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은 영의정이었다.
그렇듯이 높은 자리에 앉아 계신 대감님으로서 기생의 전기를 쓴 분이 있다.
체통을 생명처럼 존중해오던 시절에 최고의 권좌에 앉아 계신 대감마마께서
인간 이하의 천녀(賤女)로 여겨오던 기생의 전기를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와 같은 일은 동서고금의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일일 것이다.
정조 시대에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기생의 전기를 쓴 사람은 채제공(蔡濟恭)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기의 주인공은 만덕(萬德)이라는 제주 기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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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金萬德)은 18세기 사람이었습니다.
영조 18년과 19년에 제주 섬에는 태풍이 끊이지 않아 극심한 흉년이 들었고,
6만 고을 주민들이 아사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를 실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굶어죽는 사람이
섬 도처에 부지기수로 생겨났습니다.
이때 일생 객주집을 운영해 큰 부자가 됐던 기생 출신 김만덕이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식량을 사들여 고을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김만덕하면 지금도 ‘기생’이란 딱지가 따라다닙니다.
그녀의 난민구제 활동이 어쩌면 그의 기생 이력 때문에
후세에 더 알려지고 칭송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덕은 양민의 딸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관기가 되었습니다.
미모가 출중한 까닭에 제주 섬 안팎의 남자들의 유혹을 받았던 만덕은
대담하기 이를 데 없었나 봅니다.
열일곱 살 때 새로 부임한 사또가 수청을 들라고 하자
소복을 입고 나타나 사또를 당황하게 합니다.
연유를 묻자 만덕은 “오늘 사또를 모시고 자결하겠습니다.”고 말해
사또의 마음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사또에게 자기가 원래 기생이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청원을 해서 기생명부에서 이름을 빼고 평민이 될 정도로 끈기와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만덕에게도 아픈 사랑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만덕은 제주목 관아의 말직 통인으로 일하는 고선흠이라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고선흠은 그만 요절하고 맙니다.
슬하에 먼저 죽은 아내에게서 태어난 어린 딸 둘을 남기고...
만덕은 연인이 남기고 간 딸을 키우기로 작심합니다.
만덕은 자신이 기생이 된 것도 돈 때문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빨리 죽은 것도 돈 때문이며,
그가 남긴 두 아이의 장래도 돈이 결정한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기로 작정하고
객주집을 차렸습니다.
그의 나이 20대 후반이었다고 합니다.
기생출신 만덕이 객주집을 열었다는 소식에 장사꾼들이 모두 만덕의 객주집으로 몰려들었고,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만덕의 미모에 반한 돈 많은 장사꾼들의 유혹이 끊임없었습니다.
만덕은 이런 유혹을 결연히 물리치는 한편 장사꾼으로서의 신용에는 철두철미하였다고 합니다.
객주집을 연지 일 년 만에 천량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돈을 벌었으니 김만덕이 57세 되던 해에 터진 흉년 때쯤에는
그녀의 재산이 굉장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갑니다.
그 많은 재산을 털어 난민을 구제하자 고을 사람들이 “만덕할망”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그게 200여 년 동안 전설과 같은 실화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여간 김만덕의 난민구제가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기에 제주 목사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796년 이 보고를 받은 정조 임금은 제주 목사에게
“김만덕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어 답신하라”라는 영을 내립니다.
정조가 그 때 만일 가상히 여기기는 했으나
포상을 하라는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면 김만덕의 에피소드는
그후 인구에 회자되지 않았을 거고 지방의 전설 정도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만덕은 처음에 소원을 말하기를 꺼리다가
사또가 “성상의 명을 내가 집행하지 않으면 문책을 받는다.”며 보채자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임금이 살고 있는 대궐과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사또는 기가 막혔지만 조정에 보고했고,
정조는 그 소원을 들어주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래서 김만덕이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제주 여자는 결코 육지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철칙을 만덕이 깨뜨렸던 것입니다.
서울에 올라간 만덕을 보살펴 준 것은 노재상 채제공이었던 모양입니다.
영의정 채제공이 정조에게 김만덕의 상경을 고했습니다.
임금이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데,
궁중 법도상 기녀출신 객주집 주인과의 대면이 불가능해지자 채제공이 꾀를 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용한 의녀(醫女)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만덕에게
행수내의녀(行首內醫女)라는 벼락감투를 내렸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국정감사에서 크게 문제될 절차입니다만
그 당시에는 왕조시대였고
선행을 한 착한 여자를 포상하려는 것이었으니 궁중 여론도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조는 형식상 객주집 주인이 아니라 행수내의녀라는 관리를 만난 것입니다.
만덕에게 시를 써준 박제가
알현을 받은 정조가 만덕의 손을 잡고 칭송하고
금강산 구경을 잘하게 해주라고 영의정에게 명합니다.
만덕은 임금님이 손을 잡았다 하여
명주로 그 손을 감고 금강산에도 올랐고 고향 제주로 내려갈 때도
그 명주천을 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만덕은 이듬해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6월까지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임금님의 관심 인물이었으니
그 당시 서울의 관료사회에서는 만덕이 화제가 되었고,
그래서 지체높은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러 찾아들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박제가(朴齊家)입니다.
박제가는 당시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석학이었습니다.
만덕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박제가는 숙소로 직접 찾아와서 시를 넉 수 써주었습니다.
넓은 천지 바다밖에는 못나가니
넓다한들 뉘라서 시집장가 끝내랴
제주라 섬나라 이웃은 일본
사또는 천년세월에 귤만 바쳐왔네
귤밭 깊은 숲속에 태어난 여자의 몸
의기는 드높아 주린 백성 없었네
벼슬은 줄 수 없어 소원을 물으니
만이천봉 금강산 보고 싶다네
의젓이 다듬은 몸매에 돛대도 높이
남쪽별은 빛나 임금님도 기쁨을
바삐 말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니
햇빛도 바람결도 노리개에 찬란타
정녕 깨달았으리 신라와 마음은 하나
생김도 달라 여자몸 눈동자가 겹이라
이제사 알겠노라 바다 건너온 뜻은
잣다란 세상일에 있지 아니했음을.
김만덕의 선행을 보고 느낀 대석학의 감회가 잘 우러나는 시문입니다.
고향으로 떠나는 만덕과 작별하며
영의정 채제공은 서랍에서 서책을 꺼내 손에 안겨주었습니다.
그것이 채제공이 쓴 <만덕전>(萬德傳)입니다.
만덕은 1812년 74세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에 추사 김정희가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습니다.
만덕의 덕행이 그 때까지 사람들의 입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고
추사는 감탄해서 만덕의 양아들에게 현판을 써 주었습니다.
恩光衍世(은광연세).
은혜로운 빛이 세세토록 빛나라는 뜻인가요.
지금도 그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김만덕의 금강산 여행 이야기를 읽고 당시 사람들은 참 멋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조의 마음가짐이 그렇고,
채제공의 배려나 박제가의 시상(詩想)이 그렇습니다.
귀양 중에 김만덕을 기려 현판을 써 준 추사의 멋도 새삼 돋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멋있는 사람은 김만덕입니다.
이런 멋있는 이야기를 후세에 남겨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담대함 덕이었다고 봅니다.
임금에게 궁궐 구경과 금강산 구경을 소원한 그 파격 때문에
그녀의 선행도 오늘에 빛나고,
기라성 같은 당대 학자들의 기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남겼던 것입니다.
김만덕이 죽은 후 제주 사람들은 만덕을 칭할 때
‘기생’이라는 말을 입에 결코 올리지 않고
‘만덕할망’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할망은 존칭개념이 별로 없는 친근한 단어입니다.
‘만덕할망’이 보여준 사랑의 행적,
그 공덕의 가치를 평가해주고 격려해줬던 정조 채제공 박제가 김정희의 멋있는
기품을 되새기는 계기로 다가옵니다.
/퍼온 글입니다/
첫댓글 훈훈한 역사이야기 즐감합니다^^
즐감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