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0월16일 오후 1시45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은 로체 봉(8,511m) 정상에
한 사나이가 우뚝 올라섰다.
이 소식이 전파를 타고 퍼져 나가자 전세계 매스컴은 한결같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승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광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계 이탈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
그때 나이 마흔둘.
심한 고통을 이겨내기에는 한물 간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인류 사상 처음으로 이루어냈다.
지구에 있는 산 가운데 8,000m가 넘는 산 14개를 모두 오르는 위업을...
메스너는 8,000m에 처음 도전할 때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 때인 1970년 세계 9위인 낭가 파르바트(8,126m)에 도전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산소통 없이 8,000m가 넘는 봉우리에 올라 산악인들을 놀라게 했다.
메스너는 또 동생 귄터와 함께 형제끼리 정상을 정복한 첫 기록도 세웠다.
하산길에 메스너 형제는 정상에서 150m 떨어진 벼랑에 매달리다시피 비박(텐트 없이 한데에서 노숙함)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귄터가 산소 부족과 피로로 말미암아 ‘쇠퇴 현상’을 일으켜 주저앉고 말았다.
메스너는 동생을 부축해 내려왔으나,그가 도중에 잠깐 길을 살피러 간 사이에 동생은 눈사태로 인해 파묻히고 말았다
메스너는 귄터를 찾아 사흘이나 눈 속을 헤매다가 구출되었지만, 동생을 잃고 그도 동상으로 발가락을 6개나 잃었다.
메스너는 두 번째로 8,000m 봉에 도전한 1972년의 마나슬루(8,156m) 원정에서도 함께 간 동료를 잃었다.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자기 주변을 떠돌자, 메스너는 가장 믿음직한 등산가로 꼽던 페터 하벨러와 짝을 이루었다.
1975년 그가 세 번째 도전한 산은 히든피크라고도 불리는 가세르브룸Ⅰ봉(8,068m).
메스너는 하벨러와 단 둘이서 셰르파나 포터의 도움없이 북서벽 루트를 개척해 단숨에 정상에 올랐다.
8,000m급 산에서 최초로 시도해 성공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었다.
가세르브룸Ⅰ에서 성공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메스너는
1978년 네 번째 8,000m 봉 도전에서 하벨러와 함께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살아 남음을 체험하려고 두 팔과 두 다리만으로 산에 오른다는 메스너의 신념이 빛을 발한,
에베레스트 등반 사상 최초의 무산소(통) 기록이었다.
포기 알피니즘 추구한 메스너②
에베레스트 이후로 메스너는 산소통을 쓰지 않고
K2, 시샤팡마, 칸첸중가, 가셔브룸2, 브로드피크, 초오유,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마칼루를 차례로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낭가파르바트에 처음 오른지 16년 만에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로체에 등정함으로써
지구상 8,000m 봉우리 14개를 모두 등정했다
1944년 알프스 산록 남부 티롤의 빌뇌스에서 태어난
라인홀트 메스너...그가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암벽 등산을 시작한 열네살부터
28년간 알프스를 이천번 넘게 오르고,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산봉우리를 백 군데 넘게 올랐다.
또 다섯 대륙의 최고봉을 다 올랐으며, 끝내 8,000m봉 열네 곳을 다 등정했다.
에베레스트, 낭가파르바트, 가셔브룸Ⅰ과 가셔브룸 Ⅱ는 두 번씩 올랐으므로
남들은 평생 한 번도 오르기 어려운 8,000m봉을 열여덟 번 오른 셈이 된다.
메스너는 또 1990년 2월 아르베트 푸크스와 더불어 남극 탐험 사상 최초로 걸어서 남극대륙 2,740km를 횡단했다.
1993년에는 동생 후베르트와 함께 최초로 그린란드 설원 2,000㎞를 90일 동안 남북으로 종단하기도 했다.
우리는 메스너를 ‘세기의 철인(世紀의 鐵人)’, 즉 100년만에 한 번 볼 수 있는 무쇠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기록만 가지고 그를 영웅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등산을 ‘국가적인 탐험’에서 ‘개인적인 스포츠’로 바꾼데 있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15년 동안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개가 모두 정복되기까지
히말라야는 강대국들의 힘자랑 무대였다.
‘히말라야의 황금시대’라고 불린 그 시절에는 어느 봉우리를 어느 나라가 처음 ‘정복’했느냐가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나라마다 이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964년 마지막 열네번째로 시샤팡마를 중국이 초등하자 히말라야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그렇지만 산이란 한 번 오르고 마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산을 오른 일은 명예도 아니고 정복도 아니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사람이 스스로의 정신과 육체를 줄기차게 시험하는 무대가 되어 준다.
바로 이 점을 일깨워 ‘정복’을 ‘스포츠’로 바꾼 사람이 메스너이다.
메스너가 히든피크 북서벽 코스를 개척해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
1975년 영국인 크리스 보닝턴은 안나푸르나를 가장 오르기
어려운 남벽으로 올라 8,000m 봉벽등반 시대를 열었다.
우연히 같은 해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메스너의 히든피크 등정이나 보닝턴의 안나푸르나 등정이나
모두 어려운 코스를 새로 개척해 올랐다.
보닝턴은 그 일을 계기로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주창했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어떤 루트(등산로)로 어떻게 올랐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메스너는 뒤에 ‘포기 알피니즘’을 주창했다.
모든 외부의 도움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오른다는 뜻이다.
메스너와 보닝턴이 등장한 뒤로 히말라야는 개개인이 새로운 루트,
더 어려운 루트를 골라 더 힘든 방법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무대로 바뀌었다.
“1982년 한 시즌에 칸첸중가, 가세르브룸2, 브로드피크 세 군데를 오르고 나자,
비로소 8,000m급 열네 봉우리에 다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년이 지나 그 꿈을 다 이루고 난 지금, 나는 ‘다 수집했으니 이제 끝났다’는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다.
내일부터는 또 다른 8,000m 시대이다.
남이 오르지 않은 길, 더 힘든 루트를 골라 끊임없이 오르겠다.
그리하여 등산의 참 기술, 즉 살아 남는 기쁨과 행운을 맛보겠다.”
(열네 번째로 로체에 오른 뒤 기자회견에서)
메스너는 처음 낭가파르바트에 오를 때 그때까지 해온 대로 극지법(極地法)을 썼다.
수십t이나 되는 짐을 포터 수백 명이 몇 달 간 날라서 한 단계씩 캠프를 전진시킨 뒤,
마지막까지 힘을 비축한 공격조가 정상에 오르는 물량작전이었다.
그러나 극지법은 그가 알프스에서 익히고 길들인 방법이 아니었다.
메스너는 세 번째부터 알파인 식으로 바꾸었다.
등산 초창기에 알프스에서 적은 사람이 적은 물자와 장비로 짧은 시간에 올랐던 방식이다.
메스너는 페터 하벨러와 단촐하게 둘이서 최소한의 짐을 지고
표고차 1,000m 이상을 하루만에 왕복하는 집중력으로
단숨에 히든피크에 올랐다가 내려왔다.
메스너의 알파인 방식이 히말라야에서도 통한 것은 그가 워낙 어려서부터 그 방법에 익숙한 데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체력을 자신만의 훈련 방법을 통해 갖추고 있었던 덕분이었다.(이병철 칼럼니스트)
■……현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고산등반가인 라인홀드 메스너(Reinhold Messnerㆍ1944~ )는
사정없이 가능성의 한계를 추구하여 지나친 기술적인 보조수단에 물든 이 분야를 정화하면서
지난 반 세기 동안 등반분야에서 이루어진 모든 진보들의 결실을 맺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그의 전성기 동안, 그는 점진적으로 어려운 루트들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진보적인 스트립 다운 스타일로 그 루트들을 완등하면서 등반이라는 게임에서 끊임없이 분담금의 액수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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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히든피크 등정후, 피터 하벨러와 함께 |
장비와 식량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산소통이나 볼트 같은
인공보조물을 거부한 메스너는 알프스에 속공 자유등반의 시대와
고소에선 알파인 스타일 등반과 단독등반 시대를 안내했다.
그의 등반들은 모든 다른 등반들의 판단기준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새롭고 보다 어려운 도전들에 대한 이러한 집념어린 추구로 인해
메스너는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해와 비난도 받았다.
그는 몇 번이나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등반들은 무모하지 않으며, 세밀하게 계산된
엄청난 자기확신감을 지니고서 대담하게 실행된 것들이다.
이러한 증거는 그가 생존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한계를 끊임없이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한계상황 넘어에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기 위해
살아 돌아온 몇 안되는 극한 고소등반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생존재능을 산에서 평생 살며 산을 등반하면서
얻게 된 경험 덕택이라 여긴다.
메스너는 이태리남부 티롤지역의 한 소도시 브리센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그는 거기서 멀지 않은, 인상적인 침봉들에 둘러싸인
산골마을 빌료스에서 자랐다.
걸음마를 배운지 몇 년 되지 않아 등반을 시작한 그는
처음엔 근처의 샤쓰 리가이스 봉에서 부모님들과 올랐으며,
그 후 크래이내 퍼매다 동벽 같은 보다 기술적인 루트들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등반했다.
마침내 그는 알프스에서 가장 어려운 등반들을 행하기 위해
그의 동생 귄터 메스너와 몇몇 친구들과 팀을 이루었다.
1965년, 그와 균터는 서부 알프스에 위치한 트리올랫 북벽 직등과 래스 코우태스 북벽 직등 루트를 재등했으며,
1966년에는 그와 헤인니 홀저가 돌로미테의 치베타에서 암명 높은 필립 프램 루트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시험적인 대상들을 등반했다.
그리고 1969년에 그는 래스 드로이태 북벽, 치베타의 필립 프램 루트, 말모라다 남벽 등에서
새로운 루트을 단독등반했다.
또한 1969년에 그는 에리흐 랙크너와 함께 몽블랑 프레네 중앙능을 하루만에 등정하여
1974년에 그와 패터 하벨러가 아이거 북벽에서 10시간 만에 등반한 것과 같은 그런 속도등정에의 길을 열었다.
25세가 되었을 무렵, 그는 알프스에서 가장 어려운 대부분의 루트들을 등반했으며,
그것들 중에는 많은 단독등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보다 높은 대상들을 추구할 준비가 되었다.
1969년에 그는 고소등반을 처음으로 맛보았는데,
그 때 그는 한 티롤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예루파자 그란데(2,1759피트)를 등반했다.
그 다음해 그는 칼 헬리그코퍼 박사가 이끈 원정대와 함께 낭가파르밧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와 동생 귄터는 루팔 벽을 등반하는덴 성공했지만,
하산 중 동생이 눈사태에 침몰되어 실종됨으로써 그 승리는 비극으로 뒤바뀠다.
슬픔으로 인해 거의 미칠지경이 되었던 메스너는 겨우 하산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비탄에 잠긴 가족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한 비극으로부터
(그는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여섯 개를 잃었다)
정신적, 육체적 회복을 위한 시간을 가진 후,
그는 티롤의 한 원정대와 함께 마나슬루 남벽을 등반하기 위해 1972년에 히말라야로 돌아갔다.
하산 중, 프란즈 재거와 앤디 쉬릭크는 캠프를 찾지 못한 채
악천후 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의 몇몇 언론인들은
메스너가 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좀더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비록 메스너는 그러한 비난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상처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한 비난에 상심하고 대규모 원정대에 시달린 그는
작고 경험있으며 응집력있는 등반대를 선호하여
대규모 원정을 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방향에서의 그의 첫번째 시도는 1974년에 행해졌다.
아르헨티나에 위치한 아콩캉구아 남벽의 단독등반이었다.
그는 잠시 대규모 원정등반으로 되돌아왔는데,
1975년의 로체 남벽에 대한 리카르도 캐신의 이태리 원정이었다.
눈사태로 인해 그 원정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 해말 메스너는 패터 하벨러와 힘을 합쳐 히든 피크 북벽을
고정캠프와 산소통, 아니면 대규모 인원에 의한 지원과 안전망없이 한 번만의 긴 시도로 등반해냈다.
1978년에 그 둘은 심지어 더 대담한 계획을 실행하여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반(사우스 콜을 경유하여)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메스너는 1979년에는 무산소로 K2를 등정했으며,
그 다음해는 그의 궁극적인 등반목표들 중 하나인 에베레스트 북벽의 단독 무산소 등정을 이루어냈다.
또다른 놀랄만한 등반업적들이 뒤를 따랐다.
1982년에 그는 한스 캐머랜더와 함께 가셔브롬 I, II봉을 횡단했으며,
1986년엔 그와 함께 로체 서벽을 등반함으로써 8000미터 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한 메스너는 고소등반에 대한 그의 관심을 극지방의 탐험과 같은 그런 색다른 대상들로 돌렸다.
1989년에 그는 알베드 퓨츠와 함께 주로 오지의 봉우리들에서 새로운 루트를 택하면서 계속 등반하고 있다.
메스너는 1972년에 우쉬 데메터와 결혼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1977년에 이혼했다.
그것은 메스너가 결국, “산에 사로잡힌 내 진정한 관념이 우리 결혼생활에 비해 너무 크단 말이야.”라고
밝힌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981년에 그의 여자친구 네나 홀귄이 그에게 딸 아이 하나를 안겨주었다.
그는 지금 사비내 스태흐래와 함께 티롤 남부의 한 작은 성에서 살고 있으며 두 아이를 두고 있다.
1979년 이래 줄곧 메스너는 강연하고, 많은 책을 저술하며, 가이드하고, 교육하고,
그리고 여러 상품들을 홍보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그리고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정상급 영화배우에 가까운 명성을 얻었다.
메스너는 많은 수염과 텁수룩한 갈색 머리카락을 소유한 마르고도 강인한 체격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야생적인 광채가 흘러나왔다.
예외적인 강건한 사람임에 덧붙여 그는 등산에서 자연보호에까지 그리고 철학에서 영화제작에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아이디어와 견해, 그리고 의견을 긍정적으로 마음껏 토론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