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 분명한 선비 김관(金管)
뛰어난 경륜과 확고한 소신으로 진퇴를 분명히 했던 판도판서(版圖判書:재무부장관) 김관(金管)은 고려 고종 37년(1250년) 김용직(金龍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충선왕 때 왕에게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을 강력히 펴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17세 되던 해, 현량과(賢良科)에 오르고 이어 진사과와 명경과에 급제하니. 조정에서는 큰 인재를 얻었다고 하여 크게 상을 내리고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 원종 10년(1269년)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 부자가 원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고 원종을 폐하려 하자, 그는 송송례(宋松禮), 홍문사(洪文斯) 등과 더불어 임유무 일당을 제거하고 원종을 보호했다. 그는 또 거유 안유(安裕)가 적진에 붙잡혀 있을 때, 역적의 무리에게 순종치 말고 왕도의 의를 지키라고 격려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의 이름은 원래 관(館)자였으나, 이때 왕이 그의 강직한 면을 높이 사 음이 같은 관(管)이라는 총명(寵名)을 내려 지금까지 관(管)으로 알려지게 됐다.
충선왕이 불교에 탐닉하여 만승회(萬僧會)를 열려고 하자, 그는 이를 강력히 만류하다 왕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나, 결국 왕이 이를 뉘우치고 만승회를 파하게 했다.
1289년 10월, 충선왕과 함께 중국 연경에서 「주자전서」를 보고 이를 손으로 베껴오는 학문적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1298년 다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도성에 화재가 나자 그는 화염에 휩싸인 궁중에서 홀로 몸을 던져 왕을 구출했다. 환국하여 도첨의 문하시중, 국자감 사복, 판도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연로하여 물러나자 왕으로부터 궤장(机杖)과 약물, 이부자리 등을 하사받았다. 충목왕 원년(1345년) 타계하니, 향년 96세였다. 왕은 이인복(李仁復)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하고 문정공(文貞公)의 시호를 내리고 김해군 대산면 저소산에 예장케 했으니, 지금의 창원군 대산면 유동이다.
후예 중에 한국 역사상 대표적 효자인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 해동의 직필사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 한 집안에서 삼현이 배출되었다 하여 일명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라 하고 공을 삼현파의 중조로 받들고 있다.
-원전 : 1995년 김시우저 가락국 천오백년 잠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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