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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도 아랑곳없이,천천히 길을 걷고 있었다. 십오 년이나 흘렀음에도 여자의 몸에는 군살이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만 보면세련된 이십대 여성이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트럭의 운전석에 타고 있었다면, 휘익, 휘파람이라도 불어 보고 실었을 뒷모습.... 그러나 내 트럭은 벌써 며칠째 화물차 대기소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었다. 그 지루한 대기의 나날들이 아니었다면, 그런 야심한 시간에 여자의 뒤나 밟는 따위의 일은 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듯이 화물차대기소를 빠져나왔고, 그리고는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여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대기소에 틀어박혀 화투장을 만지는 것 보다는 마음이 편안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것, 밤의 미행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비슷한 쾌감을 주었다.
그러나 미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즘 걷던 여자의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그리고는 여자의 손이 가볍게 올라가는가 싶더니, 여자쪽으로 한 대의 승용차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승용차의 문이 먼저 열렸고 여자의 반쪽 얼굴에 살짝 웃음이 어리는가 싶더니, 곧 승용차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승용차는 그랜저였다. 나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멍하니, 여자를 태운 검은색 그랜저가 내 곁을 스쳐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내게 그때 트럭이 있었다면, 그 그랜저를 쫓아가 보았을까. 그 그랜저가, 그랜저에 어울리는 저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까. 내 트럭의 높은 운전석에서, 그 저택의 거실 안을 훔쳐보며 그들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냈을까. 잘 꾸며진 거실, 올망졸망한 아이들. 따뜻하고 풍요로운 밤, 어린 계집아이가 치는 피아노소리....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가슴이 마구 저려온다. 그러한 풍경은, 내가 그 여자를 만나던 십오 년 전에,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진급해서 내가 정수기 회사의 간부가 된다면 십오 년 후에는 그리 될 수도 있으리라 믿었던 풍경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랜저.... 여자를 태우고 같 최신형 그랜저가 내 가슴을 욱신욱신 결리게 하고 있었다.
다른 욕심이 없었던 것에 비해 나는 유독 차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좋은 저택이나 글래머인 미인 아내보다도 고급 숭용차에 더욱 매료될 때가 많았다. 나는 자동차 잡지를 꾸준히 보았고, 어떤 차가 얼마만큼의 최고 시속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환했다. 그것은 승용차에 대해서뿐만이 아니라. 엔진 달린 모든 것에 관해 그러해서, 모터사이클이나 경주용 차. 심지어는 화물차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내가 결국에는 트럭운전사가 되리라는 징후는 도청에 녈려 있었던 셈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마을의 뒷산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날품팔이로 그 채석장에서 여름을 보내던 아버지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그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나르는 트럭들에 매료되었다. 몇 번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산 하나의 절반이 완전히 깎여내렸고, 완만한 어깨를 갖고 있던 산은 느닷없이 절별이 되어버렸다.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그 절벽에 올라가 나와 친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트럭들이 먼지를 운무처럼 피워 올리며 천천히 달려왔다가, 힘주어 달려가곤 하는 것이 바로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기도 했다. 트럭은, 돌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끌어가는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내 꿈은 트럭운전사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개숫물을 앞마당에 쏟아 부우며 개숫물 같은 욕설을 내게 내뱉었다.
-아나, 좋다, 새끼양. 돌 캐는 것보다는 백 번 낫지.
그 시절의 내 이야기를 하면서, 여자에게도 오래전의 이야기를 물은 적이 있었다.
-애실 씨는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었어요?
여자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부끄러움을 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화배우요.
내가 그때 소리를 내 웃었던가? 신입의 등장 이후, 여자와 깨어지고 다시 새로운 여자와 지독한 연애를 하게 되기까지의 반년 동안 내가 여자의 그 말을 자주 떠올렸던 것은 기억난다. 그러나, 나를 만나던 동안의 여자가 스크린 속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신입이 알고 있는 그 여자가 스크린속의 배우였던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내게 개자식이란 욕설을 내뱉은 것을 마지막으로, 그 여자는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여자에게 그런 욕설을 들었다는 것이 분하기보다는 오히려 통쾌한 기분이어서, 퇴근 무렵 의기양양하게 여자를 다시 찾아갔던 나는 여자의 동료에게서 여자가 동사무소에 사직서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점심시간 끝나고 돌아와서 한 시간이나 됐을까.... 애실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냥 혼자 흐느껴우는 게아니라 엉엉 통곡을 하면서요.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누가 보든 말든 간에요. 오죽하면 옆 건물 사람들이 구경을 다 왔었겠어요. 정말 기막히게 울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여자의 모습을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여자가 연기하고 있는 스크린의 풍경을 완벽히 보고 있는 듯 했다. 웬 노인에게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 주다 말고, 스탬프를 손에든 채로 느닷없이 울기 시작하는 그녀.... 가만히 앉아서 꼼짝도 않는 자세로 엉엉 울고 있는 그녀. 왜 그러는 거냐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는 동료들. 자리에서 일으켜 보려고 하는 사내 동료들. 그러나 입술을 악물고 몸부림을 치듯이 울고 있는 그녀....
그날 밤, 그 여자의 자취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며칠을 연속해서 찾아갔지만 자취방은 번번이 잠겨 있었고, 일주일쯤이 흘렀을 때였던가, 주인에게서 그 여자가 그날 낮에 짐을 빼 갔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리고 십오 년인 것이다.
여자의 빵집에서 사왔던 식빵은, 한 조각도 떼어 내지 않은 채 비닐 봉투 안에서 차갑게 굳어있었다. 어느 때에는 하얀 속살로 부풀어 올랐겠으나, 그 뽀얀 젖가슴에 입술의 촉감 한 번 가져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것이다. 곧 곰팡이가 피고, 쉰내가 나기 시작할 식빵에는 부풀어 오르던 당신의 촉촉했던 곂의 기억 같은 건 없었다.
만일에 그 여자라면.... 그 여자는 어떻게 나를 못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일까.
방 한구석에서 빳빳하게 굳어 가고 있는 식빵을 보다 말고, 나는 그 봉투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가게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고, 또 그랜저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으므로 당연히 텅 비어 있을 빵집이었다. 당연히 다른 작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 텅 비어 있는 빵집의 침묵에 대고, 그저 한 번쯤 말해 볼 작정이었다.
-정애실 씨를 찾습니다. 그 여자가 거기에 있는 게 맞지요?
전화벨이 두 번 세 번, 울렸다. 받을 사람이 없는 전화이므로, 금방 끊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 한 손에는 수화기를 들고, 방구석의 식빵을 바라보며, 만일에 어처구니없게도 그 여자가 전화를 받아, 전데요. 제가 정애실인데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누구입니다. 이렇게 말할 것인가.... 아니ㅕㄴ 십오 년 전에 당신을 알았던, 당신이 기억할 수도 있는, 그러나 어쩌면 이미 당신에게는 전혀 존재하지않는.... 어떻든, 그래도 여전히 이름이 누구인 그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것인가.
"여보세요."
벽에 기대어져 있던 내 몸이 와락 일으켜 세워졌다. 거짓말처럼 그 여자가 정말로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여보세요."
나는 마치 여자가 수화기 바깥으로 나를 환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손만 간신히 움직여 살금살금 전화기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뿐이었다. 그 사이에도 여자는 몇 번인가 더 여보세요, 를 반복했다. 마침내 수화기 저편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전화야? 당신 또 빵집 전화 착신해놨구나. 그러지 말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 생일케이크를 주문해 놓고 안 찾아간 사람이 있어서요. 이름까지 새겨 놨는데.... 근데 여보, 웃기지. 생일케이크 이름이 내 이름하고 똑같은 거 있지? 안 찾아가면 내 생일케이크로 써야겠어. 가만있자.... 당신생일이 며칠이더라.... 당신, 내 생일도 잊었어요? 혹시 내 이름은 기억해요? 당신. 내 이름도 잊어버린 건 아니에요?
이튿날, 거대한 H빔을 싣고 달려가던 밤의 고속도로에서, 나는 찰나의 순간 십오 년 전의 그 여자와 섹스를 한다. 여자의 몸이 나를 빨아들일 듯한다. 나는 여자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 여자의 혈관 속에서 몸을 틀고 여자의 근육 속에다가 사정을 한다. 그래도 여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아, 제발.... 제발, 이제 그만.... 나를 좀 놓아줘. 그러나 여자의 몸은 깊고 아득한 뻘이다. 내 온몸을 움켜쥐고, 신음처럼 묻는다. 당신 나를 기억해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나를 기억하느냐구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나를 놓아줘.... 이러다가 난 죽어. 난 지금 시속 120킬로에 놓여 있다구! 그러나 여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고, 순간 여자의 모습은 가장 최근에 잤던 창녀의 모습으로 바뀌고, 또 느닷없이 그 여자와 헤어진 지 반년 만에 사귀었던 내 치명적인 연애의 여자로 바뀌기도 한다.
-도대체 너 누구야?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뜨는 찰나, 나는 강심에 놓여 있다. 어느 날 밤, 가드레일을 뚫고 나가 절벽에 걸려 서 있던 트럭의 눈전사가, 내가 누운 강심에 나란히 누워 몸을 반쯤 돌린 채로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묻고, 그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려 다정하게 대꾸한다. 여기도 고속도로라네. 밤의 고속도로.
또 한 번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뜨는 순간, 눈앞에 절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술병을 거대하게 쌓아 올린 또 하나의 트럭이었다.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며 바라본 속도계는 시속 백오십을 가리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속도계는 내려가지 않았다.
속도계의 고장일 거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에 얹힌 발의 힘을 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차는 어벗었다. 그러나 겨우 진정을 하며 전방을 주시했을 때, 내 앞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는 술병 트럭 같은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