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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북중학교 ‘동네한바퀴’ 문화유산답사
◎일시 : 2015년 11월 14일 (토) 오전 9시~12시
◎대상 : 청북중학교 학생
◎일정 : 청북중학교 → 청북면사무소 이용익선정비 및 신포 → 삼계1리 옹포 공출창고 → 고잔3리 보한재 신숙주 유적 → 율북1, 2리 산신당 및 마을유적 → 한산3리 너더리장터 → 청북중학교 (시간에 따라 일정을 조정할 수 있음)
◎답사자료
①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
가. 왜 하필 옹포(甕浦)였을까?
옹포는 우리 말로 ‘독개다. 이 같은 지명은 전국적으로도 흔하지 않다. 제주도 한림읍의 옹포가 그 중 유명하고 파주 문산포의 독개, 충남 당진의 삽교천 변에 있었던 독개가 뒤를 잇는다. 옹포라는 지명은 통상 옹기배가 드나들던 포구에 붙여질 때가 많다. 평택지역에도 옹포가 있다. 청북면 삼계1리 옹포마을이 그곳이다.
삼계리는 이름처럼 물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던 마을이다. 발안천을 따라 들어온 남양만의 바닷물은 갯골을 따라 청북면 고잔리, 삼계리를 거쳐 현곡리 신포와 건의마을까지 올라갔고 하천 변에는 고잔포, 옹포, 신포와 같은 포구들이 발달했다. 현곡리의 여러 포구들 가운데 중심은 단연 옹포였다. 옹포의 다른 이름은 ‘저포(苧浦)’다. 저포라는 지명은 김정호의 청구도에도 나온다. 여기에서 저(苧)는 모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모시가 반출되던 포구라는 뜻이다. 이 같은 지명이 유래되려면 최소한 옹포 일대에서 옹기를 많이 구웠거나 모시생산이 많았어야 한다. 기억은 아련하지만 그 단서는 몇몇 사료와 주민들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다. 화성시사에도 청북면과 인접한 화성시 장안면과 양감면 일대에서 옹기생산이 많았다고 말하며, 장안면 일대 주민들도 해방 전후 장안면과 청북면 일대에서 모시길쌈을 상시적으로 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교통체계를 감안할 때 이들 생산물이 옹포를 통해 거래되고 반출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통상 옹포라면 좁게는 삼계1리 옹포 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현곡2리 신포, 토진2리 토진(톷나루)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조선후기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다시 말해서 고을의 세곡을 한양의 경창으로 실어 날랐던 포구였다. 양성현이 고을의 읍치에서 60여리(현재거리로 80리)나 떨어진 곳에 조창을 두었던 것은 언뜻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시대 옹포 일대가 특수행정구역이었던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특수행정구역을 일반행정구역으로 개편할 때 자급능력을 고려하여 여러 고을에 분배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만한 조처다. 조선후기 옹포 일대에는 옹포와 신포에 도합 4개의 창고가 있었다. 양성군읍지(1899)에 따르면 4개 창고에서 관리했던 세곡은 벼와 쌀, 보리를 포함하여 16,989석이나 되었다.
나. 양성현의 해창으로 포구상업이 발달
바닷물의 존재는 민중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바닷물은 민물과 달라서 농경에 어려움을 주는 대신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고 어업과 수산업, 제염업, 포구상업을 발달시키는 이점이 있다. 남양만에서 발안천 수로를 따라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옹포와 신포에는 어업과 제염업, 포구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19세기 말에 작성된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도 경우궁에서 선세(船稅), 어세(漁稅), 포면세 등을 징수했고, 옹포의 거래품목으로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민어, 미역, 대합, 김과 같은 해산물 그리고 쌀, 소금, 소가죽, 백목과 같은 품목을 언급하고 있어 거래량과 종류를 짐작할 수 있다. 조운이나 어업과 함께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면서 포구에는 객주(客主)와 여각(旅閣)도 생겼다. 1896년 궁내부대신 이재순이 양성군수에게 보낸 훈령(訓令)에 ‘옹포의 경우궁 소관 포구에서 내부 훈령을 빙자하여 객주를 설치한 신순필을 엄벌’하라는 내용에서도 객주의 존재를 알게 한다.
조선 말기 포구의 물상객주들을 중심으로 조운과 어물, 소금, 옹기, 모시같은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던 옹포는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였다. 거래량이 많다 보니 포구에서 거둬들인 조세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후기 포면세나 어세, 선세는 궁실의 수입이어서 국가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청북면사무소 마당에는 양성현감 이용익의 선정비가 있다. 이용익(1854~1907)은 함경도 출신의 상인으로 이재(理財)에 밝아 ‘고종의 사금고’ 역할을 했던 왕실의 최측근이었다. 이런 인물을 양성현감에 임명한 것은 왕실의 주 수입원 가운데 하나였던 옹포의 조세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다. 근․현대의 간척으로 포구가 닫혀
옹포의 전성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갑오개혁 때 조세가 금납화하면서 조창으로의 기능이 중단되더니, 근대 이후에는 육로를 중심으로 교통체계가 재편되면서 포구상업도 시들해졌다. 일제강점기 장시(場市) 규모가 컸던 안중장과 발안장을 연결하는 국도39호선이 옹포를 비껴간 것도 사정을 더욱 어렵게 했다. 국도39호선이 건설되면서 옹포보다 못했던 신포가 크게 성장했다. 1931년(소화6년) 평택지역에서 두 번째 콘크리트 교량으로 ‘현곡교’가 건설될 쯤에는 다리를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되었고 신포장도 개장하였다. 청북면사무소와 소방서, 우체국, 청북초등학교같은 공공시설도 신포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해방 후에는 대중교통도 신포를 지났고 농협과 양조장, 구멍가게, 중국집, 식당들도 신포 시가지에 상점을 열었다. 명실 공히 현곡리가 청북면의 중심이 된 것이다.
간척은 옹포의 쇠락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고잔5리 신권식(1928년생)씨는 옹포 일대가 간척되기 시작한 것은 1922년경부터라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야판과 좌판이라는 일본인들이 삼덕초등학교 앞과 옥길리 장살미산 사이에 장둑을 쌓고 간척을 시작하였다. 장둑에 들어간 석재는 장살미산을 허물어 사용했다. 간척농지는 나중에 동양척식(주)에게 넘어가서 동척농장들이 되었다. 동척농장은 사무실을 화성시 장안면에 두고 삼덕초등학교 자리에는 농장사무실과 창고를 짓고는 농장을 운영했다. 동척농장들이 간척되고 마을 앞 포구가 사라지면서 어업에만 종사했던 옹포마을 주민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고 신포처럼 농업과 상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어서 사정이 더욱 어려웠다. 일부 주민들은 동척농장의 소작농이 되었다. 하지만 어업을 놓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장둑 아래에 배를 대고 어업을 계속했다. 남양만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당도하면 포구에는 객주를 대신하여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이 함지박을 이고 몰려들었다. 때론 3일과 8일에 개장했던 신포장에서 거래되었으며 팔다 남은 생선은 건어포로 말려 반출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뒤 피난민 정착사업의 일환으로 옥길리, 고잔리 앞 간사지들과 연백사업장들이 간척되더니, 1960년대부터는 제일교포 방덕환씨가 장둑 아래 간석지를 개간하면서 옹포의 기능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1974년 남양만 방조제가 준공되면서 완전한 농촌마을이 되었다.
일제 말 장둑 아래 뱃터는 공출미를 반출하는 포구로도 쓰였다. 주민들은 벼 2백석을 실을 수 있는 왜선들이 장둑 아래에 배를 대고 공출미를 실어갔다고 했다. 공출미를 반출하면서 삼계초등학교 옆에는 주막도 세 집이나 자리 잡았고 주막 옆에는 공출미를 저장하는 평택군곡물 창고도 지어졌다. 창고는 당시에는 귀했던 슬레이트로만 지었다. 건축면적도 상당해서 많은 양의 미곡을 저장할 수가 있었다. 공출창고는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되어 평택경찰서 소유로 넘어갔다가 나중에 안중단위농협으로 이관되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②보한재 신숙주 유적
삼덕초등학교와 성골을 지나 고개 넘어 고잔 3리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원고잔 마을로 ‘도마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맞배지붕으로 잘 지어진 고잔묘가 보인다. 고잔묘는 1850년 건립되었으며 신숙주와 신항, 신의를 모신 사당이다. 신숙주는 세종에서 세조, 성종에 이르는 시기의 학자이며 명재상이다. 신항은 신숙주(叔舟)의 증손으로 예조참판 종호(從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창군 강(玒)의 딸이다. 14세에 성종의 제 1녀 혜숙옹주(蕙淑翁主)를 아내로 맞아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오르고 고원위에 봉해졌다. 신의는 신숙주의 5세손이고 위사공신(衛社功臣) 목사 수경(秀涇)의 아들이다. 12세에 중종의 제 4녀 경현공주(敬顯公主)와 결혼하여 숭록대부에 오르고 영천위(靈川尉)에 봉해졌다.
신숙주는 1417년(태종 17)에 태어났다. 자는 범옹(泛翁)이고,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태종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살았으며, 조선 초기 통치체제의 확립과 대외관계의 정비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일찍이 윤회(尹淮)의 문하에서 배우고, 그 손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의 부친인 신장(申檣)은 공조참판, 대제학에까지 오른 세종 대의 명신이었는데, 신숙주가 17세 때 별세했다. 1438년(세종 20) 22세에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치르는 최초의 진사시에서 장원을 한 신숙주는,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에 문과에 3등으로 합격하여 전농시 직장(直長)이 되고,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3년 통신사 서장관으로 약 8개월간 일본에 다녀왔다.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통신사 서장관에 임명되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문장력 때문이었다. 사행(使行)을 통해 그는 먼 일본에까지 문명을 날렸고, 대마도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는 데 참가하여 외교적 식견을 넓혔다.
신숙주는 언어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가졌는데, 중국어와 일본어를 비롯하여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뛰어난 학문적 자질과 언어에 능통했던 사실 때문에 세종대왕이 주도한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하여 공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려 요동을 10여 차례나 내왕 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여 신숙주에게 희현당(希賢堂)이라는 당호를 주기도 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1446년 9월 『훈민정음해례본』을 완료하였다.
1447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고, 1451년(문종 1) 사헌부 장령·집의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1453년(단종 1)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일찍이 밀모에 참여한 공으로 수충협책정난공신 1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고령군에 봉하여졌다. 이어 주문사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노비·안마·의복을 함께 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방면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는데 그는 강경론을 펴 1460년과 1461년 2차례에 걸쳐 군사를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북쪽 변경을 개척했다. 신숙주는 여진 정벌에 관해 『북정록(北征錄)』을 남겼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하자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으로 서무를 참결하고, 같은 해 이른바 남이의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하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산정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역서를 편찬하였으며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 사선내왕의 절차 등을 모두 기록하였다.
해동제국기는 순수한 ‘일본견문록’이라기 보다는 일본을 이해하고 일본에 대응해가는 외교 실무를 위한 하나의 지침서였다. 그래서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대일 외교관계에서 항상 전례(典例)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일을 논의할 때마다 신숙주를 거론했는데, 영의정이던 한명회는 “지금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자 함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정몽주나 신숙주와 같은 인물을 택하여 파견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우의정인 홍윤성은 “일본에 관한 일을 갖추어 익숙히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신숙주 한 사람뿐이다. 이제 이미 서거하였으니 만일 그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나라 산천의 형세나 습속을 누가 알아 대처할 것인가”라고 했다.
신숙주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왕을 보좌하고, 30여 년 동안 학자, 정치가, 외교가, 시인, 군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75년(성종 6)에 5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저서로는 『보한재집』이 전한다. 신숙주의 사당에는 성종의 부마인 신항(申沆, 1477∼1507), 중종의 부마인 신의(申檥, 1530∼1584) 등 3위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묘소는 양주 송산리(의정부시 고산동)에 있다.
③율뷱1, 2리
율북1리 밤뒤는 옛 율북면 소재지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율북면이었다가, 갑오개혁과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수원군 수북면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청북면에 통합되었다. 마을규모는 일제강점기에는 120여 호였고, 지금은 50여 호 150여 명이 거주한다. 마을 안에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살지만 예로부터 김씨, 이씨. 박씨가 대성(大姓)이다. 밤뒤의 다른 이름은 맹골이다. 그래서 마을 입구 도정공장에서 생산되는 쌀의 이름도 ‘맹골쌀’이다.
율북2리는 안골이다. 안골은 안말, 내촌으로도 불린다. 주민들은 안골이 율북리의 본 마을이었다고 했다. 호(戶)는 20여 호로 작지만 아늑하고 포실하다. 이 마을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밤뒤와 같은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분동되었는데 아직도 마을끼리의 우애가 돈독하다.
율북리는 대한제국 시기 수원군 수북면의 중심마을로 일제강점기에는 근대교육이 크게 발달했다. 율북리에 근대교육의 깃발을 든 인물은 마을의 대지주 양재근이다. 양재근은 1923년 2월 율북리 밤뒤에 일신강습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에는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보통과를 가르쳤다. 1년 뒤인 1924년 6월부터는 마을 강습소로는 드물게 고등과를 신설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함께 가르치게 되었다. 하지만 1927년 4월 동아일보의 ‘진위군 상황’에 보도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그전에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에는 밤뒤마을 뒤에 율북강습소가 설립되었다. 학교를 설립한 인물은 양창석과 박필훈이다. 율북리강습소는 초가집으로 지어진 교실 5칸과 작은 운동장이 있는 제법 규모 있는 교육시설이었다. 학제(學制)도 해방 전후에 6년제였고 초등학교가 없는 주변마을 어린이들이 모두 입학했기 때문에 규모가 컸다. 폐교 당시 교사는 김동기씨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있었다. 강습소는 1946년 박상희에 의해 어연1리로 옮겨갔고 어연초등학교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율북1리 밤뒤와 2리 안골의 산신제는 매 년 정월 열흘날에 거행했다. 당숲은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졌고 숲 중앙에 가로 50센티, 세로 30센티쯤 되는 작은 당집이 있다. 제물은 소머리를 올렸다. 당제는 옛날에는 밤 12시에 지냈지만 지금은 어두워지면 지낸다.
④한산3리 너더리 장터
한산3리 너더리(판교)는 돌모루길과, 청북면 현곡리에서 건의, 구설창을 지나온 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서평택에서 한양으로 가는 모든 길은 이곳에서 만나 수원방향으로 올라갔다. 너더리는 길목이 크다보니 행인들의 발길이 잦았고 장시(場市)와 주막도 컸다. 너더리주막의 주인은 조씨였다. 그래서 통상 ‘조서방네 주막’이라고 불렀다. 조서방네 주막은 한 때 ‘조 선달(先達) 댁’으로 높여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연은 이러하다. ‘조선 후기 남행하던 임금이 너더리주막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큰 경사를 맞게 된 조서방은 동분서주하며 소 10마리를 잡아서 임금과 신하, 궁인들을 푸짐하게 먹였다. 이에 감복한 임금은 조서방의 노고에 감사하여 선달(先達) 벼슬을 내렸다.’ 임금의 은혜를 입은 뒤 너더리 조서방네는 ‘텔레비전’에 보도된 유명 식당처럼 근동에서 유명한 주막이 되었다. 선달벼슬은 얻은 조서방에 대한 대우도 깍듯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현재 너더리주막집의 주인은 조영O씨 부부다. 조영O(2014. 64세)씨는 너더리 조서방의 증손녀다. 조씨는 주막집에서 태어나 포승읍 내기리로 시집을 갔다. 그의 어린 시절 너더리장은 폐장(廢場) 상태였다. 당시 너더리주막은 국밥은 팔지 않았고 돌모루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잡화와 술만 팔았다. 또 가게 한쪽에서는 한복을 염색하는 염색약도 팔았다. 염색약장사는 매우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외할머니는 하루 종일 벌어들인 돈을 항아리에 담아 벽장 구석에 쌓아 두곤 하였다. 조영O씨에 따르면 주막집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조부께서 물려받았다가 나중에는 외할머니가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주막의 규모는 사립문이 있는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려있는 초가삼간 규모였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을 하며 슬레이트를 올렸고, 20여 년 전 안중에 살던 조씨 부부가 돌아와 2층 양옥으로 다시 지었다. 해방 이후 기능은 크게 바뀌었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주막은 동네 사람들의 마실방 구실을 하였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조서방네서 다리쉼을 하며 간단히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상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