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사자성어(四字成語)
⊙ 본래면목(本來面目) 너의 본모습은 무엇이냐
선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선어(禪語)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본래 얼굴', '본얼굴' 정도가 되겠지만, 그 심의(深意)는 '너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이 냐'라고 묻는 말이다. 즉 '진정한 자기', '본래 자기', 또는 '진실한 자기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를 한글로 옮기는 것은 참말로 어렵다. 선어가 그러한데 특히 본래면목 같은 말은 이중 삼중으로 표 현해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비록 네 글자에 불과하지만,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적어도 3~4배 이상 언어를 동원해야 한다. 이것은 표의 문자(한자)와 표음 문자(한글)가 갖고 있는 언어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면목은 '너의 본질, 너의 본모습은 무엇이냐?'라고 묻는 말로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부처인가?'라 고 묻는 선의 정형구이다.
'본래면목' 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화두가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父母未生前)의 나의 본모습으로, 자신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인데, 의외로 이 말 을 영혼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본래면목은 '본래적인 나(我)'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이라는 말이 붙으니까 영혼 으로 혼동하는 것 같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자기 자신의 근원, 본성, 또는 분별의식이 생기 기 이전의 일심(一心)을 가리킨다.
☆ 본래면목(本來面目)
本 근본 본. 근원, 바탕, 뿌리. 來 올 래. 오다. 面 낯 면. 얼굴. 目 눈 목. 눈.
출처 : 윤창화 <불교의 사자성어> ---------------------------------------------------------------------------------------------------------------- 본래면목은 본문에서 잘 설명했듯이 심오한 뜻이 담겨 있어 어려운 사자성어가 아닌가 합니다.
문자적인 뜻은 타고난 그대로의 면모. 또는 어떤 인위적 조작도 가하지 않은 본바탕을 가리킵니다.
본래면목은 본지풍광(本地風光) · 본분전지(本分田地) · 자기 본분(自己本分) · 본분사(本分事) · 본인(本人) 또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과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본래면목에 대한 선문답을 소개해 봅니다.
《동산어록(洞山語錄)》에 나오는 선문답입니다.
학인이 동산 선사(洞山禪師)에게 물었습니다.
"가령 새가 날아간 길로 가는 것이 곧 본래면목 아닙니까?" "그대는 무엇 때문에 전도(顚倒) 되었는가?"
"어떤 부분이 제가 전도된 것입니까?" "만약 전도되지 않았다면 어째서 노비를 주인으로 오인하는가?"
"본래면목이란 어떤 것입니까?" "새가 날아간 길로도 가지 않는다."
《복선홍천전(覆船洪荐傳)》에
학인이 홍천 선사(洪荐禪師)에게 물었습니다.
"본래면목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홍천 선사가 눈을 감고 혀를 내밀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혀를 내 밀었습니다.
학인이 말했습니다.
"본래 이렇게 많은 면목이 있군요." "조금 전에 무엇을 보았다고 그러느냐?"
저와 같이 우매한 사람은 이와 같은 선문답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선문답에서 본래면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본래면목은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어긋나기 쉬운 자리라서, 선문답은 언제나 난해합니다.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선에서는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반 발짝 빗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면목은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도 아니고, 어떤 상태도 아니며, 어떤 개념도 아닙니다. 그래서 선사 들은 정의하지 않고, 질문하는 마음을 꺾어 버립니다.
① 동산 선사(洞山禪師)의 전도(顚倒)
"어째서 노비를 주인으로 오인하는가?"
학인이 말합니다.
"새가 날아간 길로 가는 것이 본래면목 아닙니까?"
이 말은 꽤 그럴듯합니다. 교학이든 선이든 핵심은 '자취 없음', '공(空)', '무소의(無所依)'… 등입니다. 그러니 동산 선사는 단칼에 자릅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전도되었는가?"
여기서 '전도(顚倒)'란 무엇일까요?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새는 날아가고 하늘에는 길이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지 않는 길'이라는 개념을 하나 만들어 붙잡습니다. 즉, 자취 없음을 또 하나의 '자취'로 삼은 것, 이것이 "노비를 주인으로 오인했다"는 뜻일 터 입니다.
비어 있음(空)을 대상화했고 본래 자유로운 것을 관념으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답이 나옵니다.
"새가 날아간 길로도 가지 않는다."
이는 자취 없음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입니다. "공에도 머물지 말라, 해탈에도 집착하지 말라"라는 것이 선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② 홍천 선사(洪荐禪師)의 눈과 혀
"많은 면목이 아니다"
홍천 선사가 눈을 감고 혀를 내밀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혀를 내밉니다.
학인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본래 이렇게 많은 면목이 있군요."
그러자 선사가 묻습니다.
"조금 전에 무엇을 보았다고 하느냐?"
여기서 학인의 오류는 분명합니다. 행위를 본래면목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모습, 동작, 표현을 의미로 환원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선사의 행위는 '이것이 본래면목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하는 것은 이것일 것입니다. 보고 해석하는 그 마음, 지금 이해했다고 여기는 그 자리, 그것이 바로 전도(顚倒)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면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면목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이 '쉬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나'라는 규정이 붙기 이전 '좋다-나쁘다, 깨달았다-모르겠다'가 생기기 이전 그 자 리는 특별하지도 않고 신비하지도 않으며 언제나 있었지만 한 번도 대상이 된 적은 없다고 선사들은 말 합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답을 말로 찾으려는 순간, 이미 빗나갑니다.
본래면목 무엇이지 하루종일 얘기해도
망상만 늘어날 뿐 이익은 하나 없네.
그 따짐 내려놓으면 마음이 한가하리.
선문답은 똑똑한 사람을 시험하려는 것도 아니고 해석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알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려는 장치일 뿐입니다.
본래면목은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설명하려는 '나를 놓는 자리구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_()_ _(())_
향기로운 불교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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