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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을 꽃집 여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접고 길을 이어 갔다.
묘지 지역를 벗어나면 바로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São Salvador de Grijó)가 우측의
노변에 자리하고 있다.
로저가 고집(자기 집에서 자고 가는)을 포기했더라면 하루 묵었을 그리주의 공동숙소(알베르게)다.
순. 역 방향 모두 뽀르뚜가 15km쯤의 거리라 엉거주춤한 위치다.
뽀르뚜갈의 제2 도시지만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는 제1의 중간지점이라 인근에 이르면 조급증(?)이
발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알베르게 앞에서 잠시 동진하다가 남하하는 에르무 길(R. Ermo)을 따라서 고속도로(A1, E1, IP1)
밑(地層)을 입체 통과하는 까미노 뽀르뚜게스.
남하를 계속하며 소 교구(freguesia) 그리주에 속한 작은 마을 샤무스까(Chamusca)의 산따 히따
예배당(Capela de Santa Rita)을 지난다.
까뻴라 중에서는 드물게 규모가 크고 미려한 건물이다.
이 지점에서 파하빠 길(R. Farrapa~Tv. Farrapa)~로레이루 지 바익쑤 길(R. Loureiro de Baixo)
~꼬스떼이라스 길(R. Costeiras) 등 동남향으로 이어 가는 까미노.
꼬스떼이라스에서 분기, 남하하는 우르바니자상 플라비우 아빌라르(Urbanização Flávio Avelar)
길을 따라 현계(縣界/distrito)를 건넌다.
뽀르뚜 현(Porto)에서 아베이루 현(Aveiro)으로.
북부지방 최대의 지자체 빌라 노바 지 가이아의 그리주에서 아베이루 현에서 가장 큰 지자체인 산따
마리아 다 페이라(Santa Maria da Feira)의 노게이라 다 헤제도라(Nogueira da Regedoura)로.
행정구역(地圖)은 이러하지만 실제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막연한 지역이다.
경계를 알리는 아무 표지가 없기 때문에 어림으로 짐작하며 남하할 때 돌연 시장기가 들었다.
로저의 정성에 감복하여 까미노에서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일상(日常)을 깨고 간단히나마(우유와
바게트1쪽+커피) 먹었는데도 점심때 이전(11시반쯤)에 이런 느낌이기는 드문 일이었다.
장기(長期)등산과 보행 때 체력 관리의 한 방편으로 길들인 육류의 주기적 포식 습관의 주기인 어제,
포식에 하루의 휴식을 더했으므로 15km쯤을 가볍게 처리한 아침나절이었건만.
체계적 계획에 의한 개발이 아니기 때문인가.
까미노는 전체적으로는 남남동(Via de la Plata)과 남(Portugues)으로 남하하는 형국이지만 이어
지는 길들이 종잡을 수 없다.
뽀르뚜갈 만의 전통적 돌포장 길과 포장 소로를 수시로 갈아타기 때문에 방심 금물의 길.
가로질러 가야 하는 고속도로(A41,IC24)가 목전으로 다가오는 알미냐스 길(Av. Alminhas)에 들어
설 때 내 옆으로 서행하는 트럭을 세우고 물었다.
근처에 음식점이 없느냐고.(Hay restaurantes cercanos)
영어 물음에 반응이 없는 그에게 스페인어로.
내가 뽀르뚜갈 말을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역시 그의 무반응에 퍼뜩 떠오른 단어는 '헤스따우란치'
(restaurante/뽀르뚜갈어로 음식점)
산따 히따 예배당에서 1.5km 쯤을 두리번거렸으나 음식점 표지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뿐 절박한
상태는 아니었는데(3일전에 뽀르뚜에서 구입했기 때문에 굳었으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버리지 않
은 바게트 1토막이 백팩에 있으니까) 그 운전자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20여m 전진해 섰다.
각종 화분을 비롯해서 종묘와 생기 넘치는 갖가지 꽃들이 빼곡한 퀀셋(Quonset) 건물 앞이다.
"Viveiros Feira Norte"(비베이루스 페이라 노르떼/Av.das Alminhas, 224-Olivães 4500 Nogue
ira da Regedoura) 앞.
노게이라 다 헤제도라(Nogueira da Regedoura/Aveiro 현의 지자체 Santa Maria da Feira의 소
교구마을)에 속한 작은 마을 올리방이스(Olivães)의 종묘 및 원예용품점이다.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온 트럭 운전자는 평화로운 낙원에 다름아닌 이 꽃집의 주인?
그는 나를 건물 안의 꽃들 사이에 따로 꾸며놓은 휴게탁자로 안내하고 장정의 주먹만큼 크고 싱싱한
오렌지 몇개를 내 백팩이 넘치도록 넣어주고 어디론가 갔다.
낙남정맥 종주 중 정촌(진주시)의 배 농원을 통과할 때 만난 주인(제해룡)을 생각나게 했다.
그 때, 제해룡도 그랬는데.(메뉴 백두대간과 9정맥의 낙남정맥 참조)
정오가 다가오면서 기승부리기 시작한 더위를 잊은 잠간 사이에 찾아온 졸음을 쫓고 있을 때 여인이
햄 보까디요(bocadillo/sandwich) 2개와 냉 음료수 1병을 담은 쟁반을 들고 왔다.
후덕해 보이며 몸이 나기 전에는 매우 아름답고 이지적이었을 이미지인 중년녀.
언행으로 보아 여주인(나를 안내한 운전남과 부부)인 듯 한데 남자와 달리 스페인어와 영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 역시 꼬레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단다.
이따금 듣기는 해도 관심이 없기 때문인지 기억되는 것이 없다고.
되감은(rewind) 테이프 처럼 되풀이로 듣는 것은 "81세에 무거운 백팩을 메고 많은 날을 계속해서
걷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여인도 그랬다.
'경이롭다'는 단어(영어wonderful, 스페인어maravilloso)를 반복하며.
극동인은 시나(china/중국인)와 자뽀니스(japonês/일본인), 양자 중 하나다.
이같은 고정관념이 굳어있는 그들에게 꼬레아누(coreano/한국인)를 직접 대면해 호의 베풀 기회를
내가 만들어 주었다 할까.
이로써, 나는 극동은 꼬레아를 포함한 삼국의 정립 지역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더구나, 그들의 말대로 상상조차 못할 만큼의 늙은이라 결코 잊혀지지 않을 충격적 감동으로.
국내에서는 반정부적 비판자라도 해외에 나가면 외교관이 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은 물론 수사적
과장도 아님을 무시로 확인하게 된다.
시장했는데도 겨우 1개를 먹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만든 보까디요.
은박지를 미리 준비해온 여인은 남은 1개를 냉 오랜지 주스 1병(1L)과 함께 내 백팩에 넣어주었다.
묵직하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은, 순도 100%의 친절한 호의를 간직하고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에 이어 한낮에도.
개선되어야 할 뻬레그리노스의 매너(manner)
고속도로 밑을 통과한 까미노는 알미냐스 길을 떠나서 바이후 마누엘 리마(Bairro Manuel Lima),
조아킹 도밍게스 마이아(R. Joaquim Domingues Maia)를 비롯해 혼란스럽게 난 길들을 따른다.
지형 따라 집들을 짓고 그 주민들의 편의성에 맞춰 조성된 길을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룰루랄라였다.
원인 모를 시장기를 해결하였고, 필요한 곳마다 노랑 화살표 못지 않게, 곳에 따라서는 노랑 보다 더
많이 붙어있는 파랑 화살표에 대서양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명나게 걸을 수 있으니까.
그 덕을 본 사람은 멀대 같은 가나다인 뻬레그리노였다.
'뽀르뚜 ~ 파띠마' 구간은 '뽀르뚜 ~ 산띠아고' 와 달리 역 방향(파띠마) 순례자가 절대적으로 많은데
홀로 걸어오고 있던(순방향) 젊은이가 대뜸 한 말은 '재퍼니스?'(Japanese/일본인입니까)
그랬음에도 관대할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기분이었다.
단순히 국적을 물어도(where are you from 또는 from where / de dónde eres 또는 de dónde)
언짢은데 일본인으로 단정하다니?
이런 경우, 여느 때라면 호통치는 것이 당연한데도 타이르고 사과받는 것으로 끝냈으니까.
까미노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프랑스인 외에는 남녀 노소 너나 없이, 초면 구면이나 친소에 관계 없이, 아침 저녁 시도 때도 없이,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가리지 않고 하는 스페이어 인사말이 있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프랑스인은 자기나라 말 봉주르bonjour를 고집하는 유난을 떨지만)
축자적인 뜻은 '좋은(바른) 길' 이지만 모든 순례자가 하나같이, 한결같이 피차 축복의 순례길이 되기
를 빌어주는 말이다.
이처럼 모두가 모두에게 다정다감한데, 서로가 국적이 궁금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미리 건너짚거나 묻는 매너는 뻬레그리노스 간에 개선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전자는 절대 금물이며 후자의 에티켓(étiquette)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갈이천정(渴而穿井/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이라잖은가.
굳이 상대편의 국적을 알고 싶다면 예의스럽게 물어야 한다.
경찰이나 수사담당자들이 하는 직설적 화법은 인격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경우를 하도 많이 겪으면서 대응 용어를 개발(?)했다.
고함지르듯이 '녹'(no good의 약자) 하는 것.
의외의 내 독특한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는 상대편이 과오를 자각하거나 어떤 형식의 용서를 바라면
비로소 예의 갖추기를 주문한다.
실은, "연출이나 진행 착오로 녹음 녹화가 잘못된 것"을 말하는 일본식 영어(쟁글리시/Janglish 또는
재플리시/Japlish)의 N.G.(no good/일본어 발음은 에누지/エヌジ)를 차용한 것이다.
한데, 서울 여의도의 방송가(街)에는 일본의 압제를 받지 않은(태어나기 전이니까) 연령층의 한국인
중에 이 쟁글리시를 발음(에누지)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그 계통(방송)의 종사자들이 적지 않다.
그래야만 관록이 있어 보이기 때문일까.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이 바로 바른말 고운말 쓰기와 일제의 잔재 청산에 앞장선 기관의 사람들이다.
하긴, 내 과거에는 더 큰 허물이 있기 때문에 내 말은 숯이 검정 나무라고, 사돈 남 말 하는 꼴이다.
(1960년대 중반, 내 나이 30대 초에 굴리던 펜대를 내던지고 주택 건축에 투신한 적이 있다.
소위 화이트칼라(white-collar)에서 불루칼라(blue-collar)로 스스로 내려간 것.
밑천이 달리기 때문에 소규모로 시작했는데, 전문지식과 경험이 전무한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맨
먼저 한 일은 토목과 건축의 현장, 즉 노가다판에 뛰어 드는 일이었다.
'노가다'란 영어의 노(no/없다)와 일본어 카타(かた/型)의 합성어로 닥치는 대로 하는 '막일', 도카타
(どかた/土方/막일)의 와전 등으로 알려져 있는 비속어다.
그 당시의 노가다판은 서울 성북구의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現 강북구와 도봉구) 허허벌판으로 밤낮
없이 24시간 강행하는 토목과 건축의 공사 현장이었다.
여기에서 통용되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감독 밑에서 익힌 노동자들이 소위 왕초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의 일본식 발음 일색이었다.
그래서 이 용어들을 모르면 천덕꾸러기가 되거나 퇴박맞기 딱이었다.
그러므로 이 공사판에 목줄을 걸으려면 너나 없이 당치 않고 어처구니없는 이 말들을 익혀야 했다.
더구나 갑(甲)이 되려면 관록(?)이 있어 보여야 하는데 그 말 사용이 필수였다.
그렇게 했음에도 김신조 일당의 남침으로 백일몽(白日夢)이 되고 말았지만)
까미노(Camino de Santiago)로 선정된 로마 길
잠시 동진하여 국도1호선(N1/Estrada Nacional nº1. IC2) 도로를 횡단, 중국인의 쇼핑몰을 끼고
돌아서면 쎈뜨랄 다 베르가다 길(R. Central da Vergada)이 되어 남남동진하는 까미노.
안정적 취락이 형성된 국도변에 넓게 자리한 이 건물에서는 중국인 특유의 상혼이 물씬 난다.
모든 까미노에서 중국인 소유의 상점은 거개가 노른자 또는 전망이 밝은 위치에 있다.
이베리아 반도뿐 아니라 전 유럽, 지구촌 전체를 망라해서 중국인의 필적 상대는 과연 없는가.
평범하게 곧은 차로(R. Central da Vergada)를 따라가다가 국도에 합류한다.(순방향은 分岐)
작은 마을 베르가다(Vergada/지자체 Santa Maria da Feira의 소 교구 마을 Mozelos에 속해있는)
의 성모 상(Nossa Senhora dos Caminhos)이 자리하고 있는 지점이다.
까미노는 함께 하던 국도(N1, IC2/0.5km)와 헤어진다.
소 교구마을(freguesia) 로루사(Lourosa)의 N326 도로가 분기하는 로터리에서.
옛길 중 옛길, 역사가 가장 오래 숨위는 로마 길(R. Romana/1.5km쯤?)을 걷기 위해서다.
'로마시대의 길'이라는 역사적 길을 걷게 하려는 까미노 뽀르뚜게스 기획자의 배려?
이 길을 걷는 잠시 동안에 내 특기인 의구심이 발동했다.
파괴와 개발이 주특기가 된(파괴는 재건의 어머니?) 우리나라라면 이같은 길이 남아 있을까?
잔존(保存 아닌 殘存)하는 10대로(十大路/朝鮮時代의 큰 길)가 답이다.
일제는 조선혼(魂)의 말살과 효율적인 수탈 정책 수행의 일환으로 이 옛 길 위에 새 길을 만들었고,
이 신작로(新作路)는 일제의 잔재 청산주의에 걸려 무참히 도륙되었다.
반상(班常)을 막론한 우리 선인들의 애환으로 반죽된 이 옛 길이 길답게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한데, 이베리아 반도인들(에스빠뇰과 뽀르뚜게스)은 배알도 없는가.
로마제정의 압제에 미련이 남아있는 그들인가.
나를 당황하게 하고 충격적이게 한 것은 이 좁고 낡은 로마 길(Troço de Calçada romana)이 그들
(Lourosa마을 주민)에게 세습재산(Património)이라는 사실이다.
허약하여 로마제국에 먹힌 조상을 거울 삼기 위해 정신적인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같은 의문으로 내 관심을 끌어간 로루사.
총 주민수가 10.400명(2011년현재)인 이 마을이 문서상에 나타나기는 1009년이란다.
뽀르뚜갈의 국가 형성 이전에 존재한 마을임을 의미한다.
현대에는 '3C'(3개의C/Capital City of Cork)로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세계 제1의 코르크 산업국(뽀르뚜갈)에서 강력한 존재로 부상했다는 것.
이웃인 뽀르뚜갈 와인의 메카(Mecca/Vila Nova de Gaia) 덕(병마개)을 톡톡히 보고 있는가.
무척 더운 날씨.
무더위의 기승이 분초도 쉬지 않고 더욱 거세어가는 한낮.
시에스따(siesta/한낮의 휴식)가 없는 뽀르뚜갈.
떼어놓는 걸음걸음이 수은주의 눈금을 올리는 남행 길.
걸음을 잠시나마 멈출 수 밖에 없을 때 적시에 나타난 스낵 바르 '도씨 로마나'(Doce Romana).
로마 길을 훼손하거나 축소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주택(아파트), 근린시설 등 부분적인 개발이 진행
되고 있는 듯 한데 신축 복합건물에 차린 가게다.
내게(當時)는 이름(doce/달콤) 보다 더 달고 오하시스(oasis)에 다름아닌 집.
수페르 복(Super Bock/뽀르뚜갈 제1의 맥주) 1병(mini)을 단숨에 마셨다.
덤으로 나온(늙은이라?) 쿠키(cookie) 1개를 먹으며 1병 더 마시려 하는데 백두대간 지리산의 백발
쭈그렁 노파가 홀연히 나타나 막았다.
백두대간 종주때 마다 들러서 맥주와 막걸리를 마시던 지리산 자락, 매요리 가게의 주인 노파다.
한여름에 맥주 1병 마시고 거푸 주문하면 막걸리를 들고 와서 하는 말.
"맥주 먹고는 고남산(백두대간 지리산 외산) 못넘어"(메뉴 '백두대간과 아홉정맥' 117번글참조)
자기 장사보다 늙은 나를 걱정해 주던 할매가 지구 건너편 끝 뽀르뚜갈의 헤가뚜(Regato /소 교구
Lourosa의 작은 마을) 까지 따라와서 간섭(?)할 줄이야.
환영(幻影)이라 해도 지당한 충고라 토달지 못하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이열치열이라잖은가.
까미노 뽀르뚜게스에는 백두대간처럼 해발 1.000m 안팎의, 넘어야 할 산이 없으며 더구나 로마 길
은 오르내림이 있다 해도 길을 신설할 때 깎고 메워서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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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로마 길.
기원 전후 500여년간에 걸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증거의 길이다.
로마의 유대 총독인 빌라도(Poncio Pilato)에 의해서 예수가 처형된 후 황제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의 기독교 대 박해(AD 64)가 시작되었다.
극악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Valerius Diocletianus) 황제 때(AD303)까지 복수(複數/10번이상)
의 대 박해에 기독교는 존망의 기로에서 사경을 헤멜 지경이었다.
그랬는데도, 그 후손들은 로마의 '로' 자만 봐도 분노가 치솟으려 할텐데도, 착취와 핍박의 극대화를
위해 만들었던 그 길들을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보물처럼 보전하며 애지중지하고 있으니.
이에 더하여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사도 야고보의 대표적 선교여행길이라는 길(Camino de San
tiago)의 선정에 그 길들이 최우선되고 있다니.
우리 현대사의 일부도 일제의 압정으로(식민통치) 얼룩져 있다.
그 잔재의 청산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우리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아이러니(irony)다.
일제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보존 가치가 충분한 건물을 흔적도 없게 헐어버리고, 일본인이 만든 신작
로의 말짱한 교량 옆에 새 다리를 놓고 의미 없는 새 길을 내는 우리에게는.
청산하였다 하나 우리의 일상에서 끈질기게도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부실공사로 인하 기술력의
부재 또는 낙후만 노정하고 있다.
일제의 다리는 아직도 건재하지만 그 옆에 대한민국의 기술로 건설한 새 다리는 붕괴 위험의 진단을
받고 통행 금지에 이어 철거 대기 중이니까.
일본의 압정 36년은 로마 제정 500년에 비하면 7.2%에 불과한 기간이다.
500년은 36년의 14배나 되는 엄청난 세월이다.
그러나 이같은 수치만의 단순 비교는 의미 없다.
압제의 유형, 그 양과 질, 강도가 원시적이었던 당시(2천년 전)의 500년에 비해 이 시대의 학정 36년
이 되레 긴 세월이며 같은 정복자라 해도 로마인과 일본인의 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반도는 대륙으로 진출하고 제국의 야욕을 달성하려는 섬나라 일본에게 필요 불가결한 땅이다.
이것은
지정학적 운명이다.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불응을 빌미로 조선을 친(임진, 정유의 왜난/
1592년과1597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때로 부터 300여년 후에 1차 목표(조선의 병합과 전진기지化) 달성에는 성공하였으나 제2차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것은 무모한 야욕의 결과다.
로마는 제국의 확장과 안정을 위한 역점 과제 중 하나로 도로를 꼽았다.
그래서, 그들의 도로는 제국의 말발굽이 찍힌 모든 지역(국가)으로 뻗어나갔다.
그런 까닭에 군대의 신속한 이동과 원활한 교역에 절대적인 도로망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베리아 반도(Espania와 Portugal)와 유럽 전역은 물론 아프리까까지.
군대의 이동은 정복지 확장과 안정적 통치를 위함이고, 교역은 미사(美辭)일 뿐 대량의 수탈물(포도
주, 올리브油와 양모, 금, 석탄 등등)을 신속하게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이동 병력의 규모와 중요 수송 물자의 양에 따라서 도로의 형태도 달랐다.
이즈음의 표현으로 대별하면 군사도로와 일반도로, 고속도로와 국도 및 지방도, 기타 세분화 하는
이름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토목 공학, 특히 도로와 교량 건설에 정통했다.
마드리드 길, 세고비아(Segovia/Castilla y León지방 Segovia주의 州都)에 건설했으며 1985년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꾸에둑또(Acueducto/水道橋)가 대표적인 입증 실물이다.
로마 황제 트라이아누스(Marcus Ulpius Nerva Traianus/재위98~117년) 때에 건설했으며 1906
년까지 사용했다니까 2개의 밀레니엄 동안 사용한 고공 물길 다리다.
2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도 끄떡없는 웅장하고 장엄한 수로 석교.
까미노(Caminos de Santiago)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 도로들(Via Romana)중에서 지극히 일부를
차용하고 있는데 그 길(로마길)도 다양하다.
프랑스길 '깔사다 데 꼬또(Calzada de Coto) ~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의 일부가 지나가는 로마 길은 비행기 활주로를 연상하게 한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와인을 수송하던 길 중 살아있는 23km의 극히 일부라는 이 구간에
비하면 뽀르뚜 길이 차용 중인 로마 길은 골목길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잠간 사이에, 겨우 1.3km 만에 로마 길에서 이탈하는 까미노.
로마 길 2434(R. Romana 2434)에서 헤알 벤다스 노바스 길(Estr. Real - Vendas Novas) ~ 헤알
구알따르(Real Gualtar) ~ 헤알 페하달(Real Ferradal) ~ 아리에이루(Arieiro) 등의 길을.
마리아 안젤라 호사 두 꼬뚜(Maria Angela Rocha Do Couto/슈퍼마켓) 앞까지 2.7km다.
남남동향 까미노는 시골 마켓답게 촌스런 슈퍼를 지나 곧 다시 로마 길을 탄다.
의도적으로 정비를 하지 않는 것인지 새로 조성된 길과 확연히 대조되는 오르내리막 옛길이다.
개발 제한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N223도로를 건너 다시 국도(N1, IC2)에 합류하기(Rua da Malaposta 12)까지 1.5km.
띠동갑 영감의 호의, 그러나 본의일 리 없는 오도
횡단하는 N223도로의 우측 코너(순방향은 좌측)에 자리한 2층 건물이 눈에 또렷이 남아 있다.
흔하지 않은 아줄레주(azulejo/blue colored)라 그럴 것이다.
한 집 지나 있으며 약간 무디어 가는 듯 했으나 여전한 불볕을 피할 자그마한 가게.
간판에 조그맣게나마 'Bar' 라는 업태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낡은 시설이기는 해도 한낮에
들렀던 스넥 바르(Doce)와 유사한 듯싶은 가게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서 약간의 토스트를 먹고 맥주 한병을 또 마셨다.
남으로 갈 수록 더 더운 철에, 위도 상으로 이 때보다 더 남으로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파띠마로 가느냐고 묻는 듯 한 주인 영감의 말에 '리스보아'(a Lisboa)라고 답했다.
(그는 영어는 물론 이웃인 스페인말도 못하는 토종 뽀르뚜게스)
그 곳(Fatima)을 경유할 것이므로 싱(sim/yes) 또는 si(yes의 스페인어) 하면 될 텐데 왜 그랬는가.
무리(떼를 지어)로 가는 파띠마 순례자들에 대한 불편한 정서(心氣)의 표출이었을까.
시코쿠 헨로(四國遍路/日本)에서도 레이조(靈場)의 분위기를 소란스럽게 하는 대형 버스편 헨로상
(お遍路さん)들에 심기가 편치 않았으니까.
백지에 무언가를 정성껏(?) 그린 주인 영감.
말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나를 위해서 다음 숙소(albergue)의
위치 약도를 그린 것이다.
능히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자상하게 그렸으며 여의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약도였다.(소중한 품목 중 하나가 될 이 약도도 도둑에 당했다)
이 약도를 들고 내게 다가온, 고마운 그와 주고 받은 유일한 말은 나이였는데, 공교롭게도 우리는 띠
동갑(69세와 81세/당시)이다.
흔하게 듣는 시니스(chinês/중국인), 자뽀니스( japonês/일본인) 시비가 전혀 없었다.
그 이유가 언어불통에 있다면 아이러니다.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닌 그것(언어불통)을 바라야 하니까.
섣부른 의사 소통으로 기분 망치지 않고 한결 약해진 불볕을 상대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재개된 1.5km 로마 길이 끝나고 다시 2.6km의 국도(N1, CN2)가 된 까미노 뽀르뚜게스.
획정된 까미노의 최초의 길은 로마 길이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뽀르뚜 길(Camino)이 된 로마길은
대로(大路)가 대부분인 프랑스 길과 달리 소로(小路)에 속한다.
까미노 처럼 특정 의미를 가진 길 외에는 일상의 편의를 위해서 조성되는 것이 길이다.
그러므로 취락의 형성과 더불어 생성되며 공헌도에 따라서 길의 규모가 결정된다.
국도급(級) 도로 이상은 국가적인 계획의 길이다.
까미노는 이 모든 길을 망라하고 있으므로 이 길들과의 이합(離合)이 무상하다.
대부분의 까미노는 기존 도로들을 이용하고 신설 도로들 역시 기존 도로들을 흡수하거나 확장 또는
직선화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합을 피할 수 없다.
이 지역 3.1km(0.5km+2.6km)의 뽀르뚜게스도 국도화 되었다가 다시 신설국도(N1, CN2)에 흡수
당한 구간이다.
차량의 왕래가 많지 않고 갓길(路肩road shoulder)이 보행자들(peregrinos)의 안전을 지켜주기는
하나 밋밋한 길이며 자동차의 판매와 수리 등 차량 관련 업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길이다.
노령(路齡)이 오래지 않기 때문인지 까미노 특유의 분위기도 풍기지 않는다.
오래된 길에는 뻬레그리노스가 오가며 설치한 갖가지 표지들이 즐비한데, 국도의 진입(순 방향은 탈
출) 지점과 중간쯤의 가장자리에 있을 정도니까.(mini Altar, Shrine 등이)
소 교구마을 이스까빵이스(Escapães)를 지나는 국도변 음식점(Restaurante Concorde)의 맞은편
길(R. Dr. Domingos da Silva Coelho/우측)로 국도를 벗어나는 까미노.
서남향(西南向)하여 N223도로 위를 입체로 가로지른 후 곧 직각으로 좌회전하는데 바야흐로 긴장
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일정의 곳곳에 숨겨놓은 시간은 한낮의 무더위에 진즉 소진되었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베르게는
가도가도 같은 대답이니 긴장될 수 밖에.
지리멸렬되듯 한 골목길들은 방심하거나 조급하지 않으면 되지만(노랑, 파랑 화살표가 사이 좋게 있
으니까) 하나같이 같은 답변에 대상이 모호한 불만이 쌓여 가고 있는 듯 했다.
하루 해 동안 걸으면서 교회 다운 유일한 교회(capela 아닌 Igreja)를 지났다.
소 교구마을 아히파나(Arrifana)의 성모승천교회(?/Igreja Matriz de Arrifana/ Igreja de Nossa
Senhora da Assunção).
약도를 그려준 영감네 가게 직전의 건물처럼 외장(外裝)의 주색(主色)이 우리 주변에서는 드물게 보
는 아줄레오(azulejo)라 그랬을 것이다.
해가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데도 목적지(Oliveira de Azeméis의 Bombeiros Voluntários)는
10km쯤 전방이라니 걷는것 외에는 눈을 주거나 딴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게 되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으나 임박하고 있다고 생각되던 알베르게 마을은 아직도 요원한 듯 하니.
어이없게도, 오로지 영감이 권(勸)한 올리베이라의 봄베이루스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밤에
확인된 까닭이었다.
뻬레그리노스 전용 알베르게가 없는 곳에서는 늘 해온 대로 내 집을 세우면 된다.
그럼에도 봄베이루스가 제공하는 알베르게라는 새 체험의 인력이 워낙 강했다.
이 교회 지근에도 봄베이루스(Bombeiros Voluntários De Arrifana)가 있으나 그 업무(알베르게
제공)를 하지 않는다고 영감이 말했으니까.
남하를 계속하여(R. da Fundição) 국도(N1)에 합류했다가 이합을 거듭해, 지자체 산따 마리아 다
페이라(Santa Maria da Feira)에서 지자체 상 주앙 다 마데이라(São João da Madeira)를 지났다.
단일 마을 소 교구(freguesia)로, 뽀르뚜갈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살기 좋은 지자체 중 하나"(uma
dos melhores municípios para se viver)라는 마을이다.
거의 완전한(통합된) 무선 서비스(integral wireless)를 제공하는 뽀르뚜갈 최초의 지자체(2012년)
답게 인구의 증가 현상이 뚜렷하다니까.
'신발의 수도'(Capital do Calçado)로 불릴 만큼 신발과 모자(chapéus) 제조업으로도 유명하며.
이 곳에는 뻬레그리노스 전용 알베르게(donativo)가 있으며 오 늘 아침까지도(로저의 집에서도) 내
하루의 마감 예정지였다.
낮에, 가게 영감의 소개가 있기 전까지도 그랬는데 그(영감)가 내 예정을 바꾸게 함으로서 지나쳤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상 주앙 마데이라의 자원봉사 소방서도 알베르게를 제공하고 있다는데 고의일
리 없는 영감이 한 실수(誤導)의 결과였다)
"Os Bombeiros oferecem, algunas localidades, alojamento.
Não é essa a vocação dos Bombeiros, mas fazem-no num espírito de serviço."
(Firefighters offer accommodation in some locations.
This is not the vocation of Firefighters, but they do it in a spirit of service.
소방관은 일부 지역에서 숙박 시설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소방관의 소명은 아니지만 봉사정신으로 합니다)
위의 글은 소방관에게는 순례자를 맞이할 의무가 없다.
그러므로 여의하지 않을 경우를 깨닫는(理解) 것은 순례자의 몫이라고 봄베이루스 측이 천명한다.
소방관들의 이 봉사 프로그램은 뽀르뚜갈에만 있는지 스페인에서는 체험하지 못했다.
뽀르뚜게스 중에서도 뽀르뚜 ~ 파띠마 구간에서만 발휘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심하게 고생한 까닭은 뽀르뚜갈인 대부분이 이 봉사 프로그램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며, 이에 더하여 의도적일 리 없는 약도의 오식 때문이었을 것.
가게 영감이 올리베이라(Oliveira)를 오베이로(Oveiro)로 적었으니까.
노상 주차장에서 약도를 보여주며 위치를 물었을 때는 달갑잖은 듯 짜증스런 표정이었는데 괴이쩍
게도 출발하려던 차에서 나와 내게로 다가온 중년 남.
약도를 다시 꼼꼼히 살펴본 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내 백팩도 손수 트렁크에
싣고 어디론가 잠시 달리다가 차를 세웠다.
그는 나와 내 백백의 하차를 돕고 우측의 건물을 가리키며 떠났는데, 그 곳이 내 목표지 올리베이라
데 아제메이스(Oliveira de Azemeis)의 자원봉사 소방서.(Bombeiros Voluntários)
그도 약도의 생소한 지명에 짜증이 났는데, 미스테이크(mistake)임을 간파하고 짜증낸데 대한 사과
의 표시로 나를 돕는 것이라고 운전 중에 말했으니까.
더위에 시달리기로는 내 까미노 생활 최악의 날인데다 예정보다 10여km나 초과한 하루를 마감하게
된 소방서 봉사의 방(dormitorio de serviço).
뽀르뚜 현의 빌라 노바 지 가이아, 아베이루 현의 산따 마리아 다 페이라, 상 주앙 다 마데이라, 올리
베이라 지 아제메이스 등 2개 현(Distrito), 4개의 지자체(municipio)를 밟고 도착한 곳이다.
빽빽하게 들어찬 벙크들(bunks)의 층간 높이가 낮기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알베르게들과는
비교할 수 없게 여유로운 홀과 단층 침대의 쾌감이 기어코 이룬 성취감을 배가해 주는 듯 했다.
그러나 만사에는 일장일단의 양면이 있고 호사(好事)는 마(魔)를 대동하고 다닌다.
꾸꾸장이스(Vila de Cucujães) ~ 여기(Bombeiros Voluntários de Oliveira de Azeméis) 사이,
약 5km를 눈 감고 온 꼴이 되었으니까.
백문 불여 일견(百聞不如一見)과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인다는 말을 빌어 아쉬움을 표할까.
또한, 신체적 과부하를 해소하고 원상 회복에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음식의 충분한 섭취인데 음식점
정보가 부정적인 것 뿐이었다.
결정적인 거부감은 뻬레그리노스 메뉴가 아니라는 것이며(상한선을 엄청 넘는 호화 메뉴) 왔던 길을
1km 이상 되돌아 가야 하는데다 음식 대기 시간이 길다는 것 등.
평소라면 일과가 걷는 것 뿐인 뻬레그리노에게 문제될 리 없고 대기시간은 지명도와 비례 관계라 할
수 있으므로 되레 더 긍정적이겠지만 체력의 고갈로 섭취 못지 않게 휴식도 필요한 때였다.
주저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마감 시간에 저촉될 듯 한 손님은 도착 시간과 관계 없이 단호히 거부
하는 이 나라 음식점들의 영업 스타일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대안이 될 슈퍼마켓은 지근에 있으나 꾸물대는 사이에 영업 종료시간이 지났다.
바게트 1토막과 오렌지 몇개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팩을 뒤지고 있는 늙은이.
바게트는 3일 전에 뽀르뚜에서 구입하였기 때문에 돌덩이 같았음에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버리지
않은 것이지만 오랜지는 낮에 원예용품점 주인이 굳이 백팩에 넣어준 것이라 아직 싱싱했다.
돌덩이 처럼 굳은 바게트 먹기가 한두번이냐.
백팩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플라스틱 음료수병에 옮겨 담은 상비(常備)잼이 먹기를 한결 부드럽게
하였고 무난한 저녁식사가 되도록 신선한 오랜지가 입맛을 촉진해 주는 역할을 했다.
전화위복
1. 뽀르뚜갈의 자원봉사 소방대
이렇게 해서 생긴 여유 시간은 참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야근 중인 젊은 소방관과 얘기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까.
뽀르뚜갈의 소방관에 관해서(Bombeiros de Portugal/Organização) 상세하게 살펴보게 됨으로서
음식점의 고급 메뉴 보다 배가의 비타민(vitamin/활력소)이 되었으므로 전화위복이 된 것.
자기네가 접한 최 고령자, 특히 극동의 생경한 꼬레아 노인이라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한 청년(Bombeiro/소방관)은 금방 구어낸 듯한 황갈색 베이글 몇개가 들어있는 봉투를 들고 왔다.
호불호는 차치하고 밥과 함께 사람의 주식이 되고 있는 빵의 어원은 뽀르뚜갈어 빵(pão)이란다.
빵의 종주국으로 불리고 있는 뽀르뚜갈의 까미노를 걷기 한달(전번과 합해서)이 되어가며 내 까미노
생활에서 빵이 유일한 주식(主食)인데도 아직껏 먹어 보지 못한 베이글을 마침내 먹게 되었다.
하긴 주식이기는 해도 내 뻬레그리노 메뉴로는 식빵과 바게트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다른 빵류(類)는
거들떠본 적이 없지만.
굳은 바게트를 먹은 것은 보리떡도 떡이고 의붓아비도 아비가 될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겉은 바삭거릴 듯 하고 딱딱한 듯이 보이나 씹을 수록 졸깃졸깃, 감칠맛이 나는 베이글 앞에서 그 것
(오래된 바게트)은 거들떠 보기조차 역겨워졌다.
하지만 이미 만복 상태라 한개씩 나눠 먹으며 나눈 첫 이야기는 봄베이루스가 뻬레그리노스를 위해
숙소(albergue)를 제공하게 된 사연이었다.(앞에서 언급했으므로 그 얘기는 생략).
마침내, 뽀르뚜갈의 소방서와 소방관이 본제(本題)로 등장하자 청년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볼룸(volume)이 있는 팜플릿 류(pamphlet類)였다.
지대한 관심을 가진 내게 주려고 봄베이루스에 관계된 각종 홍보 자료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자료들을 살펴보며 우리의 이야기가 본격적이려 할 때 비상벨이 울리고 자리를 떠야 한 그.
반복되는 일과라, 예상하고 필요한 자료들(뽀르뚜갈어와 영어로 된)을 챙겨왔는가.
그와의 인연은 통성명도 못한 채 이렇게 끝났지만, 이 자료들은 밤 깊도록 잠 못이루는 내게 더없이
좋은 짝이 되어 주었다.
삼매경에 빠져든 자정 무렵.
뽀르뚜게스로 보이는 초로남이 입실했다.
그는 후입자의 예의는 고사하고 샤워도 생략한채 바로 정력적인 코골이가 되었다.
이래저래 잠 못이루는 심야에 뽀르뚜갈의 봄베이루스(자료)는 안성맞춤이었다.
소방관의 주 임무가 화재를 비롯해 천재 인재 불문 온갖 재난과 사고의 예방, 피해의 극복과 최소화
를 위해서 진력하는 것임은 아마도 온 세계 각국이 대동할 것이다.
자기 나라 소방관서의 조직과 운영 체계에 무지하면서 타국의 그 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이야
말로 언어도단이다.
다만, 주야 불문, 간단없는 본연의 임무가 벅찰 텐데도 업무 외의 선행을 실천하는 그들(뽀르뚜갈의
소방관)의 이미지가 내게는 각별하게 다가와서 그랬을 것이다.
나를 경악하게 한 것은 "뽀르뚜갈의 소방관 전체의 80% 이상이 자원봉사자"라는 점이다.
(Mais de 80% dos bombeiros em Portugal são voluntários)
전업소방서를 비롯하여 혼합, 자원봉사 등의 소방서로 분류되고 소방관 총원의 87%인 42.592명이
자원봉사 소방관이며 전업직은 6.363에 불과하다는 것.(2013년현재)
<그(Luís Ramos)는 14세가 된 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소방관이 되겠다고 자원했다.
그의 아버지는 지자체 로자의 소방대(Lousã Municipal Bombeiros)대장(comandante)이었고 그래서 밤낮 없이
사이렌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의 일부였다.
막사에서 이 자원서를 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지원을 허락했다.
이후 자원봉사 소방관으로 28년, 42세가 된 그는 이미 막사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지만 프로(profissional)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루이스 하무스)는 지원이 허락되었을 때 기본 훈련을 받았다.
17세에는 소방관 훈련을 받았고, 헬리콥터 수송단을 포함한 여러 코스를 수강하였으며, 리더십에 관계된 산불 진압
팀장을 위한 과정도 수강했다.
이는 실무소방관에서 지휘 능력을 갖춘 소방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랬음에도 18년 동안 로자(Lousa)에서 체육교사로 일한 일상생활이 그의 직업으로 계속 표기되었다.
학교 근무 후에는 소방 자원 요청, SMS, 사이렌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자원봉사자인 우리는 월 3일(밤, 주말 또는 공휴일 중)을 내고 1 ~ 2회의 교육을 추가한다.
나무가 뽑히거나 쓰러져도, 교통사고와 구조, 기타 우리가 필요한 다양한 상황에 지체 없이 출동하며 여름철 3 ~
4개월 동안의 산불이 우리를 가장 많이 요구하고 우리의 일상 직업(직장)은 이를 허용한다."
"한 달에 15 ~ 20€를 받는다.
여름철에 12시간 교대 근무를 하는 경우에는 영구팀의 일원으로 간주하여 시민보호국의 지원(20€)을 받는다.
지자체도 우리(자원 봉사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그 능력 내에서 우리에게(봉사하는 밤과 봉사 시간마다)
약간의 도움을 준다.">(이상 자료에서 발췌)
지자체의 소방관서는 샐러리맨 소방관 또는 지자체 직원으로 구성된 영구 팀을 기반으로 하지만 앞
에서 언급했듯이 구성원의 80% 이상이 자원봉사 소방관(bombeiro voluntário)이란다.
오로지 소방관이 되는데 100% 전념하는 전자와 자기 직업에서 떠난 시간으로 제한되는 후자로.
"우리는 훌륭한 회계사, 훌륭한 변호사 또는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단지 훌륭한 소방관이 되는 것 뿐입니다"
전업 소방관의 말이며, 양자(兩者/자원봉사 소방관과 전업 소방관)의 한 목소리는, "경험과 대의에
바친 시간에서 양자 간에는 큰 차이가 있으나 목표는 같고 우리는 같은 책에서 공부합니다"
이베리아 반도인(Spain과 Portugal)의 이같은 볼런티어(volunteer/voluntario) 정신의 출처는?
루이스 하무스가 자랄 때 소방대 대장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원봉사 소방관이 된 것 처럼 그들
의 일상에 편재해 있는 기독교 정서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슬람 축출 전쟁인 7c 반(722?~1492)에 걸친 '헤꽁키스따'(Reconquista/스페인어발음은 레꽁키
스따)를 한 그들에게는 종교적 신앙 여부와 관계 없이 그 것(기독교 정서)이 배어 있으니까.
"약자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103 자발적 도움을 주는 것"이.
2. 한국의 의용소방대
우리나라에도 이(자원봉사 소방대)와 유사한 이름의 소방대가 있다.
영문 표기로는 같은 이름(Volunteer Firefighter)인 의용소방대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그들이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에 만든 '케이보단'(警防団/けいぼう
だん/케이보단)이 이 소방대의 효시가 된 것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도지사가 감독 아래 경찰서장이 지휘하는 이 조직(警防団)의 설치 목적이 유사시의 완벽한 방공(防
空)과 치안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이다.
확대일로의 전시상황에서 본연의 임무인 소방을 빙자하여 조직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통제를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일본의 패망으로 그들의 압제가 종식됨으로서 경방단의 헤체,새 정부(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족동란
등으로 공백 상태였던 의용소방대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거듭났다.
그러나 장비와 처우를 비롯해서 모든 열악한 환경의 극복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한데도, 필사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들의 공헌은 혁혁하며 그들의 헌신적 활동도 저들
(뽀르뚜갈의 전문 소방대와 자원봉사자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나이 70 전후의 내가 백두대간과 9정맥을 홀로 종주하는 중에 부닥친 2번의 위기는 치명적이
었지만 그들(소방관과 의용소방대원들)이 해결사였다.
심야에 험준한 고산, 심산에서 외방(外方) 늙은이의 구출이 그 지역에 숙달되어 있는 그들의 헌신 외
에 또 있겠는가.
그들이 없었다면 나에게 2002년 이후는 없다.
이미 불귀객이 되고 말았을 사람에게 4번에 걸친 백두대간 남반부의 종주와 9정맥의 완주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먼 유럽,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7개 메인 루트의 완주, 아라곤 길과 마드리드 길을
비롯해 지중해 연안을 따르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 길들, 6000여km를 걷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결초보은해도 다함이 없을 그들인데도 수시로 망각하고 있는데 뽀르뚜갈의 자원봉사 소방대원들에
의해서 다시 각성하게 되었다.
나는 국내의 그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경의와 애정을 뽀르뚜갈의 그들에게도 보내며 장비와 처우,근무
환경에 관련된 양쪽의 예산 등 구체적인 대조를 귀국 후로 미뤘다.
뻬레그리노의 신분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기회를 내게 허락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뜻인가.
지중해 남동해변에 위치한 알메리아(Almeria)의 도둑들에 의해 접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이 모든 자료가 들어있는 백팩을 통째로 가져감으로서)
동서남북을 망라해서 지구촌의 그들은 산간 벽지의 파수꾼이며 해결사다.
한데, 바야흐로 이 '볼런티어 파이어파이터'(Volunteer Firefighter/의용소방대/자원봉사 소방대)에
난제의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
장비와 처우 문제의 해결은 난제가 아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의지로 능히 해결될 수 있으니까.
인구의 감소와 도시 집중으로 궁벽한 농산어촌이 공동화(空洞化)되어 가고 있는 것이 난제다.
우수한 장비와 합당한 처우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며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끝이 없을 듯한 생각들도 몰려오는 새벽 잠에는 필적 상대가 되지 못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도둑이 모든 것을 가져감으로서 밤을 새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였지만,
대기중이었다는 듯 나를 태우고 알베르게 찾아가기를 거듭했던 마드리드 길 볼런티어의 재현인가.
뽀르뚜갈의 봄베이루스와 그 알베르게를 피상적이나마 알고 체험도 하게 되었으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벽 잠의 엄습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생각도 함께 왔다.
어쩌다 있는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연에는 쾌감을 느끼지만 필연은 두려움을 갖게 한다.
챙겨주는 것 처럼 버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 위기 마다 누군가를 동원하고 무언가로 도움을 준 것은 아직 쓸모가 남아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쓸모가 보이지 않을 때 가차 없이 버려질 것이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교활하고 결함 투성이지만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에서 불퇴전한 야곱의 저력을 가질 수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