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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아풍동'이 6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조촐하게 자축하려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스승님께서 평소 말씀하시는 '인연'으로 인해 맺어진 6년이란 시간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풍수학인이면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전두환 전대통령 생가를 비롯한 선영이 있는 '합천'으로 기념답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어떤 조상님의 은덕으로 태어났는지 궁금하시죠? 답사 당일 그 해답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생일 날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일시 : 2014년 5월 11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전두환 前대통령 관련 터 답사
[요약]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 내천리 264번지에서 완산 전씨(完山 全氏) 전상우(全相禹)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점문(金點文)의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형 규곤(1916년생),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누나 선학(1925년생), 형 기환(1929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에서 대구 봉덕동 1035번지로 이사했고, 1947년 3월 25일에 희도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만주 망명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 대구공업중학교 기계과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해서 1951년 10월 15일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시하였는데 2백명 선발에 2천 4백명이 몰렸으나 합격,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합격한 그는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로 입교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李圭東)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딸 이순자를 만났다. [출전] 위키백과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수용하였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 되었다. [출전] 네이버 지식백과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했다.
* 생가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64 * 못재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산28-8 * 부모 묘 신후지 : 경남 합천군 율곡면 기리 산80 * 조모 묘, 증조모 묘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산39 * 증조부 묘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산45
2) 십승지의 전형 (경남 합천군 적중면, 초계면)
안으로는 천황산, 청개산, 단봉산이 환포하고 밖으로는 아천, 신반천, 황강이 둘러싼 천혜의 요새.
풍수를 이야기 할 때 십승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한 의미의 십승지란 큰 재난을 피하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지형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깊은 산속이며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산을 넘어 들어가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긴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야만 동네에 당도하는 곳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안에는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제법 넓은 전답이 있어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고 가뭄이 들어도 주변의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가뭄으로 인한 흉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또한 이러한 지형은 공기가 깨끗하고 외부인의 출입이 빈번하지 않으므로 전염병이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크게 질병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전쟁이 나도 외부와 분리된 지역이기 때문에 군대의 출입이 수월하지 않아 피해를 덜 입게 되고 만약 군대가 들어 올 경우에는 주변의 산속으로 피신을 하여 인명이 상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흉년, 전염병, 전쟁 등 세 가지 악재가 들어올 수 없는 땅이 십승지이며 이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부르기도 한다. [출전] 『양택풍수의 정석』 본문
3) 박소 선생 (1493∼1534) 묘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산53)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 : 강의나 강론하는 자리)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152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그 뒤 정언(正言)·지평(持平)·사인(舍人)·필선(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출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아들 응순의 딸이 선조비 의인왕후이고, 또 다른 아들 응복의 손자인 미(瀰)가 선조와 인빈김씨 소생의 딸 정안옹주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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