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부른 약봉의 어머니 고성이씨
포천읍에서 43번 국도로 의정부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설운리가 있는데, 마을 진입로
오른쪽에는 곡장과 커다란 신도비가 있는 약봉(藥峯) 서성(徐渻)의 묘가 있다.
선생의 묘는 해룡산(661m)을 주산(主山)으로 앞에는 넓은 들이 내려다 보인다.
예전에 이 해룡산 위에는 감지(鑑池)가 있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하며,
‘군마(軍馬)가 산 위를 짓밟으면 비가 오지 않으면 구름이라도 낀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로,
약봉의 부친(함재공)이 장가를 가기 위하여 규수가 있는 마을앞 주막에서 다리를
쉴 때, 일행을 보고 주모가 어느 집으로 장가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어느 댁이라고 답하자 그 주모는,
“다 괜찮은데 한 가지가․․․․․․” 라며 혀를 찼다.
연유를 물으니 그 규수는 눈이 어둡다는 것이었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서거정(徐居正)의 후손으로 감히
그런 집안에 장가를 들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돌아가자는 삼촌의 재촉을 뿌리친 약봉의 부친은,
“그 규수가 나 아니면 어찌 시집을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이니 장가를 들겠읍니다.” 하고는 규수댁으로 향하였다.
규수를 보니 인물도 좋고 학덕도 갖춘 휼륭한 처녀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혼인을 하였다.
그 뒤 약봉의 모친은 일찍이 남편을 잃고 한양의 약현(藥縣)이라는 곳에서
자식교육를 위하여 술과 약과(藥果)를 만들어서 과거를 치러오는
선비들에게 제공하였다.
술맛과 약과의 맛이 어찌나 좋았는지 사방으로 소문이 나 한양에 과거보러오는
선비들이 꼭 들르는 곳이 되었다.
그 후 자식들이 장성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가세도 늘어 집을 새로 짓게 되었다.
자식들이 새로 지을 집의 규모를 상의하자 모친은,
“마루가 12간이나 되는 큰 집을 지어라. 조만간 그 집도 좁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정작 얼마 가지 않아 자식들이 하나 둘 과거에 급제하고 후손이 번성하니,
마루가 좁아 큰 일을 치룰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눈이 어두면서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건물의 크기와 잘못을 일일히
지적하였다. 오늘날의 약주(藥酒)와 약과(藥果)는 이 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전하며, 대구 서씨는 그 후 많은 고관 대작을 내었음은 물론이다.
지금 서울 중구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고개인 약현(藥峴)이란 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으뜸 인재로 뽑혔던 약봉
서성(徐渻, 1558~163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대구(大邱)이고,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에게서 배워
1586년 29세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 회령(會寧)에 이르렀을 때,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난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窘)․황정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끌려가다 도망쳤다. 뒤에 경성(鏡城)에서
병사를 일으켜 평사(評事)를 제수받고 이내 국경인을 토벌하였다.
조정에서는 약봉이 문․무(文武)를 겸하였음을 알고 각 도의 관찰사로
내려 보냈으나, 그 일 역시 무리 없이 수행하였다.
혹 사람들이 오늘날 인재가 있느냐고 물으면 이항복은 거침없이 약봉을 으뜸으로
꼽았으며, 선조 때에는 이름 있는 일곱 신하의 한 분으로도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