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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지식 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년 4월 5일 -1989년 7월 16일)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휘자이자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넘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35년이나 이끌어왔는데 그는 항상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판매한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약 200만장이 판매됨.)
가족사와 그의 일생: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잘츠부르그 상류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라얀 가족은 아로마니안 혹은 그리스 계 혈통이며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이주해왔다고 전해진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 게오르그 요하네스 카라야니스(Georg Johannes Karajanis)는 현재 그리스 서부 마케도니아 지방인 루멜리아의 오토만 지역의 코자니란 곳에서 태어나서, 1767년 비엔나로 떠나다 켐니츠 삭소니에 정착하였다. 게오르그와 그의 형제는 삭소니의 의류 산업 건설에 참여하였고 두 사람은 1792년 6월 1일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3세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게 되어 그들의 이름에 'von(영어로 from의 의미)'이란 접두사가 붙게 된다. 그리고 '카라야니스'란 성은 '카라얀'으로 바뀌게 된다.
<카라얀의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 오스트리아 국립보건국장을 지낸 유명한 의사였다.>
<카라얀의 어머니 마르타 폰 카라얀, 슬로베니아 사람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형 볼프강, 공학을 공부했고 독자적인 공학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성공했으며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아내와 함께 오르간 협주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초기 활동
지휘자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에서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Heribert Ritter von Karahan)이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피아노 신동이었는데, 1916년에서 1926년까지 잘츠부르그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를 하였고 거기서 지휘자 길로 들어서도록 은사로부터 조언을 듣게 된다.
<카라얀이 처음 지휘를 한 모짜르테움 대강당>
1929년 잘츠부르그의 페스츠피엘하우스에서 '살로메'를 지휘했고 1929년에서 1934년까지 우름 시립극장에서 처음으로 '카펠마이스터(연습지휘자)'로 일하게 된다. 1933년 카라얀은 잘츠부르그 페스티발에서 막스 라인하르트가 연출한 연극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 장면에서 음악 지휘를 맡아 처음 데뷔를 한다. 그 다음해 마찬가지 잘츠부르그에서 처음으로 빈 필하모닉을 지휘했고, 1934년에서 1941년까지 아헨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와 교향곡을 지휘하였다.
<중장년기의 카라얀, 독특한 헤어스타일이 눈에 띈다^^.>
1935년 3월 카라얀은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같은 해 그는 독일에서 최연소로(당시 나이 27세) 음악총감독이 되었고 부카레스트, 브뤼셀, 스톡홀름, 암스테르담, 파리에 객원지휘자로 초대받게 된다. 거기에다 1937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과 만나 처음으로 오페라 피델리오(베토벤 작곡)를 지휘하였다. 카라얀은 국립 오페라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38년 당시 한 음악평론가는 "카라얀 기적"이라고 언급하며 까다로운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성공적 공연이 그로 하여금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 지휘자였던 푸르트뱅글러, 데 사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해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사와 계약을 맺어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마술피리'를 지휘하여 처음 음반을 냈고 이후 수많은 음반들을 냈다.
1939년 6월에 카라얀은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를 지휘했는데 비니프레드 바그너란 이의 말에 따르면 카라얀이 악보없이 지휘하다 헤매는 바람에 가수들의 노래가 멈췄고 커튼이 잘못 내려져 히틀러가 그다지 공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말에 따르면 히틀러는 카라얀을 매년 바이로이트 지역 축제에서 다시는 지휘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내렸다. 그러나 헤르만 괴링(나치당 초기멤버, 게슈타포 창설자)이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의 지휘자로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고 이후 총 150회의 오페라를 지휘하게 된다. (1941-1945)
<카라얀이 정식으로 지휘자로서 데뷔 공연을 한 우름 시립극장; 여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942년 11월 22일 전쟁이 절정에 이를 무렵 카라얀은 아니타 구터만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유명한 재봉틀 부호의 딸로 유대인 할아버지를 두었는데 다시 말하자면 '4분의 1 유대인'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후 나치당은 그녀를 5명의 "영예로운 아리안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경에 카라얀은 -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 나치 지도자들의 신망을 잃었다고 했지만 1945년 2월 18일 전쟁 중인 베를린에서 계속 지휘를 하고 있었고 잠시 후에 아니타와 함께 독일을 떠나 이태리 밀란으로 도피했다. 아니타와는 1958년에 이혼을 한다.
카라얀은 오스트리아의 비나치화 위원회에 의해 1946년 3월 18일 추방되다, 잠시 뒤에 복귀한다.
<카라얀은 프랑스의 미녀 모델 엘리에트 무레와 세번째 결혼하여 두 딸을 얻었다. 첫 결혼은 아헨에서 11살 연상인 오페라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했고, 두 번째 결혼은 9살 연하의 4분의 1 유대인인 이혼녀 아니터 구트만과 하였다.>
-전후 활동
1946년 카라얀은 빈에서 빈 필하모닉과 함께 전후 첫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치 경력 때문에 소련 점령당국에 의해 더 이상의 활동은 금지당했다. 그해 여름 그는 무명으로 잘츠부르그 페스티발에 참가하고 그 다음 해 공식적으로 지휘활동을 재개하도록 허락받는다.
1948년 카라얀은 빈의 음악인 동호회의 예술 감독이 되었고 밀란의 라 스칼라에서 지휘를 맡았다. 밀란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이 시기 그의 가장 주목받는 활동은 새로 창단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음반 작업을 하면서 런던 필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향악단 가운데 하나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 해부터 그는 평생동안 루체른 페스티발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1941년 파리에서 여가수 제르맹 루빈을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 카라얀>
1951년, 52년에는 다시 바이로이트 페스츠피엘하우스에서 지휘를 하였다.
1955년,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1957부터 1964년까지 빈 국립 오페라단의 예술 감독으로 재직한다. 빈 필하모닉과 잘츠부르그 축제에 긴밀하게 관여하면서 부활절 음악제를 처음 시작했는데 이후 그가 사임한 뒤에도 부활절 축제는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들과 계속적인 연계가 되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휘하고 음반을 출시해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카라얀의 말년에는 클라리넷 주자 사빈 마이어 합류를 두고 카라얀과 베를린 필과의 갈등이 심해져 결국 빈 필하모닉 지휘를 하며 여생을 마쳤다.
카라얀과 오디오CD:
카라얀은 오리지날 디지탈 오디오 CD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새로운 재생 기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기도 하고 처음 오디오 CD를 소개하는 기자회견에 동석하기도 하였다. 초기 CD의 원형은 60분까지 재생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재생시간이 74분으로 확장된 것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미디어에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가끔 제기되는데 CD포맷을 공동으로 창안한 키이즈 이밍크(Kees Immink)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카라얀 음악의 특징: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오케스트라로부터 아름다운 소리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카라얀의 음악이 적용되는 더욱 많은 음악적 아름다움에 관해 의견이 다양하다. 미국 평론가 하비 삭스는 다음과 같이 카라얀을 평가한다:
카라얀은 다목적이면서도 매우 세련되고 잘 꾸며진, 계산적이면서도 육감적인 소리를 골라 그 스스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스타일을 더해 바흐와 푸치니, 모차르트와 말러, 베토벤과 바그너, 슈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적용하였다..... 그의 많은 공연이 토스카니니나 푸르트뱅글러 등 다른 지휘자들이 갖지 못한 미리 짜여진 듯 하면서 인위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다..... 카라얀의 레코드 대부분은 과장될 정도로 정련되어 있어, 일종의 레니 리펜슈탈(나치 선전영화를 만든 기록영화 및 사진촬영의 대가, 우수한 편집능력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 영화의 깔끔한 진행처리 등으로 주목을 받았다.)의 영화 및 사진작품을 음악으로 바꾸어놓은 것 같다.
그러나 평론가 짐 스베이다와 다른 이들은 카라얀의 1970년대 이전 방식이 이후 평가되어진 것만큼 계획적이고 세련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반박하고 있다.
<새로운 매체(오디오CD, 비디오테이프)가 등장할 때마다 카라얀은 자신의 음악을 녹음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현대 고전음악작곡가들의 작품을 거의 독점적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상업주의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펭귄 가이드(1960년대 최초로 음반 안내책자로 발간된 이후 매년마다 한 번씩 발간되는 음반 안내지로 영국의 유명 출판사 펭귄북스社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가이드 잡지)에 실린 두 가지 평가는 그 점을 묘사하기 위해 인용될 수 있다.
바그너의 전형적인 낭만주의 작품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레코드에 대해서 펭귄의 저술가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카라얀의 바그너 지휘는 육감적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으로부터 훌륭할 정도로 세련된 연주와 애무하는 듯 아름다운 선율을 이끌어냈다.” 카라얀의 음반은 1999년 펭귄 음반 가이드의 1586페이지와 1587페이지에 최고 음반으로 꼽혔다.
그러나 카라얀이 지휘한 하이든의 ‘파리 교향곡’에 대해서 똑같은 펭귄 저술가들은 다소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말 그대로 빅 밴드(오케스트라 형태를 갖춘 재즈 연주단) 하이든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자체는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위기가 고압적이었으며 파리보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베를린에 가까웠다.... 미뉴에트는 솔직히 너무 느렸다....연주가 너무 매력 없고 전심으로 추천해주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똑같은 펭귄 가이드에서 카라얀이 연주한 하이든의 두 개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에 대해서는 최고의 평가를 부여했다.
20세기 작품들에 관하여 카라얀은 1945년 이전의 작품들(말러, 쇤베르그, 베르그, 베베른, 바르톡, 시벨리우스, 리차드 슈트라우스, 푸치니, 일데브란도, 피제티, 아서 호네거, 프로코피에프, 드뷔시, 라벨, 폴 힌데미스, 칼 닐슨, 스트라빈스키의 곡들)을 거의 모두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공연 및 음반출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1953년)은 두 번 공연을 했고 칼 오르프의 오페라 ‘종말 시간에 관한 희극’은 1973년에 초연했다.
<카라얀 특유의 눈을 감으며 지휘하는 모습>
음악 외적인 측면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
몇몇 비평가들, 특히 영국의 노만 레브레히트는 카라얀 때문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공연료가 오르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 잘츠부르그 음악제 등 공공 자금으로 운영되는 공연단체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공연료를 올리는 것은 물론 초청된 게스트 연주자들에게도 엄청난 액수의 공연료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한번 그가 오케스트라를 맡게 되면 음반을 내도록 하였고 거기서 자신을 위해 로열티의 많은 부분을 가져갔으며, 새로운 음원기술 - LP, CD, 비디오테이프, 레이저디스크 등이 나올 때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을 다시 레코딩하였다. 다른 지휘자들이 자신이 맡은 오케스트라를 통해 음반 레코딩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 다른 지휘자에게 지불되는 가격을 올리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카라얀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이기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현대 지휘자들과는 달리 그는 엄격하고 독재자적인 스타일을 지닌 지휘자였으며 연주가 마음에 안 드는 단원에게 공개적으로 굴욕감을 주기도 하는 등 강압적인 면이 있었다. 반면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오케스트라로부터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그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미국 뉴욕)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할 때, 지휘자 단상을 올림으로써 청중이 곧바로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고, 베르디의 오페라를 레코딩할 때도 최종적으로 소리가 나올 때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더욱 가까이서 들리도록 밸런스를 조정함으로써 음악을 지휘하는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비평가들은 그를 레너드 번스타인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두 지휘자가 단상에서 펼치는 몸짓과 연기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디오 레코드 자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휘를 하면서 자주 눈을 감기도 한다.
<카라얀은 취미로 비행기 조종을 하였다. 이외에 취미로 자동차 경주, 요트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미 공군기지에서 이륙 전 공군 장교들과 인사를 나누는 카라얀>
대중문화 속에서의 그의 음악:
카라얀이 데카社와 함께 레코딩한 음반, 리차드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 (왈츠)’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공상과학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었는데, 일반적인 제작 순서와 정반대로 영화감독 자신이 미리 녹음된 음반에 맞추어 영화의 씬을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카라얀의 음악은 원래의 왈츠 보다는 이후 영화에서 줄곧 우주 정거장과 원시인, 외계 물체를 묘사하는 음악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수년 후 큐브릭 감독은 다시 카라얀의 또 다른 음반 - 벨라 바르톡의 ‘현과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 을 자신의 영화 ‘더 샤이닝(The Shining)'에 사용하였다. 비록 큐브릭 감독의 1971년 작품 ’A Clockwork Orange'에서 헝가리인 지휘자 페랑 프릭세이(Ferenc Fricsay)가 1958년 지휘한 베토벤 9번 교향곡의 2악장의 사운드를 사용하긴 했지만 영화 마지막에는 카라얀이 1963년에 지휘한 똑같은 작품의 음악이 사용되었다. 이 똑같은 두 개의 음악은 물론 베를린 필하모닉에 의해서 연주됐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신기루와 오아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