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가벼운 아침 발걸음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밝은 날을 기다리는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이리 저리 지나치는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네해 저문 거릴 비추는가로등 하얗게 피었네밝은 날을 기다리는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이리 저리 지나치는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
1977년 산울림의 1집 아니벌써가 나왔다. 벌써 44년 전의 일. 아니 벌써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유신 말기라는 시대상황에서 대중들은 이 새로운 가요에 신기해하면서 40만 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로 호응한다.
70년대는 비틀스의 시대이다. 63년에 데뷔하여 70년에 공식 해체되었지만 해체 이후 비틀스의 가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때마침 팝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성행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비틀스의 음악은 우리에게 묘한 열등감을 안겨 주었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통하여 흘러 퍼지던 비틀스의 노래들. 예스터데이, 렛잇비, 옐로 서브마린 등 주옥같은 명곡들은 가요계 전반적으로 트로트가 성행하던 한국 가요의 현실에서 자칭, 타칭 음악 애호가들에게 문화적 열패감을 안겨 주었다.
지금은 미스터 트롯, 미스 트롯 등의 성공으로 트로트가 재조명되고 우수한 가요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본 엔카를 흉내 낸 저속한 대중문화의 양식으로 인식되고 있어 젊은이들은 소위 말해 유행의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영국의 팝 음악을 들으며 대중음악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신중현이 ‘미인’ 등의 노래에서 최초의 록음악을 선사하고 한대수도 ‘행복의 나라’ 등으로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런 검열과 대마초 사건 등으로 한국의 록음악은 싹을 틔우기도 전에 시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날 대중들의 귓가에 아니 벌써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사이키델릭 펑크록, 형식은 새로웠지만 건전한 내용의 가사로 군사정권의 검열도 교묘히 피해 갔다. 하지만 그 후에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검열관들의 눈에 염세적이고 퇴폐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가사를 개사하였다고 한다. 원가사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남겨진 게 없으니 추측에 맡길 수밖에. 음악 애호가들에게 아니벌써는 우리도 이 정도 수준의 록음악을 창작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다는 음악적 자신감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이른바 K팝이라는 장르로 전 세계를 매료시킬 수 있었던 원천은 이런 문화적 자신감이었다.
1977년은 MBC 대학가요제가 시작된 원년이기도 하다. 대학가요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아마추어 가수들이 스타가 되어 프로 가수로 데뷔하는 기회로서 매년 대중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 준 연례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산울림에게 대학가요제는 아픈 손가락이다. 예선에서 ‘문 좀 열어줘’로 1위를 하고도 김창완의 대학 졸업으로 본선에는 참가도 하지 못하고 대학 후배들인 샌드패블스에게 1회 대상의 영광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 한이 1집과 2집을 연이어 히트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유신정권에 의하여 바뀐 가사는 묘하게도 군사정권의 종말을 암시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와 민주화의 미래가 밝지 만은 않다는 사실도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와 같은 가사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천재는 가요를 창작하고 대중들은 가요를 소비하지만 시대와 역사는 대중가요를 명곡으로 받아들인다. 산울림의 1집과 2집이 모두 한국을 빛낸 100대 명반에 든 것은 스타와 대중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아니 벌써’는 44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명곡의 반열에 등극하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fDhCUZ5IW1Y (산울림 아니 벌써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