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대천리 집성당 (保寧 大川里 集成堂)
집성당(集成堂)은 보령시 웅천읍 노천리 웅천초등학교에서 하천을 따라 500m 정도 남쪽으로 내려 온 곳의 화락산(花落山) 동향사면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정면의 각 칸에는 4분 합문이 설치되어 있다.
홑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한 이 건물은 양 옆 박공 아래에는 방풍판을 설치하고 있는 납도리식 건물로 2단의 기단 위에 놓여져 있으며 원형초석(圓形礎石) 위에 원주(圓柱)를 세우고 있으며 사우(祠宇) 주변은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 맞배지붕의 소슬문이있다.
집성당 창건록 (集成堂 創建錄)
중국 송(宋)나라 때 유학(儒學)의 한 계통인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이 된 주자(朱子)의 사상과 조선중기 주자학의 대가이며 대표적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宋時烈)1)등의 사상을 집대성(集大成)하여 기리고자 양(兩) 성인(聖人)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여 제례(祭禮)를 갖추기 위한 사당이다.
1906년 항일 의병활동에서 유준근(柳濬根), 채광묵(蔡光默), 이상구(李相龜)등과 의병 참모로 활동하였던 남포(藍浦)의 파평인 윤석봉(尹錫鳳)과 조진학(趙鎭鶴), 비인(庇仁)의 신섭(申섭)이 주축되어 1897년 8월(永曆251年丁酉8月)에 남포 인근지역의 모든 유생들에게 창건취지를 알리는 통문(通文)을 발송하면서 건립이 추진되었다.
1898년 1월 22일에는 지병 중이던 윤석봉(尹錫鳳)을 대신하여 백관진(白觀鎭)이 집성당 착공을 위한 토신제(土神祭)를 지냈으며 동년 2월 10일에는 화정처사(華汀處士) 윤석봉이 준공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동년 3월 19일에는 회암(晦庵) 주자(朱子)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모시는 봉안제(奉安祭)를 올림으로 완공되었다.
매년 봄, 가을과 매월 1일, 15일에 지역 유림(儒林)들이 모여 분향하며 제례(祭禮)를 갖추고 강송(講誦)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윤석봉, 백관진, 유준근, 김복한, 유호근, 조구원, 신응선등 항일 유림들이 서로 교류하며 항일의지를 심화(深化)하였던곳이며 현재에도 매년 1회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는 문화유적으로 이의 창건기록에 대한 모든 자료를 기록하여 놓은 창건록을 본 카페에서 보유하고 있다.
1)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 : 제1차 예송논쟁(왕가에서 상복(喪服)을 입는 기간에 대하여 서인과 남인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제2차 예송논쟁인 1674년 효종비인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가 논의되자, 예론에 따라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1주년설)이 채택됨과 함께 예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실각하여 덕원(德源), 웅천(熊川), 거제(巨濟), 청풍(淸風)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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