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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의 신비또한 사제와 함께 댓글 6
봉헌의 신비 며칠 전 선교사들에게 차량을 지원하는 봉사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월례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마친 다음, 함께 차를 마시며 여담을 나누다가 우연히 ‘봉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에는 열 명이 넘는 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자매도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많은 사람들이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경험담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는데, 그 말씀이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하기까지 하여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귀를 쫑긋하여,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태중교우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일가친척 중에는 개신교 종신봉사자(집사, 권사, 목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천주교 신자이고, 천주교신자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녀 혼자뿐입니다. 다만 얼마 전 그녀가 사위를 얻게 되었는데,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고 제단봉사자(복사단)로 활동했던 신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몇 년간 그녀와 봉사하고 활동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소공동체 일원이 아니면 그런 집안 사정을 잘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고, 함께 생활 나눔을 하지 않는 이상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고, 그런 질문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말 서두부터 알 수 없는 신비감에 싸여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개신교의 봉헌생활을 철저히 교육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마치 예배당이 자기 집인 것처럼, 거의 매일 예배당에 나가 놀고 기도하며 살았으며, 집과 학교와 예배당밖에 몰랐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목사와 다름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신자였으며, 예배당의 장로로서 평생을 일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가정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거의 모든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는 봉헌생활을 털끝 하나 의심하지 않고 믿었으며, 봉헌을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봉헌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영혼으로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십일조의 은혜를 모두 실감하며, 하느님의 사랑에 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나이가 차서 그녀는 하느님을 믿는 멋진 청년을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배인 기도생활과 봉헌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계속하였습니다. 딸과 아들이 태어나 자녀교육을 시키면서도,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믿음은 날로 커져만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온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가 “우리 예배당에도 백만 원 십일조를 내는 가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설교에서 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본당신부가 이런 말을 했으면, 설교하는 신부에게 ‘무슨 되지도 않을 말을 지껄이고 있는가?’하고 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정은 그 날부터 집안에 ‘십일조 백만 원 목표!’라는 문구를 써놓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날 이후 그 자매의 가정뿐만 아니라 그 예배당에 다니는 가정 모두가 그런 문구를 집안 기도 상에 써놓고 매일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부로서 이 말씀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예배당 목사가 하는 ‘십일조 봉헌 목표설정과 청원’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십일조를 백만 원 봉헌하자’는 말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는 가정이 되라는 것이며, 그런 물질적 축복을 하느님께 당당하게 청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는 부자가 되어 백만 원씩 봉헌하라는데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자매는 당연히 목사의 말에 동감하였고, 온 가족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청원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자기 책상머리에 ‘십일조 봉헌을 이백 만원 목표!’라는 새로운 표어를 적어 놓더랍니다.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 녀석도 누나에게 질세라 ‘십일조 봉헌 삼백 만원 목표’라고 적어 놓고 기도하더랍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더 큰 새로운 목표를 놓고 기도하는 것에 감동하였고,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녀는 자녀들을 믿고 오히려 대견해 하였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그 자매의 믿음에 부응하듯이, 그녀의 자녀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기도하며,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가정은 십일조 ‘칠백 만원’을 봉헌하는 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대학을 마치고 시집간 딸은 천주교 신자인 배우자를 얻었는데, 부부가 서로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십일조 ‘이백 이십 만원’을 내는 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자매의 딸은 현재 이름 석 자만 대면 웬만한 젊은이들이 알 수 있는 유명한 영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딸은 이 큰 돈을 모두 예배당에 봉헌하면 목사들만 배불릴 것이니, 지금은 생각을 바꾸어 예배당과 여러 복지단체 나누어 십일조를 봉헌하고 있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팔십 만원을 더 보태어 삼백 만원을 십일조로 봉헌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직 미혼인 아들은 유명한 수학강사가 되어 누나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로 삼백 만원을 봉헌하는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새로운 목표로 ‘십일조 천만 원 목표’로 기도하고 있는데,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길이 눈앞에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자매의 말을 듣고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실로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고, ‘눈앞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과연 실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천주교 신부인 나를 보고 “왜 신부님들은 교우들에게 봉헌의 기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얼버무리며 변명을 해댔지만, 사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얼마 전, 나는 교우들에게 교무금 배가 운동을 하자고 말을 꺼냈다가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는 것 같아 그 말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교무금 ‘오천 원 더 봉헌하자’고 말을 바꾸어 얼버무렸는데, 내가 했던 말을 취소하는 바람에 말에 신빙성을 잃어버리고 괜히 교우들만 들쑤신 것 같아 부끄럽고 죄송한 느낌만 남게 되었습니다. 내가 쓰라린 경험을 해서인지 자매의 말을 듣고, 우리 천주교회의 교무금 제도는 구조적으로 실패한 제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천주교의 봉헌관습으로는 교무금을 자발적으로 올리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이거 한 번 올리려고 애를 쓰다 보면 진이 다 빠지고, 다시 반복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 십일조 많이 봉헌하는 부자가 되라는 의미가 우리 교무금제도에는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천주교 신자는 십 년 전이나 이십 년 전이나 늘 똑같은 교무금을 봉헌하기 일쑤이며, 아예 교무금을 봉헌하지 않는 가정이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봉헌을 하지 않으니 냉담가정, 쉬는 교우가정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봉헌을 잘 하는 가정은 절대로 냉담하거나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책으로 내 놓은 것이 ‘성경 공부 100주간’으로 신심을 드높이고, ‘신심서적 100권 읽기 운동’으로 신앙의 감동을 더 해 보고자 내 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신심이 깊어지고 영성이 높아지면 당연히 자발적으로 봉헌생활도 잘 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 봉헌제도는 시대와 국가 제도가 달라졌다고 혹자가 아무리 얘기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좋은 제도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천주교회의 재정으로는 제대로 된 사업하나 꾸려갈 수가 없습니다. 본당 직원들은 박봉에 시달리며, 오로지 봉사와 희생만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본당 성음악은 날로 후퇴하고 있으며, 예술가들은 대부분 월급을 주는 개신교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개신교 신자가 됩니다. 또한 능력 있는 젊은이들도 대부분 개신교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펼칠 수 있는 많은 일과 사업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입니다. 삼십 년 전 내가 청년시절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나와 함께 음악을 하던 많은 동료들이 천주교를 떠나 개신교로 향했고, 그 결과 그들의 자녀들이 지금 개신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정통교리를 부르짖어도 거대 자본 앞에서는 다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대 자본을 얻고 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현재의 개신교는 부패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그 자매도 개신교의 부패에 신물을 느끼고 천주교로 개종한 듯합니다. ‘십일조’는 분명 하느님의 명령이며, 따라야 할 것이지만, 그것을 차지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토마토 11.12.22. 14:17
봉헌! 정말 좋습니다. 번만큼 내는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때 돈 많이벌어 너무 쉽게 써버리고 쓸데없는것에 손대 손해보고 하지 말라고한 돈거래하여 당하고 사실 그땐 전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유인ㅋ 하지만 요즘은 기도합니다. 저의 작은 정성 보템이 될수있게 주님께 청합니다. 도리켜 보면 결국은 신앙안에 진정한 삶이 있다고 느끼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있고 정말 봉헌 잘 할 수 있게 더욱 분발하는 한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아멘
안크리스티나 11.12.23. 20:21
넉넉해서 많이 봉헌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먼저 봉헌하고 넉넉해질 수도 있어요.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봉헌을 늘려가면 그 몇배로 늘려서 돌려주신다는 것을 실감하며 생활합니다^^* 모리아산 12.01.02. 14:50
아멘. 신부님 강론 잘 경청 하였습니다. 봉헌 - 정말로 놀라운 신비 입니다.저역시 개신교 신자에서 천주교로 개종 하였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정확히 알고 믿고 실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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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 자매님이 어릴 때부터 숨쉬는 것처럼 신앙을 키워준 부모님, 가정환경이 정말 부럽습니다. 윗글에서는 봉헌을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말했지만, 실은 시간, 노력도 모두 봉헌할 대상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십일조에 턱없이 부족해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