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서오능중 明陵의 유래.
朝鮮 19대 왕인 숙종대왕(肅宗大王)과 한 처사(處士)의 이야기다
조선(朝鮮)의 제19代 임금 숙종대왕(肅宗大王)(1661.9.8~ 1720.7.30)은
성은 이(李), 휘는 순(焞),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보다.
1674년 음력 8월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19代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총명하고 속깊은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다.
어려서 부터 영특한 지모와 카리스마적인 성격으로 남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을 잠재웠으며
항상 왕으로서의 권위를 잃지않고 남다른 애정으로
그 유명한 희빈 장씨 장옥정과 희대의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고자 내관 한사람과 무장 한사람만을 데리고 민정시찰을 자주 하였다.
어느날 숙종임금이 멀리 수원성 가까이 말을타고 민정시찰을 나갔는데,
흐르는 냇가(지금 水原川 附近)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두고 슬피 울면서 냇가의 땅을 파고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상을 당하여 묘를 쓰는것은 흔한 일이지만,
묘라는 것은 산에 쓰는 것이지 파는 족족 물이 솟아나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이 괴히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이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안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나 곡절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이보게~ 총각!!
여기 있는 이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이 들어있는 관입니다"
"그런데 왜 물이나는 냇가를 파고 있는고?"
"이곳에다 묘를 쓰려고 하는데요? ..."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었다.
"이보게~ 젊은이!!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이곳에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에 어머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葛處士)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리고 와서는 냇가 이자리에 꼭 어머니 묘를 쓰라고 일러 주었지요.
그 분은 워낙 유명한 지관인지라 아무소리 못하고 알았다고 했어요"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큰 갓을 쓴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이야기를 듣고난 숙종이 가만히 생각하니 갈처사(葛處士) 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 갈처사 라는 지관이 사는곳을 아는가? " 하고 물으니
"저기 저 언덕위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라고 하는것이 아닌가.
숙종 임금은 궁리 끝에 지니고 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번 당황하였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 이었다.
총각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급한 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임금이 써준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御命)!!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 모친 묘를 쓸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였다.
수원부는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추상같은 어명이 떨어 졌으니,
허름한 시골 총각을 위해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끌어내어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 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그지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肅宗)은 총각이 수원부(水原府)로 떠난뒤 갈처사를 단단히 혼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숙종이 산마루에 올라가니 그곳에는 다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이 있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에 초막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낙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 행색이었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는지라,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 서서 물었다.
"나는 한양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인가?"
"그렇소만 ~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는게요?"
"오늘 아침 저 아래 모친상을 당한 총각한테 냇가에 묘를 쓰라했는가?"
"그렇소! 그런데 그게 뭐 잘못 되었소?"
"듣자하니 당신이 묘자리를 좀 본다는 지관이라 하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 했다니 그게 어디 당키나 한 일인가? 아직 장가도 못간 어진 총각한테 골탕을 먹여도 유분수이지, 모친상을 당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고 있는 총각한테 그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는 천인공노할 죄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숙종(肅宗)의 참았던 감정이 어느새 격해저 목소리가 커졌다.
그랬더니 갈씨 또한 촌노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 ~이~ 보시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 참견을?
당신이 그 묘자리가 얼마나 좋은 명당인지 알기나 하고 떠드는거요?"
그러면서 숙종보다 더 크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숙종은 더욱 화가나고 기가 막혔다.
(속으로는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 어디 잠시더 두고보자 하면서 감정을 억 눌렀다.)
"그래요? 물이 쏫아져 나오는 냇가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그러자 갈처사는 의기양양하여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할것이지 ~ 그곳은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삼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옮겨가는 묘자리야 !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 있을것이지!! 허허 ~ 이거 참 ~~ "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의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삼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자리를 잡아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당황하며 자신도 모르게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하는생각이 들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지만 모른체 당혹감을 감추면서, "그렇다면 그렇게 모든일을 훤히 내다보는 지관이 어찌하여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허허 ~ 이 양반아 ~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이나 있을 것이지~ 귀찮게 따지고 들어?" "뭐요? 따지고 들다니? "
아무리 기세좋은 숙종이라도 갈처사의 당당한 모습에 서서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 선비양반 ! 저 아래 부자로 사는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하는 것들인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래도 이집은 지금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아무리 기세좋은 숙종(肅宗)이라도 갈처사의 당당한 모습에 서서히 주눅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보시오 ~ 선비양반 !!
저 아래 부자로 사는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하는 것들인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래도 이집은 지금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움막이지만, 나라 상감이 찾아올 자리라오!
이 초라한 움막이 나랏님이 찾아올 천하에 명당자리란 말이요!"
숙종은 그만 아연실색하여 정신을 잃을뻔 했다.
이런 신통(神通)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것 같았다.
"허허 ~ 그렇다면 한가지 더 묻겠는데 나랏님(王)이 언제 찾아올 터요?"
"거 ~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그럼 잠시 기다려 보시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때 날을 받아놓은 것이 있으니,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한쪽 찌그러진 괘짝속에서 보자기를 꺼내 종이 한장을 꺼내어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하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와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그 시간이었다. 갈처사는 바로 문앞에 있는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상감마마 ~ 소인이 상감마마를 몰라보고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 "
"여보시오.... 갈처사(葛處士) ! 괜찮소이다. 대신 이 상황을 그 누구에게도 결코 발설하지 마시오"
"네 알겠나이다 상감마마!"
"그리고 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은 뒤에 뭍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아니 되옵니다. 소인처럼 미천한 자가 어찌 하늘같은 상감마마의 유택 자리를 잡겠읍니까?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아니오 !! 내 일찌기 갈처사 같은 명 지관을 본적이 없으니, 내 청을 들어 주시오!!"
"아니 되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허허 나는 그대와 같은 명지관이 잡아준 자리에 묻히고 싶소.
더 이상 사양말고 내 청을 들어 주시오!"
"하오면 상감마마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된 자로서 영면하실 자리를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하늘과 같은 상감마마의 하명이신데 어찌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는 숙종이 죽은뒤 묻힐 왕능자리를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오능(西五陵)중에 "명능(明陵)"이 바로 그자리라 한다.
명능(明陵)은 서오능(西五陵) 중에서도 가장 명당 자리로 정평이 나 있다.
서오릉(西五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군이다.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말하며, 그밖에 순창원과 수경원 그리고 장희빈의 "대빈묘"도 함께 있다.
경능(敬陵)은 조선 추존왕 덕종(德宗)과 정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창릉(昌陵)은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의 능이다.
익릉(翼陵)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능이다.
명릉(明陵)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肅宗)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능이 있다.
홍릉(弘陵)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의 능이다.
순창원(順昌園)은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회빈 윤씨의 묘이다.
수경원(綏慶園)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묘인데, 원래 경기도 고양군의 옛 연희궁 자리(현재의 서울특별시 신촌동)에 위치하였으나, 1968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대빈묘(大嬪墓)는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묘이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위치하였으나,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참고로 서오능에 있는 명능(明陵)에는 숙종대왕과 인현왕후의 쌍능이 있으며, 인원왕후는 별도로 혼자 쌍능 왼쪽에 예장돼 있고 사랑에 살고 사랑에죽은 장옥정묘는 "대빈묘"라 하여 숙종대왕능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장옥정은 한때는 중전자리에 올랐지만 폐서인되어 사사 되었기에 능(陵)이라 하지않고,
묘(墓)라 한다.
아무튼, 갈처사는 궁에 들어가 숙종대왕이 살아생전에 능 자리를 잡았는데, 숙종대왕(肅宗大王)은 고마움의 뜻으로 갈처사(葛處士)에게 삼천량을 하사 했으나, 노자로 삼십량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끝으로, 갈처사가 홀연히 떠난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시가 전해오고 있다.
신묘 하도다 갈 처사여 ~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 넉넉하시고 한가한 날 운동삼아
西五陵 탐방이라도 하시게 되시면 야담같은 이야기를 되살려 기억하시고 백성과 함께하려했던 조선의 임금과 무지렁이 村夫인 葛處士의 행위를 되돌아 보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