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말씀: 불초 소생이 보내드린 보잘것 없는글(인간 신희석이가 소위 ‘한국적 출세’를 아니한 이유①: 문제의 제기)에 대하여 불과 하룻동안에 50 여명의 동문 여러분들께서 읽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번째의 글 '박정희와 나'를 보내드리오니 많은
애독과 아울러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 희 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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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화: 내가 본 박정희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대면한 사실이 없다.
다만 1978년 가을, 동경대학대학원 국제관계론연구실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만 33세의
나는 우리정부의 해외두뇌유치계획의 일환으로(강영훈 초대외교안보연구원장 談:당시) 외무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 당시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로 부임하기 위하여 (또한 모교인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의 최종교섭을 위한 각종준비작업을 하는 등) 다양한 업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때를 전후로 하여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이 대결한 제 10 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1978년
12월12일). 현실정치와 전혀 관련성이 없는 나로서는 그다지 커다란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청와대
정무수석실 (Y모정무수석)관계자로부터 외무부외교안보연구원 동료교수인 L모박사와 내가 동시에
유정회소속 전국구 국회의원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하는 전혀 사실무근한 연락을 받았다. 나는 순간
당황하였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는 박정희대통령과 전혀 면식도 없고 아무런 인연도 없는
입장이었기에 적지않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동경대학 국제관계론연구실이 나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귀국후 정치학자로서
아카데미즘의 세계와 더불어 한국에서 정책연구활동과 교육활동에 전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 동경대학의 은사요,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인 지도교수
Eto,Shinkichi(衛籐瀋吉)선생을 비롯한 몇사람의 가까운 석학들과 상의한 결과, 그들은 전원일치로
나의 한국정계진출을 극구 반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정계로 진출하여 우선 국회의원이 될 경우,
이미 취득한 동경대학박사학위기의 반환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하는 협박성(?) 소식도 간접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겁을 먹고 적지않게 주저하였다(피눈물 흘리면서 거의 10 년간 공들여 취득한박사학위기를
하루아침에 뺏기다니?). '박정희정권의 국회의원'으로서 정계에 입문하여 정치인의 길을 걸어야할지
아니면 사회과학자(정치학교수)로서 학문과 연구의 길을 걸어야할지 나는 적지않게 고민하였다.
그 당시 내가 만약 정치인의 길을 선택하였더라면 박정희대통령이야말로 나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은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존경하고 추종하였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당시 어떻한 과정과 경로로 내가 유정회 국회의원 전국구 후보중의 한사람으로 살며시
거론되었는지 확실히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의 평생 은인으로서 해외두뇌국내유치
계획의 일환으로 외무부(당시)로 나를 불러주신 강영훈 前국무총리(초대 외무부외교안보연구원장)와
나를 평소에 아끼고 가끔 채찍질을 해 주셨던 민관식 前국회의장 그리고 김세진 박사(훗날 주뉴욕총영사,
상공부차관 역임) 세분의 적극적인 추천의 결과라는 사실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특히 민관식 前국회의장은 1980년 8월경, 소위 '서울의 봄'이 마무리되고 어느정도 국내정국이 진정기미를
보일때 나를 데리고 일본의 정계와 관계시찰을 위하여 약 1 주일동안 동경을 방문하였다. Hotel Okura에
체류하는동안 우리는 Suzuki Zenko일본수상,Nakasone Yasuhiro 행정관리청장관(? 중의원의원),
Takeshita Noboru 자민당간사장 (?중의원의원),Sakurauchi Yoshio 중의원의장,동경대학의 Eto Shinkichi
교수(국제정치학자), Sato Seizaburo 교수(일본정치외교론),Honma Nagayo 교수(미일관계론), 외무대신(45여년전의 회동이었기에 이름기억안남),Sejima Ryuzo ItoChYu일본재벌고문(거물급경제인) 등의 일본정관계요인들과 식사회동을 하면서 양국의 정국현황과 한미일관계의 전망에 관하여 정책간담회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내가직접 "최근일본정국동향과 일본의 對韓인식/정책" 이라는 제목으로 정책보고서(秘)를 작성하여
민관식 前국회의장의 지시로 주일한국대사관의 이상구 정무공사(나중에 중앙정보부차장,주말레이지아대사로 영전)를 통하여 서울로 보고하였다.
또한, 나는 귀국후 민 의장과의 방일결과를 박동진 외무부장관,강영훈 외교안보연구원장,공로명 차관보, 등 외무부관계자들에게도 브리핑하였다. 지금 회고하건대, 그 당시 중앙정보부에 전달된 민관식 국회의장의 보고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도 보고되어 중요한 정책현안자료로 활용된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 근거 無). 귀국길에 민관식 의장과 나는 신깐센으로 Kyoto를 방문, Kyoto대학의 국제관계전문가 Ichimura Shinichi 교수, Yano Toru교수등과 개별식사회동의 시간을 가진후 平安神宮, 龍安寺, 石庭 등 세계
문화유산을 견학한 후 취중에 淸水寺의 Mawaribudai에 앉아서 상당한 시간 정담을 나누었던 45년전의 옛 추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만약 78년도 가을에 학문보다도 정치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교수직 취업을 과감히 버리고 전국구보다는 나의 고향 대전에서 지역구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차례의 연속당선을 기록한후, 더 큰 자리를 향한 정치행보를 줄달음질 하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미국과 일본에서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하였지만, 영광의 조국 대한민국과 그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전고등학교→대전중학교→대흥국민학교로 점철되는 대전촌놈인 나에게 있어서 대전고 졸업동창생들은 나의 커다란 힘이요, 소위“빽”이 될 수도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행보의 길로 나갔었더라면 나는 소위 말하는 “한국적 출세” 또는 “세속적 출세”의 길을 걸었을 런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오늘날과 같이 학문의 길을 선택한 것을을 결코 후회 하지 아니한다.
동경대학은사들의 진지한 권고와 아울러 오로지 학문의 길을 걷기를 희망했던 선친의 준엄한 꾸지람은
나로 하여금 학문과 배움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나의 先親께서는 “미국하버드대학이나 일본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면 동해바다에 빠져 죽는것이 낳을 것이다”라고 강조할 정도로 학문의 길을 권장
하였다. '천하대란의 세파속에서 뜻이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몸을 감추고' 불안정하고 세속적인 정계진출을
삼가하고 학문의 길을 꾸준히 걸어라고 하였던 선친의 지침이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요컨대, 박정희대통령은 내 인생에 커다란 운명적변화를 초래할 뻔 하었던 결정적인 인물이며,
국가발전과 민족중흥을 위한 박 대통령의 업적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호에 계속:③ 내가 본전두환)!
첫댓글 선비의 사는 방법과 위정자의 사는 방법은,
초식하는 토끼가 하는 말,
"왜 호랑이는 지저분하게 피 냄세나는 육식을 하는 지 모리겠다".
고 하듯이 ..... 영원히 이해를 할수 없는 겁니다.
세상을 편히 살려면 이웃을 잘 만나야 하는 데....
특히나 만나지 말아야 할 이웃은 , 똑바른 위정자는 그래도 낳은 편이지만 .
첫째 정상배(政商輩). 둘째 조폭(組暴). 입니다.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균서! 인생을 먼저 걸어가는 선학으로서 들려주신 귀중한 말씀 고맙게 생각하네.
대전고 43 의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하여 열심히 남은 인생을 살아 갑세! 자주 만나자! 희석이가.
잘 보구 가네요~~`
잊지않고 잘 보고 가시는 기준이에게 항상 감사 드리네. 또 다음 글을 기대해 주게! 국회시찰ok? 희석이가.
학문의 길을 택했으니 ' 철세 '를 상면할 수 있는 겨 ~
짜식 ~ 아주 잘한겨 !!!
철세야! 소생의 미련한 선택을 아주 잘한 것이라고 칭찬해주는 따뜻한 한 말씀에 깊이 감동 하네.
우리 함께 굳세게 살아가자, 응! 희석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