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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온으로 행복 만들기
오온으로 행복한 삶을 창조하다
오온은 곧 ‘나’이며 세상이다. 이 세상은 곧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상은 공하지만 어쨌든 오온이라는 공한 것이 가합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러면 이 신기루 같고 비실체적인 영화 같은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그동안 불교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공하고 환영같다고 하면서 실체가 없다는 것만 강조해 오다 보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현실감각이 없다거나, 당장 눈앞의 막막한 현실적 고민을 타파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설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우리가 고통받고 있지만 그 고통이란 것도 다 환상이니 그 환상 속에서 괴로워할 것이 무엇인가? 물론 맞다. 그러나 중생들은 답답하다. 이 허망한 괴로움 또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실재감 있게 다가오는 고통이며, 부처님도 그 고통을 없애 주기 위해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은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은 오취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거꾸로, 방편으로 오취온을 어떻게 다루고 사용하면 이 세상과 나라는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즉, 허망한 꿈과 같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 꿈을 아름답게 꾸고, 신기루 같은 현실이지만 실질적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가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이니 꿈과 같은 현실은 대충대충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태어난 이유는 삶을 아름답고도 최선으로써, 매 순간순간의 온전한 집중으로써 살아냄으로써 아름답게 신기루를 펼쳐내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불교를 허무주의적인 것으로만 이해해 세상과 따로 떨어져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어리석음이다. 돈도 벌고, 성공도 하고, 할 것은 다 하되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현실이 다 허망한 것이니 성공도 명예도 돈도 다 버리고 떠나라는 것만을 고집하는 종교는 아닌 것이다.
여기 오온, 오취온이 들려주는 삶을 아름답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
오취온의 하나 하나 지분은 ‘나’의 정신적, 신체적인 요소들이다. 즉 내가 평생동안 이 다섯 가지 요소를 가지고 꿈과 같은 현실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하나 하나의 지분들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가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깨어있는 마음으로 몸과, 느낌과, 상과 행과 식을 분명히 바라보면서 만들어 갈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업보라고 하여 업을 짓는대로 과보를 받는다고 말한다. 과보란 바로 우리의 생생한 현실이다. 지금 우리가 이 생에서 받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바로 내가 스스로 지은 업에 대한 결과 즉 과보인 것이다. 즉 현실이 창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과보다. 그러면 이 과보는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업이다. 업이 업보를 가져온다. 즉 부처님께서는 업, 즉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삶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즉 나의 삶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조건을 창조해 내는 것은 바로 신구의 삼업인 것이다.
즉 몸으로 한 행위와 입으로 내뱉은 말들, 그리고 마음으로 지은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이 삼업이 바로 삶을 창조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업이다. 오온이 ‘나’이며, 나는 세 가지 삶의 창조 도구를 통해 삶을 만들어낸다. 오온이라는 존재가 말과 행동과 마음이라는 세 가지 창조도구를 사용해서 삶을 창조해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신업 즉 몸의 행동은 오온 가운데 색온이 하며, 의업 즉 마음의 행동은 오온 가운데 수상행식이 종합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심의식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며, 통상 마음이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볼 때, 수상행이라는 마음부수 즉 심소법의 작용을 바탕으로 식온이 종합적으로 대상을 식별하고 분별하는데, 이것이 삼업 가운데 의업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수상행 그 중에도 특히 행온의 작용을 바탕으로 식별하여 의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신구의 삼업을 신구의 삼행이라고도 한다. 신행, 구행, 의행이라는 말은 수상행식 이라는 작용 가운데 업을 짓는 작용은 주로 행온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최종적으로 대상을 식별하여 아는 마음인 식과 의를 모두 심과 동의어로 보는 것을 보았을 때, 의는 곧 수상행식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업 즉 마음으로 짓는 업을 좀더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면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작용의 도움을 통해 의업을 짓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상을 느끼고 인식하고 의도하는 등 다양한 심리작용을 통해 최종적으로 대상을 식별하고 알아냄으로써 그 결과를 가지고 의업을 짓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수상행식은 동시적으로 발생하여 의업을 짓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교리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수상행식의 작용을 잘 사용한다면, 즉 의업을 잘 사용한다면, 마음이 어떻게 현실을 만들어내고,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의 요소가 어떻게 현실을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수상행식의 마음을 다루어야 원하는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수온, ‘느낌’으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낸다
수상행식의 첫 번째는 수온(受蘊)이다. 다시 말해 삶을 창조하는 첫 번째 마음 작용은 수온이다.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것이 마음의 첫 번째 구성요소로써, 감정으로써 느끼는 것이 나의 삶을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곧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와 같은 말이다. 매 순간의 현재에 무엇을 느끼고 사느냐 하는 것이 바로 어떤 미래를 창조할 것이냐를 결정짓는다.
예를 들면 최근 일주일간을 돌이켜 보라. 내 마음 가운데 어떤 느낌이 나의 삶에 가장 크게 작용했는가? 행복했는지, 기뻤는지, 즐거웠는지, 불안했는지, 답답했는지, 괴로웠는지를 살펴보라. 내가 어떤 감정을 많이 느꼈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삶에 어떤 감정을 더욱 더 많이 느끼게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무언가를 느끼고 있음과 동시에 삶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상황이 좋으면 좋은 걸 느끼고, 상황이 나빠지면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것이지 그 느낌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과연 그럴까? 좋은 상황이라고 좋은 걸 느끼고, 나쁜 상황이라고 나쁜 걸 느낄까? 그렇지 않다. 보통 우리는 외부적인 어떤 좋거나 나쁜 상황이 생기면 그에 따라 나의 느낌은 수동적으로 결정된다고 배웠고 지금껏 그렇게 알아왔다. 즉 우리가 느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상황이 나의 느낌을 결정짓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실은 그렇지 않다. 동일한 외적 상황에서 무엇을 느낄 것이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내 스스로 나의 느낌과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 보았으니 여기서는 쉬운 비유를 한 번 들어보자. 밥과 김치를 먹고 있다. 그것은 나쁜 느낌인가 좋은 느낌인가? 사실 김치를 반찬으로 밥을 먹고 있다는 그 상황 속에는 좋거나 나쁜 그 무엇도 없다. 그저 중립일 뿐이다. 그러나 상황 따라 그것은 괴로운 느낌을 가져오기도 하고, 즐거운 느낌을 가져오기도 한다. 한 달씩 굶은 아프리카 아이들은 김치와 밥만을 가지고도 꿀맛 같다고 느낄 수 있는 반면, 갑자기 사업 부도로 몰락한 가정에서는 그 상황을 비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상황 자체가 그것에 대한 느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상황이 거기에 대한 느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느낄 것이냐에 대한 결정권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내 인생의 감정에 대한 통제권과 결정권은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지난해 설악산에 단풍을 구경하러 갔었다. 어찌나 차가 많이 막히는지 입구에서부터 도통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가 막히는 것은 좀 불편했지만, 단풍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꽉 막힌 도로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 했다. 그것보다는 놀라운 설악의 단풍을 감상하는 것이 더없는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꽉 막힌 도로와 아름다운 단풍처럼 우리 주변에는 항상 나쁜 일과 좋은 일이 동시에 있다. 거기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느 쪽에 마음을 기울여 어떤 감정을 선택할 것인지는 언제나 나의 선택일 뿐이다.
뒷 산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고 가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더라도 그것에는 관심도 없이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일과 지지고 볶으면서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바쁜 일과 중에서도 잠깐 잠깐이나마 틈나는 대로 단풍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따뜻한 아침 햇살이 내리쬘 때 두 팔을 벌리고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창틈 사이로 비스듬히 비춰오는 햇살을 받아 끓여 놓은 차 한 잔에서 그윽한 향이 피어오를 때 그 차향의 연주를 듣는 것은 참으로 축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행복한 감정, 작지만 따뜻하고도 깊은 고요와 평화를 느끼는 것이 바로 내 삶을 창조해내는 원동력이라는 걸 우리는 모르고 살아왔다. 내 삶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 앞에 이렇게 펼쳐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쌓인 업무에만 일상적으로 집중을 한다.
물론 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을 하면서 즐겁고 기쁘며 몰입되는 바로 그 느낌이야말로 우리의 일에 대한 미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며 즐겁다면 머지않아 그 일로 인해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내며,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일 속에서 느끼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계속 생겨날 것이고,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을 직장상사는 계속해서 던져 줄 것이다.
느낀대로 더 많이 느낄 기회가 부여된다
일을 할 때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틈틈이 잠시 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자연을 감탄할 때 평화로움과 고요함과 같은 근원적인 행복이 넘치게 된다. 바로 그렇게 행복과 평화, 고요와 같은 감정을 더 많이 느낄 때 우리의 인생은 더욱 더 많은 행복과 평화, 더 많은 행복을 느낄만한 상황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얼마나 많이 느끼고 사느냐에 따라 얼마나 더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더욱더 느낄 수 있도록 우주법계가 상황을 조성해 주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감동받기를 좋아하면 감동스러운 상황이 인생에 자꾸 등장하게 된다. 자연을 보고 더 많이 감탄하고 감동하게 된다면 어쩌면 직장에서 특별한 인연이 생겨 생각지 못했던 휴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직접 자연 속으로 뛰어들어 더 많이 자연을 느끼고 감동하고 오라는 우주법계의 피드백인 것이다.
언제나 나에게서 나간 것은 우주법계를 스친 뒤에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나쁜 감정을 내보냈다면 그 나쁜 감정은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우주법계를 떠돌다가 인연이 맞아지는 때가 되면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불행함을 느끼는 사람은 점점 더 많은 불행할 일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감정, 평화로운 느낌,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느낌과 감정이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 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감정과 느낌은 그 자체로써 본질적으로 공하지만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에너지이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간대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자연을 보고 감동받아 보기 전에는 아름다운 자연이 지천에 널려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대자연이 주는 평화와 경이로움을 깨닫게 된 뒤에는 무한한 자연의 신비로운 모습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발밑에 있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여러분이 잡초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풀들이 너도나도 진기한 꽃들을 피워낸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직접 느끼고 감동받기 전에는 아무리 무한한 신비의 자연이 있었어도 우리에게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내가 비로소 그것에 감동하고 감탄하며 찬탄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로 와서 창조의 영감으로 바뀐다. 내가 감동하고 감탄하며 찬탄하는 것은 그대로 내 인생에 창조되게 된다. 더 많이 감탄할수록 더 많이 눈에 뜨이고, 더 많이 찬탄할수록 더 빛나는 순간이 내 인생에 드러난다.
나 또한 스스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귀한 인연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자연과 접촉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다가, 언젠가부터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 조화와 경이에 눈을 뜨고 난 뒤부터는 자연스럽게 우주법계로부터 대자연을 경탄할 기회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낀다. 설악으로 지리산으로, 울릉도와 제주도로, 또 안나푸르나와 쿰부 설산 히말라야, 라다크와 인도, 미얀마, 중국의 황산과 계림으로 철마다 갈 수 있는 기회들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이 자연에 감탄할 때 우주법계는 더 많이 자연과 접촉할 기회와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본래 완전하며 풍요로움을 깨닫기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길 원하지만 왜 부자가 될 수 없는지 아는가? 무엇을 느끼고 사느냐가 우리 삶을 만들어내고 창조하는데, 스스로 무엇을 느끼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부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느낄 법한 풍요로움의 느낌과 감각을 먼저 느껴야 부자가 될 것인데, 현실에서 느끼는 것은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느끼면서 마음으로는 부자를 원한다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자의 느낌, 풍요로움의 느낌을 느낄 수 있을까? 완료형, 완성형으로 느껴야 한다. 느끼려면 이미 완성이 되어 있어야 느껴지지 않는가? 보통 행복해야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이미 원하는 것을 이룬 것처럼 느끼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스님. 이루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룬 것처럼 거짓말로 느껴요? 그건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거짓말로 느끼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감정과 현실을 속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속아왔던 것을 되돌려 놓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나는 불행하다고 착각했고, 결핍되어 있다고 착각했으며, 언제나 부족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근원은 완전성에 있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성되어 있고, 무한하게 풍요롭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가득 차 있다. 풍요로움도, 사랑도, 지혜도 모든 것이 완전히 꽉 차있는 것이 바로 이 우주법계다.
내가 그동안 작고 여린 행복을 느끼고 감동하는 감각을 상실하고, 바깥으로 더 크고 많고 대단한 것들만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그런 삶만을 살아오다 보니 괴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밖으로 구하고 구걸하는 삶은 언제나 가난과 결핍을 창조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점점 더 많은 것을 얻고자 구할수록, 부자가 되기를 원할수록 더욱 더 우리는 가난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내가 부족하다고 가난하다고 느낄 때는 비교에 의해서다. 남보다, 부자들 보다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가난과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과 비교해 본다면 어떤가? 무한히 풍요롭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교 열등에 시달리며 남보다 가난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비교라는 잣대를 놓아보라. 그 자리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함도 없다. 그저 중립적인 하나의 현상만 있을 뿐이다. 그저 중립적인 상황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비교라는 차별심을 만들어서 내 스스로 가난하다거나 부자라거나 하며 분별해 왔던 것일 뿐이다. 바로 그 분별만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언제나 고요하다. 부자가 좋다고 하겠지만, 사실 부자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고요한 중립에 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비교가 사라지기 때문에 괴로울 것도 행복할 것도 없이 그저 여여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고요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원래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어리석었기 때문에, 내가 가슴을 활짝 열지 못했기 때문에 우주 본연의 완전성과 풍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그 완전성과 풍요성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믿고 그것을 느껴보라. 이미 내가 원하는 근원적인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완료형으로 느껴 보라. 이 말은 긍정 심리학이나, 시크릿에서 말하는 것처럼 돈이 없지만 돈이 많다고 느끼라는 말이 아니다. 부자가 아니지만 부자가 된 것처럼 가짜로 느끼라는 말도 아니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내면은 본래부터 공하며,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부족한 적이 없고, 언제나 꽉 차 있다는 사실을 아는 바탕 위에서, 내가 누리고 느낄 수 있는 작고 여린, 당장에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것부터 감동하고 감사해 나아가라는 의미다.
돈이 1만원 밖에 없다면 1만원이 주는 느낌을 ‘없다’ ‘가난하다’는 결핍으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1만원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사 먹고 쓸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며, 감동할 수 있는 그것으로 느낄 수 있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본래 이루어진 것을, 본래 이루어진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큰 것이 생겨야지만 풍요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작은 것 속에서도 충분히 풍요롭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마음가짐이 옮겨 가게 됐을 때 이 우주법계는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더 많이 바라기보다, 더 많이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며 찬탄하고 감사할 때 이 우주법계는 내가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던 것들을 더욱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음의 한 부분인 수온, 즉 느낌과 감정은 우리의 삶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느끼는 대로 느끼는 것이 창조되는 것이다. 본래 감정과 느낌이 공하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먼저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 그렇게 먼저 느끼고 감동함으로써 더 많은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수온이 우리에게 주는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이다.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미래는 바뀐다. 가만히 내 과거를 짚어보면 내 삶이 왜 안 좋아졌는지, 좋아지는지가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삶이 괴로웠던 사람, 부정적이었던 사람은 일상 속에서 먼저 행복을 찾고 느껴야 한다. 내가 먼저 행복을 느껴야 행복한 삶이 펼쳐진다.
상온, 생각이라는 창조에너지
앞서 수온에서는 매 순간의 현재에 어떤 느낌으로 사느냐에 따라 느끼는 대로 자신의 삶이 창조된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상온에 의하면 자신의 평소 생각, 사고, 판단, 이성, 개념 등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창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에 무엇을 주로 생각하고 사는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며 사는지, 사고와 이성을 어느 쪽으로 기울이며 사는지에 따라 생각하고 사유하는 대로 삶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살면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게 되며,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살면 부정적인 삶을 창조하게 된다.
그 어떤 생각이나 사고, 사유와 판단, 사고방식과 가치관일지라도 내 안에서 일어난 생각의 에너지는 특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이 우주로 퍼져나간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의 특정한 생각 에너지는 그것을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특정한 창조에너지가 되어 이 세상을 일정부분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그러니 어떤 동일한 생각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심지어 그것이 내 안에 삶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혹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창조해 내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고 여러 번 상상하였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그렸던 일들이 똑같이 이루어지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면 스스로 마음의 에너지를 제한하고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즉 내 스스로 마음속에서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말도 안 되, 어떻게 내가 생각했다고 그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겠어?’라고 스스로의 마음의 능력을 의심하며 제한했기 때문에 이 우주는 ‘내 스스로 제한한’ 자신의 능력을 고스란히 현실로 창조해 낸 것이다. 즉 100% 온전히 생각한 대로 현실이 된 것이다. 생각 속에서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했기 때문에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자신의 능력은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나 그것을 정하는 쪽은 나 자신이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을 규정하고, 결정지을 뿐이다. 아무리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일지라도, ‘난 공부는 안 되’라고 선언하지는 말라. 그 선언은 더욱 더 자신을 공부 못 하는 사람으로 결정짓게 될 것이다.
생각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만약 무언가를 원한다면 먼저 이미 꿈이 이루어졌다 생각하고 충분히 그 기쁨, 행복, 만족감을 느껴보는 특별한 창조행법을 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가 창조하길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재료가 충분히 있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간다면, 생각함과 동시에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일 수 있다. 언제나 원인 속에 이미 결과는 내포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세계에서는 생각하고 나서 그것이 실제 물질현실로 벌어지는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한 더 깊은 차원에서는 시간은 무의미해진다. 실제 천상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생각함과 동시에 곧장 현실이 된다고 한다. 음식도, 집도, 차도, 사랑도, 주변 환경도 모든 것이 생각과 동시에 현실로 창조를 끝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은 우리 인간계, 즉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도 그 원칙은 적용이 되고 있다. 다만 거기에 환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을 원한다면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또 다른 정신의 차원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시공에 갇혀 있는 제한된 관점에서만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이지, 본연의 우주법계에서는 시공의 개념이 없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이루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우리 제한된 관점의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일 뿐, 본연의 자리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규정짓는 것이고, 완성형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 진 것 처럼 느끼고, 이루어 진 것 처럼 상상하게 된다면, 그것을 이루는데 드는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상상하는 시각화와 심상화는 창조행법의 아주 중요한 방법이다.
물론 이러한 창조행법은 모두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 또한 하나의 공한 것이고, 신기루와 같으며, 환영과 같을 뿐임을 안다면, 상온을 통해 삶을 창조할지라도 거기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근원에서는 이런 창조를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 것보다, 창조 자체를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각본을 수용한 채, 이렇게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은 걸림 없는 대자유한 삶을 내맡긴 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일이지만, 때때로 집착 없는 창조의 경험을 체험해 보고 싶거나 방편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면 이런 방법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 이 창조행법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 결과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부분은 다음의 행온 부분에서 조금 더 다루어보도록 하자.
행온, 집착 없이 원할 때 이루어진다
‘행(行)’은 수, 상, 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 욕구, 바람, 잠재적 형성력을 의미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 욕구이자, 어떤 행위의 원동력이 되는 의지작용이 행온이다. 즉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은 이루어진다. 행온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온은 아주 미묘한 것이다. 한 때 유행처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번져나갔다. 연금술사라는 책이 유행하면서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말에는 한 가지 빠진 수식어가 있다. ‘집착 없이’라는 수식이 빠졌다. 즉 ‘집착 없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가 맞는 말이다. 만약 그냥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기 쉽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간절히 원할 때는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집착과 욕망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집착이 개입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진급 되기를’ 하고 간절히 원한다고 해 보자. 간절히 진급되기를 소망하고 열망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진급 안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급에 집착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지면 질수록 ‘진급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함께 생겨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진급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진급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연습하게 된다. 그러니 진급에 대해 크게 집착하면 할수록 ‘진급 떨어지는데 대한 두려움’이 연습되어 결과적으로 진급에서 떨어지는 것을 연습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나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착 없이 단순히 진급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힘을 받을 것이다. 집착 없이 원한다는 말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급이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는 마음의 여유로운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마음은 결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두려움과 불안이 없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에는 진급 낙방에 대한 마음보다는 진급 그 자체를 연습하게 되는 것이다.
집착을 놓았는지 확인하는 방법
물론 이렇게 되려면 분명히 집착이 놓여져 있어야 한다. 즉 결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집착 없이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집착을 하지 말고 다만 이루기 위해 원하자 라고 하는 순간 벌써 집착은 미세하게 달라붙게 된다. 집착이 정말 놓여 졌는지 아닌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진급에 진짜 떨어지게 되더라도 괜찮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진급에 붙으면 좋겠지만 떨어져도 상관없을 정도가 되어야 진짜 집착을 놓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내맡김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내맡김이며, 근원에서 언제나 우주법계는 말 그대로 법계, 즉 진리의 세계로써 진리다운 삶을 나에게 보내주고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이며 내맡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계 거의 모든 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인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바가바드 기타의 카르마 요가에서 설명한 집착 없이 행하라는 가르침이며, 노자의 무위자연, 무위행이기도 한 것이다. ‘집착 없이 원하라’는 가르침이야말로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이 말한 진리를 실천하는 핵심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마음을 낼 수는 있다. “남들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다.”, “전역하고 나서 공무원 준비를 하겠다.” 의도를 일으켜야지 평생 안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지 돈도 벌지 말고, 취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마음을 다 내야한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욕망과 집착을 배제하고 원하고 의도하면 거기에는 힘이 붙는다. 반대로 욕망과 집착이 개입되면 힘이 실리지 않는다.
남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내었지만, 행여 부자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보겠다고 했지만,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 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에는 얽매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실은 열정이 식는 것이 아니라, 편법이나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에 깊은 현존이 드러나게 된다. 즉 미래에 집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현재에 더욱 충실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온을 잘 쓰게 된다면, 즉 의도를 일으키되 머물러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게 된다면 그것은 강력한 힘으로 현실을 창조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일체유심조를 실현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식온, 분별 인식하는 대로 경험한다
다음으로는 식온(識薀)이다. 식이란 구별, 분별, 인식, 식별 작용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분별하여 아는 작용을 의미한다고 했다. 수상행이라는 세 가지 작용을 토대로 하여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느낌과 생각, 개념작용과 의지, 의도라는 마음 작용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대상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식온에 의하면 대상을 어떻게 분별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창조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식온은 허망한 분별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식에 의해 인식되고 이해 된 대상을 유위법이라고 하며, 식의 분별이 사라진 상태에서 보여지는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무위법이라고 한다. 즉 식에 의해 걸러 대상을 보면 세상은 유위의 생사고뇌가 반복되는 중생세간이 되며, 분별식을 놓아버린 채 세상을 보게 되면 불생불멸의 무위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생은 수상행과 함께 작용하는 이 식 때문에 자신의 세계를 어리석은 중생의 세간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저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며 인식하는 세계는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만들어내는 세상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일한 대상을 어떻게 분별하여 인식해 아는가에 따라 자신이 분별한대로 삶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동일한 한 직장에 취직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직장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며 인식하는 것이 아주 좋은 직장이고, 사장님과 직원들도 매우 진실 되고 서로 아껴주는 행복한 직장으로 인식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반대로 나쁜 직장이고 사장님과 직원들도 형편없다고 인식했다. 전자의 인식, 식별작용에 따라 전자의 사람은 그 직장에서 점점 더 행복과 평안과 진실 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방식대로 인식한 사람은 그 직장 속에서 내가 인식한 것을 계속해서 더 많이 인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계속해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점점 더 직장이 싫어지고, 형편없어 지며, 사람들도 비뚫어진 시선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보는 사람에게 직원들은 마음을 열고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더 많이 인식되도록 경험이 창조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와서 “스님께서는 사람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발등 찍힙니다. 모든 사람들은 착한 것 같다가도 자기 이익과 관련되면 상대에게 어떤 짓도 합니다. 그게 사람들 심리에요. 스님이라고 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사람을 너무 믿지 마세요.” 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람을 못 믿게 되면,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날지라도 그 사람이 그 마음을 읽고는 우리 앞에서 못 믿을 짓을 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 상대방을 진실 되게 믿어주면 그 사람이 설사 나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당신 앞에서만은 진실 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어떤 존재로 되며 내게 인식될지가 결정되는 것이지 상대방에 따라 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닫으면 나에게로 오는 모든 이가 마음을 닫지만, 내가 먼저 열면 나에게로 오는 모든 이가 마음을 열게 된다.
만약 여러분이 상대방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다면, 점점 더 내 삶에는 의심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믿지 못할 사람, 진실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자꾸만 내 삶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더 내 안에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는 인식은 증명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나의 인식과 분별이 긍정적이고 진실 되다면 그 사람 앞에는 점점 더 좋은 사람, 긍정적이며, 믿을 만 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내가 먼저 타인을 긍정적이고 진실 되게 인식하니 나를 좋게 봐 주는 사람 앞에서 타인도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 내가 마음을 열고 세상 사람들을 아름답고 진실 되며 한 사람의 부처님으로써 인식하게 된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진실 되고 아름다운 존재로 경험되게 될 것이다. 내가 인식 한 것과 같은 것이 내 인생에서 점점 더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어떠냐에 따라 자신의 필터대로 세상은 내게 와 규정되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규정하는 대로 세상은 규정되고, 그 인식과 규정을 점점 더 뒷받침하고 증명해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은 창조가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으로 삶을 만들어 낸다
배운 것을 종합해 보자. 앞에서 배운 수상행식이라는 마음 작용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결정된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처럼 마음을 일으킨 대로 현실은 창조된다. 마음에서 일으키지 않은 건 현실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내면에 있지 않은 것은 외부로 드러날 수 없다.
‘누가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복수했다?’ 라고 하겠지만 그 또한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다. 내 마음 가운데 그 사람을 끌어당긴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게 온 것이다. ‘어떤 괴로운 상황이 벌어졌다’라고 할 때에도 그 또한 내 마음이 수상행식이라는 어떤 잠재적인 요소로 그 상황을 끌어당겼기 때문에 생긴 것일 뿐이다. 내가 업을 짓지 않고서는 돌아오는 과보가 있을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내 마음의 투영이다.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할지라도, 혹은 아무리 외부적인 문제가 나를 뒤덮어 괴롭혔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내부와 외부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분별일 뿐이다. 그것은 둘이 아니다. 언제나 마음에 있는 것이 외부의 현실세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에 있는 것의 종류가 수상행식 네 가지다. 그렇기에 느끼는 대로 현실세계가 만들어지고, 생각하는대로, 의도하는 대로, 분별하고 의식하는대로 현실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 마음만 현실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네 가지 마음의 요소 모두가 어우러졌을 때 더욱 강력하게 현실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수상식과 행온의 창조, 그 교리적 이해
조금 더 수상행식의 과정을 교리적으로 살펴보자. 수온과 상온, 즉 느낌과 생각이 마음 작용의 두 가지 중요한 토대가 된다. 촉에서 수상행이 발생한다고 한 것처럼 수온과 상온이 일어남과 함께 행온이 발생한다. 행온은 유위를 조작하는 것(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행은 의지를 가지고 유위를 조작하는 것이고, 유위는 행에 의해 조작되어진 것을 뜻한다. 유위란 만들어내는 것, 조작하는 것이며, 유위법은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유위를 만들어내는 정신작용이 바로 행온이다. 즉 행온이야말로 수온과 상온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을 만드는, 유위를 조작하는, 삶을 창조하는 핵심 마음이다. 그렇기에 행온을 업이라고도 하며, 업을 짓는데 따라 과보가 생겨나는 것이, 업행이 삶을 만들어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행이 유위를 만들어내면 그 유위(만들어진 것)를 식온이 인식한다. 식온이 인식할 때는 이름과 형태를 가진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명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이 유위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행이 명색을 만들어 낸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행이 명색을 만들어내면 식온은 명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유위나 명색이 바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 곧 세계인 것이다. 수온과 상온, 즉 느낌과 생각을 토대로 행온은 명색이라는 유위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명색을 식온이 인식한다. 이와 같이 행온이 의지작용으로써, 즉 업으로써 세상(명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세상(유위, 명색)을 만들어내는 가장 직접적인 마음의 요소는 수상행식 가운데에서도 행온이다. 행온이 유위를 조작해 내기 때문이다. 즉 행온이 의도적인 업으로써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업보다. 행과 업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는데, 행온 즉 의도적인 업을 지으면 이 세상은 그에 따른 결과로써 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업이라고 말한다. 즉 행온인 것이다. 그런데 이 행온이 작용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바로 느낌과 생각이라는 수온과 상온이다. 이렇듯 수온과 상온을 자료로 행온이 의도를 일으켜 이 세상을 만들어내면, 그렇게 만들어진 명색이라는 세상을 최종적으로 식온이 인식하고 식별하는 것이다.
명색은 이름과 행태를 지닌 모든 것을 의미하니, 결국 오온도 명색이다. 결론적으로 행온이 이 세상을 만들어내고, 행이 만들어낸 이 세상을 명색으로 인식하게 되며, 그렇게 인식된 명색이 결국 오온이기 때문에 식이 오온을 인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느끼는대로 또 생각하는대로 이 세상은 만들어진다.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의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온과 상온의 기초자료를 가지고 행온이 의도를 일으켜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즉 업을 짓는 기초자료가 바로 느낌과 생각이다. 그렇기에 느낌과 생각의 기초 마음을 바꾸면 의도를 바꾸게 되고, 의도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만들어진 유위의 세상은 실체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규정되어지고, 내 안에서 조작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이유다. 세상이란 내 바깥에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온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온이 이 세상이라는 유위의 허망한 세상을 이름과 형태(명색)로써 만들어 놓으면 식온은 그것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상윳다 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무엇이 행인가? 유위를 만들어내는 것을 행이라 한다. 어떤 유위를 만들어내는가? 물질적인 성질로 색이라는 유위를 만들어내고, 느끼는 성질로 수라는 유위를 만들어내며, 생각하는 성질로 상이라는 유위를 만들며, 유위를 만들어내는 성질로 행을 만들어내며, 분별해 인식하는 성질로 식이라는 유위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유위를 만들어낼 때 그것을 행이라 한다.”
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행이라 하는데,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오온으로써 유위인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이 오온을 가지고 유위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행온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색수상행식의 오온 가운데, 특별히 행온을 업이라고 부르며, 업이 세상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업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면 그에 따른 결과로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다고 배워 왔다. 그래서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선한 행동, 선한 말, 선한 생각을 하면 선의 과보를 받는 것만을 배웠다.
그러나 바로 그 행온이 오온을 토대로 세상을 만드는 전체적인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어떻게 써야만 행온이 현실세계를 원하는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행온, 즉 업이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어떤 업을 지을 것이냐에만 초점을 맞춰왔지만, 이제는 수상행식이라는 마음 작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수상행식이라는 마음 전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지금 여기’라는 매 순간의 현실에서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의도하는지’,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네 가지 마음작용들이 합쳐져 현실이라는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유위를 조작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조작해 낸 유위의 세상을 유위법이라고 하고, 그러한 유위법은 이름과 형태를 부여하여 식온이 인식하기 때문에 명색이라고 한다.
십이연기에서 ‘무명-행-식-명색-육입-촉’의 과정이 나오는데, 이 또한 무명으로 인해 수상행이 함께 행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행이 만든 유위를 식이 인식하며, 그렇게 인식된 대상이 명색이고, 그러한 명색을 우리는 육입이라는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무명으로 인해 느낌과 생각을 바탕으로 업작용인 행이 일어나면, 그 행이 조작한 유위를 식이 인식하고 그렇게 인식된 대상이 명색이며 그 명색을 다시 육입이 접촉함으로써 ‘촉-수-애-취-유-생-노사’가 이어진다. 즉 눈귀코혀몸뜻이 명색을 접촉함으로써 다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에서 애욕이, 애욕에서 집착이, 집착에서 업행인 업장, 업유가 일어나서 결국 태어남과 늙고 죽음이라는 생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십이연기는 뒤에 다시 배우겠지만, 결국 오온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책임감과 깨어있음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의 요소들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우리는 낱낱이 다 살펴보고 살지 않기 때문에 생각지 못한 현실세계를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만들지 않은 현실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지’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내가 만들었지만, 그 과정을 우리가 지켜보지 못하고 다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상온이라는 생각의 작용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 머릿 속에서는 하루에 6만가지 정도의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중에 몇 가지의 생각을 뚜렷이 관찰하고 있을까? 우리는 생각의 대부분을 놓치고 살아간다. 느낌도 놓치고, 의도와 욕구도 놓치며, 대상들이 내게 와서 어떻게 인식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보라. 그 누구도 원망할 필요는 없다. 그 모든 것은 내 안의 색수상행식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결코 원망하거나, 누구를 탓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완전히 책임감을 지난 사람이 될 것이다. 근원에서는 남들의 탓도 아니고, 이 세상의 탓도 아니며, 조건이나 환경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내 스스로가 만든 것일 뿐이지만,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색수상행식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들을 낱낱이 관찰하지 못해 놓친 것이거나, 혹은 전생에 지은 잊혀진 업식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생에서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스스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완전한 책임감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또한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대방 때문에, 모순된 사회 구조 때문에, 내 바깥에 있는 조건들 때문에 이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그것은 더 이상 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내 근원에서는 온전히 내 책임임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때, 내 안에는 삶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해 주는 것과 같다. 그랬을 때 모든 힘의 원천은 내 바깥이 아닌 내 안에 있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온이 내 삶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내 스스로 깨어있지 못함으로써 어떤 삶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놓쳤음을 안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색수상행식이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관심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위빠사나, 관찰, 깨어있음의 관 수행이 필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은 허망하다
사실 색수상행식으로 삶을 창조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창조된 세상 또한 허망한 것일 뿐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이 모두 공(空)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실재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허망하고 공허한 것이다. 다만 수상행식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인연생기하는 것들이다. 인연따라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뿐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허망한 것들이다.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식온이 세상과 대상을 분별하지만 그 분별작용 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제나 분별을 놓아라, 분별하지 말라고 설법하고 있다.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허망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왜 애써 집착해 원하는 대로 삶을 창조해야 하겠는가? 주어진 삶의 조건이라는 우주법계의 뜻에 따라, 나의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내준 삶이라는 최적화된 귀의의 여정,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가는 편이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물론 필요할 때는 수상행식으로 삶을 창조하되 그 창조물과 창조의 작업 또한 모두가 공한 것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무엇이든 창조하면서도 창조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되어도 좋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좋은, 삶 자체가 하나의 흥미롭고도 놀라운 하나의 연극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삶에 심각함과 무게감이 사라지고, 평안하면서도 고요하며, 경쾌하면서도 자유로운 삶이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수상행식을 이용해 무엇이든 창조하여, 이 우주법계를 위해, 이웃과 수많은 중생을 위해 사용하라. 그러나 그 모든 창조의 작업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 모든 창조작업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창조가 되면 되는대로 좋고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좋을 수 있는 참된 자유로움이 드러날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꽃](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7.gif)
그 끈질긴 집착만 놓아 버리면 만사가 자유로울걸!.....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 )
분별심을 내려놓는 마음공부에 정진합니다.
감사합니다._()_
사랑합니다._()_
행복합니다 배우고 갑니다 ..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마치 한편의 소설,연극을 본듯하여,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모르고 읽었습니다.
귀한 글로 인해 부족함을 많이도 채웠습니다.
여여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