기 유럽 낭만주의 화가들이 자연풍경을 그리는데 심취했던 것도 낙원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미술사는 그들의 이상을 낭만주의라고 하지만 어쨋건 그것은 오랜 동안의 중세적인 금욕주의를 박차고 인간의 본성을 되찾으려는 생명운동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그와 반대가 되는 상황 속에 살면서도 그들의 낭만정신을 부러워하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욕망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 그것은 금욕주의의 반대축이지만 결과적으로 낭만이 억압당하고 있는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 숨어있는 낙원에 대한 콤플렉스는 결코 억압에 굴하지 않는 다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풍경화가 결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니라 냉동되어 있는 세균처럼 언제나 새로운 포장으로 부활되기를 기다리는 생명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클라크(K.Clark)가 풍경화를 정의하여 훌륭한 풍경화란 “자신이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게 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은 그가 인간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낙원 콤플렉스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화는 단지 바라보고 서있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거나 혹은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마술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의 화가 최북이 금상산을 그리러 갔다가 그 풍경에 심취하여 투신자살의 충동을 느꼈던 것처럼 우리는 정의부의 풍경그림 앞에서 그와 같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의 풍경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비밀은 바로 그 유혹인데 그것은 주로 색채와 공간이 우리에게 환상을 불러내게 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 유혹은 모든 사람의 명제가 아니라 사악한 것에서 벗어나 있는 복 받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해야 옳다. 그것은 일찍이 칸트가 ‘무관심’이라고 했던 그 순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칸트(I.Kant)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연이란 인간의 벗은 나체를 거대하게 확대해 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누구든 그 자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벗은 나체를 욕망의 눈이 아니라 어린애와 같은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눈으로 나체를 볼 수 있을 때 자연은 우리에게 손님(他者)이 아니라 바로 나와 하나의 몸이 된다니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이 말을 뒤집으면 거대한 자연을 축소해 놓은 것이 사람의 몸이고 풍경이므로 좋은 풍경화를 그린다는 것은 자연을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면서 객체와 주체사이의 떨어져있는 대립적인 간격을 색채라는 미묘한 소재로 해소하는 미술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시도는 이미 동양화가 오랜 세월 시도했던 것으로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단지 한 쪽이 유화로, 그리고 다른 쪽이 종이와 먹을 사용함으로써 접근하는 방식이나 기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정의부의 그림을 보면 그가 본능적으로 이런 점을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화를 통해 일찍이 산수화가 시도했던 유현(幽玄)의 미를 나름으로 원용함으로서 동양적인 미감을 실현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을 안영목(安泳穆)화백은 카타로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최근 몇 년간 그는 무채색의 시도를 많이 하였다. 자연이 가진 색채를 모두 제거하고 무채색 하나로 삽입시켜 마치 한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한국 전통 수묵화의 영향을 받아서 장르를 초월한 독특한 한국적 분위기를 일구어 내려함은 같은 동료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좋은 시도로 여겨진다.’
안 화백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부는 산수화가들이 여백과 번지기 수법을 통해 실현했던 ‘유현의 미’를 그는 유화라는 색 다른 재질을 통해 현대적으로 번역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유현성은 비록 현대인의 감각과 정서에 봉사하는 쾌감의 미학으로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어쨋건 그는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역광(逆光)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역광의 방법은 합리적인 것을 애매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환상의 세계로 몰고 가는데 매우 효과적인 것이다. 이런 효과는 당연히 그의 풍경에서 그림자의 무게를 덜어주며 풍경에서 공간의 리얼리티를 약화시켜 준다. 낙원은 현실이라는 삼차원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받은 의식 속에 존재하는 특수한 세계임을 말해 주려는 것 같다.
그림자의 제거는 서서히 그의 풍경이 평면의 세계로 접근해 감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럴 것이 평면에의 접근은 그의 환상이 침묵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며 스스로 미의 구도자가 되기를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캔버스를 뒤덮는 듯한 그레이 색조의 무채색은 침묵을 강요하는 매우 강열한 메시지다. 일찍이 오지호가 30년대에 시도했듯이 그의 무채색의 감정은 색채의 포리포니(和音)의 산물이지만, 어쨌든 그의 이 색채 미는 낙원의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시대는 사유하는 시대가 아니고 행동하고 접촉하고 느끼면서 상호 교감하는 별난 시대라는 사실이고 그의 무채색의 등장은 이런 시류와 걸 맞는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의부의 무채색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의 색채는 질감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히 질량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유산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새로운 역사는 언제나 야만적(프리미티브)인 것에 의해 새로 쓰여지게 된다. 아프리카의 원시미술이 유럽의 고전주의를 파괴하며 실험적인 것을 만들어 냈던 것도 그 하나의 예이다. 정의부의 색채에서 무겁고 강하면서도 두터운 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그가 현대회화의 노선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의 색채는 단순한 물질이나 물량주의가 아니라 낙원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전략적인 산물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메마른 현대인의 감성적인 제단에 한 가닥 단비를 선사하려는 강한 실천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업노트 / 정의부
무채색이란
색이면서도 색이 아닌 무채색을 우리는 그 가치를 소흘히 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검정색을 인상파 이론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옛날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지금도 문하생들에게 팔레트에 짜지도 못하게 가르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흰색은 모든 사물을 밝게 해주고, 그리고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검정색은 약간씩만 유채색과 혼합해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게를 더해 준다.
젊은 날 바다를 그리러 갔는데 아무래도 물이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스승격인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보니 왠지 무게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분에게 평을 해 달라고 했더니 역시 “물이 가볍구먼!”하고 한마디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물이 무거워 보이는지는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나서야 스스로 그 기법을 익힐 수 있었다.
또 한 예로 어느 학생이 산을 그렸는데 먼 산이 너무 가까워 보여 스승이 한마디 했단다. “산을 멀리 밀어 보시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산이 멀리 물러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다못해 나중에는 이젤을 뒤로 밀어 보았다고 한다. 그 산에 회색을 조금만 타면 될 것을!
우리는 무채색 단계를 대개 11단계만 알고 이를 연습한다. 그러나 좀 더 감각적인 훈련을 위해서 어느 미국 디자인학교에서는 144단계까지 훈련시킨다고 한다. 역시 감각적인 훈련이 많이 필요한가 보다!
장미 사생에서 생긴 일
현대사생회 회원 약50여명이 일산 호수공원의 장미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장미가 하도 많이 피어 구경꾼도 많고 그림 그리는 화가들도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작업복에 흙과 물감이 묻은 채 점심을 먹고 있는데 이를 보고 지나가던 어떤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
- 엄마 : “너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줄 아니?”
- 아들 : “알아. 화가들 아냐?”
- 엄마 : “그래 저 사람들 화가야! 너도 지금 열심히 공부 않으면 나중에 저렇게 돼!”
- 아들 : ???
유럽 스케치 소개
유럽순회 스케치전은 약 60 여일 동안 유럽 11개국 순회를 하면서 현지에서 직접 유화로 스케치(밑그림)한 작품 50여점을 가지고 연 전시회이다. 여행 순서는 파리 - 런던 - 파리 - 브랏셀 - 헤이그 - 암스텔담 - 쾰른 - 프랑크프르트 - 하이델베르그 - 루쩨른 - 제네바 - 짤즈부르그 - 인스부르그 - 비엔나 - 베네치아 - 밀라노 - 피렌체 - 로마 - 나폴리 - 쏘렌토 - 아테네 - 로마 - 제노바 - 모나코 - 니스 - 마르세이유 - 바르셀로나 - 마드리드 - 함브르크 - 코펜하아겐 - 파리 - 서울이다. 아래 위 모두 청바지 차림에다 캔버스, 유화, 일상여행용품에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 지도와 안내서 등을 들고 기차, 버스, 항공기를 이용하였다.
혼자서 하는 여행의 외로움과, 좀도둑의 극성으로 정상적인 루트로 현지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그림은 대체로 아침 6시경부터 10시에 마감하는 것으로 시간을 짜고, 관광객이나 좀도둑이 나오는 10시부터는 나도 관광을 하면서 내일 아침 스케치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리고 무척 많이 걸었다.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각국 말도 조금씩 배워가며 하는 여행의 재미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
봉평메밀꽃밭 사생기
봉평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단편소설로 유명하다. 소금을 뿌린 듯이 어스름한 달빛아래 펼쳐지는 메밀꽃의 여운은 지금의 봉평을 지방자치단체가 벌린 사업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란 말이 있다. 아침부터 그렇게 떠들어대던 봉평 메밀꽃 축제 덕분에 교통이 말이 아니었다.
봉평 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늘어선 자동차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한참을 길에서 보내야 했다. 역시 우리나라는 너무나 좁은, 그래서 너무나 냄비 같은 성격을 지녔나보다! 그러기에 좋다고 소문만 나면 이렇게 모여들지... 봉평을 한참 지나 미술관이 있는 곳에서 여장을 풀고 그림을 그렸다. 메밀꽃밭은 예상대로 하얀 소금을 뿌린 듯한 희멀건 넓은 밭에 원두막이 서 있는 풍경이 가히 목가적이라. 이효석의 문학이 꽃 피울 만 했다. 메밀꽃밭에 많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는다던지 꽃밭 속을 돌아다니며 노니는 모습이 사람의 동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는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이효석이 말하는 물레방앗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거라도 있었으면 비도 피할 겸 아스라한 옛날 추억이라도 더듬어 볼 텐데...돌아오는 길은 5시, 출발해서 서울 인사동에 돌아오는데 자그만치 8시간이 걸려서 이튿날 1시에 도착했다. 역시 봉평은 먼 소설속의 메밀밭이었다.
발상의 전환
한젊은 친구가 오랜 미국유학 끝에 국내전시를 한단다. 그런데 걱정이 태산이다. 왜냐하면 설치미술로서 최첨단 미술의 장르를 초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가면서 국내 우수한 청년작가로 선정되어 하는 전시가 일반 세인들의 고정관념으로 볼 때 이해가 잘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가보면 별로 볼게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주제가 sliding space 즉 공간이동이다. 따라서 기대를 가지고 온 손님들이 이해를 못하고 실망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란 것이다. 벌서 한 2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한국 음악가가 유럽여행을 갔는데 길에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비싼 입장료를 주고 들어갔다. 헌데 어느 연주가가 들어와서는 도끼를 들고 피아노를 그냥 때려 부수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입장료만 아깝다고 투덜대면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러 옛날 일이 생각나는데 그 당시 유명한 베토벤이나 쇼팽곡을 많이 들었지만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오직 피아노 부순 음악회만 생각난다는 것이다. 과연 음악이란 무엇인가? 어느 음악이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여 우리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가? 많이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화단도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이를 표현하려는 화가들의 몸부림이 치열하다. 너와 내가 누가 잘 그리느냐가 초점을 맞추지, 너와 내가 어떻게 다르냐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그림이든 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그 작가의 내면세계를 더 잘 이해하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간공포증이란!
공포증 가운데는 고소공포증, 색채공포증, 협소공포증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화가들에게는 공간공포증이란 게 있다. 넓은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어린애가 텅 빈 방을 보고 운다든지, 학년이 낮을수록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한다든지, 미개한 민족일수록 집안이나 몸에 조각이나 문신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다 공간공포증의 한 예일 것이다.
경험이나 그림이 미숙한 사람일수록 공간공포증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화면배경에도 앞의 주제를 살리기보다 뭔가 열심히 칠해서 빈 공간 없이 빡빡하게 메꾸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나도 이 공포증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한 결과 색채와 형체의 단순화였다.
모든 공간을 단순화시킬 수 있는 데까지 단순화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현장에서 그려온 그림을 그리고 다시 칠해서 다소 현장감은떨어지지만 단순화시키면서 색채의 하모니를 꾀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색채가 곱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역시 공간공포증이란 게 나에게도 남아 있는지, 아무래도 불안하여 이 공간들을 인위적으로 분할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여백을 좀 남겨 여운을 찾으려 하고, 특히 역광을 즐겨 쓰고 후면을 흐리는 수법을 썼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 개성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 번도 내 맘에 드는 작품을 만들어 보지 못했다. 이게 예술의 깊이인가 보다!
아트뉴스 > 정의부 - 자연에 대한 색채미학을 화면위에 펼쳐내
ART NEWS | 정의부 |
자연에 대한 색채미학을 화면위에 펼쳐내
자연을 작가만의 어법으로 표출해 내고 있는 서양화가 정의부씨의 13번째 개인전이 조형갤러리에서 열렸다. 특히 이번 전시는 꽃과 철새를 주제로 하는 “꽃과 새들의 노래”로 많은 이들에게 감흥을 전해주었다. 그의 예술세계는 정상의 경지에 올라있다. 그것은 자연을 표현해 내는 그 이상으로 독특한 색채미학과 공간해석이 화면위에 표출시켜 가슴속에서 이야기하는 자연의 질서를 자기어법으로 구사해 내기 때문이다.
이에 미술평론가 박용숙씨는 “그의 작품은 산수화가들이 여백과 번지기 수법을 통해 실현했던 ‘유현의 미’를 그는 유화라는 색다른 재질을 통해 현대적으로 번역해 내고 있으며, .
그의 유현성은 비록 현대인의 감각과 정서에 봉사하는 쾌감의 미학으로서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역광(逆光)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이런 효과는 그의 환상이 침묵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며 스스로 미의 구도자가 되기를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해야할 것이다”라고 피력하고 있듯이 그의 화폭 위에 나타난 자연을 향한 접근방법은 자연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먹이를 찾아 날기 시작하는 새 떼들의 날개짓을 통해 희망이 전달되고, 화사한 꽃들의 향연을 통해 평화와 행운이 정해년 새해에 각 가정에 풍성하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 편집부 -
鄭義富 I CHUNG, EUI-BOO
*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미술학 석사)
* 개인전 13회(국내 9회, 국외4회)
(일본 메이떼쓰백화점 화랑, 동경 후지이 화랑, 나고야 마쓰시마 화랑, 동경 이시가와 화랑)
* 사단법인 국제미술교육연구협회
* INSEA 세계총회 한국대표로 참가 및 미주지역, 타히티, 뉴질랜드,
아시아 각국 등 태평양 연안국 순회스케치 여행(50여개국)
* 아시아 현대미술전 국제공모전에서 아트마인드상 수상
* 한국미술협회기획위원 역임
* 구상작가 대한민국회화제 기획위원 및 운영위원
* 대한민국미술대전, 경기도 미술대전, 관악미술대전, 행주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 상향전 공모전, 신미술대전, 송파미술대전, 기타 각종 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 한국수채화협회 주최 전국공모전 심사위원
* 문교부 국정교과서 미술분야 및 전국학생 미술실기대회 심사
* 여의도고, 경복고, 경희대, 경원대에서 교편
* 아시아현대미술대전 심사 및 초대작가(동경)
* 송파미술협회 초대회장,
* 현대사생회 회장 역임
* 상형전 회원전 및 해외전
* 한국수채화협회전 및 아세아수채화 작품전 해외전 참가
* 대한민국 구상작가 회화제
* 국제 공모 아세아 현대미전
* 한국·일본 정예작가 교류전
* 독일 베를린 시 초대전
* 한국미술문화 대상전 초대 4회
* 한국 구상중진작가 32인 초대전
* 그 외 각종 초대 및 기획전 출품
현재
* 현대사생회 고문, 송파미협 고문, 한국미협, 상형전, INSEA국제회원, 아시아미술교우회 회원,
신세계문화센터 강사
http://on-canvas.com
E-mail:euiboo@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