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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30일 독서모임
*참여인원: 박형규님, 조성대님, 문지혜님, 한대성님, 신윤경님, 성현님
영양초등학교에서 문지혜선생님과 한대성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농촌유학센터 건물도 둘러보시고, 아이들과의 생활과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조성대선생님께서 가지고 오신 유기농사과를 먹으면서 둥글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후에 “얘들아! 들꽃 피는 학교에서 놀자”의 책으로 독서모임을 진행하였습니다.
조성대님: 안순억교사는 벌떡교사라는 별명이 생길정도로 교장말씀 안 들어서 경고도 몇 번 받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교육법상 교사는 교장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있는데.. 그 관행을 깨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미술시간에 공작세트를 준비하면 “이번에 공작세트는 00에서 하자.”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시고, 나중에 알고 보면 은밀한 뒷거래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80년대 어느 학교에서나 있었던 관행이었는데, 이때는 전교조도 출범하기 전이였어요.
그 자리에서 회식자리에서조차 그 일을 걸고넘어지니 혼자만 정의로운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다보니 초임 시절 때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답니다. 계속 문제제기를 하니 당신만 정의롭고 다른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냐? 선배가 하면 눈 딱 감고 따르는게 공익사회의 도리라느니 오히려 충고를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정 못마땅하면 시험문제도 안선생님 반만 담임이 출제하라고 공개적으로 따돌리는 경우가 있었답니다. 워낙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안선생님을 지지하던 선생님들조차도 나서서 설득하려고 하셨다네요.
결국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부장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교무부장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배님도 한때는 교사로써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선배님이 살아오셨던 교직문화 속에서 아무 고민없이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젊은 교사의 마음에 한번만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편지를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마다 부장교사 책상위에 올려놓고 갔다고 하네요. 그 글을 놓아두기를 1주일째 되던 날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내가 안선생한테 졌어. 깨우쳐줘서 고맙네.” 그러면서 두 분이서 화해하게 되고, 그런 에피소드들이 소소하게 실려있더라고요.
본인이 가장 영향을 받았던 부분은 이오덕 선생님의 만남을 통해서라고 하고요. 또 한분의 스승이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송순재교수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참 그 당시 젊으셨을 때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시다 보니 전교조 출범기 때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그 당시 시대 분위기가 연상이 되더라고요. 전두환 정권하에서 또 그렇게 고민하셨던 부분들하고, 그 당시의 금서 중에 하나인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읽으셨다고 합니다.
영양초등학교 근무하고 계시는 문지혜선생님, 한대성선생님이 같이 자리해주셔서 돌아가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박형규님: 지금 안순억선생님은 경기도 교육청으로 가셔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조성대님: 김상곤 교육감이 학교개혁을 하는 중에 남한산초등학교를 모델로 한 혁신학교를 여러 곳에 전파시키자 해서 스카웃 제의를 하셨다 하더라고요. 현재로써 남한산초등학교는 수용인원의 포화상태를 이르렀고 너무나 많은 전학을 시키려고 했었답니다.
대표적인 것이 80분 블록제수업이라고 80분 수업을 하고 30분 쉬는 구조로 가셨다고 합니다.
제안이 왔을 때 역할이 끝나면 다시 남한산초등학교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갔다고 합니다. 또 교육청에서 근무하는 와중에 남한산초등학교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언제라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고요. 남한산초등학교에서 파견교사 형식으로 경기도교육청 홍보담당실로 가게 되셨답니다.
문지혜님: 저도 이것 읽고..저희 초등학교가 종을 안치거든요. 교사가 자율적으로 수업을 하다보면 40분 수업이 아니라 50분이 될 수도 있고 하니까. 그것을 자율성을 줬어요.
처음에는 여기오기 전에 기간제교사도 했는데, 울산에서 했던 학교에서도 당연히 종을 치고 제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학교에서도 종을 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 처음에 여기 와서 시간을 못 맞추겠는 거예요. 제가 40분에 맞춰서 수업하는 것도 힘든데 애들은 자꾸 시계를 쳐다보고 저는 이제 절정에 다다르고 있고.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종이 없어도 40분이 흘러갔으면 흐름도 정리하고 하는데 거기에서 ‘내가 너무 종이 없어졌다는 것 자율성이 부과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획일적으로 40분 쉬고 10분 쉬는 수업을 했던 것은 아닌가?’
저도 이것을 몇 번 시도를 해봤거든요. 80분 수업하고 30분 쉬는 것을 아이들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않으면 40분이 지나면 아이들은 여전히 시계를 보기 때문에 제가 얘기를 “너희들이 대신에 80분을 하면 30분을 쉬게 해주겠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80분을 공부를 하는데 제가 일방적인 수업을 해서는 아이들도 힘들고 저도 힘드니까. 제가 한 것이 만들기나 꾸미기 위주로 해서 하는데 대신에 너무 만들기 위주로 하면 뼈대가 없으니까 앞에 30분은 가르쳐주거나 아이들끼리 찾아보거나 했는데, 아이들도 너무 좋아하고 결과물도 완성도가 높고 40분 쉬고 다음 시간으로 넘기는 것보다. 그래서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번 시도하려고 했는데, 그러는 찰라에 운동회하고, 뭘 하고, 진도에는 쫓기고..
은근히 80분 동안 수업한다는 것이 따지고 보면 수업시간 2시간 합쳐서 하는 것과 별반 다른게 없는 것 같지만, 교과에서 붙여서 하는 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진도를 맞추려고 하니 은근히 힘들고 했어요. 시험도 학력고사 친다고 하니까 힘들긴 힘들더라고요. 해보니까 2번 정도는 ‘좋다! 아이들도 좋아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해보려고 했는데 확실히 현실에 부딪히는 것은 있었어요.
박형규님: 대안교육 연수교육이라고 해서 서울시 쪽은 공교육교사들을 연수프로그램으로 대안교육현장에서 활동하던 사람들과 접목하여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하면서 시간이 좀 흐르면 참 젊은 사람들은 답답하겠지만 좋을 때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골 속에서는 그나마 저런 초등학교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데.. 만약에 일월 없어지고 수비 없어지고 하면 전부다 영양으로 집결하면 끔찍한 경우가 됩니다. 초등학교는 60명 정도라도 있고, 중학교는 줄어드는데, 고등학교는 좀 늘어나고.. 아쉬운 건 그거죠.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자기 역량을 가지고 할 수 있게 하는 풍토가 좀 조성이 되면 좋은데...
농림수산부에서는 일단은 농촌이 죽어간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도농교류라는 차원에서 농림수산부의 메인 사업으로 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정말로 교육부와 연결이 없으면 나중에 가면 지역아동센터처럼 그르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은 현재로서는 각 지자체에서 양양군이나 울산 소호초등학교 그 두 사례는 지금 교육청에서 적극적으로 돕고 있고, 유학센터 숙소부지도 학교에 부지를 할애해서 거기서 짓게 하는 실정입니다.
신윤경님: 저는 일단 책 읽으면서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수업방식이고 제가 꿈꾸는 수업이고.. 아이들이 정말 자연에서 뛰어놀고 같이 수업을 하고, 학부모님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교장실이 아이들의 놀이터처럼 들락날락 거리고.. 어떻게 보면 제약보다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더 많이 주어지는 학교라서 .. 저는 아이들이 이 학교를 다니면서 재미있겠다 싶으면서도 선생님들이 정말 바쁘시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연구하시고, 수업준비하시고, 고민하시고 하는 모습들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보고 싶거든요. 학교라는 틀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농촌유학센터 , 지역아동센터.. 어떻게 보면 저도 아이들을 만나는 직업이고 아이들과 같이 책에서 배우던 다니면서 배우던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부분에서 저에게는 재미있고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는 방향으로 다가왔습니다. 더 고민을 해야겠죠.
조성대님: 남한산초등학교의 학부모 중의 한 분이 중등교사 분이 계신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저도 학부모이전의 교사의 입장으로서 남한산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학부모 상담에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많이 하는 교사는 없다고... 학부모 입장에서는 감사하기만 한 일인데, 막상 자기에게 남한산에서 교사 생활하라고 하면 못할 거 같다고..너무 힘들 것 같고, 자신 없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셨더라고요.
현대사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평소에 민중교육지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언급이 됐더라고요.
전교조가 출범하기 이전에 1985년 5월에 민중교육이라는 게 무크형식의 잡지 한권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부제목을 한 잡지인데요, 논문, 좌담, 교단일기 같은 다양한 형식의 일선교사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점과 관행들을 지적하고 그 당시 교육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글들이 실렸다고 하네요. 이 잡지에 참여했던 대분이 전교조 1세대 분들이셨고요.
지금 같으면 평범한 주장들과 당연히 상식들이었지만, 5공화국 전두환 정권아래에서는 달랐다고 합니다. 이 민중교육이라는 잡지가 나온지 한달쯤 되자 5공화국 군 정권은 민중교육을 시국사건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잡지창간을 주도했던 분은 안기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잡지를 발행했던 곳은 실천문학사인데 출판인도 같이 전교조1세대와 같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합법적인 출판물이 졸지에 판매금지가 되고 잡지에 글을 실은 교사들은 물론이고 원고를 출판사에 전달했던 교사들까지 같이 엮어서 그 당시에 줄줄이 구속을 시켰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구속되어 있는 동안 징계위원회에서 강제 파면을 당했고, 언론은 그 당시 문교부의 보도 자료를 그대로 받아서 교육지사건의 왜곡된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쯤에 문제교사 식별법이라고 문교부에서 지침이 은밀하게 내려왔다고 하네요. 이 지침에 의하면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학교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고 학급생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려는 교사,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교무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등 당시 말도 안 되는 내용들로 문제교사를 식별하는 지침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 지침은 나중에 전교조교사 식별법으로 둔갑하게 되어 계속 이후로 몇 년 동안 우려먹었다고 하네요. 당시 얼마나 감시가 심했던지 유명한 이오덕샘도 정년을 4년을 남겨두고 견디지 못하고 교직에서 물러나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알려졌다시피 이오덕샘은 제야에서 전교조 1세대 선생님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하셨고요. 자문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관심 있던 내용이 다루어져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신윤경님: 요즘 전교조 선생님들은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한대성님: 외부적으로 뉴스에 알려진 일들을 하시면서 내부적으로도 많이 준비하시는 것 같아요. 어떤 일이 하나 터진다고 해서 거기에 많이 치우쳐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일하는 사람들이 일단 별로 없어요. 활동가분들이 많이 안 계셔서 그분들이 많이 힘드실텐데 기존에 하던거 다 하시고, 그것도 나름 하시고... 얼마 전에 감사받고 하셨으니 그것도 하시고... 분위기가 썩 많이 하시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늘 상 모임을 가면 일단 이슈나 화두를 던져주고 그다음에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조성대님: 얼마 전에 다들 아시겠지만, 전교조 가입한 명단을 자기 홈페이지에 올려서 지금도 조사와 압류를 당하고 있던데, 일선학교에서 전혀 선생님들은 개의치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본인 스스로가 그런 쪽으로 몰고 가려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이 사람은 냉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서 더 안타까웠습니다.
한대성님: 안 좋게 보시는 학부모님들도 많습니다.
박형규님: 나는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있는데, 지금의 우리 교육 상황이라는게 한계적 상황이라는게 전제가 되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발도둠을 한다면 그 안에서 어떤 가능성들이 있을까? 나는 요즘 들어서 솔직히 예전에 가졌던 것보다 살짝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해. 예전에 친구교사들 거의 교장 될 나이인데 전교조라는 이유로 다 평교사라고. 그것으로 이야기 들어보면 스스로도 전교조 탈퇴한 아이들도 많고..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전교조로써 자기 정체성을 솔직히 못 가지겠다,” 라는 친구들도 있고. .
전교조를 교육운동으로써 어떻게 이행하게 할건가 하면 고민되고 속시끄러우니까 그냥 평교사로 살면서 지내겠다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런 산골짜기 내에서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견디기만 한다면 조금 다른 형태의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는 사람이 만드러 내는게 희망이지 던져 주는게 희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시기가 올 때까지 조금 참으면서 그래도 꾸준히 무언가를 해내고...아까 문선생이 이야기 한 것처럼 80분 수업이라도 자꾸 시도하고 어떤 것들을 시도하면서 장작불처럼 조금씩 모아서 하면... 인내력이 있고 지역에 있는 몇몇의 안 되는 사람들과 연결이 되고 같이 공조해서 같이 사업도 만들어내고 이렇게 하면, 오히려 영양 같은 곳은 희망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요. 4년 동안 살아보면서 힘들었고 고민도 많았는데, 사실은 다 지나가는 부분들이고 교육이라는 본질에 근원적 측면을 본다면 그 만큼 좁은 구석에서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양에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고, 있다가도 몇 년 있다 가버리고...
한대성님: 여기는 학생이 얼마나 됩니까?
박형규님: 지역아동센터는 있고, 농촌유학센터는 아직 없어요. 농촌유학은 지금이라도 아이들이 오면 당장하죠. 광고도 좀 내보고 하는데 영양이 워낙 골짜기다 보니 쉽지 않아요.
특히 서울경기도 중심에 있는 것은 유명한 곳이 벌써 몇 군데 있거든요. 강화쪽에서 생기고 양양, 순천, 양구 이런대로 다 가버려요.
저는 3~4년 그러리라고 각오했어요. 경남쪽은 소호나 경주에 두군데가 있고, 경북쪽이 여기가 있는데 대구나 이런데는 아직은 잘.. 그렇고..
오히려 귀농한 사람 중에 봉화나 있는 사람들. 태백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연결이 되어서 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고..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저는 일단은 올 겨울부터 청년장년 프로그램부터 할 생각입니다.
한대성님: 그럼 현재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은 몇 명정도 됩니까?
박형규님: 현재 16명정도 됩니다. 초중고 애들이 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은 거의 뭐 없고 거의 초등학생들이 대부분입니다.
한대성님: 그럼 그런 아이들은 정규수업을 다 끝나고 오는 겁니까?
박형규님: 끝나고 저희가 데리러가죠. 여기 와서 조금 있다가 집에 가고 하니까 시간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체제를 주말학교 위주로 하고, 주말학교 프로그램을 잘 형성을 해서 가능하면 주말학교를 영양전체에 있는 아이들 대상으로 할 생각입니다.
한대성님: 지역아동센터 같은 경우도 학교와 연계가 필요합니까?
박형규님: 필요하죠. 예를 들어서 방과 후도 그렇습니다.
지금현재 시골학교는 돌봄시스템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교육부에서 하는 것이고 이것은 보건복지부인데.. 지금 대전 충남쪽은 교육청과 정책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프로그램 자체도 지역아동센터와 교환을 해요. 선생님들도 교류를 해서 해서 모범적으로 풀어나가는 데가 몇 군데 있어요. 경북은 아직은 아직 없고, 도시에서도 아직 드문 사례고... 일단은 저희도 노력을 해봤는데, 조금 가능성 하나가 있었던 것은 축구가 있었습니다. 애들이 축구를 좋아하니까 축구를 할때 학교 운동장을 사용하니까 그 부분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저는 지구력싸움이라고 생각해요. 이거 성과 안 난다고 그러면 절대 못합니다. 저는 좀 전방위적으로 생각해요. 저도 아이들 대상이고 하지만 교육이라는 자체를 사실 평생 교육을 받는 것인데, 조금은 성인까지 확대시키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데리고 오든 내부에서 하든 어떻게 해서든 작게 모인든, 많이 모이든 모임을 활성화 시키려고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해내는게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대성님: 운영을 하려면 그래도 자금이 필요할텐데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박형규님: 현재로써는 거의 다 사비로 하고 있다고 보고, 내년부터 사회적기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맨땅에 매일 해딩 하듯이 하면 끝이 없고, 국가에서 사회적기업이라는 제도를 활성화 시킨다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는 사업과 매치시킬 수 있는 것이니 일단은 신청을 해놨습니다. 12월~1월에 확정이 되고 그것으로써 앞으로 더 활성화된다고 봅니다.
한대성님: 작년에 법인이 되셨다고 하셨는데 그럼 국가에서 어떤 지원이 있습니까?
박형규님: 사단법인이 되었다고 지원받는 것은 없고, 단지 하나 법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더라도 농림부사업도 그렇고 농촌이라는 곳에서 그것이 참 재미있는데,... 개인이 출하해서 할 수 있는 사업이 거의 없어졌어요. 농촌에서 무엇을 하려면 최소 작목반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이장이 중심에 끼어야 하고.. 만약에 이장이 중심에 끼지 않을 때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하나는 군의원하고 엄청 친하거나, 아니면 법인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인이 되면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법적인 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행령을 가지고 들어가면 저쪽에서 힘들죠. 절대로 내칠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좋은 자리에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