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산서면 주민자치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영덕
직위 |
직급 |
성명 |
분장 업무 |
면장 |
행정 5급 |
한국희 |
산서면 업무전반 |
부면장 |
행정 6급 |
김인섭 |
기획업무전반, 행정업무전반, 동향, 보안, 선거, 의회 |
총무 |
행정7급 |
육영희 |
기획, 행정, 예산, 회계, 감사, 건축, 체육, 주민자치 |
세무7급 |
조용재 |
지방세, 세외수입, 국·공유재산관리, 부동산, 문화예술 | |
시설9급 |
신광호 |
건설과소관, 재난안전과소관, 상수도, 농업기반 | |
기능9급 |
정철용 |
행정지원과소관, 환경, 일반서무, 교통, 정보통신 | |
환경미화원 |
이수철 |
지역 환경,청소 | |
환경미화원 |
송기두 |
지역 환경,청소 | |
통게업무보조원 |
정일수 |
행정 업무 보조 | |
주민생활지원 |
녹지6급 |
이성재 |
가족관계등록부, 제적, 신원조회, 인구동태 |
사복8급 |
정재인 |
사회복지업무 전반 | |
행정9급 |
오수정 |
주민등록, 인감, 제증명, FAX민원 | |
복지도우미 |
안미영 |
주민 복지 업무 보조 | |
산업 |
사복6급 |
최문식 |
산업업무전반, 산림, 양정 |
행정7급 |
박현진 |
친환경농업, 쌀소득보전직불제, 소득지원 - 농지원부, 농업기술센터, 유통, 5.3프로젝트 | |
행정9급 |
최광귀 |
농업도시, 농지취득자격증명, 농지전용, - 축산, 지역경제, 과수 |
(2)산서면사무소의 역사
우리나라의 말단 행정이 방(坊)이었고 광무 10년(1908)방이 면(面)으로 개칭되었는데 방에는 풍헌(風憲). 약정(約正).도영장(都嶺將).기찰장(譏察將).도장(都將).막장(幕將).리정(里正).간고(監考) 등 8인의 관원이 있었다. 방이 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면의 장을 면장(面長)이라 하며 면장은 자택에서 사무를 처리 하였다.권양수 초대 면장시(1906)에 오산리 추원각(追遠閣)에서 직무를 행함으로 지금도 속칭 ‘동청’이라 하고 있다. 1901년 일제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면사무소(面事務所)를 파정(坡亭)에 설치하여 사무를 집행하며 실무자를 서기(書記)라 하고 급료를 지급 하였다. 현재 있는 면사무소는 어느때 이주하였는지 상고 할 수 없으므로 기록치 못한다. 다만 현재 산서 면사무소 건물은 2009년4월 17일 새 청사 준공식을 가졌으며, 산서면 동화리 122-2번지 기존 면사무소 부지를 확장해 건립된 산서면사무소 신청사는 총 사업비 16억원을 투입, 3353㎡(1014평)의 대지에 지상 2층 규모로 사무실을 비롯해 사무실과 농민상담소, 다목적 강당, 소회의실 등이 들어서 있다.
<<역대 산서 면장>>
순번 |
성명 |
재임기간 |
비고 |
1 |
권양수(權陽壽) |
1906 |
|
2 |
양한표(梁漢杓) |
|
일제(日帝) |
3 |
이익장(李翼張) |
|
〃 |
4 |
권양규(權良奎) |
|
〃 |
5 |
김형모(金炯模) |
|
〃 |
6 |
정대익(丁大翊) |
|
〃 |
7 |
김응만(金應萬) |
|
〃 |
8 |
이승희(李承熙) |
1946.2.14~1948.11.8 |
|
9 |
유동렬(柳東烈) |
1948.11.8~1949.10.14 |
|
10 |
임준희(林晙熙) |
1949.11.20~1952.3.27 |
|
11 |
이근우(李根雨) |
1952.5.12~1956.6.11 : 1956.7.23 |
민선(民選) 〃 |
12 |
권흥옥(權興玉) |
1958.8.8~1960.11.29 1960.12.31~1961.6.21 |
〃 〃 |
13 |
윤용섭(尹龍燮) |
1961.8.2~1963.7.25 |
사무관대우 |
14 |
이동춘(李東春) |
1963.7.25~1968.6.20 |
〃 |
15 |
윤용섭(尹龍燮) |
1968.6.20~1976.6.26 |
별정직사무관 |
16 |
김진식(金鎭湜) |
1976.8.18~1985.3.21 |
〃 |
17 |
권희완(權熙宛) |
1985.3.22~1993.6.30 |
〃 |
18 |
육동수(陸東洙) |
1993.7.1~1998.3.10 |
〃 |
19 |
김흥섭 |
1998.3.11~1998.7.1 |
〃 |
20 |
육경준 |
1998.10.1~1999.10.25 |
〃 |
21 |
이선형 |
1999.10.26~2000.4.30 |
〃 |
22 |
최춘석 |
2000.5.1~2002.8.16 |
〃 |
23 |
이두형 |
2002.8.17~2003.3.16 |
〃 |
24 |
임차승 |
2003.3.21~2005.1.5 |
〃 |
25 |
이도형 |
2005.1.6~2008.7.20 |
〃 |
26 |
차주선 |
2008.7.21~2010.9.19 |
〃 |
27 |
한국희 |
2010.9.20~현재 |
〃 |
<산서면사무소 옛날 사진> <산서면사무소 표석> <산서면사무소앞 신축 청사>
2) 산서 파출소
옛날에 치안(治安)은 행정의 일부로 예속(隸屬)되어 사실상 체계적인 활동이 없었는데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에 점차 혁신되어 왔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日本)에 강제로 병합된 뒤 경찰은 식민지 통치(植民地統治)를 위한 일제(日帝)의 야비한 이용도구가 되어 민중(民衆)의 공포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8.15광복 후 비로소 민주경찰(民主警察)이 탄생되어 본연의 치안자세(治安姿勢)로 돌아오게 되었다.
(1) 산서 파출소 연혁
위치 :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162번지
대지 : 265평
1945년 10월 국립경찰 탄생과 동시에 장수보안서 산서면 주재소로 호칭
1946년 4월 2일 제 11관구 경찰서 산서지서(山西支署)로 개칭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장수경찰서 산서지서로 개칭
1950년 7월 26일 6.25사변으로 남하
1950년 7월 26일 수복(收復)
1967년 9월 7일 청사 신축
1986년 11월 12일 산서지서 건물 재건축
1995년 1월 27일 산서지서를 장수 경찰서 산서파출소로 관서면 변경
2003년 8월 1일 지역 경찰제 운영계획에 의거 장수 지구대로 편입
2006년 5월 8일 장수지구대가 장수, 번암, 산서파출소로 환원
2008년 7월 18일 산서 파출소 개축 준공
산서면 파출소가 7개월의 공사 끝에 드디어 완공되어 새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약 3억원의 사업비로 설립된 신축건물은 대지면적 1.250㎡에 건축면적 83.4㎡의 3층 건물로 예전 파출소가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새 건물이 올려졌습니다.금일 새 파출소로 이사를 하고 일주일 내에 준공식을 거행될 것입니다. 새 건물에서 주민의 치안유지와 범죄예방을 위한 충실한 민중의 지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2)현재 직원 현황
< 옛 파출소 건물> <신축 파출소 건물>
3) 산서 우체국
5.16 군사혁명으로 군사 정부 수립과 동시에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면 1국 주의를 실현 추진하는데 민간 자본으르 조달하는 방법으로 별정우체국 제도가 도입되어 산서우체국이 개국되면서 우리 고장 통신발달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 졌다.
(1)우체국 연혁
주소 :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123
대지면적 : 452.7평(1,329.0 ㎡) 건축면적 : 146.36㎡ 건물연면적 : 242.52㎡
우체국 :130.32㎡ 관사2층 :94.92㎡ 관사 3층 :17.28㎡
1962년 5월 16일 개국(우편,우편함저금.보험)
1963년 6월 1일 전신전화개통
1969년 12월 5일 시내전화 개통
1985년 8월 1일 전화광역화(자동화)
1988년 11월 4일 청사 개축
2006년 12월 9일 청사 이전 신축
(2)취급 업무
우편접수.배달.우표판매.우편환.대체.예금.연금.제세공과금.택배
(3)역대 국장
초대국장 :윤병호 (1962.5.16~1993.6.30)
2대국장 :윤경호 1993.7.1~1999.8.31)
3대국장 :강순자 (1999.9.1~ 현재)
<산서 우체국 옛 건물> <산서우체국 새 건물>
4)산서 의용 소방대
옛날 서울에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라는 관청을 두어 수화소방(水火消防)을 하였으나 향리(鄕里)까지는ㄴ 미치지 못하였고 향약정신에 입각하여 자연부락 단위로 환난상휼(患難相恤)에 협조해 온 것이 하나의 풍습이 되어왔다. 우리 면에 일제 때에 소방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창설연월일을 알지 못하고 광복 후 1953년 9월에 다시 창설되어 면내의 화재예방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역대소방대장-조경환,윤수봉,이태희,김태철,한정희,윤진섭,양수영,이재두,서영식,이윤재,이기완,이원형
5) 산서 보건소 및 보건진료소
옛날 우리나라 농촌 실정은 비슷하여 천연두(天然痘), 홍역(紅疫),열병(熱病)등의 전염병과 여러 질병에 걸려 많은 생명을 잃어야만 했다.. 그것은 의료 시설이 부족하고 위생관념도 희박한 결과인데 우리 면에는 한약방(韓藥房)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일제(日帝) 시대에는 예방위생으로 봄. 가을에 청결날을 정하여 대청소를 실시하고 천연두(天然痘).홍역(紅疫)등의 예방을 위해 접종하였으며 건국 후에는 위생 행정이 강화되어 국민의 위생의식을 계몽하고 예방위생 활동으로 많은 실효를 거두었다. 1956년에는 소건소법이 제정되어 각 면에까지 보건진료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에는 모자보건법이 공포되어 임산부(姙産婦) 와 영아(嬰兒)의 건강보호와 함께 산아재한 운동이 실시되는 등 국민보건에 기여 하고 있다. 우리 지방 의료업은 광복 후 이정수(李正銖) 공의(共醫)가 월남하여 지역의료에 기여했으며 양약방도 1953년부터 계속 유지, 한약방과 더불어 면민 건강을 도와왔다. 1980년대 들어와 무의촌일소정책(無醫村一掃政策)에 의해 1985년 현장소에 청사를 짓고 수련의 1명과 보건직 2명이 배치되었다. 그 후 2개소의 진료소(마하,하월)가 증설되었다.
<산서보건소> <마하보건진료소> <하월보건진료소>
6) 산서 농협
1961년 7월 29일 법률 제 670호로 제정 공포된 농업협동조합법에 의하여 산서면 내에 백운리,마하리,학선리,동화리,오산리,용성리,계월리 농업협동조합 등 8개의 리조합이 결성 운영되었으나 조합원 규모는 조합당 100~300 정도로 매우 영세하고 사업 자금이없었기 때문에 농사자금 알선, 비료의 공동 구매 사업에 그치는 등 사업기반이 워낙 취약하고 농협에 대한 조합원의 인식이 낮은 실정에 있었기 때문에 각 리조합은 거의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1971년 초부터 면내 1개로 합병이 추진되어 8개 리 협동조합별로 조합원 총회의 합병결의를 통하여 마침내 1971년 7월 28일 1,774명의 조합원이참여하여 산서면농업협동조합으로 설립등록을 하게 되었다.
○산서면 농업 협동조합 설립위원(30명)
리별 |
성명 |
리별 |
성명 |
리별 |
성명 |
리별 |
성명 |
동화리 |
유재동 |
봉서리 |
정방현 |
신창리 |
허정욱 |
이룡리 |
김용준 |
김형진 |
사상리 |
김응만 |
|
최병철 |
하월리 |
정상만 | |
임순승 |
김진철 |
오산리 |
권복규 |
학선리 |
양병순 | ||
마하리 |
육종철 |
사계리 |
정재수 |
권흥옥 |
이선재 | ||
홍종문 |
이상선 |
권채희 |
건지리 |
모용덕 | |||
백운리 |
조용윤 |
쌍계리 |
김삼수 |
오성리 |
장제호 |
최병관 | |
양경모 |
이행의 |
안병문 |
|
| |||
봉서리 |
김원형 |
신창리 |
이창우 |
이룡리 |
이 영 |
|
|
○ 리 조합별 현황
조합면 |
조합원수 |
조합장 |
조합명 |
조합원수 |
조합장 |
조합명 |
조합원수 |
조합장 |
백운리 |
108 |
조용윤 |
학선리 |
120 |
한부갑 |
용성리 |
387 |
김용준 |
마하리 |
100 |
육종철 |
동화리 |
130 |
임순승 |
사계리 |
349 |
정재수 |
신창리 |
145 |
허정욱 |
오산리 |
187 |
권규복 |
|
|
|
1973년 3월 5일 법률 제2577호로 공포된 개정농협법에 의하여 명칭을 산서리 농업협동조합에서 산서 단위농협협동조합으로 변경하여 11월13일변경등기하고 지금과 같은 종합농협으로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1989년 2월14일 명칭을 산서단위농업협동조합에서 산서농업협동조합으로 변경하고 동년 11월 20일산서농협과 장수농협과도 합병하였다.조합장 선출제도도 바뀌어 지난 1962년에 제정된 농협임원 임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1988년말에 페지되면서 무려 27년 만에야 임명제에서 직선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1989년초부터 농협의 자율경영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많은 변화가 시작 되었다.주위한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규모 경제의 확대로 자율경영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장수농협과 대단위합병이 추진되어 1989년 11월 20일산서농협을 해산하고 장수농협으로 합병되었다.
○ 산서 농협 연혁
1961년 8월 15일 8개 리 농업협동조합 발족
1971년 7월 28일 산서면농업협동조합 발족
1989년 11월 20일 장수농협과 합병 장수 농협 산서지소 개설. 지소장 허정욱
1992년 12월 13일 경제종합센터 건립
1993년 12월 31일 판매사업 50억 달성탑 수상
1996년 3월 31일 장수농협 흑염소 가공공장 준공
1997년 6월 30일 번암농협 합병
1997년 12월 26일 장수농협 미곡종합처리장 준공
2001년 9월 21일 장수농협 하나로마트 대형화
2003년 12월 31일 지도업적평가 전국 1위 달성
2004년 12월 31일 지도업적평가 전북 1위 달성
2005년 8월 15일 농협총화상 수상
2005년 12월 31일 지도업적평가 전북 1위 달성
2007년 6월 30일 13대 김창수 조합장 취임
○장수 농협 대의원
1 |
방화 |
양경희 |
16 |
용암 |
유한호 |
31 |
등석 |
김재수 |
2 |
성재 |
안정환 |
17 |
하오 |
권병혁 |
32 |
봉정 |
이희환 |
3 |
강치 |
송상석 |
18 |
월강 |
권희성 |
33 |
시장 |
이승희 |
4 |
양신 |
김후남 |
19 |
초장 |
윤용준 |
34 |
시장 |
정은주 |
5 |
마평 |
이희원 |
20 |
월호 |
최정훈 |
|
|
|
6 |
서원 |
정상득 |
21 |
진전 |
모시환 |
|
|
|
7 |
봉서 |
황명숙 |
22 |
원흥 |
육광기 |
|
|
|
8 |
사창 |
김종갑 |
23 |
평촌 |
유풍기 |
|
|
|
9 |
당가 |
최대범 |
24 |
신월 |
홍순호 |
|
|
|
10 |
창촌 |
이준식 |
25 |
구창 |
구인서 |
|
|
|
11 |
신등 |
이양식 |
26 |
용전 |
한정연 |
|
|
|
12 |
이룡 |
한수철 |
27 |
압곡 |
강진원 |
|
|
|
13 |
이룡 |
조순옥 |
28 |
구암 |
김민수 |
|
|
|
14 |
대창 |
김수호 |
29 |
동촌 |
이재식 |
|
|
|
15 |
신덕 |
최흥림 |
30 |
능곡 |
양석신 |
|
|
|
7)산서새마을 금고
새마을 금고는 회원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상부상조정신에 입각하여 자금의 조성 및 이용과 회원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지위의 향상 및 지역사회 개발을 통한 건전한 국민정신의 함양과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 연 혁
1983년 4월 17일 발기인 총회
1983년 4월 21일 업무개시
1984년 9월 22일 법인인가 전라북도지사인가 제 9-9-12호
1985년 8월30일 법인 등기
1986년 6월 30일 새마을 연합회 가입
1990년 1월 18일 산서새마을금고 준공식 (현 사무실)
○역대 이사장
직명 |
성명 |
제임기간 |
비고 |
이사장 |
이경래 |
1983.4.21~1985.4.21 |
초대 |
|
김성기 |
1985.4.21 ~ 1987.2.28 |
2대 |
|
이병구 |
1987.3.1 ~ 1991.3.1 |
3~4대 |
|
정익수 |
1991.3.1 ~ 2004.2.28 |
5~7대 |
|
이기완 |
2004.3.1 ~ 2008.2.28 |
8대 |
|
이원형 |
2008.3.1~ 현재 |
9대 |
<산서새마을 금고>
8) 주민자치센터
1.주민자치센터를 운영하는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일종의 주민자치조직으로서
주민자치센터 운영에 대한 주민참여의 활성화, 주민의견 수렴, 자문 역할등을 수행합니다.
2. 주민자치위원회는 읍면동사무소별로 설치하며 관할 구역내 각계각층의 주민대표 15∼25명내외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운영상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위원들이 협의하여 선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민자치위원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서, 주민자치센터 운영에 있어 주민들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주민자치위원회의 구성이나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자치단체별로 조례로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3. 조례(일반적인 조례)
제15조 (설치) 면사무소의 자치센터 운영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거나 결정하기 위하여 동사무소에 주민자치위원회(이하 “위원회”라 한다)를 둔다.
제16조 (기능) ① 위원회는 다음 각 호의 사항에 대하여 자문 및 심의한다.
1. 자치센터의 시설 등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사항
2. 주민의 문화·복지·편익증진에 관한 사항
3. 주민의 자치활동 강화에 관한 사항
4. 지역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항
5. 기타 자치센터의 운영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
② 제1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이 조례에서 위원회가 결정하도록 규정한 사항은 위원회에서 의결로서 결정한다.
③ 위원회는 제21조에 의한 정기회의 개최시 제5조제1항제1호 또는 제6호 수행과 관련된 안건을 심의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제17조 (구성등) ① 위원은 위원장, 부위원장 각1인을 포함하여 25인 이내로 구성하되, 3인 이내의 고문을 별도로 둘 수 있으며, 이 경우 당해 동에서 선출된 시의회 의원은 그 직에 있는 동안 당연직 고문이 될 수 있다.
② 면장은 당해 면사무소의 관할 구역 내에 거주하거나 사업장에 종사하는 자 또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다음 각 호의 방법에 의하여 추천 또는 선출된 후보자 중 봉사정신이 투철하거나 자치센터의 운영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갖춘 자를 위원으로 위촉하여야 한다.
1. 당해 동에 소재하는 각급 학교, 주민자치위원회 및 교육·언론·문 화·예술 기타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추천하는 후보자
2. 공개모집 방법에 의하여 선출된 후보자.
③ 면장은 제2항에 의한 위원을 위촉함에 있어서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관계, 경제계, 일반 주민 등 각계 각층이 균형 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위촉하되, 어느 한 계층에 소속된 위원이 전체 위원의 1/3을 초과해서는 아니되며, 특히, 여성위원의 참여를 적극 장려하여 전체 위원의 1/3 이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④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위원중에서 호선하되 위원장은 공무원이 아닌 자 중에서 선출하여야 한다.
⑤ 고문은 면장이 위촉하되, 당연직이 아닌 고문을 위촉하는 경우에는 당해 면사무소의 관할구역 내에 거주하거나 사업장에 종사하는 자로서 전문적 식견을 갖추었거나 덕망이 높은 자를 위촉한다 .
⑥ 면장은 고문을 포함한 위원 전원에 대한 주요 인적사항을 매년도 개시1월 이내에 공고·게시 등의 방법에 의해 일반 주민에게 공개하여야 하며, 고문을 포함한 위원을 새로이 위촉한 경우에도 주요인적사항을 같은 방법에 의해 일반 주민에게 공개하여야 한다.
⑦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및 당연직이 아닌 고문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다만, 위원장은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제18조 (위원장등의 직무)
① 위원장은 위원회를 대표하고 위원회의 직무를 통할한다.
② 부위원장은 위원장을 보좌하며 위원장의 유고시 그 직무를 대행한다.
③ 고문은 자치센터의 원활한 운영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문·조언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④ 위원은 매월 소정의 시간을 자치센터운영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월별 각 위원의 근무일자, 근무시간, 자원봉사 내용 등은 위원회에서 정한다.
제19조 (간사)
① 위원장은 위원중 간사 1인을 지명하여 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하게 할 수 있다.
② 면장은 필요한 경우 소속공무원으로 하여금 위원회의 사무처리 등을 지원하게 할 수 있다.
제20조 (해촉)
① 면장은 위원 및 당연직이 아닌 고문이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임기 전이라도 해촉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제4호 내지 제5호의 경우에는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1. 당해 면사무소의 관할 구역 외에 거주하게 되거나 사업장을 떠나게 된 경우
2. 질병이나 해외여행 등으로 6개월 이상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3. 스스로 사퇴를 원하는 경우
4. 자치센터의 운영 취지, 목적, 기능 등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을 경우
5. 기타 위원이나 고문으로서 직무를 해태 하였거나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② 제1항에 의한 해촉 후 그 후임자로 위촉된 위원 및 당연직이 아닌 고문의 임기는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제21조 (회의)
① 위원회의 회의는 정기회의와 임시회의로 구분하며 정기회의는 월1회 개최하고 임시회의는 면장 또는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와 위원 1/3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개최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의한 위원회의 회의개최 통지는 위원장 명의로 한다.
③ 위원회의 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의하고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④ 고문은 위원회의 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할 수 있으나, 표결권은 갖지 아니한다.
⑤ 면장은 자치센터 운영과 관련하여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다.
제22조 (회의록)
위원회의 간사는 회의시마다 회의록을 작성하여 비치하여야 한다.
제23조 (실비보상등)
고문을 포함한위원은 무보수 명예직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필요한 경우에는 예산의 범위내에서 실비를 지급할 수 있다.
제24조 (시행규칙등)
조례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규칙으로 정하되 그 이외의 필요한 사항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동장이 운영 세칙으로 정한다.
산서면 주민자치센터를 이끌어갈 초대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산서면은 2009년 10월 28일 11시 산서면사무소 2층 대강당에서 주민자치위원 위촉식을 갖고 위원 25명에 대한 위촉장을 전달했으며 이날 위촉된 주민자치위원들은 지역발전과 주민복지 향상을 위한 폭넓은 의견과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고 모두가 살기 좋은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하게 된다. 차주선 면장은 “올해 처음으로 구성된 위원회인 만큼 산서면 주민자치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며 “산서면민들의 자치역량을 높이고 건강을 책임지는 자치공간이자 복지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왕성한 활동을 바란다”고 말했다.
연번 |
분야별 |
이름 |
비고 |
연번 |
분야별 |
이름 |
비고 |
1 |
고문 |
이경희 |
|
16 |
분과 |
정영덕 |
위원 |
2 |
김진식 |
|
17 |
사회 진흥 분과 |
권희상 |
분과위원장 | |
3 |
이곤호 |
|
18 |
이진우 |
위원 | ||
4 |
총괄 |
육동수 |
위원장 |
19 |
방세혁 |
위원 | |
5 |
안흥수 |
부위원장 |
20 |
권희원 |
위원 | ||
6 |
한병원 |
총무 |
21 |
유한호 |
위원 | ||
7 |
주민 자치 분과 |
윤경호 |
분과위원장 |
22 |
이기재 |
위원 | |
8 |
장관빈 |
위원 |
23 |
여성 분과 |
강순자 |
분과위원 | |
9 |
이병재 |
위원 |
24 |
진영순 |
위원 | ||
10 |
정익수 |
위원 |
25 |
윤재석 |
위원 | ||
11 |
김규생 |
위원 |
26 |
안병안 |
위원 | ||
12 |
임채철 |
위원 |
|
|
|
| |
13 |
문화 예술 체육 |
권승근 |
분과위원장 |
|
|
|
|
14 |
장빈 |
위원 |
|
|
|
| |
15 |
김남기 |
위원 |
|
|
|
|
산서면 주민자치위원회 구성
2. 교육의 조직
1) 근대(近代) 이전의 교육
(1) 국립교육(國立敎育)
우리나라의 교육은 문자의 사용과 때를 같이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보면 중국으로부터 한자(漢字)가 들어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의 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 고구려(高句麗)는 소수림왕(小獸林王)2년(372)에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자제교육(子弟敎育)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문왕 2년(682)에 국학(國學)을 세워 교육하였고 고려(高麗)시대에는 성종(成宗) 11년(992)에 국자감(國子監) 태학(太學) 4문학(四問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이 있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충렬왕(忠烈王)때 국학의 명칭이 성균관(成均館)으로 바뀌니 이 때부터 중국 송대(宋代)의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들어왔으며 이는 조선(朝鮮)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국립대학으로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또 4부학당을 두어 유생(儒生)을 뽑아 교육하였으며, 각 지방의 경우는 목(牧) 부(府) 군(郡) 현(縣)에 향교(鄕校)를 하나씩 설치하고 지방의 유생을 뽑아 가르쳤다. 학과는 유학(儒學) 무예(武藝) 및 병학(兵學) 역학(譯學) 의학(醫學) 천문지리(天文地理) 음양학(陰陽學) 및 점술학(占術學) 산학(算學) 율학(律學) 도학(道學) 등이 있으며 유학 무예 및 병학은 양반계급의 자제에 전수되고 역학 이하는 잡학(雜學)이라 하여 중인계급(中人階級) 자제에 전수되었다. 최고학부인 성균관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생원(生員) 진사(進士)로써 정규생을 삼되 정원 200명이 미달될 때는 4부학당에서 유생을 뽑았으며 각 학생의 학비는 모두 관급이었다. 국가에서는 성균관 직원과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에서 이를 감독케 하였다.
(2) 사립교육(私立敎育)
조선 중기부터는 서원(書院)과 서당(書堂) 등의 교육기관이 생겨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우리 면에는 부락마다 서당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월곡(月谷)의 지금당(知今堂)과 백운리의 백운재(白雲齋)는 사숙(私塾)의 범류에서 벗어나 공학(公學)의 면모를 갖춘 교육장으로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현대식 학교가 설립된 이후 차차 서당은 폐쇄외었다. 1968년 1월 오산리 권창옥(權昌玉)이 운동서당(雲洞書堂)을 세우고 여름 겨울 방학기에 한문을 가르치게 하고 있으며,1989년에 산서경로당의 주관으로 육영당(育英堂)을 건립하여 방학 때를 이용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만헌(晩軒)정염(丁焰)은 과거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2년도 채 못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니 나라수호를 위하여 힘썼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스스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남원(南原)구원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종전 후 고향에 돌아와 제자인 활계(活溪) 이대유(李大臾)와 협의하어 이 학당(學堂)을 세웠다. 이 학당에서 조선조 말엽까지 문과대과 7명 생원진사 30여명이 배출되었다. 대지 357평 답 490평 창원정씨(昌原丁氏),부안김씨(扶安金氏),김해김씨(金海金氏), 삭녕최씨(朔寧崔氏)등 5성문중(五姓門中)에서 운영하고 있다.
(나) 백운재(白雲齋)
백운리에 거주한 능성구씨(稜城具氏)와 남원양씨(南原梁氏)가 글방을 짓고 백운산의 이름을 따서 백운재라 하고 후세교육에 열중하였다. 이학당에서 생원 진사가 몇 명 배출되니 그 곳의 청유(淸流)한 물과 수려(秀麗)한 산이며 4면의 수목이 독서하기에 적합하다 하겠다.
(다) 운동서당(雲洞書堂)
권창옥(權昌玉)이 그의 선고(先考) 청연재(靑蓮齋)를 추모하기 위하여 융친계(隆親契)와 협의하여 건축하였으며 여름 겨울 방학기에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청연재의 사적은 『유교편(儒敎篇)』에 약기(略記)되어 있다.
산서면 겅로당의 주관으로 도비 군지 경로당 시상금과 면내 각 기관 및 유지의 협조로 건축되어 매년 겨울방학기에 충효교실(忠孝敎室)을 운영해 온바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후원회를 걸성하니 회원이 80여명이다. 『예의교본(禮儀敎本)』『사자소학(四字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등의 교재로 초,중,고등학생을 십수년간 양석호(梁錫鎬) 강사(講師)가 훈도(訓導)하였고 현재는 권승근 선생님이 훈도 하고 있다.
3) 근대교육(近代敎育)
(1) 우리 고장의 학교(學校)
1876년 문호개방 후 우리나라는 자주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위하여 신교육을 실시하는 근대학교가 요구되었다. 이 때 최초의 근대학교가 1883년에 세워진 원산학사(元山學舍)와 동문학(同文學)이었다. 이후 미국의 선교단에 의해배배학당(培材學堂) 이화학당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립학교(私立學校)들이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일제(日帝)시대에는 민족의식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인에 의해 건립된 사립학교를 많이 폐교하고 관공립학교를 만들었는데 철저한 식민교육으로 일관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8월부터 미군정(美軍政)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청산하고 민주교육으로 바뀌었고 1946년부터는 의무교육(義務敎育)이 실시되었다. 1948년에 우리 정부가 수립되어 새 교육법이 공포되고 민주이념에 입각한 기회균등 교육이 실시되고 문먕퇴치교육(文盲退治敎育)이 적극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1970년부터는 1면 1중학교(一面一中學校)까지 의무교육 실시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각급 국,공,사립학교가 수많이 존재하고 교육제도 역시 발전하였으며 장학제도도 대폭 늘어나 공부를 잘하면 국내 각급 학교는 물론 외국유학까지도 자비부담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면의 경우 1924년 6월 10일 산서공립보통학교(山西公立普通學校)가 개교되어 현재에 이르고 그밖에 두 개의 초등학교가 있으며 1967년 9월 8일 산서 중학교(山西中學校)설립인가를 받아 1968년 3월 28일 개교하였으며 1986년 9월 5일 산서고등학교(山西高等學校)가 개교되었다.
(2) 산서초등학교
1876년 문호 개방 후 우리나라는 자주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위하여 신교육을 실시하는 근대학교가 요구 되었다.이때 최초의 근대학교가 1883년에 세워진 원산학사와 동문학이었다. 이 후 미국의 선교단에 의해 배재학당(1885),이화학당(1886)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랍학교들이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민족의식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인에 의해 건립된 사립학교를 많이 폐교하고 관공립학교를 만들었는데 철저한 식교육으로 일관 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8월부터 미군정하에서 일제 식민지 교육을 청산하고 민주교육으로 바뀌었고 1946년부터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1948년에 우리 정부가 수립되어 새 교육법이 공포되고 민주이념에 입각한 기회균등 교육이 실시되고 문맹퇴치교육이 적극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산서면은 1924년 6월 10일 산서공립보통학교(山西公立普通學校)가 개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졸업생 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기수는 38회생 215명이다. 초등학교는 이후 2곳이 인가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산서초등학교에 통합 되었다.
<계월(桂月)초등학교(구 계월초등학교)>
주 소 :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 305번지 면적 : 8,286㎡
인가년월일 : 1955년 4월 1일 (계월분교장 인가)
개교년월인 : 1957년 4월 12일 계월초등학교 개교
폐교년월일 : 1993년 2월 28일 (산서초등학교로 통합)
총 졸업생수: 1,550명
<성계초등학교(구 성계초등학교)>
주 소 :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465번지 면적 :12,903㎡
인가년월일 : 1957년 5월 30일 (오성(五聖)분교장 인가)
개교년월인 : 1967년 3월 1일 성계(聖溪)국민학교 개교
폐교년월일 : 1992년 2월 28일 (산서초등학교로 통합)
총 졸업생수: 815명
<산서초등학교 구 건물> <산서초등학교 신청사>
(3) 계월초등학교
주소: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 305번지
면적: 8,286㎡
인가년월일:1955년 4월 1일[계월분교장 인가]
개교년월일:1957년 4월 12일 계월초등학교 개교
폐교년월일:1993년 2월 28일[산서교로 통합]
총 졸업생수는 1,550명이다.
현재는 노인의료복지 시설 장수 예원요양원으 로 사용되고 있음.
(4) 성계초등학교
주소: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446번지
면적: 12,903㎡
인가년원일:1957년 5월 30일
개교년월일:1967년 3월 1일 성계초등학교
폐교년월일:1992년 2월 28일
총 졸업생수는 815명 이다.
(5) 산서중학교
소재지:산서면 동화리 64번지
대지:15,359㎡
건평:2791.25㎡
1967년 9월 중학교 건립발기인 총회를 개최. 양해철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177명으로부터 백미 266가마와 72명으로부터 현금 1백5만5천 원을 희사받아 교실 2칸을 건립,1968년부터 개교하였다. [육성회장 허정욱]
1970년 운동장 확장사업으로 전 면민에게 백비 271가마를 거출,토지를 매입하고 면민의 인력을 동원, 지금의 운동장으로 확장하였다. 1972년 산서면 장학회 설립을 위하여 106명에게 420만원과 82명에게 백미 87가마를 희사받았으며 그 후에도 몇 분의 희사로 현재 1,525만원을 운영하고 있다.
11회와 14회 졸업생은 297명으로 가장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6) 산서고등학교
소재지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73번지
대지:11,619㎡
건평 : 1,563㎡
3. 산서의 조직
1) 자율및 친목조직
(1)산서자율방범대
산업사회가 발달됨에 따라 범죄가 늘어나고 따라서 범죄자도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기존 치안인원으로는 어려움이 있어 사회발달에 발맞추어 1989년 5월11일 35명의 자원봉사자로 첫 발대식을 갖고 청소년의 선도,부녀자 및 노약자의 귀가보호, 도난방지, 청소년 폭력선도 예방,외부차량 적발 등 모든 범죄예방에 주력하고 있다.
가) 산서자율방범대 연혁
. 1989년 5월 11일 발대식을 갖고 산서 지서를 사무실로 시작.
. 1989년 9월 8일 농촌 지도소 사무실로 이전.
. 1992년 11월 28일 현 사무실인 복지회관으로 이전.
. 현직 대장은 마상식 대장, 부대장 2명,감사 2명, 총무 1명, 각조장 7명, 각 대원33명(감사 2명 포함),총44명으로 구성되어 오늘에 이르고있습니다.
나) 산서자율방범대 근무수칙(守則) 1.대원은 봉사정신과 사명감을 갖고 순행하며 범죄예방,순찰 및 야행질서에 최선을 다한다. 2.대원은 음주,취객 및 비행 청소년, 노약자, 부녀, 미아등 발견시 홍익정신으로 선도 귀가및 안전을 위하여 보호, 동행한다. 3.대원은 근무개시, 또는 사건사고 발생시 주무관청에 보고하거나신고하여 지시를 받아야 한다. 4.대원은 근무중 현행범이 발생시는 가장 안전한 합법수단으로 체포 유도하여야 한다. 5.대원은 정당방위가 아니고는 폭력으로 상해하여 우범자를 체포또는 구인 하여서는안된다. 6.대원은 호신용 외에는 타인에게 위압감이나 불쾌감을 주는 흉기나 무기를 소지하여서는 안된다. 7.대원은 신분을 방조하여 사적으로 권력남용 및 근무한계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 8.대원은 경찰업무에 협조하여야 하고 관내 주요 행사시 질서유지에 최선을 다하여 지원출동 근무를 하여야 한다.
다) 산서 자율방범대 전직 대장
초대 권 희 원 유 주 상 장 빈 최 규 오 홍순택
유한호 김남기 유한호 마상식(현재 대장)
(2)산서면 청년회
1990년 지역사회 발전과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복지사회를 이룩함을 목적으로 성립되었다.
- 전직회장:
초대회장 |
유주상 |
1990년 |
2대회장 |
권신택 |
1991년 |
3대회장 |
정윤화 |
1992년 |
4대회장 |
양은모 |
1994년 |
5대회장 |
육관수 |
1995년 |
6대회장 |
한창석 |
1996년 |
7대회장 |
권희원 |
1997년 |
8대회장 |
안병기 |
1998년 |
9대회장 |
이기두 |
1999년 |
10대회장 |
김병인 |
2001년 |
11대회장 |
양철모 |
2003년 |
12대회장 |
홍순목 |
2005년 |
13대회장 |
서근원 |
2007년 |
14대회장 |
이기재 |
2009년 |
15대회장 |
현재 |
|
<산서면 청년회 경로 잔치> <산서면청년회 주관 산서 상징 표석>
2) 행정 조직
(1)리 행정(里行政)
1914년 4월 1일부터 리정(理政)을 맡아 보는 사람을 리장(里長)이라 하였다. 1915년 48개 부락을 14개 리로 통합하고 리장을 두었다. 1961년 19개로 분리(分里)하고 1966년에 다시 통합, 14개 리가 되어 참사제(參事制)를 실시 하였다. 1971년 38개로 분리(分里)하였다가 1981년 다시 33개로 분리하여 리정(里政)을 담당케 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락에는 반장(班長)과 부녀회장(婦女會長)을 두고 운영한다.
마을명 |
통 |
이장 |
마을명 |
통 |
이장 | ||
오성 |
방화 |
1 |
안상준 |
건지 |
월호 |
20 |
이수재 |
성재 |
2 |
안명수 |
진전 |
21 |
모시환 | ||
강치 |
3 |
송동수 |
마하 |
원흥 |
22 |
박환탁 | |
쌍계 |
양신 |
4 |
이재두 |
평촌 |
23 |
최신규 | |
마평 |
5 |
이희원 |
백운 |
신월 |
24 |
임채철 | |
사계 |
서원 |
6 |
정상득 |
구창 |
25 |
구규훈 | |
왕곡 |
7 |
이준희 |
학선 |
용전 |
26 |
최낙생 | |
봉서 |
봉서 |
8 |
김요진 |
압곡 |
27 |
강기성 | |
하월 |
창촌 |
9 |
정흥수 |
구암 |
28 |
김규생 | |
신등 |
10 |
정치수 |
동고 |
29 |
이병재 | ||
사상 |
사창 |
11 |
김노수 |
동화 |
시장 |
30 |
윤인섭 |
당가 |
12 |
신윤식 |
봉정 |
31 |
윤재석 | ||
이룡 |
이룡 |
13 |
한병원 |
등석 |
32 |
임길승 | |
신창 |
대창 |
14 |
이진우 |
능곡 |
33 |
양도영 | |
신덕 |
15 |
최흥림 |
동촌 |
34 |
한순희 | ||
용암 |
16 |
정윤화 |
|
|
|
| |
오산 |
하오 |
17 |
권희상 |
|
|
|
|
월강 |
18 |
권동주 |
|
|
|
| |
초장 |
19 |
박용진 |
|
|
|
|
(2)체육회
초창기 체육은 학교 운동회가 중심이 되었고 체육시설이 학교에 마련되므로 학교 체육이 자연 체육의 주류를 이루었다. 1920년 7월 13일 전 조선체육대회가 조직되고 이 때부터 하부조직으로 각 종목별. 지방별로 점차 확산 되엇다. 산서면에서는 지금부터 35년전인 1975 8월 15일 광복행사로부터 시작되었으나 1994년 부터는 ‘산서면민의날’ 행사로 바뀌었으며 남녀노소 온 주민의 공락의 기회를 갖고 겸하여 각종 경기도 하고 각 리 풍물단도 등장하여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면민 전체의 친목과 단합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하지만 산서면의날 행사가 혹서기 중심에 진행되는 관계로 각 마을에서 행사 준비하는데 많은 어려움과 여름 장마철 피해등으로 인하여 행사 날짜를 변경하자는 안이 산서면이장회의에서 결의되어 제 33회 산서면민의 날과 체육대회를 5월 1일로 변경하여 진행되어지고 있다.
<2010년도 체육회장및 임원> < 각 종 경품 들 >
<체육대회 경기 모습> <옛 면민의날 체육대회>
4. 종교(宗敎)
1.민간신앙(民間信仰)
1)풍수지리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해 풍수지리양비기사상(風水地里陰陽秘記思想)이 시작되었는데 도선비기(道詵秘記)에는 명당(明堂)을 쓰면 발복(發福)하고 잘못 쓰면 바로 해를 본다 하였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성행하여 묘(墓 )를 쓰는데 관심이 많다. 그러나 최근에 산업화,핵가족화,정보화사회가 되면서 선영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일부에서는 가족묘지를 만들어 선영을 한곳으로 모시는 집안이 차차 늘고 있으나, 아직도 지관(地官)에 의해 이장(移葬).개사초, 입석(立石)을 실시하는 풍속은 간간이 남아 있다.
2) 점복(占卜)
점술가와 무단이 미래의 길흉(吉凶)을 예견해 주고 점괘(占卦)에 다라 액막이굿도 하고 비손도 하는 등의 민간 신안으로, 개화 된 현대사회에서는 미신(迷信)이라 하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문복을 하며 점쟁이 말을 믿는 습성이 있다.
2.불교
고구려(高句麗)의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설법에 의해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는 길을 가르친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왔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호국신앙(護國信仰)으로 보호 받게 되었으므로 우리 고장에도 고려(高麗)때의 사찰이 두 곳이나 있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는 유교 사회(儒敎社會)이므로 배척을 받아 쇠퇴하였다가 고종(高宗) 말에 신교(新敎)자융의 원칙에 따라 해금(解禁)되어 다소 활기를 찾게 되었다. 광복후 제헌헌법(制憲憲法)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더욱 활성화 되었다.
위치: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47-1
종파:태고종(太古宗)
연혁:1887년
재산:답5,200평, 전 500평
대지: 500평
건물:5동(대웅전.종각.산신성각.
요사채,잡건물)
문화재: 불상 22구, 정화 5정, 종1개(1.5kg)
석불:장수군 지정 문화재 41호
이 사찰은 비행기재 아래 원흥부락에서 북편으로 살짝 돌아앉은 아담하고 양지바른 곳에 있다. 거대한 석불로 보아 고려 때 상당규모의 도량이었다고 생각되나 폐사되고 석불만 남아 있는 까닭으로 어느 때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알 수 없다. 석불의 규모는 대단히 커서 높이가 4m, 둘레가 3m 정도 인데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각 하였으며 입성으로 되어 있다.. 예술감각이 뛰어나 삼국 시대 석불중 어느 석불에도 뒤지지 않는 정교한 석불이다. 고려시대의 석불이란 설도 있으나 어느시대 조각불이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풍부한 석불이다. 수 백 년 동안 있던 것인데 화웅처사(化雄處士)와 부인 허씨는 허술하나마 집을 지어 석불의 몸을 가리니 그 때부터 원흥사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운선의 딸 청신(靑信)이 계승하고 이어 김귀수에 계승되어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되어 이르고 있다.
위치: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산 4-1
종파:태고종(太古宗)
연혁:고려시대
등록:1971년 전통사찰 80호
건물:3동 대웅전 12평, 수선당 13평,
요사채 14평, 석불 1구, 종 1개(83kG)
불상 3부, 탱화 3점
칠봉산(七峯山) 아래에 숙운암(宿雲庵)이 있었던 것으로 『장옥경헌문집(張玉鏡軒文集)』에 기재 되어 있으며 . 현 법당을 건축할 당시 도관(도광(道光)16년 (1836)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굴된 것을 볼 때 19세기까지는 절이 있었으리라 생각 할 뿐이다. 연대를 알 수 없는 돌로 새긴 석불이 있는데 국가에 경사가 있으려면 석불이 환하게 변색하고. 흉한일이 있으려면 석불에 이끼가 낀다 한다. 석불에 공을 드리면 영험이 있다는 전설과 함께 오랜 세월을 내려오고 있으며 참배객도 끊이지 않ㄱ고 있다. 30여년 전 한국불교미술원장인 임서정 스님은 불상의 양식이나 조각 기법으로 볼때 고려시대의 설불이라 감정 하였다. 1980년 권희선(權熙善)이 뜻있는 신도들과 함께 힘을 모아 현 법당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영월사(映月寺)
위치: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38-2
종파:조계종(曹溪宗)
연혁:1963년 문공부 등록
재산:답316평,전 516평
대지:창원정씨 종중 소유
건물:대웅전 13평, 삼성각 3평, 묘사채 15평
문화재:불상 6구,탱화 7정, 종 1개15(Kg)
이절은 현재 산서면 봉서리에 해당된 이 곳은 장수군 산서면과 남원시 보절면,덕과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은 산상에 있는데 주변에 상당한 고성이 있으며 서남은 막히고 돌북은 열려진 곳에 위치하고 잇다.지금부으로부터 150년전에 한 스님이 성아래 성시마을 뒤에 있는 암자를 이 곳으로 이건(移建)했다 한다.
이 곳은 사찰로서 빼어난 위치로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불제자가 아닌 속세 서생이라 할지라도 수신(修身).수심(修心)하는데 더 없이 좋은 곳이라 할 것이다. 『장수군지(長水郡誌)』에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이 곳에 올라 토굴을 파고 한 겨울을 났다는 말이 있는데 이 고장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위치: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산 10
종퍼:태고종(太古宗)
연혁:1955년 창건
등록: 1970년
건물:5동 법당 3.8평, 칠성각 5.4평
산신각 4.5평, 객실 6.2평 요사채 8.2평
문화재:불상 7구, 탱화 4점,종 1개(112Kg)
오산리 초장마을 동쪽 영대산 아래 지초바웃골에 있다. 자기완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는 주지 스님이 교직자들과 뜻을 모아 운영하고 있으며 신도들의 열성도 대단하다. 법당 주위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기암괴석이 있고 특히 바위 밑에서 나는 약수(藥水)는 몸에 좋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져 있다.
3.유교(儒敎)
공자는 인간의 대성으로 요.순 .우.탕.문.무.주공등이 보여준 도덕정치의 인과 의를 집대성하신분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수양으로부터 치국.치세에 이르는 것이 유교의 근원이며 선비의 학문이라 할 것이다.유교에는 13경:대학,맹자,논어,중용,시전,서전,주역,춘추,효경,예기,주례,의례,이아)을 중요한 경전으로 하고 있으며, 교육의 목적은 윤리의 도덕에 중점을 두어 선인을 양성하여 현인이 되게 하는 데 있고 그 실천 목표는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도 삼국 시대로 추측되는데 설총.최치원등 유학자가 배출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는 국교를 불교로 하면서도 정치와 교육제도는 유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로써 중국의 선진문물을 전달받은 방편으로 삼았다.
조선조가 되면서 숭유배불정책을 국시로 하여 유교를 국교로 하므로 유교중흥의 시대가 되면서 수 많은 유학의 현철이 배출되었으니,권근,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등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여 유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지금도 유교는 사회윤리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산서면에 있는 유교의 전당으로는 압계서원과 서동서원그리고화산영당과 유계영당이 있으나,산서면의 유림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1)압계서원(鴨溪書院)
소재지: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구압
시대:1789년 창건,1958년 증건
규모.구조:사우(祠宇) 1동(목조와즙 4평)
내상문(內三門) 1동 (목조와즙,전면 4칸,측면 3칸,
방 2칸,대청 2칸 19평)
강당(講堂) 1동 (목조 와즙 2칸 6평, 제관실)
사랑(舍廊) 1동(목조와즙 , 2칸 3평)
외삼문(外三門) 1동 (목조와즙, 2칸 3평)
교직사(校直舍 )2동(목조,슬레이트 8칸 21평, 행랑 포함)
향사인물(享祀人物): 주벽(主壁) : 육려(陸麗)
배향(配享):임옥산.박이겸.박이항.육흥진
향사일(享祀日):음력 3월17일
정조(正祖) 13년(1789)에 창건하였다가 대웡군(大院君)집정기인 고종(高宗)5년 (1868)에 조령(朝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광복 후 1958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사동서원(社洞書院)
시대:1842년 창건 1930년 복원, 1984년 중수
규모.구조 :사당(祠堂) 1동 (목조와즙 3칸 12평. 맛배지붕)
강당(講堂) 1동 (목조와즙 5칸 17평 ,팔작지붕)
내삼문(內三門) 1동 (목조 와즙 3칸)
외삼문(外三門) 1동(목조와즙 3칸)
전사각(典祀閣) 1동(목조와즙 14평)
고직사(庫直舍) 1동(목조와즙 12평)
향사인물(享祀人物) -김극일 ,김준손,김기손
김일손,김대유,김치삼,김정택
향사일(享祀日):음력 3월 22일
(3)화산영당(華山影堂)
소재지: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171-1
시대:1928년
규모,구조:
영당(影堂) 1동 (목조와즙 3.5평)
문(門) 1동 (목조와즙 1.5평)
향사인물 : 권집
(4)유계영당(幽溪影堂)
소재지 :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17번지(대산동)
시대 :~1788년
규모.구조: 영당(影堂) (1동 목조와즙)
향사인물 :정재흥
향사일 :음력 9월 13일
(5)문양공별묘(文襄公別廟)
소재지 :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산 27번지
시대 : 미상
규모.구조:별묘 1동(목조와즙)
향사인물 : 양성지
향사일자:음력 동지
(6)운동서당(雲洞書堂)
소재지: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175번지
시대: 1968년
규모.구조: 서당 3칸(목조와즙)
향사인물:권진규
향사일자:음력 3월 15일
4.기독교(基督敎)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속죄와 신앙과 사랑을 본받아 추종하여 영혼의 구원에 따른다는 기독교는 17세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ㄹ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천주교(天主敎)를 서학(西學)이라 하여 서양문물의 하나로 이해하였는데 학문적 대상이던 천주교가 종교 신앙으로서 수용된 것은 18세기 후반 영조(英祖) 말엽부터 였다. 이후 정조(正祖)7년(1783)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서양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 이 신앙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개신교의 경우는 문호개방 이후인 19세기 말부터 국내에 전파되는데,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 교회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로 선교하였다. 그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학교와 의료기관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과 사회봉사활동을 벌였다.
산서면에 처음으로 들어온 장로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김은자 전도사를 파송하여 전주 완산교회 당회장 김윤식 목사의 주례로 1953년 5월 3일 전도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1970년 이후 몇 개 부락에 교회당이 신축되어 교세가 확대 되어 가고 있다.
위치: 산서면 동화리 145-2
설립년월일:1953년 5월 3일
교회건평:114평(목사사택 24평,기타부속건물,대지320평 )
현재담임목사: 나형록목사
산서면 마하리에 평촌교회와 산서면 쌍계리에 쌍계교회를 세워 산서면 전체 복음화에 노력하였으며, 현재 교회 운영하는 목회자와 장로의 열정과 성실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교화 되고 있다.140명의 교인수를 가진 교회로서 주일예배가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2)산서제일그리스도교회
설립년월일:1970년 9월23일
교회건평:75평(목사사택 25평,기타부속건물,대지 235평)
현재담임목회자:권문주목사
1970년 9월 23일 이기영을 주축으로 인근 청년유식자들의 협조로 불취학 아동을 교육시켜 사회에 배출하였다.1984년 정식으로 성직자가 부임하고 교회로서 선교를 행하게 되니 아동교육 차원을 넘어 성도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1988년 4월 에 건물을 현주소에 건립하고 교회를 이전하였다.
(3)평촌교회
위치:산서면 마하리 평촌부락
설립년월일:1987년 3월3일
교회건평:100평(사택 20평,기타부속건물)
현재담임목회자:문영학 목사
처음 신도수가 70명이었으나 계속되는 이농현상으로 현재는 20여명의 신도가 있다.
위치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신월
설립년월일 :2009년
5.원불교(圓佛敎)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1916년 4월 28일(당시26세)대각과 함께 설립한 종교로 내세를 지향하는 새 종교로 도약하고 있다.
(1)산서 원불교
위치:산서면 동화리 106번지
설립년월일:1953년 3월
교세:법당 1동 45평,생활관 1동, 기타 2동)
자산:대지 200평,전 2,000평)
1953년 산서교당 창설을 위해 성미 15입(叺)을 모아 봉서리에 집을 매입하고 원불교 산서지소의 간판을 달았다. 그리고 법회를 매월 9일,3일로 정하였다.1957년 3월 24일 교인회의를 가져 교당을 동화리로 이전할 뜻을 정해 백미 57가마와 봉서리 교당미 50가마를 합하여 현재 교당터를 매수하였다.
1963년 1월 법당 신축공사가 기공되었다. 모성철 슬하 2형제가 백미 20가마를 희사하고 원불교회에서 준비한 백미와 합하여 300가마로 계획을 세워 1964년 12월29일에 법당 낙성봉불식을 하였다. 1970년11월에 종각 및 정문을 준공하고 1977년에 원불교청년회를 결성하였으며,1979,1981,1984년등에 생활도구 및 환경을 정리 하였다.1989년 생활관 및 법당 부속건물 등을 수리하는등 혁신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