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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 (눅 8:49~56)
우리가 힘들어할 때 달려와서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손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거칠어진 손, 힘없는 손을 “꼭” 잡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은 성도들의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어떤 눈길일까요? 바닷가에서 아침이나 저녁에 바닷물을 보면 물에 비친 태양빛 한 줄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빛줄기는 오직 나 자신만을 향해 따라다니면서 비춰줍니다. 여기가도 저기가도 계속 따라와서 비춥니다. 예수님의 눈길도 늘 성도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시골에도 도시에도 화려한 집에도 가난한 집에도 그 어디에 있어도 향합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시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는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천성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서 사랑하고 결심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시시한 사랑이 아니라 변치 않는 뼈저린 사랑을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끔찍한 저주를 당하는 줄을 훤히 아시고도 이를 자청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뼈저리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도록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 물속에 뛰어들어 바닷물을 벽처럼 만들어주셨습니다.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물을 막아주셔서 물이 침몰시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에서만 구해주실 뿐만 아니라 불에도 타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셔서 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과 신하들이 자기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분노해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한 다음에 던져 넣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붙들고 있던 사람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멀쩡했습니다. 머리카락 한 개도 불에 그을리지 않았고 겉옷도 그대로 있고 불탄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방화 처리가 잘 된 방화복을 입고 방화제를 뿌리고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불가마처럼 뜨거운 풀무불에 분명히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3장 25절입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하나님께서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드신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절에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답게 역시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구해주십니다. 뜨거운 지옥의 유황불못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구하기 위해 무모하게 뛰어드신 것입니다. 십자가라 할지라도 뛰어들어 달게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 풍랑 위를 달려와서 구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거친 풍랑을 만난 사람을 보면 피합니다. 때론 최신형 구조선이나 구조용 헬기조차도 풍랑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어 발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물불가리지 않고 찾아오셔서 구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손을 잡으러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이처럼 사랑이 듬뿍 배인 손길입니다. 그 손길로 우리의 손을 “꼭” 잡아주십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어떠하셨나요? 마찬가지로 손을 잡아주시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신명기 7장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권능의 손으로 출애굽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하늘에서 들으시고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행 7:34).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백성들의 손을 잡고 이끌어내신 것입니다(행 7:25).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백성들이 억압받고 괴롭고 힘들어 부르짖으면 달려오셔서 세파에 시달린 손을 “꼭” 잡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사랑하는 딸이 죽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슬퍼서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5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고 살려주신 예수님께서 우리 손도 잡아주시고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은 사람의 손을 잡아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죄로 인해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의 손을 잡고 부활시켜주십니다.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주라”(55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함을 주십니다(요 10:10). 죽은 사람을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풍성함까지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의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분신들인 일꾼들을 통해 잡아주십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 베드로가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기에 재산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져야 할 진짜 귀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향해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베드로가 이 말을 하면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서서 신이 나서 뛰어다녔습니다.
우리는 은과 금이 있어야 사람을 살리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은과 금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 불치병이 든 사람의 손을 잡아 주시는 예수님께서 살려주시고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외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일을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손잡아 일으켜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음의 능력으로 일으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5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나?’ 하면서 의심쩍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술 더 떴습니다. 53절을 보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리느냐? 예수님이라고 다 되느냐?”라는 식으로 비웃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던 비웃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손잡고 일으켜주십니다. 꾸지람하거나 윽박지르거나 호통을 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다가오셔서 손을 “꼭” 잡고 일으켜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절벽 위에서 떨어지다가 천만다행으로 아슬아슬하게 나무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위에 사람 없소?” 나무에 매달려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잡고 있는 손을 놓아라. 그러면 구해주겠다.” 그 사람은 중얼거렸습니다. ‘무슨 엉뚱한 말씀, 손을 놓으면 떨어져 죽는데’ 그 사람은 더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거기 다른 사람이 없소?” 시중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그래? 그러면 죽든지 살든지 네 멋대로 해라”고 하시면서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해서 “휙” 돌아서서 가버리셨을까요?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도 살려주시는 예수님께서 그냥 가실 리가 없습니다. 떨어져 죽지 않도록 예수님의 도움을 뿌리친 그 손조차도 잡아주십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배울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있는데 손가락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인간을 똑바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손가락은 하나님이 아니라 땅 쪽을 향해 힘없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길을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외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못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역시 우리 손을 “꼭” 잡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뿌리친 손,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섬기지 못한 손일지라도 붙잡아 주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급하게 달려오는 자동차에 아이가 부딪치기 직전에 놓였습니다. 그럴 때 “이 녀석아! 차가 오는 것을 잘 보고 건너야지!”라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얼른 가서 손을 붙잡고 잡아당겨서 치이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 할지라도 이처럼 손잡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기분 나쁘다고 손을 뿌리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기분에 따라 손을 잡기도 하고 놓기도 합니다. 개인, 정당, 단체, 나라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손목을 굳게 잡고 천국에까지 데려다 주십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붙잡아주지 못해도 예수님은 잡아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잡아주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일은 참 귀합니다. 많이 잡고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잡아줄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 까지 들어가도록 잡아주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끝까지 잡아주지 못합니다. 기분에 따라 잡기도하고 놓기도 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잡아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끝까지 붙잡지 못합니다. 나를 붙잡고 지탱해줄 것 같았던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권세도 나를 잡아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붙들고 놓치지 않고 붙잡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손입니다. 손을 대셔서 나병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불치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눅 5:12~13).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의 관에도 손을 대시고 다시 살려주셨습니다(눅 7:11~16). 자신을 잡으러온 말고의 귀를 손으로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눅 22:47~51). 무엇보다 천국에 이르도록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아 주십니다. 생명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붙잡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잘 대해주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그 누구든 살려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어디든 어느 사람에게든 찾아갑니다. 2천 년 전에 사랑의 손길로 만백성을 구원해 주시러 오신 예수님께서 그 손길로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앙 생활해 올 수 있었고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작은 일 같아보여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작은 일 같아보여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 손을 잡아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칠어진 손, 나약해진 나의 손을 “꼭” 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손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힘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