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구국의 꿈을 안고 고국떠나 의병창설 2008/06/06 08:00 김삼웅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줄기찬 노력을 기울였다.
2008년 봄에는 회령으로 홍범도를 찾아가 만났다. 그러나 홍범도와 연합작전은 일시 포기하게 되었다. 홍범도를 만나본 결과 시세에 통하지 않고 무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산포수들을 동원하여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에 크게 타격을 준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이범윤을 만나 설득을 벌이고 최재형과 이위종과도 만났다.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은 헤이그특사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1907년 헤이그에서 활동하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항일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국경지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범윤도 본격적인 의병전쟁의 준비에 나섰다. 그러던 중 이범윤은 의병준비를 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당국의 추방명령으로 훈춘의 산악지대에서 거병을 모색하게 되고, 최재형과 이위종도 각각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범윤 세력과 최재형 세력은 한동안 깊은 갈등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일종의 파벌 싸움이었다. 그러나 두 세력은 갈등을 뛰어넘어 연합전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국권을 침탈하는 적진 앞에서 사소한 이해 관계로 언제까지나 분열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연합의병부대가 창설되었다. 안중근도 서명한 '결의록'과 '동맹록'을 작성하고 총독 김두성(金斗星), 대장 이범윤을 지도부로 하는 의병부대가 창설되었다. 총독 김두성이 누구인가는 아직까지 숙제로 남아 있다. 연합의병부대의 첫 자리를 차지한 위치로 보아 유인석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윤병석 교수).
이때 결성한 의병부대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4천 800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안중근이 속한 최재형 세력의 도영장(都營將)은 함북관찰부 경무관 출신인 전제익이 맡고 참모장 오내범, 참모에는 장봉한과 지운경이 각각 임명되었다. 안중근은 우영장, 의형제를 맺은 엄인섭은 좌영장이 되었다. 좌영과 우영에는 각각 3개 중대가 배치되었다. 소속 의병은 약 300여 명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10. 26의거'이후 자신의 공식 직함으로 내세운 '의병참모중장(義兵參謀中將)'에 선임되었다.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도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피임된 사람들이었고, 나는 의병 참모중장에 피선되었다. 나는 의병과 병기들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 모은 다음 그곳에서 큰 일을 의논하기로 하였다.(주석 10)
의병연합부대가 결성되는 데는 최재형과 이범진의 많은 지원과 지역 한인들의 모금 그리고 안중근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모금한 약 4천 원의 기금이 군자금이 되었다. 총도 100점이 마련되었다.
안중근은 의병참모중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의병들의 훈련과 사상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기질이 완고하여, 첫째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 둘째 주먹이 센 사람, 셋째 관직이 높은 사람, 넷째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 여겨, 나 같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말은 따르려 하지 않았"(주석 11)기 때문에, 이들의 정신을 바꾸고 전투원으로 육성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멈추지 않고 이들을 설득하고 훈련하여 혁혁한 의병으로 만들었다. 안중근은 의병에 참여한 동포들에게 일장의 훈시를 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2~3백 명 밖에 안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백 번 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 큰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이 한 번의 의거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여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고, 급히 나가고 천천히 나가고, 앞일을 준비하고 뒷일도 마련하여, 모든 것을 갖추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앞장 서서 나온 사람들은 병약하거나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 그 다음에 청년들이 사회를 조직하고, 민심을 단합하고, 유년을 교육하여, 미리 앞 일에 대비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실업에 힘쓰고 실력을 양성한다면 그 때에는 큰 일도 기필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주석 12)
안중근은 훈시 하는 동안 목이 메이고, 이를 듣는 의병들은 흐느끼면서 서로 껴안아 구국전쟁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주석
10 - <안응칠역사>, 68쪽.
11 - <안응칠역사>, 68쪽.
12 - <안응칠역사>,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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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라사랑 뜨거운 조국애 를 느끼게 합니다..
김삼웅선생님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한 가지 기사요청 드려도 될까요. 언젠가 청산리 대첩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다가 적병 수천을 몰살했다는 한국측 기록과 달리, 일본측 기록은 전사 십 수 명이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을 보고 큰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 기록을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자국의 패배를 누가 그대로 기록하겠습니까만) 다른 일본전투 기록들이 비교적 정확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가슴아픈 일이지만 청산리 전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삼국지 시대 관우장비 전투도 아니고, 정예훈련을 받은 일본군이 산속 갇혔다고 해도 수 천 명이나 몰살하기가 쉽지 않을 일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일본군 수백 명의 희생자를 한국에선 애국심 고취를 위해 수천 명으로 높이고, 일본에선 수십 명으로 줄여 기록한 게 아닐지.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객관적이고 심도 있는 글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언젠가 해보고 싶지만 연륜도 짧고 역사에 원래 문외한이라서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