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열며... (한성백제박물관 2018.3.30-6.30)
2012년 도봉서원(道峰書院)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 金剛鈴금강령과 金剛杵금강저를 비롯한 고려시대 불교용구 79점이
출토되었습니다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寧國寺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특히 도봉서원터 출토 금강령은 五大明王,梵天범천, 帝釋天제석천, 四天王등 모두 11구의 불교 尊像존상들이 표현되어 있는
매우 드문 예로,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줍니다
이 전시는 도봉산길 90(도봉동 512변지)일대가 고려시대 영국사라는 불교의 중심에서 어떻게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城地성지로
변해가고, 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는지를 조명합니다 천여년에 걸쳐 서울의 불교와 유교, 사상의 중심지였던
그 땅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프롤로그: 도봉산
道峯山도봉산은 서울의 도봉구, 경기도의 의정부, 그리고 양주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紫雲峰자운봉을 비롯한 암벽이 장관을 이루고, 산세가 아름다워 小金剛소금강이라 불리었다 도봉산 일대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땅이었으나, 5세기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신라의 일개 郡군이었던 지역이 고려 초에 승격하여
見州견주가 되었으며 1018년에 楊州양주에 예속되었다
도봉산에 조선 문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진 것은 옛 영국사 터에 조광조를 배향하는 도봉서원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여러 문인들이 도봉산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며 시를 짓거나 글을 남겼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도봉서원은 사라졌으나 1970년대부터 경기지역 유림들에 의해 봄, 가을의 제향과 서원 복원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2009년
'도봉서원과 刻石群각석군이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도봉서원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천 년 만에 빛을 본 도봉산 영국사
2012년 도봉서원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건물터 다수와 石築석축등이 확인되었고 도봉서원이 영국사의 일부
건물터와 기단을 재활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조사중 중심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금강령과금강저를 비롯한
다수의 고려시대 금속공예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대명왕과 범천, 제석천. 사천왕까지 무려 11구의 존상이 섬세하게
푶현된 금강령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것이다 유물의 뛰어난 조형성, 예술성과 함께 이러한 유물들이 조선시대 서원터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출토된 금속제 유물은 모두 79점으로 커다란 청동 항아리 안에 향로, 향합, 굽다리 그릇, 그릇, 숟가락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위를 청동 대야와 청동 화로가 덮고 있었으며, 草本초본으로 다시 덮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처럼 옛 절터에서
불교 금속공예품들이 한꺼번에 발견되는 것은 종교적 의례 행위나 전란등으로 인해 임시로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령과 금강저
금강령과 금강저는 인도의 무기에서 유래되어 발전한 것으로 밀교의례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의식구이다
금강령은 손으로 흔들어 소리를 내는 搖鈴요령의 일종으로 의식때 소리를 내어 중생들을 성불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금강저는 마음 속 번뇌를 없애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도봉서원터에서 출토된 금강령과금강저는 세트를 이루는 것으로, 손잡이의 끝부분에 갈고리와 같은 고(쇠금자변에 오래될고)
가 각각 5개인 오고령과 오고저이다 금강령의 방울 부분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윗단의 5면에는 오대명왕을, 아랫단의 5면에는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을 나타내었으며, 고 부분에는 舍利사리를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등이 섬세하게 표현된물고기 모양의 鐸舌탁설도 함께 출토되었다
사리공과 함께 11구의 존상이 모두 표현된 금강령은 우리나라에서 도봉서원터 출토 금강령이 유일하며, 고려시대에서도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명왕 Vidyaraja
명왕은 밀교에서 나타난 부처의 化現화현중 하나이다. 敎化교화하기 어려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장애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므로 ,대개 분노하는 모습[忿怒尊]으로 표현된다눈을 부릅뜬 무서운 표정으로 칼이나 밧줄 등을 들고 있으며,
얼굴과 팔이 여러 개인 多面多臂다면다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명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경전이나 불교미술에 부동명왕. 항삼세명왕. 군다리명왕. 대위덕명왕. 금강야차명왕의
오대명왕이 주로 나타난다명왕의 존명은 번역 방식에 따라서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다 오대명왕은 밀교 金剛界금강계
曼陀羅만다라의 대일여래.아촉여래 보생여래아미타여래 불공성취여래의 다섯 부처의 뜻을 받들며 각각 다섯 방위를 수호한다
청동 공양구 Bronze Ritual Ware
불교 儀禮의례는 부처와 이들을 따르는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행위로, 供養공양행위가 함께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공양을
통해 부처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공양에는 음식, 물, 향, 꽃, 등불 등을 바치며 이를 위해 각종 공양구가 사용된다
도봉서원터에서 출토된 불교 공양구는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수량이 많을뿐 아니라 종류도 다양하다 걸이향로
香爐향로, 香盒향합, 香垸향완 등 향 공양과 관련된 것들과 동이, 항아리, 盒합, 대야, 화로, 굽다리 그릇, 숟가락등
모두 79점이다도봉서원터 출토 청동유물은 한번에 제작된 것이아니라 여러차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대대로 사용하던
물건을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글자나 부호가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 영국사의 모습을 살피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석각편Engraved Stelae
도봉서원터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석각편 5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퇴점암 계통의 돌에 선을 구획한 후 歐陽詢體의 楷書體
해서체를 새긴 것이다 書風으로 보아 고려 10~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3점은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을 새긴
石經석경으로 최초로 발견된 고려시대 석경이다
석각편 중 하나는 [千字文천자문]을 돌에 새긴 것으로, 163句구 [治本於農치본어농], 165구[淑載南묘숙재남묘], 167구
[稅熟貢新세숙공신]의 일부가 남아있다 사찰에서 [천자문]은 글씨를 익히는 교본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석각편들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석각천자문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천자문이다
조선시대 영국사 Yeongguk-sa Temple in the Joseon Period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번성했던 영국사는 어느 시점엔가 쇠락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5세기 초 터만 남은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영국사는 孝寧大君효령대군의 후원을 받고 국가차원의 불교행사가 거행되는 등 번성하였으나
성종대에 급격히 쇠퇴하면서 16세기 중엽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영국사터는 건물지 몇 군데만이 남아 있다. 그 중 5호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이상의 方形방형 건물로
佛殿불전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영국사의 유물로는 효령대군을 비롯한 후원자 명단이 새겨진 암막새와 梵字범자무늬
수막새 등의 기와, 분청사기, 백자편 등이 있다
도봉서원의 건립
1573년 터만 남은 영국사 자리에 도봉서원이 세워졌다 불교 사찰이 쇠락한 자리에 유교 서원이 건립된 것은 한 시대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였다 도봉서원은 조광조와 송시열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賜額書院사액서원이었으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서인계 畿湖士林기호사림들이 공론을 모았던 도성인근의 가장 중요한 서원이었다 도봉서원은 여러 차례의
전란과 자연재해 등을 거치며 파괴되었으나 지속적으로 재건되었으며, 도봉서원의 건립. 중건과 그 구조에 관한 기록이 전해져온다
도봉서원은 선현에 제사를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풍광을 감상하고 즐기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은 도봉서원을 들러 강론을 하고 기행문과 시를 남겼으며, 서원 근처에 그들의글을 새긴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또 상당수의 화가들이 도봉산과 도봉서원의 풍경을 수려한 필치로 남겼다. 그러나 경기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도봉서원도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서원철폐령과 도봉서원의 훼철
조선 후기의 서원은 차츰 인재 양성과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의 긍정적인 기능을 잃어버리고 혈연. 지연. 학벌. 당파관계
등과 연결된 병폐를 낳았다 양반들은 서원의 건립과 유지를 위하여 일반 백성들의 돈과 재물을 강탈하고 지방관청에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1864~1871년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민폐를 줄이는 한편 궁핍한 국가 재정을 충당할 목적으로 서원철폐 작업을
벌였다 전국 650개 서원 중 중요한47개소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철거되었다 도봉서원은 이때 완전히 毁撤훼철되어
터만 남게 되었다
고려시대 불교와 불교미술
918년 후삼국시대의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고려는 호족세력과 지식층을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새로운 왕조의
사회통합 이념으로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는 수도 개경에 10대 사찰을 겅립하고 燃燈會와 八關會를 개최하였으며
훈요10조에 불교 숭상을 당부할 정도로 불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대각국사 의천등 많은 왕실과 귀족의 자제들이 출가하여 활동한 것은
고려시대 불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예이다
고려의 불교는 통일신라에서부터 시작된 각종 종파가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고 체게를 갖추었으며 왕실 및 호족세력의 후원으로
각종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의 사람들은 불교에기대어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으며사찰을 세우고 의례와 장엄을 위한
불상과 불화, 경전등을 조성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고려시대 불교미술은 통일신라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고려
귀족문화의 화려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반영되었다 반면 지방에서는 호족들에 의해 철로 만든 불상과 다양한 형식의 탑 등
지역색이 강한 미술품이 만들어졌다
에필로그: 도봉산길 90의 역사
조선 초기까지 번성했던 영국사는 사라지고 도봉서원이 건립되었다 영국사는 없어졌으나, 영국사의 건물부재는 도봉서원의 건축에 재활용되었고 부도의 돌받침은 그대로 남아 유생의 마음을 가다듬는 水盤수반이 되었다 일시적으로는 훼손이 있었을지라도
결코 대립의 장은 아니었다
이제 도봉서원 복원사업의 방향 설정에도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뛰어난 조형성과 예술성을 갖춘 금강령을 이용하여
불교 의례가 행해지고, 누군가에게는 원대한 꿈을 실현시켜준 공간이 되었던 이곳을 相生상생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오늘 우리가 한 일은 내일 우리의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