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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별곡
이조 중기(인조 때?)에 한 함경도 관찰사가 초도순시차 들른 명천군(明川郡)에서 먹은
반찬 중에 담박한 생선이 있었으나 낯설고 이름이 없었다.
단지 태(太)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다는 사실뿐.
관찰사가 명천과 태씨의 첫자를 따서 명태라 부르게 했다는 생선.
이름이 하도 많아 홀란스러운 바닷고기의 이름 '명태'의 내력이란다.
봄에 잡으면 춘태, 가을에 잡히면 추태, 겨울에 잡은 것은 동태라 하고,
그물로 잡은 것은 망태, 낚시로 낚아올린 것은 조태,
원양어선이 잡은 명태는 원양태, 근해에서 잡은 명태는 지방태,
얼리지 않은 생물상태는 생태, 꽁꽁 얼리면 동태,
완전히 말리면 북어 또는 건태, 장기간 눈과 바람을 맞혀 말려 노란색을 띄면 황태,
반만 건조했으며 코를 꿰어 말린다 해서 코다리, 말린 어린 명태는 노가리.
알젖갈은 명란젖이며 창자로 담은 젖갈은 창란젓.
음식으로는 명태국, 북어국, 생태 매운탕과 지리, 각종 찌개, 알탕과 완자탕, 동태고명
지짐이, 명태완자와 김말이, 명태전과 표고전, 명태튀김과 탕수, 명태알무침, 죽과 롤
샌드위치. 명태식혜와 아가미식혜, 회무침, 생태김치와 명태속대김치와 아가미깍두기.
관혼상제에 불가결의 품목이며 보양식을 비롯해 치질, 습진, 설사, 단독, 기관지 천식,
심장병, 구완아사, 감기, 무좀, 관절염, 티눈, 포진까지 명태를 이용해 건강을 지켰단다.
<검푸른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이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몸은 없어질 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헛 명태라고 헛 이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양명문 시)
오호, 도대체 버리는 것 없는 바닷고기여!
쓰이지 않는 데 없는 명태여!
그러나 동해안의 대표적 풍어의 명성이 사라져가고 있단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바닷물의 온도 상승으로 어장이 북상하고 있으나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니 금단의 해역을 어찌하면 좋은가.
축제라는 이름으로 띄우고는 있으나 날로 더 속빈 강정 꼴이 되어감은 불 보듯 뻔한 일.
10월 7일 아침 7시.
자산천 하류의 거진1교를 건너, 성원 상떼빌아파트를 지나는 해안순환도로를 따르다가
송포리(松浦) '거진랜드마크공원' 앞에서 차로와 헤어졌다.
하늘로 솟으려는 명태와 온몸으로 안고있는 소년을 형상화 한 석조 조형물을 거진 랜드
마크라 하여 금강산길 7번국도변에 세운 공원이다.
금강산 왕래가 활발해 가고 있을 때 통일의 전진기지를 자임하고 나선 고성군으로서는
금강산 손님도 맞고 명태의 본산지 거진도 띄우는 것이 좋은 홍보전략이었을 것이니까.
통일의 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듯 하던 분위기가 깨지고 금강산 길이 한 순간에 막힘
으로서 고성군의 최북방지역은 한동안 패닉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해안을 걸으려면 도로를 떠나서 '군 순찰로'를 따라야 한다.
"이 길이 행정안전부의 지원사업비로 인천 강화군에서 DMZ를 따라 고성 통일전망대~
토성면 용촌(속초시계)까지 조성된 길"이란다.
'평화누리길' 안내판인데 그 때(안내판을 처음 보았을 때)는 믿었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 후(지난5월), 휴전선 따라 걸을 때 확인한 것은 경기도와 고성 외의 강원도와 강화도
에는 평화누리길이 없다는 것.
휴전선 접경 경기도 4개 시군이 '평화누리길' 이라는 이름으로 연결한 총 길이 184.5km
를 말하며 연천(경기도)에서 철원(강원도)으로 넘어올 때 평화누리길은 끝나건만.
군 순찰로가 끝나는 반암항 입구에 한 공적비가 서있다.
현 반암항의 면모를 갖도록 방파제공사를 시공 당시의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공을
치하하는 비석이다.
반암항이 어촌정주어항으로 정착하는데 기여한 듯.
"고마운 뜻을 길이 간직하려고 비문에 새겼으며 하늘나라에서나마 지켜봐 주기 바란다"
는데 마을 주민들의 뜻 치고는 초라한 것 같다.
하찮은 공에도 침소봉대하여 요란스런 이즘의 행태에 비해 오히려 소박하고 진실한가.
관동별곡8백리길이 어디를 돌아서 왔는지 반암마을에서 다시 만났다.
돌아가는 해안 모퉁이에 자리잡았다 해서 돌구미 또는 회진리(回津里)라 했으며 마을의
지하가 암반지역이라 반바우, 반암리(盤岩)가 되었다는 마을인데 민박수요가 많은가.
반암해수욕장 피서객이 모두 민박을 이용하는지 온통 민박집이고 대 고객 페어플레이
(정보제공)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는지 '민박요금 예고 시범마을'을 표방하고 있다.
반암해수욕장 이후의 해안은 송죽리(松竹) 한하고 군에 통제되어 얼마동안 농로와 마을
길을 따라야 한다.
규모는 작으나마 모처럼 송죽리의 누런 황금들녁을 걷는 기분도 괜찮았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 하나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역시 너른 들녁이다.
해안으로 가려면 대대리 합축교 밑을 흘러 동해로 빠지는 북천을 건너야 하는데 광대한
이화학당 토지가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마산자락의 주택마당을 통해야 한다.
이 너른 땅의 주인(서울 이화여대의 학교법인)도 길을 터줄 만한 여유가 없는가.
우리나라에서 산과 들 불문하고 땅 가지고 위세부리는 것은 개인보다 종교집단들이 더
심하며 가히 행패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사회 지도층 개인에 한하는가.
집단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은 더욱 엄격하고 엄중해야 하건만.
일제에 머리숙일 수 밖에 없다
북천의 지천에 멋스런 마산해안교가 놓이고 정자도 새로 짓고 평화누리길 표석도 세운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도 평화누리길이라는 이름의 새 길을 조성하려나 보다.
북천을 따라 조금 올라가 있는 북천철교 역시 그 목적으로 거듭났으니까.
원산~양양 간 철도의 이 철교는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건설했던 다리였지만.
6. 25 동란 때 북한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막기 위한 함포사격으로 절단난 후 남아있던
앙상한 교각 위에 상판을 깔아 보행과 자전거 전용 다리로 거듭나게 했다.
코스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듯 하나 다리아치에 평화누리길을 못박아 놓은 것으로 보아
송죽리(거진)와 봉호리((蓬壺里/간성)를 잇는 평화누리길 다리인 것 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경기도 4개시군의 양해를 받았는가.
명칭이 휴전선 전 지역으로 확대될 때 경기도 4개시군은 이미지 관리에 적잖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양해가 손쉬운 일이 아닐텐데.
이 길을 새로 조성하면 고성군 해안을 거쳐가는 길이 세개나 된다.
해파랑길과 관동별곡8백리길에 이어 평화누리길.
걷는 사람이 무슨 길을 걷고 있는지 헷갈리기 십상이겠다.
또 무슨 이름의 길이 생길지 자못 궁금한데 왜 이러시나.
그보다, 동족상잔의 참극을 말해준다는 낭자한 포탄자국, 철로를 모두 절단내버린 함포
사격에도 요지부동한 교각들 앞에서는 늙은이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포탄 한방 맞지 않았어도 단 1세대를 버티지 못하는 우리의 다리들에 비해 가공할 포격
세례를 받고도 3세대를 끄떡없고 영구적이라 할 만큼 튼실한 다리를 만든 일제에게.
부실공화국임을 수치로 여기기는 커녕 부정과 부실이 체칠화되어버린 민족의 자괴감!
오호 통재로다.
몇년이나 버텨줄지 부실한 상판 위에서 연어떼를 보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었다.
산란기를 맞아 귀환하는 저들은 결국 죽으러 오는 것이지만 힘차 보였다.
국내에서는 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저들을 처음 보았지만 캐나다에서 본 적이 있다.
그라우스 산(Grouse Mountain)에 올라 밴쿠버의 멋진 전경을 감상하기 전에 카필라노
의 서스펜션 다리(Capilano Suspension Bridge)를 걷고 클리블랜드 파크(Cleveland
Park)의 연어 부화장(Capilno Salmon Hatchery)에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힘과 3m나 되는 계단을 뛰어 오르는 점프력을 가진 연어.
연어(鰱魚)는 민물(江) 어느 곳에서 태어난 후 넓은 바다로 나가서 성장한 다음 만년에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갈 때 버거운 장애물들을 돌파한다.
소위 귀소본능(歸巢本能)에서 나오는 괴력이다.
여우까지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이건만 인간의 향수는 날로 더 황폐해 가고 있다.
인간은 고향을 잃어가는가 버려가는가.
10월 8일부터 2개월은 연어들의 산란을 위해 포획을 금지한단다.
바로 하루 전인 오늘을 놓칠세라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
그러나 어찌나 변변찮은지 힘센 저놈들이 조롱하듯 낚싯줄을 끊고 달아나기 3번에 나는
낚아올리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찌를 물고 달아난 놈의 운명은 어찌 될까.
간성읍 봉호리의 북천 하구를 돌아 남천으로 가는 내 길이 관동별곡8백리길과 동행한다.
'방죽골'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호수가 있었던 듯.
그래선지, 예전에는 마을 이름의 한자가 '蓬湖里'(호수湖) 였는데 지형이 병마개를 졸라
맨듯한 형국이라 하여 병'壺'(호)자로 바꿔 봉호리(蓬壺里)로 쓰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철조망으로 차단해 백사장에는 들어설 수 없으나 지근의 농로와 송림길이 있는 동호리.
마을이 열리던 때 갈대가 무성해서 갈벌, 훗날에는 신선이 놀다가는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선유리(仙遊), 결국 동쪽에 호수가 있다 해서 동호리(東湖)가 되었다는 마을이다.
여러 자연마을 중에 특이한 '염전밭' 마을이 시선을 끌었다.
일제강점기에 백사장에 1자 정도의 진흙을 깔고 바닷물을 모아 소금을 만들었단다.
이 곳 해변이 염전밭이라 불리워진 연유란다.
가진항과 공현진항
염전밭을 지나 신안리(新安)의 남천 둑으로 난 차로를 따르면 남천교다.
어느새, 관동별곡8백리길은 6코스가 시작된다(남천교~가진항)
왜 이처럼 잘게 토막을 냈을까.
7번국도 남천교(南川橋)를 건너서면 죽왕면 향목리(竹旺面香木里)다.
울릉도에서 이주해 온 정씨가 심은 울릉도 향나무 3그루가 무성하게 자라서 무명마을이
'향목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나 지금은 향나무 없는 향목리란다.
남천교를 U턴해 관동별곡8백리길을 따라 향목리를 지나면 가진리(加津里)다.
수산물이 다른 곳보다 풍부해 주민생활에 많은 덕이 된다 해서 덕포(德浦)였단다.
어촌에 작은 나루 하나가 늘어나서 가포진(加浦津)으로 바뀌었다가 가진리(加津里)로
정리되었다는 마을이다.
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이지만 덕포단 때문에 가진항에는 동구(洞口)로 돌아가야 한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덕포라는 이름도 손님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꽤 큰 지방어항인데도 국도에서 멀리 있어 관광객들의 접근이 불편하기 때문일까.
횟집들이 즐비하지만 일요일의 한낮인데도 주인이 손님보다 더 많은 듯 하였으며 바쁜
곳은 낚시가게 뿐인 듯.
내게는 그림의 떡일 뿐인 가진항의 낚시마트에서 막걸리1병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떠난
시각은 13시 13분.
속초시 경계까지는 무리라면 청간정을 목표로 수정해도 여유롭지 않을 듯한 시간이다.
풍기 월사모팀의 설악산 등산에 합류하기로(내일/10월 8일) 아침에 약속하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설악산 곁으로 가려는 것이니까.
공현진리길 해변도 철조망으로 차단되어 있다.
'촛대바위' 또는 그럴싸한 이름표를 달아줄 법한 바위지대가 아쉬웠는데 이름이 있단다.
고재바위.
가진리에서 공현진리로 갈 때 넘어야 하는 높은 고개 해변의 바위라 해서 '고재바위'라
했으며 바위 일대에서 고래들을 많이 포획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단다.
공현진리에서 들은 유래다.
공현진리 해안에도 명품 바위지대가 있다.
날로 더욱 넘쳐나는 우리나라의 사진작가들에게 인기있는 일출명소라는 옵바위다.
공현진 앞바다의 5개 바위섬중 5번째 섬이라 해서 오바위가 옵바위로 변음되었단다.
바위 일대에 섭(조개)이 많아서 두 단어를 합성해 옵바위라 했다고도 하는 바위지대다.
어떤 류의 마니아도 되지 못하는 늙은 나그네가 공현진리 해수욕장과 국가어항 공현진
항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눈에 띄게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너른 국가어항인데다 마을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간성현감 택당 이식(澤堂李植/1584~1647)을 생각하며.
380여년 전인 1631년, 대사간 택당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의 원종(元宗) 추존의
불가함을 주장해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당상관인 정삼품 대사간에서 종육품 외직인 간성현감으로 쫓겨났다.
현 관급으로는 중앙부서의 1급 관리관에서 지방 면장으로 7계단이나 강등된 것.
당연히 사직했을 것이며 부임한다 해도 자포자기에 포악한 현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택당은 현감1년여에 유별시(陳富嶺留別詩)를 남기고 한양으로 복귀했지만 그의
선정에 감복한 현민들은 그의 하세는 물론 부인의 별세에도 보은의 정성을 표했단다.
지존에게는 자리를 걸고 바른 말을 했지만 백성으로부터는 숭앙을 받은 인격.
민초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는 이른바 허니문(honeymoon)기간이 필요없다.
부와 권력 앞에서는 간(肝)도 담(膽)도 다 버리고 충견 되는 것이 영광이라는, 하나같이
환관들 뿐인 이 시대에 택당이 어찌 갈망되지 않겠는가.
그의 인격은 과연 불세출인가.
현감 택당이 선유담(仙遊潭)에서 작시한 '공수왕처세방회(公須往處勢方回)'라 한 것을
인용해 앞글자 2자로 마을이름을 '공수진리'라 했단다.
1914년의 행정개편 때 장현리(長峴)와 통합하면서 합성된 이름이 '공현진리'라는 것.
한데, 관계자들의 말과 달리 택당의 작시라는 근거가 없다.
택당의 시 선유담은 물론 다른 시문집 아무데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천학정,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노는가 하늘로 올라갈 학이 머무는 곳인가.
공현진리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보완한 체력이 공현진교 이후 발휘되기 시작했다.
동해대로(7번국도)와 해안을 드나들며 오리진(五里津)으로도 불리는 오호리(五湖里)와
오봉리(五峰里)의 명품들인 송지호오토캠핑장, 송지호, 송지호해수욕장을 지났다.
화진포호와 난형난제의 호수와 해수욕장이다.
화진포호에 금구도가 있다면 송지호에는 죽도(竹島)가 있는 것 까지 닮은 꼴이다.
아무리 명품이라도 소비자의 외면을 받으면 허명에 불과하다.
철 지난 해변이 바로 그 꼴이다.
지방어항 오호항 까지도 외모와 달리 공허하다.
이어지는 봉수대해변, 삼포리(三浦)의 삼포해변, 문암진리(文岩津)의 자작도해변, 백도
해변 등도 다를 것 없다.
한국인에게 한국의 바다는 여름에만 찾는 곳인가.
먼 외국의 바다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건만.
여름이라 해도 워낙 많은 해수욕장을 사람으로 채우는 일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기근 현상은 어항도 마찬가지다.
지방어항 백도항, 문암2리항 등도 흉어에 사람의 발길이 뜸하여 시름만 깊어간단다.
문암천(문암대교)을 건넜다.
교암리(橋岩) 부터 토성면(土城)이다.
마을 양쪽으로 흐르는 개천에 두개의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바우' 였는데 한자화 해서
교암리가 되었단다.
육상교통이 편리하여 강릉과 원산 사이에서 가장 크게 장이 섰으며 동해안에서 수심이
가장 깊어 큰 배가 정박함으로서 교역이 왕성했던 마을이란다.
동해안에서 청어 제일 산지, 미역도 많이 채취하던 곳 등 화려한 과거가 있는 마을.
그래서 였을까.
부유로운 주민들은 1931년에 풍광이 빼어난 기암의 해안 절벽에 유서가 깊은 청간정을
닮은 정자를 지었다.
바다의 일출이 가히 선경(仙境)이라는 고성 8경인 천학정(天鶴亭)이다.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노는가 하늘로 올라갈 학이 머무는 곳인가.
풍류는 여유로운 자의 것이고 여유는 부유로워야 가능한 것?.
교암리해수욕장을 지나고 한때 이름난 어항이었다는 지방어항 교암항 아래의 천학정에
당도했을 때는 18시가 넘었다.
여광이 조금 남아있을 뿐인 시각.
내일의 설악산 외도 일정이 없다면 아마 여기에 집을 지었을 것이지만 일어섰다.
교암사거리 7번국도를 거쳐 아야진해변을 걸을 때는 어둠이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원래 대야진(大也津)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아야진(我也津)으로 바뀌었단다.
일제가 대일본(大日本) 외의 지명에 '大'자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는데 글쎄.
일제가 사용한 대(大)자 지명이 적지 않기 때문에 언뜻 수긍이 가지 않는 유래다.
밀려오는 어둠에 쫓겨 궁금증을 갖거나 풀 겨를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국가어항 아야진항에서 청간해변을 거쳐서 청간정으로 오르는 해안길은 주둔하고 있는
군 부대로 인해 7번국도로 우회해서 진입해야 한다.
주간에는 철조망의 문을 개방한다는데.
불밝히고 있는 청간정에 밝은 시간에 다시 들를 것을 기약하고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백두대간 종주 때 이래 10여년간 단골인 속초의 찜질방 해수피아로 가려고.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