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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등과 좌절
1962년 삼정학회 선배들은 그간 일제 강점기에 억울하게 식민지 생활을 하였는데 굴욕적으로 보상을 몇 푼 받고 한일의정서를 교환하는 박정희정권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1964년 동호회를 만들어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자고 만든 서클이다. 흔히 말하는 6·3세대 들이 만든 클럽이다. 외세의 침입에 분할 정책으로 구심점이 없는 이 민족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 나라가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이런 이념에 부합하는 논리와 행동으로 맞서는 윤선배가 있었다. 늘 하얀 한복을 차려 입고 데모에 앞장서며 격앙된 소리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늘 외치던 삼정학회 윤 선배와 고 선배는 결국 데모주동자로 감방에를 갔다.
창립멤버인 선배들은 우리나라 국토를 푸르게 가꾸자며 연탄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나무를 사서 서울 근교에 있는 한 선배네 농장 밭에다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그 선배네 땅이 개발 붐을 타고 건물을 짓게 되어 나무를 옮겨 심어야 했다. 그래서 논의 끝에 대전이 고향인 박상철 선배네 고향 시골마을의 야산에다 봄에 모두 옮겨 심었다. 그래서 가을에 나무에 퇴비도 주고 가지치기도 할 겸해서 동호회 회원들이 대전에 내려가기로 했다.
1976년 11월 10일 일요일 아침 8시에 서울역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침에 나가니 남학생이 9명 그리고 여학생은 정다운 딱 한명 뿐이었다. 다운은 혼자서 갈수 없으니 되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래서 생명은 다운을 붙들고 기왕에 나온 것 같이 가자고 설득했다. 한참 후 다운은 따라가겠다고 했다.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다운은 생명과 함께 자리를 하고 서로가 좋은 감정을 속이지 못하고 희희낙락하며 시골에 가서 일을 마치고 저녁 7시경 서울역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다들 헤어졌다.
그런데 박 선배는 생명을 잡으며 소주 한잔 하자고 한다. 어차피 집이 같은 방향이라 따라 갔더니 김치찌개를 시키고 소주를 한 병 달라고 하시더니 소주를 따라 잔을 채우시자마자 “이생명!, 너는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커다란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여자의 치마폭에 쌓여 젊음을 보내서야 되겠냐?” 며 다운이와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박 선배는 둘이서 삼정학회 모임에 나와 둘이 사귀는 것을 못 마땅해 하신 것이다. 바른 말이지 둘이 만나려면 다른 회원들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몰래 만날 것이지 철부지들이 대 놓고 모임에서 둘이서만 어울리는 것이 서클 분위기상 안 좋아 보였던 것이다. 진지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투사로 나서도 모자랄 판에 기껏 연애나 하러 서클에 왔느냐는 투였다.
내성적인 생명은 충격을 받았다. 삼정학회가 무엇인데 감히 내가 좋아하는 표현도 못하고 구속받아야 하나? 술에 취한 생명은 박 선배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정말 화가 났다. 집에 돌아온 생명은 눈물을 머금고 긴 앞머리를 가위로 삭둑 삭둑 잘라 버렸다. 이튿날 깨어 보니 머리가 너무 엉망이었다. 후회막급이다. 술김에 너무 했다. 참았어야 하는데...
아침도 못 먹고 이발소에 갔다. 이발사에게 앞머리는 그냥 두고 뒷머리만 다듬을 수 있느냐? 고 물어 보았다. 이발사는 “그러게 뭐 하러 잘랐어요? 할 수없이 빡빡 밀수밖에 없네요.” 중처럼 삭발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 온 셋째 형님은 깜짝 놀라신다. “무슨 일이냐?” 걱정스런 눈빛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터에 삭발까지 하였으니, “아녀요 공부 좀 더 열심히 하려고 결의를 다지기 위해 머리를 삭발 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생명은 창피하여 모자를 뒤집어쓰고 도서관 귀퉁이에 자리하고 강의실도 못 들어가고 1주일 내내 집과 도서관만 왔다 갔다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오후 4시경 우연히 도서관 앞에서 만난 다운은 생명을 보자마자 파란 얼굴로 질리며 “생명이형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삭발했어?” 생명은 머뭇머뭇했다.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차마 못하고 한참 만에 “어... 뜻한바 있어 공부 좀 열심히 하려고...”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겨우 입을 열었다. 10일쯤 지나 겨우 강의실에 나가 친구들과 만났다. 주임교수님이 지나가는 생명을 보고 “좀 흉측스러우니 모자라도 좀 쓰고 다니지?” 그러자 생명은 어깃장을 놓는다. “모자를 쓰고 다니려면 뭐 하러 삭발을 해요!” 차차 뻔뻔해지고 당당해지는 반항아가 되었다.
그 때 마침 몇몇 회원이 박정희 대통령이 발의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불온서적을 만들어 돌렸다는 이유로 몇몇 회원이 잡혀가고 감방에 가기도 했다. 그래서 회장할 사람이 없다고 생명이 삼정학회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977년 1월 충남 아산의 의암리로 겨울 봉사 활동을 가는데 봉사대장으로 앞서라는 것이다. 동호회의 이념은 잘 모르지만 맡아 해보겠다고 허락을 했다. 18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의암리에 도착했다.
박상철 선배를 비롯한 복학생 2명과 이생명 그리고 모두 1학년학생 15명이다. 지난 여름 봉사활동을 1번 가 보았던 1학년도 있지만 대부분 처음 따라 나선 봉사활동이다. 봉사에 참여한 대원들은 대장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략 10일간의 봉사활동 기간에 처음엔 긴장하여 잘 적응을 하지만 3일쯤 지나면 잠도 못자고 인민군 군대처럼 쉬지도 못하고 밤낮 일에 동원되며 듣도 보도 못하던 자아비판시간은 잘 꾸며진 쑈와 같았다. 그러니 불만이 고조에 이른다. 그러면 푸닥거리를 한바탕해야 수습이 되는 것이다. 그 푸닥거리로 한 밤중에 남학생들이 농땡이를 피웠다고 핑계를 만들어 불러 모아 놓고 눈 위에서 포복을 시켰다. 그 푸닥거리가 끝나자 3명의 1학년 학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짐을 싸서 돌아가겠다고 나선다.
그때 생명은 불교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 당시 막 출간한 일연스님의 자서전을 5권 차례대로 다 읽고 또한 고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미안하다며 반성하는 의미에서 맨발로 눈 위를 걷겠다고 한다. 생명은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약 2키로 정도 떨어진 다른 마을에 복학생들이 머물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박 선배는 자초지종을 듣고 말리지 않은 후배 녀석들을 내일 아침 혼내 줄 테니 우선 자기 사타구니에 발을 넣으라고 하신다.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이튿날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며 늦게 모임장소에 나타났더니 수습이 되어 후배들이 사죄한다며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봉사대장은 너무 힘들었다. 밤낮으로 3팀, 3팀으로 나뉘어 활동하는 현장을 쫒아 다니며 챙겨보고 지도해야 하는 그야말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았다. 10일 동안 계속 3-4시간씩 밖에 못자며 활동하다보니 끝날 때쯤은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봉사가 끝나가는 9일째는 종합발표회가 있어서 무대를 설치하고 낮에 가르친 아동반의 학예 발표회를 시작으로 그간 활동 보고 그리고 동네 주민 노래자랑이 이어진다. 그런데 생명은 너무 힘들어 귀가 안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2, 3등을 심사를 하여 시상해야 하는데 귀가 안 들린다고 말할 수는 없고 박수치는 모습을 보고 결정해야 했다. 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귀가 영영 안 들릴까봐 걱정은 되었지만 너무 피곤하여 3일 동안 낮과 밤을 밥만 먹으면 자고 쉬었더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1977년 여름에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생명은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서울서 정주까지 약 120여 킬로를 어떻게 걸어 다녔는지 체험해보겠다며 배낭을 싸서 집을 나섰다. 경기도 하남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 당시 중부고속도로 공사를 하는 중이라 그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장호원에 거의 다 왔을 무렵 해는 어둑어둑하여 밥을 해먹고 쉴 곳으로 찾은 곳은 개울가 에 공사하려고 방치한 하수구(노깡)이었다. 개울가에서 개울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 싸가지고 온 밑반찬과 저녁을 해먹고 통 안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다. 새벽 2시경 주위가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근처 원두막에서 술을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부 싸움을 큰 소리로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가 빗방울이 슬슬 쳐 들이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바람과 함께 더 깊이 쳐 들여 할 수 없이 비닐을 꺼내어 겨우 발만 가리고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역시 저녁에 남겨둔 밥을 챙겨 먹고 또 걷기 시작했다. 이튿날은 시골 외딴집 처마 끝에 자리 잡고 또 하룻밤을 지냈다. 셋째 날은 화양동 계곡에 도착하여 계곡물에 저녁을 지어 먹고 너럭바위에 누웠다. 넓은 바위가 안방 바닥처럼 편안했다. 하늘을 이불삼아 배낭을 베게 삼아 누웠으니 남아 대장부가 더 무엇을 바라느냐? 4일 만에 드디어 고향근처에 어느 마을에 도달했다.
1주일간 먹고 지낼 쌀과 국수 그리고 야채 등 식료품과 석유 그리고 초를 샀다. 예전에 후배 네가 과수원을 할 때 과수지기가 가족들과 살던 폐가를 1달간 혼자 지내겠다고 이야기하고 찾아 들었다. 방안 천정엔 사람이 살지 않아 거미줄이 여기저기 걸려있고 구멍 구멍구들이 꺼진 방바닥에 다행히 문짝은 달려 있어 바람을 막아 주었다. 방 귀퉁이에 조그만 책상하나 펴 놓고 책을 올려놓고 버너를 솥 삼아 펼쳐 놓고 코펠로 식기를 삼아 차려 놓았다.
<황제내경> 이라는 한의학 원서를 근본적으로 연구하고자 움막생활을 자처한 것이다. 혼자서 밥해 먹고 공부하고 1주일간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계속 공부만 했다. 1주일 후 주민등록을 발급받으러 면사무소에 들렸다. 동사무소 직원에게 1주일 만에 입을 처음으로 여는 순간 울림소리가 마치 동굴 속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이 산상수훈과 같은 게 아닐까 느껴졌다.
시장에 나가 또 1주일간 먹을 식료품을 사가지고 또 돌아갔다. 1달간의 동굴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했다. 생명은 외딴집에서 혼자 지내며 자연은 인간에게 잘 살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 살라고 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단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살라는 것을 배웠다.
1998년 9월 15일 위생병으로 논산에 입대를 하였다. 9월 중순에는 시골에선 누에가 마지막 잠을 자도록 해주느라 가장 바쁜 때이었다. 생명은 4째 아들이라 군대를 가는 날도 일을 하다 말고 “저 군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려도 부모님들은 문밖에도 안 나오시고 “그래 잘 갔다 와라!” 하시고는 끝이다. 서운하지만 이해를 해야 했다. 위로 형님 3분이 모두 후방에서 편하게 근무를 하다 왔으니 당연히 편하게 잘 있다 오겠지 라는 편안한 마음이시다. 큰 형님은 전방에 배치 받았지만 어떻게 손을 써서 서울 근무하고 나머지 두 분은 논산에서 근무하셨으니 군대가 그저 학교정도로 밖에 생각을 안 하시는 것 같았다.
논산훈련소에서 기본 훈련이 끝나고 철원과 화천사이의 최전방 수색대로 배치를 받았다. 2월초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최전방에 근무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겠지 하며 입술을 깨물며 열차에 올랐다. 모든 짐을 싸서 군장을 꾸리고 창가에 앉아 보는 경치는 너무도 을씨년스럽게 지나갔다. 서울 용산역에서 잠시 기차가 멈추고 기차를 바꿔 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에 큰 누나가 면회를 왔다. 그나마 큰 누나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 배치 받은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선배들은 우리가 근무할 지피(G.P. - DMZ 안에 있는 관측초소)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지피가 남북한이 관측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다보니 가까운 곳은 400미터 거리에 있어 육안으로도 서로 움직이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고 야간엔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상호 대화가 가능한 지하방카이다. 지도를 가르치며 - “폐쇄된 지피들은 1960년대까지는 남북한이 서로 교전을 수시로 하였는데 남한에서 북측 지피를 쳐들어가자 보복이 두려워 긴장을 했는데 1주일 후 긴장을 풀고 술파티를 하고 잠들었단다. 그런데 한 병사가 오줌이 마려워 방카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 거꾸로 잤는데 그 병사만 다리를 잘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전원의 목을 잘라 갔다고 한다.
또 다른 폐쇄시킨 지피를 가르치며 저기는 어느 날 북한에서 예쁜 아가씨가 한명 넘어와 윗선에 보고를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 소대장이 데리고 살다가 1달 후 아버지 환갑이라 하루만 넘어가서 만나고 온다고 하여 보냈더니 이튿날 돌아 올 때 술과 떡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넘어 와 잘 먹고 잘 마셨는데 그날 밤에 북한군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와 모두 다 그을려 죽여 저 방카를 폐쇄 했다는 등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 난후 밤에는 화장실도 못가고 낮에도 혼자 있으면 머리카락이 수시로 쭈삣 쭈삣 서기도 했다.
내무반에 들어가니 바로 앞 기수의 위생병이 첫 휴가를 갔다가 돌아와 파견 나가 자살했단다. 그 선배는 집창촌에 들렸다가 성병에 걸려 돌아와 지피에서 혼자 어떻게 치료되겠지 하고 해보다가 치료가 안 되자 군의관에게는 창피하여 말을 못하고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자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위생병이 한가하면 딴 생각하면 안 된다며 중대장은 수시로 의무대에 와서 빡세게 군기를 잡기 시작하였다. 또 생명은 한의대를 다니다 휴학하고 왔으므로 가장 전문적인 위생병이라고 판단하여 대대본부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의무대전체의 모든 살림을 모두 맡아 약제계를 맡게 되었는데 마침 새로이 온 군의관이 경성의대를 나온 선배 의사이었다. 그런데 경성대 한의과를 다니다 왔다고 하니 오히려 더 편하게 온갖 시집살이를 시키는 바람에 정말 힘들었다.
지피는 북한 간첩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발목 지뢰가 수없이 뿌려져 있다. 물론 남한의 병사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뿌린다. 그런데 봄이 오면 지피 주위에 더덕이 많아 향긋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유혹에 넘어가 지뢰밭인줄 알지만 소대장 몰래 몰래 넘어가 더덕을 캐오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의무대에 전화가 울린다. 지피에 서 근무하던 장중사가 잠이 안와 지난 밤에 아티반을 3알 먹었는데 지금 혈압이 40-50밖에 안 나온다고 한다. 군의관은 즉시 군단에 보고하고 본부로 후송시키라한다. 그래서 나왔는데 군의관이 진찰해보더니 별 문제가 없단다. 그래서 알고 보니 장중사가 18살의 나이에 지원하여 계급이 중사지만 고참 들은 2-3살이나 나이가 많아 말을 잘 안 들으니 스트레스를 무척 받다가 잠이 안와 너무 많은 양의 안정제를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링거액이나 주라고 하신다. 최전방에는 5월 8일에도 눈발이 휘날리니 4월 하순은 쌀쌀하다. 그래서 링거액을 냄비에 데워 팔에다 주사를 해주었다. 그래도 장 중사는 온몸을 덜덜 떤다. 생명은 안 돼 보여 팔을 쓰다듬으며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렇게 장 중사는 치료받고 귀대를 했다.
그런데 1주일 후 오후에 비보가 들어왔다. 바로 그 장중사가 전역 1주일을 남겨둔 최고 고참 오병장과 지피밖에 더덕을 캐러갔다가 대인지뢰를 밟아 장 중사는 사망하고 오 병장은 중상을 입은 것이다. 시체를 병기창에 옮겨다 놓았단다. 의무대에 있는 생명이 보고 시체를 염을 하라는 것이다. 병기창에 도착해 시체실에 들어가 보니 두개골 뒤쪽은 지뢰 파편에 날라 가고 눈을 감지 못하고 운명하여 눈을 감겨도 다시 뜨니 무섭다. 바로 1주일 전에 만져보았던 피부는 싸늘하니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참으로 난감했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초병들이 소주를 들고 들어와 대낮이지만 한잔하시란다. 맨 정신에 어떻게 수습을 하시겠냐며 나를 위로한다. 그나마 대학에서 해부학을 배웠으니 시체에 대한 두려움은 그다지 없었는데 아는 사람이 1주일 만에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니 허무하였다. 인생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허무한 것이구나! 그때부터 생명의 인생관은 “내일은 없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뿐이다”. 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같은 내무반 안에서는 생명이 동기들보다는 3-4살 많았고 최고 고참 들도 동갑이거나 어린 병사들과 함께 근무를 했다. 고참 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이유도 없이 수시로 구타를 하고 졸병들을 소집하여 어두운 방카에서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등에 두 손을 허리춤에 깍지 끼고 버티기 즉 ‘원산폭격’이라는 체벌을 군기가 빠진다며 매주 일요일엔 늘 똑같은 이유로 없이 규칙적으로 받았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병영 생활이었다. 정말 괴로울 땐 총으로 다 쏴 죽이고 싶지만 참고 참다 전역하는 날 후배들에게 이곳에서 배운 기백으로 세상을 산다면 겁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 어떤 어려움도 다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훗날 고등학교 동창들에게도 어느 부대에서 화장실 청소를 안했다고 똥을 먹으라고 해서 한 동안 군대가 지탄을 받고 있을 때도 생명은 우리 아들은 대학은 안보내도 군대는 꼭 보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래서 생명의 아들 완섭이도 해병대를 지원하도록 하여 무사히 군대를 마치게 하였다.
최전방 지피는 북한군 외에 민간인도 6개월 정도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군 생활을 하다 보니 휴가 때 민간 마을에 나와 버스를 탈 때면 강원도 시골 아가씨도 너무 아름다워 보였고 서울에 종로 거리에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보이는 예쁜 아가씨들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처음으로 여자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