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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피아골 산장, 연곡사,
사명대사, 무착대
피아골.
천왕봉 방향에서 노고단 방향의 지리산 종주.
노고단보다 임걸령 거쳐 피아골 하산도 바람직.
특히, 가을 꽃 단풍 계절에는 경관이 환상적이다.
(지리산 제 2 경- 피아골의 단풍)
지리산 [ 노고단 & 피아골 ] 산행지도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계곡 단풍 = 지리산 10 경.
철쭉은 거울 같은 계곡 물에 그 고운 빛을 비추고
여름에는 햇살조차도 파고들지 못할 만큼 짙은 녹음.
가을엔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엔 눈꽃나라.
계곡 초입에 있는 연곡사와 국보급 문화재.
매표소부터 피아골 산장까지 6km 계곡 길.
피아골 산장에서 임걸령까지 2km 능선 길.
연곡사-직전마을-피아골 산장
여름철 피서지로 잘 알려졌다.
특히, 단풍 아름다운 가을에
삼홍소 인근의 계곡미는 압권.
<삼홍소>란 어떤 뜻일까?
<골짜기를 붉게 물들인 단풍의 아름다움.
<수면 위를 붉게 비추는 단풍의 아름다움.
삼홍소 주변에 수북히 쌓인 단풍의 아름다움.
"온 산이 붉고
계곡 물이 붉어
사람 마음도 붉다"
남명 조식 作., 삼홍시.
삼홍소는 삼홍시에서 유래.
<피아골 단풍제> 산신제는 10월 말.
1977년부터 계속 이어 온 연례 행사.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11월 초.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맑고 깨끗한 개울.
임걸령- 불무장등 - 피아골 - 섬진강 - 남해.
임진왜란, 한말(韓末) 격동기,
여순 반란사건, 6. 25 전쟁 등
전란이 일때마다 격전지., 피아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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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단풍은 다른 골짜기에 비해 유독 붉다.
그 단풍은 수탉의 붉은 볏처럼 싱싱해 보인다.
이곳 단풍이 고운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연곡사 아래부터 섬진강 따라 다랑이논
바깥 세상에서 살길 없어 비탈에 일군 논.
그것마저 지주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농민들.
임진왜란이 일자 왜놈들의 방화 약탈과 살인
경상도를 휩쓸고, 전라도를 더럽히려 할 무렵
피아골 입구에서 막지 못하면 나라를 잃을 판국
관군은 이미 있으나 마나 했던 상태라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농민들
거기에 승려도 합세해 연곡사에 지휘본부
의병들은 왜놈들과 맞섰지만
무기부터 비교 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섬진강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고,
힘이 모자란 그들은 피아골로 밀리게 되었다.
왜놈들은 의병들을 바위에 세우고 목쳐 죽였다.
칼을 내려칠 때마다 목 따로, 몸뚱이 따로
계곡에 곤두박질쳐 삼흥소가 시체로 넘치고,
피로 물든 계곡물이 섬진강까지 흘러 닿았다.
갑오년 농민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든 피아골.
그때도 농민들은 목이 뎅겅뎅겅 잘려 죽었다.
조정은 왜놈들을 불러들여 청부살인권을 준 것
그후 한일협약을 계기로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때 전남 의병들이 몰리다가 최후를 맞이한 피아골
여순사건 때도 피아골로 쫓긴 군중들이 피를 뿌린 곳.
옛부터 피밭[稷田]이 많아
유래되었다는 지명., 피밭골.
..........................찾아가는 길..............................................
<코스 - 1.> 임걸령 -3.5Km- 용수암삼거리 -0.5Km- 피아골 산장
-1Km-구계포계곡 -1Km- 삼홍소 -2Km- 선유교 -2Km- 직전리
<총거리 10 Km, 등반시간 3시간 40분, 하산시간 2시간 10분 소요.>
<코스 - 2.> 노고단 산장 -4Km- 질매재 -1Km- 피아골 산장
-1Km- 구계포계곡 -1Km- 삼홍소 -2Km- 선유교 -2Km- 직전리
<총거리 11Km, 등반시간 4시간 10분, 하산시간: 3시간 10분 소요>
구례군 토지면 직전리에서 노고단이나 임걸령까지 울창한 원시림
숲속의 계곡따라 14 Km 오르는 단풍등산 코스가 가장 대중적이다.
구례 또는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오면 외곡리 검문소
여기에서 북쪽 2 차선 포장도로를 달리면 좌측에 연곡천
연곡사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토지면 내동리 평도부락이다.
여기에서부터 피아골 등산로가 시작된다.
연곡사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따라 30분 가면 직전마을
피아골은 양봉 토종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
선유교 철다리 건너 계곡 우측 오르는 곳에서 식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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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산장 ( 061-782-9675 )
피아골 산장은 공포체험을 즐기기 적당한 산장
연인끼리 이곳에서의 하룻 밤은 잊지 못할 추억.
땀과 더위를 씻을 만큼 개울물이 풍부한 산장 주변.
붉은 단풍잎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피아골 산장.
산장 터에서만 인골 한 트럭이 나왔던 빨치산 격전지.
나병에 효험 있다는 인골이 많아 나병환자 몰려들던 곳.
'귀신이라도 나올 듯 음산한 기운이 감돌던...귀곡'.
밤이면, 무덤을 파헤쳐 인골의 물을 마시던 나병환자.
그 음산한 곳에 폐허로 방치되다시피 했던 피아골 산장.
1988년 산장지기로 온.. 함태식 씨.
2006년 10월 말 현재 79세 산장지기.
그곳 산장을 새로 짓다시피 개보수,
지금껏 그곳을 떠나지 않는 산장지기.
피아골 버스종점에서 도보 2시간 거리.
수용 인원은 70명, 겨울에는 9시 소등.
<1박 5000원, 침낭 2000원, 담요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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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태평양 연안이라 옛부터 나병환자 많던 지역.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병기록은 고려 고종때〈향약구급방>
천포창(天泡瘡), 양매창(楊梅瘡), 음창(淫瘡) 등이 나병.
이조 문종(1450~52)은 1백여명의 나환자를 남녀별로 수용
고삼원 약으로 치료하면서 바닷물에 목욕을 시켰다는 기록
광해군(1608∼23)은 경상·강원·충청도에 환자를 수용 치료
이조 중기에는 무속신앙도 큰 몫을 했고 미신요법도 성행했다.
주술 기도 또는 인육이나 인골에 고인 썩은 물을 약재로 사용.
하여, 나병환자가 밤중에 무덤을 파헤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하여, 피아골 산장은 나환자가 많이 몰려들기로 소문난 곳.
산장 건립할 때 발굴된 인골이 많아 귀신 나올 듯 음산한 곳.
우리나라에서 객사한 시체는 집안에 들이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대신 맺힌 한을 풀 수 있도록
굿 또는 회혼제를 지내기도 한다.
물에 빠져 죽은 원귀에게는 수혼제,
처녀귀신에게는 영혼끼리의 결혼식.
아직껏 복권되지 못한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빨치산들.
영혼마저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맴돌아야 하는 영혼들,
피아골은 비참하게 죽어간 빨치산들을 떠오르게 하는 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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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詩.....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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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 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짓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 지리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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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덤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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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산장 동쪽에 눈에 띄는 암봉의 이름(뜻 : 흰 무덤).
흰 눈에 덮이면, 하얀 무덤인 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피아골 산 아래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높아보이는 암봉이다.
그러나, 흰덤봉에 오면 고산중령에 가려진 일개 무덤에 불과.
산은 오르지 않고는 그곳을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
옛날 사명당(유정)이 피아골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곳 위에서
의병을 작전 지휘하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흰덤봉은 무장 구례군당 유격대가 훈련받던 곳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구례군당 비트.
1948년 4월 28일 구례지역 반동 숙청 사건 후
구례군당 유격대장 박종하는 전투 능력을 발휘
이현상이 이끌던 남부군 총참모장까지 지내다가
후평 반전 후 남하하다가 경찰 유탄에 맞아 사망.
남부군은 딸뜨기 능선을 따라 지리산으로 재 입산
박종하가 죽자 단 한번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남부군 지도부는 대원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오락회
달궁, 피아골 오락회에서 이현상이 직접 훈장 수여식
그 장소가 지금의 피아골산장 앞 흰덤봉 부근이라 한다.
그 후 토벌대의 동계토벌로 인해 세력이 약화된 남부군
1952년 봄에 피아골에서 보급투쟁만 하며 머물렀다 한다.
따라서, 흰덤봉 일대는 역사적으로 군사 전략 상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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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부터 지리산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의 별장지기
지금은 피아골 산장에만 전념하는 산장지기 함태식 옹.
피아골 산장은 양쪽으로 계곡을 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침볕과 저녁볕이 아주 인상에 남는 곳이 피아골 산장.
1928년 구례 출생 노고 산장지기 18년후 피아골 산장지기
1971년부터 지리산의 삶을 빼고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경력.
그가 조직한 지리산악회 활동으로 지리산은 국립공원 제1호.
국립공원 직영화로 쫓겨나다시피 했던 삶의 터전 노고단 산장.
1988년 1월4일.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 도착한 피아골 산장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이 아파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61세의 나이에 유랑길에 오른 듯 들어왔던 피아골 산장.
저녁 노을에 붉게 물혀 눈덮인 흰덤봉의 장관.
흰덤봉이 붉은 얼굴 화사한 미소로 손짓하는 듯.
함태식 옹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흰덤봉.
연곡사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에 있는 사찰 연곡사
543년(백제 성왕 21년)에 화엄사 종주 '연기조사'가 창건
................연기조사......................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에 최초로 차를 심었다는 설.
화엄사의 창건주는 연기조사는 황룡사 출신의 승려
신라 경덕왕(742~765) 때 인물인 사실이 고증되었다.
한동안 인도 승려로 잘못 알려져왔던 연기조사
연기조사는 의상대사 제자로 중국에서 화엄학을 공부
귀국하면서 차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은듯 보인다.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
그 어머니는 효자인 자식의 정성을 마시는듯.
화엄사 장륙전 삼층석탑 정면에 찻잔을 든 석물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올렸던 효심의 차를 조각.
문수보살이 부처에게 차 한잔 올리는 석굴암 조각
부처에게 차를 올리듯 우려낸 차가 최고라는 의미.
황룡사에 있던 연기조사는 왜 백제로 갔을까?
구례군화엄사기실(求禮郡華嚴寺記實)에 연기조사 기록.
이 책에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 연기조사 창건
연기조사는 인도 스님이란 기록뿐 더 자세한 내용은 없다.
연기조사가 화엄사 창건 당시 지은 해회당 대적광전(大寂光殿)
창건 당시 화엄사는 화엄도량의 대총림이 아닌 소규모의 절집.
화엄사 창건 100년 후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율사 증축
이때 연기조사와 그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리려
자장율사가 사사자탑과 함께 석등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 관한 기록의 전부
연기조사는 왜 경주에서 백제 구례로 왔을까?
당시 선화공주를 따라 신라에서 백제로 온듯..
연기조사는 문수보살 화엄경을 널리 펴겠다는 분
그전엔 불교가 융성한 경주 황룡사에서 불경을 설파.
그러던 어느날 문득 비몽사몽 간에 모자를 만났는데,
그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온 동자가 이렇게 말했단다.
"본디 스님은 화엄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그말을 남기고 두 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새 인연처 찾아 지리산에 든 연기조사.
그 부인의 형상을 본 산등성이에 지은 암자가 연기암.
연기암은 화엄사에서 2.3km 노고단 가는 길목에 위치.
그후 연기조사는 직접 만난 그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화엄사를 창건하고,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을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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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에는 기이하게 남근석이 세워져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귀신사..............................
모악산 서쪽 전주 가는 길가., 청도마을에 위치
의상대사가 문무왕(文武王) 16년(676년)에 창건.
당시 화엄종이었다는데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
백제 법왕(百濟 法王) 때에 왕실의 내원사(內院寺)
그 근거로 귀신사 경내 석수(石獸)의 남근석(男根石)
국신사(國信寺), 귀신사(鬼神寺), 또는 귀신사(歸信寺)
각각의 이름이 언제 그렇게 불리웠는지 알 수 없다.
김제~ 전주 712번 지방도로로 22km가면 원청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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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법왕은 선화공주와 사랑했던., 무왕의 아버지.
무왕은 용의 아들로서 백성들 추대로 등극했던 왕
내원사는 백제 왕실의 비구니 사찰들을 의미한다.
'남근석은 백제 왕실에 속한 사찰의 상징.'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재건 후
1950, 6.25 전쟁으로 다시 전소된다.
동부도,북부도, 국보 2점, 보물 4점.
1981년 3월 1일부터 옛 법당을 철거
신축 복원 불사가 계속되는 연곡사.
사찰 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에 관한 설화가 있다.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 법당 자리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다.
이때 연못 가운데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며 날아간 제비
하여, 연기조사는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명명 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제비 연(燕), 골 곡(谷)., '제비골 사찰'.
인도에서 제비를 타고 왔다고 알려진 연기조사.
화엄사는 화엄경의 '화엄' 두 자를 따 창건하였고
같은 해 544년(백제 성왕 22) 법계사도 창건한 고승
백제 성왕은 신라 선화공주와 사랑을 나눈 '서동.'
서동설화는 백제와 신라의 혼인동맹 사실을 반영
즉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딸의 결혼이라는 견해.
하여, 서동을 무왕이 아닌 동성왕이라 보는 설도 있다.
미륵사를 만들 때 연기설화 일부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마를 캐던 평범한 서동들 꿈을 설화로서 표현.
당시 백제는 불교문화 전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관광지 : 지리산국립공원, 섬진강,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사성암, 운조루
지리산 온천랜드, 산수유마을, 피아골, 노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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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
544년(진흥왕 5)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6·25 때 불탔고 1965년, 1981년 중건되었다.
1967년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 해체
보수할 때 하층 기단부에서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 발견.
그 유물로 보아 화엄사와 더불어 지리산에 가장 오래된 고찰로 추정.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인조 5년(1627)에 소요대사 태능이 복구.
영조 21년 (1745) 왕가에 '신주목으로 쓰는 밤나무' 율목봉 산지.
1895 년 밤나무 남벌로 승려들이 절을 떠나 폐쇄되었다고도 한다.
구한말과 6.25에 파괴되었다가 근래에 중창불사가 크게 이뤄졌다.
경내 삼층석탑과 산등성이에 있는 세 점의 부도와 두 점의 부도비
모두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꽃 피운 선종 계통의 문화유산
한편,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을사조약으로 한일합방이 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의병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
1907년 8월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를 설치
적극 의병활동을 하다가 야간 기습을 받고 순절.
피아골은 6.25 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
토벌군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은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밭이 많은 곳.
피아골 입구 구례구 토지면 내동리, 직전리 일대.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들머리 직적리.
좁은 산비탈을 억척스럽게 일궈 만든 계단식 논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일군 피 땀.
피아골 연곡사 찾아가는 길.
운조루 입구 오미 버스정류장 앞에서 하동 가는 19번 국도
약 9km 길 왼쪽 외곡리 검문소에 피아골 행 865번 지방도로
그 길 따라 7.8 km 가면 피아골 매표소, 0.4km 더 가면 연곡사
구례- 연곡사 입구 평도마을(1시간 간격으로 하루 14회 군내버스)
순천.여수 - 평도마을(하루 2회 버스 : 평도->순천.여수 10:20 15:20)
연곡사 입구 평도마을에는 단풍각( T. 0664-782-1164) 민박집, 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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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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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은 의외로 골이 깊다.
골이 깊어 피신이 용이하고
지리산 산악지대로 연결된다.
섬진강 따라 이어지는 하동과 구례
이현상이 이곳으로 거점을 옮길 때,
이미 구한말 의병들의 체험을 숙지
연곡사는 통일신라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수선도량
부도가 많아 유명한데 그 한구석에 고광순의 순절비.
찾는 이도 없고 아무 표지도 없이 쓸쓸하게 서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둘째아들 고인후의 12대 종손
1905년 을사늑약 후 일제에 항거해 일어난 호남 의병들
1906년 태인 무송서원에서 궐기한 최익현을 필두로 시작
1907년초 장성 기유만, 남원 양한규, 광양 백낙구, 창평 고광순
의병을 일으켰으나 모두 좌절되었고, 고광순 의병만 끝까지 항거.
1907년 9월 11일 새벽, 광주 진해 일본군은 연합해 연곡사를 습격.
고광순은 연곡사에서 남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처절한 항전
불원복이라고 쓴 부대 깃발을 휘날리면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불원복(不遠復)이란 '멀지 않아 국권이 회복되리라'는 뜻이다.
고광순의 죽음에는 슬픈 사연이 많다.
한말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
그 저자 황현과의 일화가 그 중 하나이다.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문장가 황매천에게 격문을 부탁.
그런데 황매천은 써주지 않았다.
황매천은 그 때를 두고두고 후회.
고광순의 전사소식을 듣고 제일먼저 달려간 황매천
같은 군에 사는 박태현과 함께 연곡사로 달려갔었다.
깨진 기왓장이 쌓여있는데, 불탄 재는 아직도 불기운.
공의 시신을 덮은 개미뚝 만한 초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터져나와 통곡을 했다.
그 밤으로 흙을 돋우어 무덤을 만들며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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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의 천개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남김없이 목숨바쳐 싸우는 열사들은 있어도
나라는 일그러지고야 마는구나.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 떼만 나무그늘 사이로 내려와 앉는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끝내 뭔 짝에 쓸 것인가.
임란 때부터 의절지킨 명가문의 성세에 감히 따를 수 없다.
홀로 서풍을 마주보며 뜨거운 눈물을 튕긴다.
새로 만든 무덤은 높이 솟았으나,
옆에 핀 들국화는 누웠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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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보다 일곱 살이나 손 아래인 매천 황현
광양 출생이지만 구례에 오래 살아 구례 유학자
만수동 생가에 매화나무와 옹달샘이 있어..'매천'
매천이 격문쓰기를 거절한 구례 월곡동 대월헌.
고광순 순국 3년 후에 경술국치를 당하게 된다.
매천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음독하며 남긴 절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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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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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매천이 고광순 주검 앞에서 쓴 싯구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뭔짝에 쓸것인가?"
황매천은 고광순 죽음후 3년간 번민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 구차함보다 떳떳한 죽음을 선택
..................매천.......................
본관이 장수(長水)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나 가계가 몰락
그러나, 아버지가 천권의 책을 집에 쌓아두고 그를 교육
1883년(고종20년) 29세에 과거응시해 초시초장에서 장원
몰락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밀린., 매천.
부패한 과거제, 당파싸움 조정 현실에 실망한 매천.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해 선비의 기개를 지키는 삶
일제가 을사 보호조약 체결로 국권을 빼앗아 자결한다.
<매천야록> <매천집> <오하기문> 등을 저술.
광양과 구례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기개있는 선비로서 이름을 남긴., 매천 황현
매천야록은 1865년부터 1910년까지 역사 자료
최익현이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해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목숨을 끊고
그 시신이 부산에 들어올 때 황현의 詩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디메에 임의 뼈를 묻사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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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에서 나와 구례쪽으로 가다보면
지리산 자락 너른 뜰 금환낙지., 명당터
장대한 아흔 아홉 칸짜리 기와집이 운조루.
1776년 삼수부사와 낙안군수였던 유이주의 집.
구한말 실상을 소상히 알려주는.. 운조루 일기.
이 대가집에는 쌀독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네모난 뒤주고, 하나는 원형이다.
그런데 원형 쌀독 밑에 새겨진 글., 타인능해
누구든지 와서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
유씨 가문 자기네 뒤주독은 비어 있어도
반드시 타인능해 뒤주독은 채웠다고 한다.
자기네는 보리밥을 먹어도
이웃에게 쌀을 나눠 주었다.
집 굴뚝은 지붕위로 솟지 않고
모두 주춧돌 밑으로 깔려있기에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는 구조.
배고픈 이웃을 배려하는 숨은 뜻.
동학도들에게, 의병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도와야만 했던 고충도 적혀있다.
"종손 아들은 도둑놈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가면서
쇠몽둥이로 머리를 심하게 후려쳐서 한 달 동안이나
의식불명으로 누워있었고 이젠 더 훔쳐갈 물건도 없다."
고광순이 순절한 1907년 겨울,
기삼연은 장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곳을 다니다 금성산성으로 피신
기삼연은 추위와 굶주림, 동상으로 문드러진 다리
이곳에서의 처절한 항쟁은 60여명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순창에 사는 사촌동생 구연의 집에 숨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순창의 이마무라 부대가 덮친다.
1908년 2월2일, 음력 설날 아침 창평 무동촌의 격전
의병은 조선왕조의 양반들과 지식인들이 일으킨 운동.
호남 의병은 타협없이 끝까지 항전했다.
무인을 천시한 양반들의 의병활동은 한계
점차 실제적인 항일 항전의 주도권은 평민
'1984년 동학 혁명 및 1919년 3.1 운동.'
.............의병장 고광순.............
고광순의 무덤은 담양 월봉산 노적봉 아래에 있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했던 3부자 후손.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를 배출한 의병장 명문가
'3백년 세월을 두고 다시 태어난 의병장 고광순.'
1848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고광순 의병장
그가 48세 되던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기우만 기삼연 등 호남지방 유림들과 창의하여
10여년 간 일제 군경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1907년 10월 16일 연곡사에서 순국한.. 고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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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
그는 이조 중기 승려이자 의병장 법명은 유정.
이름은 임응규 호가 사명당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3세 때 김천 직지사로 출가
1561년 승과에 급제하고 1575년 봉은사 주지로 천거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 서산대사의 제자
3년 간 가르침을 받고 금강산 태백산 등 명산을 순례.
충북 옥천 상동암에서 인생무상을 깨닫고 홀로 참선.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휘하에서 승병으로 활약
왜군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되찾고 권율과 의령을 탈환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혈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전공.
선조는 그 전공을 포상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 제수.
그뒤 네 차례 적진에 들어가 가토(加藤淸正)와 회담
2차 담판후 그의 상소문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
문장이 웅려하고 논리정연하며 실천방도까지 제시했다.
국방을 위해 산성구축 및 개축에도 전력.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 (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 남한산성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 (冶爐)에서
활촉 등의 전쟁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쳤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다가 선조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던 서산대사.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성공적인 외교성과
전란 때 잡혀간 3, 000 여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 귀국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던 사명대사.
정유재란 때 울산에 침공한 왜군을 물리쳤고
1604년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 강화 체결
왜군에게 잡혀간 3천5백 명의 포로와 함께 귀환
그 후 해인사에서 결가부좌한 채 해탈을 맞았다.
1610. 8. 26 설법 중 결가부좌한 채 입적.
제자들이 홍제암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
<사명당대사집>7권
<분충서난록(奮忠서難錄)>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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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를 스승으로 맞이한 사명대사.
두 고승 사이에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금강산 장안사로 사명대사가 올라가고 있었다.
"서산대사 도술이 높다 해도 나보다 못하리라.˝
사명대사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장안사에 들어섰다.
그러자 곧 법당에서 한 스님이 나왔다.
사명대사보다 스물 셋이나 많은 서산대사.
서산대사가 사명대사를 맞이하러 나온 것.
사명대사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잡고 외쳤다.
"대사님, 지금 제 손의 참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새는 죽을 운명일까요, 살아날 운명일까까요?˝
"대사! 지금 내 한 발은 법당, 다른 한 발은 법당 밖
지금 나는 법당으로 들어갈까요, 아니면, 나갈까요?˝
"그야 나오시겠지요."
˝허허, 그 말씀이 옳아요.
멀리서 수고스럽게 오신 손님인데
당연히 내가 나가서 맞이해야 겠지요.
그리고, 불자의 살생이란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인사 후, 본격적 도술 시합을 벌였다.
사명대사는 바늘로 국수를 만들어 담은 그릇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바늘국수를 먹고나서 서산대사에게도 권했다.
서산대사는 먹던 국수를 다시 바늘로 만들었다.
사명대사는 이번엔 계란을 꺼내어 쌓아 올렸다.
서산대사는 계란을 공중에서 거꾸로 쌓아 내렸다.
사명대사는 놀란 마음을 숨기고 하늘을 향해 합장.
맑던 하늘에 먹구름을 불러 번개와 비를 내리게 했다.
"대단하시군요.˝
"대사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산대사도 합장을 했다.
그러자 먹구름이 밀려나고 비는 거꾸로 올라갔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에게 제자로 삼아 줄 것을 청.
두 대사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전쟁에서 큰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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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이름은 임응규였고 어려서부터 총명.
주변 사람들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나중에 스님이 되어 그는 수염을 길렀는데,
허리까지 이르러서 왜군은 그 기상에 압도
15세 때 어머니, 이듬해 아버지마저 운명한다.
이 때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겼다.
결국 17세 때 충청도 황악산에 있는 직지사에 출가.
1592년에 임진왜란때 앞장서서 승병을 이끌고 출전.
사명대사는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하는 병법에 능통.
그는 승병을 이끌고 적을 맞아 수많은 공을 세웠다.
1594년 사명당은 회담 차 적진에 세 번이나 들어갔었다.
이때 적장 가토오가 사명대사에게 물었다.
"조선의 보배는 무엇이오?"
"우리나라 보배는 바로 당신의 목."
"무엇이라고요? "
" 조선에서 당신의 목에 엄청난 상금이 걸렸오.
당신의 목을 갖게된다면 상금도 상금이려니와
이 전쟁도 끝날 터이니 그 어찌 보배가 아니겠오?"
가토오는 사명당의 담대함에 그만 간담이 서늘.
사명당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수많은 공로
전쟁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와 평화회담.
일본을 휘어잡고 있던 도쿠가와나 벼슬아치들
일본 국민들도 사명당의 도력과 슬기에 압도.
평화가 오자 선조의 벼슬 제의도 거절하고 입산.
성직자의 참전을 불허하는 고대 인도의 불교 풍습
국가 위기 앞에서 불교의 가치관을 버린 사명대사.
국난 앞에서 스스로 갈등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명대사는 지리산의 사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
피아골 산장 동쪽의 흰덤봉은 승병 작전지휘 본부.
덧 말.
임진왜란 승병 지휘사령부는 북한산 중흥사.
고려 때 보우 국사가 가람을 중창했던 중흥사.
갑오경장(1895년)으로 의승군제(義僧軍制)가 폐지
그전까지는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던 승군 총본영.
중흥사는 1905∼1915년 일제 때 불 타 소실된 사찰.
'2005년 11월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
무착대.
...........피아골에서 사라진 옛 암자들...........
임진왜란 당시 피아골 주변에 사찰이 많았을 듯.
<산중일기> 기록 속 피아골 일대 사라진 옛 절들
길상대암, 금류동암, 금강대암, 오향대
삼일암, 무착대, 천주암, 양진암. 수월암
금선대(금강대암 주변 암자), 법왕대(금선대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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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도처로 변한 무착대는.. 옛 암자 터.
핏빛 단풍의 절규 속 애환이 물들어 있는 피아골
그곳 지류 중 하나 도투마리골 이름이 참 흥미롭다.
도투마리란 날실을 감는 베틀 채머리 위 틀(장구 모양)
골짜기가 도투마리처럼 허리가 잘록해 붙여진 이름
직전마을 솔봉민박집 뒤 기지국 안테나가 있는 능선.
도투마리골 하단부는 넉넉하지만 오를수록 좁아진다.
넓은 반석 위에 움푹 패인 큰 절구통처럼 생긴 구멍.
여기에서 계곡 왼쪽 해발 600m 지점.. 1차 합수점
계곡 건너 오른쪽 산죽사이로 해발 670m 바위 군락
비박하기 적당한 계곡은 도투마리 허리처럼 가늘다.
산죽사이로 열린 길따라 이어진 널널한 공터..초원.
바로 그 초원 윗쪽이 해발 1300m에 가까운 불무장등
도투마리골은 불무장등, 솔봉장등 사이에 있는..지계곡.
솔봉장등으로 내려서다 직진마을 방향에 있는 무착대
반야봉과 삼도봉이 가까이 있고 서쪽 방향에는., 노고단
불무장등과 왕시루봉 능선을 번갈아 보며 내려서면 무착대
산허리를 돌아 돌팍을 밟고 들어서면., 기도처 무착대.
당귀와 무성한 풀, 단풍, 보랏빛 향기를 지닌 용담, 샘터.
지금은 허물어져 인적을 느낄 수 없는 기도처의 옛 흔적들.
마음 속 집착과 탐욕을 버리는 기도처., 무착대.
살다보면 남보다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집착과 탐욕.
단 한개 만으로도 충분한데 그 이상을 갖고 싶은 집착.
살림살이가 늘어 집 공간이 비좁아도 가득 채우고픈 탐욕.
무착대 전망바위 쉼터에 앉아 바라보는 피아골과 왕시루봉
왕시루봉 능선을 내려서며 시야에 들어오는 무덤이.. 하나 둘.
도투마리골로 내려와 직전마을 지나 피아골을 빠져나오면 섬진강
나그네길 - 가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 일랑 두지말자 미련 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 최희준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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