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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2 /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 서안. 우루무치
사막지대의 옥토 '아름다운 목장'
박찬 / 스포츠서울 문화부 차장
신라승 원측법사 사리탑이 있는 곳-서안의 흥교사
한시간 반가량 그런 길을 달려가다 보니 멀리 언덕 위에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탑이 보인다. 바로 흥교사에 있는 삼장법사 현장스님의 5층 사리탑이다. 현장은 손오공과 함께 부처님의 나라인 천축으로 법을 구하러 가는 얘기를 담은 중국의 기서 「서유기」에나오는 인물.
그는 인도유학을 하고 돌아온 후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에서 신라승 원측과 중국승 규기 등 제자들과 함께 역경사업에 진력하다가 664년 세상을 떠난 중국의 고승이다.
그후 669년 이곳에 탑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 이 탑은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5층 전탑(벽돌로 만든 탑)이다. 그러나 이 탑보다 더 나의 흥미를 끈 것은 현장스님 탑 바로 옆에 있는 신라 승려 원측법사의 3층 사리탑이다.
현장스님의 5층탑을 가운데 두고 그의 두 제자인 규기와 원측의 3층탑을 좌우에 배치했는데 삼장법사의 탑에 비하면 한결 작고 간결하지만 신라 스님이 이처럼 중국 최고의 고승과 나란히 중국인들의 존숭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무한한 긍지를 느끼게 해준다.
원측은 신라 진평왕 35년(613년) 경주 모량에서 신라 왕실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문아로 3세 때 동진출가해 15세 때 당나라 유학길에 오를 정도로 어려서부터 명민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역경과 학문이 중국의 어느 고승보다도 뛰어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 전해오는 원측스님의 얘기는 그가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했으며 고난 끝에 그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장스님이 자은사에서 제자들에게 불경을 가르치며 그가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할 때 마침 그곳에 유학가 있던 원측은 처음엔 외국인이라 하여 규기를 비롯한 현장스님의 중국인 제자들이 그를 냉대해 공부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현장스님의 가르침을 문밖에서 동냥하듯 들으며 공부했는데 그의 재주를 알아본
현장스님이 제자들을 꾸짖고 원측을 큰 학생으로 세워 방에 들어와 공부하게 하고 또 그와 함께 역경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원측스님은 이후 낙양에서 열반에 들었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가 스승인 현장법사의 몸에서 나온 7개의 사리보다 훨씬 더 많은 49개였다고 전한다.
원측스님은 한때 신라정부가 귀국을 요청하자 당나라 측천무후가 이를 완강히 거절했을 중국에서 저명한 고승으로 대접받았으며 측천무후로 부터 생불과 같은 예우를 받은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2년 전 중국 하남대학 도서관에서 진본이 발견돼 관심을 모았던 원측스님의 「해심밀경소」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신라 고승의 3대 저작물로 우리 학계는 물론 세계 불교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차가 흥교사 앞에 이르자 아직 이른 아침 이어서인지 문이 굳게 잠겨 있다. 관리인을 불러 문을 열고 경내로 들어서자 그때서야 젊은 스님 몇 분이 마당을 쓸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도량으로 나온다. 흥교사는 669년에 창건된 중국의 고찰로 1862년 청나라 동치년간 당시 섬서성 지역에 살고 있던 회족들의 봉기로 탑을 제외하곤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흥교사는 그후 1922년부터1939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흥교사에는 현재 20여 명의 스님들이 살고 있는데 개방 전 인민정부 시절에도 두세 명의 승려들이 절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법당 뒤편에선 새로와 불전을 짓고 그 안에 모실 와불을 조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절은 개방 이후한국 불교신자들이 간간히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흥교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장경루가, 왼쪽은 등근 원으로 된 안은 문을 지나 삼장법사 현장스님과 원측, 규기 등 그의 두 제자의 사리탑이 있다. 사리탑 뒤편에는 세 분의 영정과 기념비, 이들이 번역한 각종 불교경전을 모셔둔 대편각당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요사체와 법당, 그리고 새로 조성하는 와불전이 있다.
안내인과 함께 흥교사 주위를 한바퀴 돌며 안내를 받고 있는데 한 어머니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아들을 앞세우고 불공을 드리기 위해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이들과 함께 법당으로 들어가는 젊은 스님을 붙잡고 몇 장 사진을 찍었다. 이윽고 징소리와 염불 외우는 소리가 들린다. 얼핏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의 어머니가 열심히 절을 하고 있다. 자식을 위한 모정은 어디나 다를 게 없나보다.
흥교사가 자리한 종남산 부근은 이밖에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 우리광복군의 히밀훈련소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해방 직전 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이범석) 병사들이 미 첩보부대 0SS의 주관으로 비밀훈련을 받았던 곳이다. 미국은 또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 훈련을 시키기 위해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이곳에 이들을 수용할 병사를 신축 중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3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공작의 임무를 띠고 본국에 파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2백여 명의 우리 광복군은 파견 직전, 일본의 항복으로 애석하게도 참전이 무산되고 말았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소수민족의 천지 -우루무치
낭만적으로만 보이던 서안의 겨을 안개가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12월31일 아침, 안개낀 시골길을 달려 흥교사에 다녀온 후 옛날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던 장안 내성의 서문을 둘러보고 돈황행 비행기가 있는 난주로 가기 위해 서안공항으로 갔으나 안개로 비행기가 취소돼버려 꼼짝할 수 없게된 것이다. 한낮인데도 공항주변은 안개가 자욱하다. 스루가이드와 현지 가이드가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보지만 비행기가 취소됐다는 데야 별수 없었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난주행 기차라도 타기 위해 부랴부랴 서안역으로 달려갔다.
돈황 입구인 유원역까지는 기차로 40여 시간이 걸린다고 해 장거리 기차여행에 대비해 먹을 것을 잔뜩 샀으나 표를 구하러 간 가이드가 빈손으로 돌아와 잠시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실크로드고 뭐고 다 틀린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에 모두 침울해 있는데 스루가이드가 스케줄을 거꾸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호텔에 가서 의논하기로 하고 다시 우리가 묵었던 호텔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애초의 스케줄은 서안-난주-돈황-투루판-우루무치였다. 그러나 스루가이드는 서안에서 우루무치로 먼저 간 다음 거꾸로 투루판-돈황-난주로 해서 실크로드 지역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스케줄이 엉망이 됐지만 장춘 본사에 연락해 스케줄 조정을 하겠다는 스루가이드 말을 듣고 '모로 가든 바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망년을 서안에서 즐겁게(?) 보내기로 했다. 호텔에 들어서니 로비가 한국말로 시글벅적하다. 한국 교수 연수팀 50여명이 막 북경으로부터 도착했다는 것이다. 호텔 로비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있어 가까이 가서 보니 선배 시인인 전북대 최승범 교수가 앉아 있었다.
이국에서 만나는 지인은 더욱 반가운지라 최교수가 체크인을 할 때까지 로비에 같이 앉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바쁘게 뛰어다니는 스루가이드 전성석 부장의 얼굴은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뭐가 잘 안 되는 것인지‥‥전 스케줄을 다시 짜고 비행기·기차 ·호텔예약 다시 해야 하는데 혹시 하나라도 어긋나면 만사가 뒤틀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1992년 송구영신을 위해 이틀 동안 단골로 터두었던 호텔 앞 허름한 회족 식당에서 우리가 가지고 간 한국고추장과 김치 등으로 김치 고기 볶음과 떡볶이 대신 국수볶음을 만들어 조촐한 망년회를 가졌다. 0시가 되자 여기 저기서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쉽게도 미처 폭죽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 일행은 중국 청년들이 터드리는 폭죽 구경만 해야 했다. 어두운 서안 거리는 온통 폭죽 터뜨리는 소리와 화약 냄새로 진동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케줄을 변경한 우리는 이튿날인 정월 초하루 우루무치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안공항으로 나다. 호텔을 나오면서 서안역에서 기차여행에 대비해 사뒀던 사과·배 등 과일과 중국 밀빵, 한국고추장 등을 최교수 방으로 올려보내고 공항으로 향했다. 귀국해서 들은 얘기지만 그때 우리가 준 과일과 한국고추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란다 자신들도 다 먹지 않고 뒤에 들어올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고 왔단다. 서안공항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지만 어제보다는 다소 나아져 비행기 이착륙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낮 2시 15분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또 한 시간 가량 연발한다. 중국 국내선은 특히 겨울철에는 제대로 시간을 맞춰 출발하는 예가 드물다고 한다.
비행기 출발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그동안 우리를 웃겨오던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의 서안 현지 가이드 최승수씨가 '중국에선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이 비정상이야요'라고 말해 우리를 또 한번 웃긴다.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예정시간보다 1시간40여 분이 지난 오후3시 드디어 출발한다. 비행기를 타니 비행기 안은 마치 우리나라시골 장터길을 오가는 완행버스처럼 온갖 짐이 통로마다 쌓여있고 퀴퀴한 냄새마저 심하다. 겨울 중국여행은 중국 특유의 냄새가 없어 좋다고 하는데 따뜻한 비행기안이다 보니 어쩔 수 없나보다. 비행기엔 외국인 승객이라곤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그마저도 우리가 외국인이니 그렇게 생각하지만 생긴 모습이 한족과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승객들은 우리가 외국인인지 어떤지도 모를 것이다. 하기야 정월 초하루부터 낯선 외국 땅을, 그것도 오지중의 오지라는 중국 신강지방을 여행할 외국인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비행기는 눈이 하얗게 덮인 서안 화산줄기를 넘어 광막한 고비사막 지대를 날아 3시간여 만에 흰눈을 머리에 쓰고 있는 천산산맥 북록의 우루무치공항에 착륙한다. 스케줄 변경이 성공적이었는지 공항에 현지 가이드가 나와 우리를 반긴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신강 위구르자치구에서 가장 좋다는 '가일대반점'.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호텔로 가는 길 양편으론 백양나무와 측백나무 가로수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서있다. 우루무치엔 한달에 두번 정도 눈이 오는데 한번에 보통 20센티미터 이상 쌓인다고 한다.
그러나 가로수와 길 양편엔 눈이 쌓여 있는데 찻길은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다. 현지 가이드에게 물으니 길마다 책임구역이 정해져 있어 눈이 오면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치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눈이 많은 고장에서 당국이 일일이 그 많은 눈을 다 치울 수 없다보니 주민들에게 책임구역을 정해 눈을 치우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루무치 거리는 생각보다 무척 한산한 편이다. 중국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자전거 행렬을 이곳에선 볼 수가 없었다. 아마 겨울철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탐스런 눈발이 끊이지 않는 어두운 우루무치 거리에 주민들이 나와 눈을 치우고 있다. 미리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로 들어서니 이곳 호텔 로비에서도 빨간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 현악4중주단이 가벼운 클래식음악을 연주하며 우리를 맞는다. 무척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호텔 또 한 외국인이 경영하는 최고급 호텔답게 깔끔하다. 체크인을 하는 도중 마침 호텔 연회장에서 위구르족 민속공연이 열린다 하여 호텔 매니저에게 부탁, 공연장으로 갔다. 호텔에서 마련한 신정 맞이 프로그램의 하나로 각종 민속음악 연주와 패션쇼가 함께 열리고 있었다.
디너쇼를 겸한 이 행사는 그러나 본격적인 민속공연 행사가 아니라 일종의 댄스 파티 같은 거였다. 민속춤도 우리가 기대했던 위구르족 가무가 아니라 코사크족 민속무용 하나 뿐이었다.
'구리(이곳 말로 꽃이라는 뜻)' 라는 이름의 스물두 살 난 코사크족 처녀가 「행복한 코사크소녀 Happy Kozac Girl」란 제목의 코사크 민속춤을 췄는데 우리는 춤보다 이름 처럼 예쁜 그녀의 미모에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우리가 민속춤에 관심을 표시하자 아까 호텔 연회장을 안내했던 호텔의 예쁜 처녀 매니저가 내일 저녁은 '무슬렘의 날'이란 주제로 뷔페겸 무슬렘 민속공연이 있으니 미리 예약을 해두라고 꼬드긴다.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흔쾌히 예약을 했다.
우루무치는 한문으로 鳥漁木濟라고 하는데 우루무치 강변에 건설된, 도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원래 우루무치는 '광대한 목초지' 또는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목초지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살던 수많은 유목민들의 사활이 걸린 생명선이라 오랜 세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 '투쟁'이란 뜻도 있다고 한다. 우루무치는 중국 신강-위구르란의 성도로 모두 13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인종 전시장이기도 하다. 인구는 유동 인구까지 합쳐 약 1백30만 명 정도. 겨울 평균기온은 영하 15도, 여름철 평균기온은 섭씨 20도 정도로 별로 덥지 않아 여름철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휴양지로 유명하다. 이곳 특산품은 옥돌, 특산주는 '이리곡'이라는 술로 55도쯤 되는 상당히 독한 술이다. 또 이곳은 양을 많이 기르는데 양의 숫자가 신강성 인구보다도 많다고 한다.
우루무치는 주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연간 약4∼5만 명이 물려든다고 한다. 한국인은 개방 이후 일년에 200명 정도 찾아오는데 주로 상사맨들이나 실크로드를 찾는 학술팀이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정월 초하루에 우루무치에 도착했으니 1993년에 우루무치를 찾은 첫번째 한국인 관광객인 셈이다. 우루무치는 천산 산맥 북쪽 기슭, 우루무치 강변의 해발 915미터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사막지대의 옥토인 이곳은 남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에 닿아있고 북쪽으로 중가리아 분지, 서쪽으론 구 소련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이어진다.
이 지역은 신강의 사막지대에서는 옥토나 마찬가지인 곳이어서 옛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유목민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렸다. 특히 중가리족과 회족이 서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7세기 들어 당나라가 사막지역을 장악했을 때 천산북로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이곳에'북정도호부'를 설치하고 정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후에도 몽고나 투르크겔 등 여러 유목민족들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여 왔다. 이어 18세기 중엽 , 청나라 건륭제는 중가리아 지역을 평정한 후 이 지역에 성을 축조하고 '적화' 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우루무치는 19세기에 접어들어 신강성이 설치 되면서1882년 신강성 성도로 성장했고 러시아와 교역하는 시장이 섰다. 그리고 장개석의 민국시대엔 '적화현'이라 부르다가 1948년 중공 정권이 수립된 후우루무치 시로 개칭되면서 신강성의 성도로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원래 초원기후로 초원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옛부터 목축이 주산업을 이루었다. 따라서 양모·피혁 등이 많이 생산· 교역되었는데 이후에는 관개농업이 발달해 농작물생산이 급속히 늘어났다. 더욱이 이 지역에 무진장하게 묻혀있는 석유와 석탄·철광·동광 등이 개발되었고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들이 들어서면서 급속히 발전하게 됐다. 때문에 요즘 우루무치는 시멘트 화학·주철·강철· 자동차공업의 발달과 함께 전통적인 산업을 이어받은 피혁과 면방직 ·제분공업까지 발달돼 명실상부하게 신강성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해 있다. 우루무치는 또 신강성 성도이기 때문에 신강성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루무치-북경선 외에도 중국각지로 가는 항공노선이 개설돼 있고 난신철로 등 철도망과 도로망도 잘 발달돼 있다.
이튿날 아침 10시30분, 우리는 먼저 우루무치 자유시장을 찾았다 아침 10시 30분이라니까 날이 환하게 밝았을 것 같지만 북경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엄밀히 따지자면 8시 30분으로 겨울날로는 이른 아침이다. 중국은 그 넓은 땅덩어리가두 북경 시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실제 우루무치와 북경과는 두 시간의 시차가 난다. 때문에10시30분이라 해도 새벽 같기만 하고 더구나 정월 초이틀이니 시장이 제대로 설 리 없다. 일과도 자연히 늦게 시작한다.
원단 휴일이 겹쳐서 시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가 많았다. 시장 입구에서 우유에 계란을 푼 국물
을 사먹었는데 입맛에 딱 맞다. 시장 안엔 수많은 개인상점이 있고 이들 개인상점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사무실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현재 중국에선 개방 이후 개인상점이 전국적으로 번져가며 활발하게 거래를 이루고 있어 자본주의 시장경제원리가 이곳에서도 폭넓게 확산돼가고 있음을 느끼지만 아직 문을 덜 열기는 했지만 이미 문을 연 장신구가게, 등 식료품가게, 옷가게, 과일가게 등 가게들을 돌아보다 자유시장을 나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로는 중국요리인 '통양구이'를 시켜 먹었다. 신강에 온 이상 통양구이를 먹어보자는 의견에 따라 10 달러씩 내 미리 예약한 것 이었다. 양을 통째로 구운 것인데 새끼 양고기 맛이 의외로 좋다. 우리 일행의 먹성은 정말 끝내준다. 10명이 통양 한 마리를 모두 먹어치우고도 부족해 이미 차려진 중국요리도 싹 쓰는 것이다.
한참 양고기를 먹다가 고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 가이드를 통해 주방에 물으니 이미 다 먹었다며 주방장이 우리를 주방까지 안내하며 해명한다. 주방장의 난처해 하는 모습도 우스웠지만 그 많은 양고기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우리 일행의 먹성에도 절로 웃음이 난다. 주방에 가보니 아닌 게 아니라 언제 다 먹어치웠는지 통양구이는 뼈만 앙상하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낯선 이국 땅에 와서 모두 잘먹으니 안심도 된다.
식사를 마치고 우루무치 최고의 관광지로 알려진 남산목장을 향해 떠났다. 우루무치에서 75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은 우루무치시내의 신강-위구자치구 박물관, 천산 '천지'와 함께 우루무치를 방문하는 모든 관광객이 찾는 관광코스다. '서백양구'로 불리기도 하는 남산목장 가는 길은 거의 대부분 고원지대를 지나는 구릉 길인데 겨울이라서 그런지 길 양편으로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그러나 눈이 덮이지 않은 곳은 군데군데 시든 풀들과 자갈, 흙이 섞인 황야지대이다. 여름철 같으면 멀리 천산의 횐눈을 배경으로 군데군데 어우러진 농가와 길 양편으로 핀 뭇꽃들로 '무릉도원'이라 부를 만큼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모든 게 황량하기만 하다.
우리를 태운 호텔 셔틀버스는 눈길을 헤치며 남산목장을 향하다가 목장이 얼마 안 남은 산비탈 오르막길에서 눈 때문에 더 이상가지 못하고 길가 한마을 옆에 차를 댄다. 코사크족이 사는 마을이란다. 가이드는 남산목장 대신 코사크족 마을에 가보자며 모두 차에서 내리라고 한다 차에서 내리니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우리는 코사크족 마을로 들어가 코사크들이 사는 집을 둘러봤다.
코사크족의 집은 흙벽에 이엉을 올린 흙집으로 마치 50∼60년대 우리나라 시골의 초가집 같은 느낌을 준다. 코사크들의 양해를 구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집안이 의외로 따뜻하다. 지붕엔 건초더미를 얹어놓아 바깥 차가운 공기를 차단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선 현지 가이드들 조차언어소통이 잘 안 되는지 대화를 나누다가 자주 고개를 갸웃댄다. 이들 코사크들은 주로 물물교환으로 생활필수품을 구하는데 이들을 상대로 한 장사는 주로 회족들이 맡아서 한다고 한다.
집안엔 카페트가 바닥과 벽에 널려 있는데 코사크족의 빈부의 차이는 집에 카페트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구분한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간 집은 그런 대로 잘사는 집이었는지 바닥에 카페트가 몇 겹씩 깔려 있고 벽에도 사방을 돌아가면서 걸려 있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이들 코사크들은 우리가 반갑다는 듯 차대접을 한다. 난로에 눈을 녹여 끓여 내오는 차는 '염차'로 맛이 약간 짜다. 우리는 차 대접을 받고 답례로 얼마 안되는 중국 돈과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산 껌·담배·볼펜 등을 내놓았다.
집밖으로 나와 기념촬영을 하는데 마침 하교시간이었는지 코사크족 어린이들이 떼지어 마을로 들어온다. 이 겨울에 아이들이 웬 학교냐고 물으니 가이드는 이곳에는 겨울방학이 없다고 한다. 코사크족은 유목민들이라 나는 봄에 온 가족이 양떼를 몰고 나가면 겨울, 눈이 내려야 돌아오기 때문에 아이들 공부는 주로 겨울에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 예의 그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우리들 주위를 맴돈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도 젊은 처녀나 청년들이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이곳에도 개방 바람으로 모두 도시로 나가고 없다고 한다. 이들은 모택동과 등소평 외에는 현재의 중국지도자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개방바람도 전혀 무관하게 사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처럼 외따로 사는데 이념인들 무슨 소용이랴. 코사크 마을은 50∼60년대 우리나라의 시골마을처럼 한없이 평화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http://www.arko.or.kr/zine/artspaper94_10/1994100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