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의 동물은?
물론 실제로 있던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 만들어낸 상상의 동물이지만 이름은 있다.
인간을 돕는다는 상서로운 동물인 서수 중 하나인 이 동물,
머리는 용 같고 몸통은 해치같이 생겼다. 황제능을 호위하고 있는 이 동물은 조선시대 관복에도 등장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운현궁"이란 이름의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3월 4일까지)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집이였으니 당연 대원군 이하응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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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단령포본.(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黑團領 袍本) / 1869년.
흥선대원군이 50세가 되는 해에 금관조복본과 함께 제작한 전신 초상화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금관조복본과 동일한 친필의 화제가 있어 이 작품도 이한철과 유숙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관복의 흉배에 기린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기린 흉배 /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이 상복(常服) 단령(團領,깃을 둥굴게 만든 포'로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귀족층이 입던 옷)에
달았던 기린(麒麟)이 수놓인 흉배이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의하면 기린 흉배는 대군(大君)의 예우로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882년 대원군존봉의절 이후에는 거북 흉배로 바꾸었기 때문에 1882년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박물관)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건청포본 / 1880년
이하응이 환갑이 되던 해인 1880년에 이한철과 이창옥이 함께 완성한 작품이다.
청색 포를 입고 방건을 쓰고 있는데 얼굴은 무표정하여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는 살색의 가늘고
짧은 선을 반복하여 굴곡을 표현하였으며 이목구비는 짙은 색으로 그려 입체감을 더하였다.
흥선대원군 사진 / 1882년.
운현궁에서 기증받은 흥선대원군 천진(天津) 사진의 원본이다.
사진의 우측 하단에 고려국(高麗國) 대원군(大院君) 시(時) 광서팔년(光緖八年) 세재(歲在) 임오 추팔월 맹일
조어 영무처,가 쓰여 있어 흥선대원군이 청 군대에 납치되어 천진에 도착한 직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안당 편액
운현궁의 사랑채 건물인 노안당의 편액이다. 노안당은 주로 이하응이 사용하던 건물로 "노안老安 "이란
당호는 논어의 "노자老者 "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관서에는 "석파선생에게 써서 주다, 노완(書爲石坡先生老阮)" 이라고 되어 있어, 추사가 직접 써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안당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추사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글씨는 목판에 직접 새긴 것이 아니라 종이를 여러겹 붙인 두꺼운
판에 여러 겹의 종이를 붙여 만든 장지공예형식으로 제작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노안당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순조20년(1820) 12월 안국동 궁에서 남연군 구와 여흥민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
났다. 13세 때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얻었고, 후실 소생으로 1남 1녀를 두었다.
15세인 순조34년(1834)흥선부정에 임명되면서 처음 관직에 나갔고 헌종9년(1843) 군(君)에 봉작되었으며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둘째 아들 재황(載晃)이 1863년 12세의 나이에 제26대 국왕(고종)으로 즉위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이 되었다.운현궁에서 어린 국왕을 대리하여 부국강병정책을 주도하는 등 10년간 국정을 좌우하였다
이후 임오군란과 갑오개혁 때 정치 전면에 나서며 재집권을 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898년 2월 운현궁 노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흥선대원군의 약력
1820년 - 서울안국동궁(安國洞宮)에서 남연군의 넷때 아들로 태어남.
1831년 - 여흥민씨 민치구(閔致九)의 딸과 결혼
1843년 - 흥성군(興宣君)에 봉해짐
1863년 - 고종(이재황) 즉위
1873년 - 최익현 상소로 실각
1882년 - 임오군란 이후 2차 집권, 청 군대에게 납치되어 천진으로 호송.
1885년 - 청으로 부터 환국
1891년 - 회혼
1894년 - 갑오개혁 시기 3차 집권
1898년 - 훙서
노안당 상량문 눌림쇠 (老安堂上樑文金眞子) / 1864년.
운현궁 중수공사 때 노안당 상량문과 함께 발견된 눌림쇠로 은으로 만들어졌다. 상량하는 노안당 건물과
운현궁의 억년무강(億年無彊)을 축원하는 네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다. 글씨는 추사체 특유의 예서로 특히
무(无)"자는 추사의 대흥사 무량수각(無量壽閣) 모각 편액의 무(无)"자와 자형이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중수 공사 당시 노락당의 상량문 눌림쇠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모양은 같으나 크기는 노안당 것보다 작다.
흥선대원군 화로 / 19세기/ 개인 소장.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전하는 화로이다. 놋쇠로 두텁게 만들어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간결하면서도 위엄있는 형태와 과하지 않으면서 세련된 장식, 중후한 미감 등에서 조선 왕실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유물이다.
수조 (水槽)
수조 (水槽) / 19세기 말 - 20세기 초.
물을 담아 보관할 수 있는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외부 4면에 이하응의 친필 예서와 행서, 그리고 난초와 대나무가 각 1점씩 새겨져 있다.
예인(藝人) 흥선대원군의 시,서,화 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 수조는 노안당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조의 전면.
수조의 우측면, 대나무와 시가 새겨져 있다.
아름답구나 푸른 대나무여
사시사철 그 모습을 바꾸지 않네.
수조의 뒷면
발아래에 작은 연못 마련하니 가득히 물이 이제 모여드는구나
연못 가운데 바닥에 흰 모래 깔고 사방에는 푸른 돌로 꾸몄다
깊고 넓지 않다고 말하지 말게나 숨어사는 사람의 한적함만 맛보려네
물이 가득한 보슬비 내리는 아침 물이 깊고 맑은 밝은 달 뜬 저녁
어찌, 큰 강에 물이 있어 그 물결이 하늘에 닿아 희게 보이는 일 없겠는가
그러나 평상의 자리 사이로 사방 한 길에, 한 자 깊이로 가득한 못물보다는 못하다.
맑고 얕아 마음대로 놀 수 있어 흐릿하고 번거로운 일들을 애오라지 씻어버린다.
무었보다, 이른 새벽 어둑한 때에 한 조각 가을 하늘의 푸름이 가장 좋구나
수조의 좌측면, 난과 시가 새겨져 있다.
좋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좋은 향이 나오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사아천군 / 이하응 / 19세기.
흥선대원군의 예서 글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서풍을 본받아 거침이 강하지 않은 고예 서풍을
구사했다. 단편이기는 하나 흥선대원군의 예서로는 수작이다.
남송 진덕수(眞德秀, 1178-1253)의 <심경찬>의 마지막 구절인 "사이천군"을 예서 필적으로 쓰고 인장을
찍어 마무리하였다.
<화제,畵題> 나의 천군(마음)을 섬기라. <석파><대원군장>
노락당 편액(老樂堂 扁額)
운현궁 안채인 노락당 당호를 쓴 편액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의 편액 글씨는 신관호(申觀浩,1810-1888,후에 신헌申櫶으로 개명)가 썼다. 신관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무관이었지만 시,서,금석학에서 추사 김정희의 의발을 전수받은 제자로 알려졌다.
관지로는 백문방인의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주문방인의 "신관호인申觀浩印"이 찍혀 있다.
홍칠삼층각게수리장 / 19세기 말 - 20세기 초.
홍칠을 하고 여닫이 문안에 여러 개의 서랍을 설치한 3층의 각게수리장이다.
운현궁에서 사용한 것으로 각게수리장은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한 금고나 약장으로도 사용된 가구이다.
여닫이 문짝 사방 테두리에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한 쌍의 용이 장식되어 있어 궁중에서 사용했던
가구임을 알 수 있다.
상단의 서랍에는 꽃을, 문 복판에는 수팔년과 수壽자를, 네 칸의 마름칸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을
한 자씩 배치하였다. 각 층의 여닫이를 개폐하기 위해 위아래로 움직여 잠글 수 있는 자물쇠가 달려 있다.
맨 아래층은 여닫이를 열면 부피가 큰 물건을 넣을 수 있도록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과 3층에는 각각 7개와 11개의 작은 서랍이 있으며, 각 서랍에는 타원형의 손잡이를 달아 놓았다.
제기.
이로당 편액, 二老堂扁額 / 19세기 후반.
운현궁 이로당 편액이다.노락당이 운현궁의 중심건물로서 잔치와 같은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면
이로당은 그야말로 운현궁의 안주인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로당 편액은 노안당 편액과 마찬가지로 추사의 글자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다. 특히, 老자와 堂자는
노안당의 글씨와 일치하여 추사의 글씨 중 같은 것을 범본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당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이후인 1869년에 추가로 건축된 건물이다.
이로당의 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를 지칭하는 것으로 '두 노인을 위한 집"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당은 부엌을 중심으로 남측채는 안주인의 생활 공간 북측채는 궁궐에서 파견되어 안주인의
수발을 드는 상궁들의 처소로서 행랑채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하응이 위독해지자 이재면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주상을 보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렇게 서너 차례 말했지만 이재면은 죄를 입을까 두려워 끝내 아뢰지 않았다.
잠시 뒤 다시 물었다. "주상께서 거동하지 않으셨느냐?"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쉬고 운명했다. (매천야록)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했던 아들 고종은 끝내 아버지를 보러 오지 않았다.
임종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례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노안당, 집권과 은거의 공간
19세기 중엽 조선은 세도 정치로 인한 정치 기강의 문란, 삼정(三政)의 폐해 등으로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 시기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여러 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기 이전, 권력의 핵심인물이였던 대원군은 주로 운현궁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운현궁에는 각종 사무가 집중되고 문서가 쌓여 나갔으며 출납을 위해 소관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노안당은
다양한 인사들이 모이는 실질적인 정치의 장이였다. 대원군은 종친부 유사당상으로서 종친부 권한을
확장시키고 재정과 군사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 나가면서 권력의 중심에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국왕의 아버지라는 명분상의 지위보다 국정 전반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대신의 지위에 준하는
예우를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대궐을 수시로 출입하며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를 통해
세도정치 척결, 서원 철폐, 각 아문의 서리 임명 등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첫댓글 <흥선대원군>은 말년에 권력에 대한 향수 때문에
일제침략의 교활한 마수에 걸려들어 이용당하고
<고종황제>로 부터 외면당한 체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되는
'執着과 老欲' 이 갖여 온 인생황혼의 쓸쓸한 모습이오이다
역사의 단면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되돌아 보게되오이다
酷寒 冬安期가 가기 전에
청라동지들!
언제 번개처럼 출두해
[운현궁]과 《운현궁 유물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으면 좋을 것 같소만????
네~
찬성합니다 ㅎ
군데군데 볼데도 많더군요^^
솔개바람님의 강의 듣고싶습니다
좋은 제안이요.
이번 화욜에는 노르웨이 라딩 첫 미팅이 잇어 참여할 수 가 없으니
2월 중 좋은 날에 만날 수 있게 해보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