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명제기(明帝紀)
명황제는 휘를 예(叡), 자를 원중(元仲)이라고 하며, 문제(文帝)의 태자이다. 태어나자 조조는 그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옆에 있도록 명령했다.1) 조예는 열다섯 살 때 무덕후(武德侯)에 봉해졌다.
황초 5년(221) 제공(齊公)이 되었다.
2년 그의 생모 견씨가 부친 조비에게 주살당했으므로 뒤를 이을 황태자로 세워지지 않았다.2)
3년(222) 평원왕(平原王)이 되었다.
7년(226) 여름 5월 문제는 병세가 위중하자, 곧바로 조예를 황태자로 삼았다. 17일, 황제에 즉위하여 대사면을 행하고, 황태후에게 존칭을 주어 태황태후(太皇太后)라 하고, 황후를 황태후(皇太后)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의 봉작에도 각기 차등을 두었다.3)
6월 14일 생모 견부인에게 문소황후(文昭皇后)의 시호를 추증했다. 23일, 동생 조정을 양평왕(陽平王)으로 삼았다.
8월 손권이 강하군(江夏郡)을 공격했지만, 태수 문빙이 굳게 지키며 저항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논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를 구원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명제가 말했다.
“손권의 군대는 수전에 잘 훈련되어 있는데, 지금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공격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급습하면 되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나, 공격이란 수비하는 숫자보다 두배는 있어야 하오. 그러므로 그들은 절대로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오.”
먼저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순우(荀禹)를 변방지대에 파견하여 병사들을 위로했다. 순우가 강하에 도착하여 통과한 현의 병사와 따르는 1천의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산세에 의지하여 불을 들어 공격하자 손권은 퇴각해 버렸다.
12일, 아들 조경(曹冏)을 내세워 청하왕(淸河王)으로 삼았다. 오나라의 장군 제갈근(諸葛謹)과 장패(張覇) 등이 양양(襄陽)을 침공했지만 무군대장군 사마선왕이 격파시키고 장패를 참수하였으며, 정동대장군 조휴(曹休)도 별동부대의 대장을 심양(尋陽)에서 격파시켰다. 이들의 공적을 논하고 상을 주는데 각기 차등을 두었다.
겨울 10월 청하왕 조경이 서거했다.
12월 태위 종요를 태부로, 정동대장군 조휴를 대사마로, 중군대장군 조진(曹眞)을 대장군으로, 사도 화흠(華歆)을 태위로, 사공 왕랑(王郞)을 사도로,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진군(陳群)을 사공으로,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사마선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
태화 원년(227) 봄 정월 조예는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무황제(조조)를 함께 제사지내고, 모든 종족이 명당 ----- 정당(政堂) ----- 에서 문제를 상제와 짝지어 제사지냈으며, 강하군의 남부를 분할하였고 강하의 남부에 도위(都尉)를 설치했다. 서평군(西平郡)의 국영(麴英)이 반란을 일으켜 임강령(臨羌令)과 서도(西都) 등의 지방 관원을 살해하였으므로, 장군 학소(郝昭)와 녹반(鹿磐)을 파견하여 그를 토벌하고 참수시켰다.
2월 5일 명제는 직접 적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15일, 문소황후(견부인) 영묘를 업성에 건립하고, 21일, 동교(東郊)에서 태양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1일 다시 오주전(五鑄錢)을 발행했다. 19일, 처음으로 종묘를 건축했다.
가을 8월 서쪽 교외에서 달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4일 동쪽 교외에서 열병식을 거행했다. 언기의 왕이 아들을 조정으로 들여보내자, 명제는 그들의 작위를 두 등급 승진시켰으며, 홀아비, 과부, 자식없는 노인, 고아와 같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었다.
12월 모황후의 부친 모가(毛嘉)를 열후로 봉했다. 신성(新城) 태수 맹달(孟達)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표기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토벌하도록 했다.
2년(228) 봄 정월 사마선왕은 신성을 공격하여 토벌하고, 맹달을 참수하여 그의 머리를 보내왔다.4) 본래 신성군에 속했던 상용(上庸)․무릉(武陵)․무현(巫縣)을 떼내어 새로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하고, 석현(錫縣)을 새로 석군(錫郡)이라 했다.
촉나라의 대장 제갈양이 국경을 침입하자, 천수(天水)․남안(南安)․안정(安定) 삼군(三郡)의 관리와 민중이 위나라에 모반하고 제갈양에게 호응했다.5) 명제는 대장군 조진을 파견하여 관우(關右; 관중지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일제히 군대를 진격하도록 했으며, 우장군 장합(張郃)을 파견하여 가정(街亭)에서 제갈양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제갈양이 패배하여 도주하자, 삼군이 평정을 되찾았다.
2월 18일 명제는 순시하여 장안에 이르렀다.
여름 4월 8일 낙양궁으로 돌아왔으며,6) 옥에 갇힌 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사면시켰다. 16일, 제갈양 토벌의 공훈에 따른 판정이 있었는데, 작위를 봉하고 영지를 증가시켜 주는 데 각각 차등을 두었다.
5월 큰 가뭄이 들었다.
6월 조칙을 내렸다.
----- 유학을 존중하고 학문을 중시하는 것은 제왕 교화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면서 유학을 배운 관원 중에 경전에 정통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성현의 도리를 널리 알릴 수 있겠는가? 그중에서 박사를 잘 선발하여, 비로소 시중과 산기상시의 관직에 임명해야 된다. 각 군과 국에 널리 조칙을 내어 공사(貢士)에는 경학에 뛰어난 자를 우선적으로 추천하게 해라.
9월 조휴가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완성( 城)에 도달하여 오나라 대장 육의(陸議)와 석정(石亭)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29일, 아들 조목(曹穆)을 세워 번양왕(繁陽王)이라고 했다.
10월 4일 대사마 조휴가 죽었다.
겨울 10월 공경과 측근의 가신들에게 조칙을 내려 뛰어난 대장을 한 명씩 추천하도록 했다.
11월 사도 왕랑이 죽었다.
12월 제갈량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였으므로, 조진은 장군 비요(費曜) 등을 파견하여 그와 싸우도록 했다. 요동태수 공손경의 형의 아들인 공손연(公孫淵)이 공손경의 지위를 강탈하였으므로, 공손연을 요동태수로 임명했다.
태화 3년(229) 여름 4월 원성왕(元城王) 조례(曹禮)가 세상을 떠났다.
6월 21일 번양왕 조목이 죽었다. 26일, 고조부 대장추(大長秋) 조등에게 사후의 존호(尊號)를 주어 고황제(高皇帝)라 하고, 부인 오씨(吳氏)를 고황후(高皇后)라고 했다.
가을 7월 조칙을 내렸다.
----- 예법에 따르면 황후에게 후사가 없으면 서자를 선택하여 세워 정통을 잇도록 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바른 혈통을 계승한 것으로 공적인 도의를 받들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사적인 친분을 생각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전한의 선제(宣帝)는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지만, 망부(亡父; 史皇孫)의 지위를 올려 도황고(悼皇考)라는 존호를 주었다.7) 원제(元帝)의 서손(庶孫)이었던 한나라 애제(哀帝)는 번왕의 신분으로서 황제를 옹립하고, 동굉(董宏) 등은 멸망한 진(秦)왕조의 실례를 들고 나와 당시의 조정을 미혹시켜 잘못 인도하였으며, 애제의 망부 정도공왕(定陶恭王)에 대하여 공황(恭皇)이라는 존호를 주고 수도에 영묘를 건립하였다.8) 또 번왕 가까이에서 총애를 받은 자(애제의 어머니 丁姬)에게 은총을 주어 장신궁(長信宮; 황태후를 가리킴)과 똑같이 취급하고, 전전(前殿)에서 부자가 황제라고 칭하는 것이 나타났고 아울러 네 명의 황태후가 후궁에 함께 있는 것은 참람되고 법도에서 어긋난 것이니, 이처럼 법도가 없어서 사람이든 신이든 신하 사단(師丹)이 그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애제는 충성스럽고 공정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죄를 뒤집어썼으며, 그 겨로가 정희(애제의 모친)․부태후(傅太后; 애제의 조모)의 능묘가 불에 타 없어지게 하는 위급함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이후, 출신이 유사한 제왕들이 이러한 일을 다투어 모방했다. 옛날에 노나라 문공은 ----- 선대 희공을 대대로 민공보다도 높은 위치에서 제사지냈다 ----- 제사 순서를 거슬렀지만, 그 죄는 하부에서 유래하고 있다. 송나라에는 임금을 후하게 장사지내는 것이 법도가 아니므로, 모두 그 책임을 화원(華元)에게로 돌렸다. 지금 공경과 담당 관리들은 이전 세대에 나온 일로써 깊이 경계를 삼아야 한다. 만일 후사가 제후 중에서 나와 입조하여 황실의 정통을 받들 경우에는 마땅히 황제 자리를 계승한 사람으로서의 대의를 명백히 보여 줄 수 있어야한다. 만일 어떤 자가 교묘한 말과 사악한 행위로써 그 당시 군주를 유도하고 아첨하여 함부로 정당한 칭호를 세워 황실의 정통을 범하고, 황제의 망부를 황(皇)이라 하고, 망모를 후(后)라고 부르면, 보좌하는 신하들이 그들을 주살해도 용서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이 조칙을 금책(金策; 황금으로 만든 표찰)에 적어 종묘에 깊이 간직하고 법령에 기재하도록 하라.
겨울 10월 평망관(平望觀)을 청송관(聽訟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명제는 항상 말했다.
“재판이란 천하의 생명에 관한 일이오.”
매번 큰 재판이 있을 때마다 항상 재판하는 곳에 와서 방청했다.
이전에 낙양의 종묘가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조씨(曹氏) 선조들의 위패가 업성의 종묘에서 받들어졌다.
11월 종묘가 비로소 완성됐으므로 태상 한기(韓曁)에게 부절을 주어 고황제(조등)․태황제(조숭)․무제․문제의 위패를 업성에서 맞이하였다.
12월 10일 낙양에 이르게 하여 종묘에 신주를 받들어 안치했다.9)
12월 24일 대월지국(大月氏國)의 왕 파조(波調)가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바쳤으므로, 파조를 친위대월지왕(親魏大月氏王)에 임명했다.
4년(230) 봄 2월 4일 조서를 내렸다.
----- 세상의 질(質; 소박함을 존중한 문장)과 문(文; 수식을 존중한 문장)은 왕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변화한다. 전란이 반발한 이래 경학 교육은 이미 폐지되어 끊어졌고,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려고만 할 뿐, 경전을 학습하려 들지 않는다. 어찌 내가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미흡하다고 하여 기용되는 자가 덕의에 따르지 않겠는가? 앞으로는 관리들이 하나의 경전을 배워 통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박사들에게는 시험을 부과하여 그 중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자를 선발하여 즉시 등용하라. 품행은 떠있고 화려하기만 하여 그 근본을 아는 데 힘쓰지 않는 자는 파면하여 물러나게 하라.
10일, 명제는 태부와 삼공에게 조서를 내려 문제가 지은 《전론(典論)》을 돌비석에 새겨 종묘 문 밖에 세우게 했다. 15일, 대장군 조진을 대사마로, 표기장군 사마선왕을 대장군에, 요동태수 공손연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 태부 종요가 죽었다.
6월 11일 태황태후가 붕어했다. 19일, 상용군을 군에서 없앴다.
가을 7월 무선변후(武宣卞后;태왕태후)를 고릉(高陵;무제의 묘소)에 합장했다.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촉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8월 5일 동쪽으로 순시를 했으며, 사자를 파견하여 희생인 소를 바쳐 중악(中岳;嵩山)에 제사지냈다.10) 19일, 허창군으로 행차했다.
9월 폭우가 내려 이수․낙수․황하․한수가 범람하자, 조진 등에게 조칙을 내려 군대를 귀환시키도록 했다.
겨울 10월 11일 명제가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16일, 명령을 내렸다.
범죄자 중에서 사형수를 제외한 자를 풀어주는데, 보석금에는 각자 차등을 두어야 한다.
11월 금성이 목성 부근에 출연하였다.
12월 28일 문소견황후를 조양릉(朝陽陵)에 이장시켰다. 23일, 공경에게 재능과 인격이 우수한 현량을 추천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5년(231) 봄 정월 명제가 적전(籍田)에서 밭을 갈았다.
3월 대사마 조진이 세상을 떠났다. 제갈양이 천수(天水)로 침공하였으므로 대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막도록 했다. 지난 해 겨울 10월부터 이 달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9일에 비를 기원하는 성대한 행사를 거행했다.
여름 4월 선비족 부의왕(附義王)과 가비능(軻比能)은 그들의 부족사람과 정령(丁零) 대인(大人;부족의 실력자) 아선(兒禪)을 인솔하여 유주에 도착하여 좋은 말을 바쳤다. 다시 흉노를 보호하는 중랑장을 설치했다.
가을 7월 6일에 제갈양이 퇴각하여 도주하자,11)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각기 차등을 두었다. 15일 태자 조은(曹殷)이 탄생하자 대사면을 내렸다.
8월 조칙을 내렸다.
----- 옛날에 제후를 조정에 참석시킨 것은 친족간의 화목함을 증진시키고, 모든 나라들끼리 협력하고 융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선제(先帝)가 법령을 만들어 여러 왕을 수도에 머물지 않도록 한 것은 나이 어린 주상이 보위에 있을 때 그의 모후(母后)가 실제 정치(섭정)를 하였으므로 제후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으며, 이것은 모든 국가의 성장과 쇠퇴와 관계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왕은 12년간 모이지 않았으니 어찌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 왕 및 친족 공후(公侯)들은 각기 친아들 한 명을 조정에 참석시키도록 명령한다. 이후에 나이 어린 주상과 모후가 궁중에 있는 경우에는 선제의 명에 따라 행할 것이니, 이것을 법령 속에 기재하여 명확히 밝히도록 하라.
겨울 11월 17일 달이 헌원대성(軒轅大星)을 범했으며, 30일 회(晦;그믐), 일식이 있었다.
12월 6일 달이 토성을 범했는데, 21일에 태위 화흠(華歆)이 죽었다.
6년(232) 봄 2월 조칙을 내렸다.
----- 옛날의 제왕이 제후에게 영지를 주어 다스리도록 한 것은 제후들이 힘을 합쳐 왕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시경》에도 ‘덕을 품고 나라를 안정되게 하니, 종자(宗子;一族의 자제)가 성의 담장 같구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진나라와 한나라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계승했지만, 제후의 나라는 강하거나 약하거나 모두 그 중심을 잃었다. 거대한 위나라가 건국된 이래 모든 왕은 제후국을 얻었지만, 시기의 적절함에 따라 봉해졌으며, 일정한 제도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히 후대의 규범이 되지 못한다. 지금 개정하여 제후나 왕에게 영지를 주어 모두 일군(一郡)을 갖게 하여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하라.
3월 7일 동쪽으로 순시하러 가는데, 지나는 곳마다 홀아비․과부․고아, 아들없는 노인을 위문하고 곡물과 흰비단을 하사했다.
9일, 달이 헌원대성을 범했다.
여름 4월 6일 허창궁으로 행차했다. 28일, 처음으로 종묘에 신선한 과일을 바쳤다.
5월 황자(皇子) 조은이 죽자, 영토를 추증하고 시조를 안평애왕(安平哀王)이라고 했다.
가을 7월 위위(衛尉) 동소(董昭)를 사도로 삼았다.
9월 마피(摩陂)로 행차하여 허창궁을 수축하고 경복전(景福殿)과 승광전(承光殿)을 건립했다.
겨울 10월 진이장군(殄夷將軍) 전여(田予)가 군대를 인솔하여 오나라 대장 주하(周賀)를 성산(成山)에서 토벌하고 참수했다.
11월 4일 금성이 대낮에 나타났으며, 혜성이 익(翼;별자리 이름)에 나타나, 태미성(太微星) 속 상장성(上將星)에 접근했다. 28일, 진사왕 조식이 죽었다.
12월 명제가 행차를 끝내고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청룡(靑龍) 원년(233) 봄 정월 23일 청룡이 협현(陜縣;北邙山) 마피의 집에 나타났다.
2월 6일 황제가 마피로 행차하여 그 용을 보았으며, 그 결과 연호를 바꾸었다. 마피를 용피(龍陂)로 바꾸고, 남작(男爵)과 자작(子爵)에 대해서는 두 등급 작위를 주고, 홀아비․과부․고아, 아들 없는 노인에게는 그 해의 세금을 내지 말도록 했다.
3월 3일 공경들에게 조칙을 내려, 재능과 인격이 우수하고 행동이 성실한 사람을 각자 한 명씩 추천하도록 했다.
여름 5월 12일 조칙을 내려 지금은 고인이 된 대장군 하후돈, 대사마 조인, 거기장군 정욱을 조조의 종묘 정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12) 18일, 북해왕(北海王) 조유(曹蕤)가 죽었다.
윤달 5월 1일 일식이 있었다. 8일, 제후왕의 딸 이외의 각 종실(宗室) 황족의 딸을 모두 읍주(邑主)라고 호칭했다. 여러 군국(郡國)에 조칙을 내려, 사전(祠典;제사의 규정을 나타내는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산이나 냇물에 제사지내는 일을 금지했다.
6월 낙양궁의 공차는 방(국실)에 불이 났다.
위나라에 귀순하여 변방을 보위하는 선비족 보도근이 이미 배반한 선비족 가비능과 함께 사통하여 내려오자, 병주자사 필궤(畢軌)가 표를 올려 보고하고 문득 자신도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가비능을 밖에서부터 위협하면서 안으로는 보도근을 진압했다. 조예는 표장(表章)을 본 이후에 말했다.
“보도근이 이미 가비능에 의해서 유인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의심이 든다. 지금 필궤가 군대를 출동하였는데, 마침 두 부락의 선비족이 놀라 함께 일어서게 된다면 어떻게 위협하고 진압할 수 있겠는가?”
즉시 필궤에게 조서를 내려 설령 군대를 출동시켰더라도 구주(九州)를 넘거나 변방을 멀리 넘지 말라고 명했다. 이 조서가 도착할 무렵, 필궤는 군대를 전진시켜 음관(陰館)에 주둔시키고 장군 소상(蘇尙)과 동필(董弼)을 파견하여 선비족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가비능이 아들에게 기병 1천명을 인솔하게 하여 보도근의 부락민을 맞이하도록 하였으며, 이 부대는 소상․동필과 만나 누번(樓煩)에서 싸웠는데, 위나라 군대는 패하고, 소상과 동필이 전사했다. 보도근의 부락민은 전부 반기를 들고 국경으로 가서 가비능과 합류하여 국경지대를 침범했다. 교기장군 진랑(秦郞)13)을 파견하여 중군(中軍)을 통솔하여 이들을 토벌하자, 선비족은 사막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가을 9월 안정군 국경지대 수비를 하고 있던 흉노의 우두머리 호박거자직(胡薄居姿職)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사마선왕은 장궁 호준(胡遵)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추격하고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겨울 10월 보도근 부락의 우두머리 대호아랑니(戴胡阿狼泥) 등이 병주에서 항복했으므로 효기장군 진랑은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왔다.
12월 공손연이 손권이 파견한 사자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의 머리를 베어 보냈으므로, 공손연을 대사마낙랑공(大司馬樂浪公)으로 임명했다.
2년(234) 봄 2월 10일 태백성이 화성 부근으로 운행했다.14) 18일, 조예가 또 조칙을 내렸다.
----- 채찍질을 관리에 대한 형벌로 삼은 이유는 태만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함인데, 근래에 들어 무고하게 채찍질을 당하여 죽음에 이르는 자가 많으니, 채찍질과 곤장의 형벌제도를 줄이고, 이를 법령에 기재하라.
3월 6일 산양공(山陽公;한 헌제) 유협(劉協)이 세상을 떠났다. 조예는 상복을 입고, 유협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절을 가진 사자를 보내어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25일에 대사면이 있었다.
여름 4월 유행병이 크게 발생하였으며, 숭화전(崇華殿)이 불타 없어졌다. 12일, 담당 관리에게 조칙을 내려 큰 소를 바치게 하고 문제의 제묘에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문제의 신주와 패위를 향하여 산양공의 죽음을 보고했다. 산양공의 시호를 추증하여 효헌황제(孝獻皇帝)라 하고, 한나라 황제의 예의 제도에 따라 안장시켰다.
이 달 제갈양이 사곡(斜谷)을 지나 위남(渭南)에 주둔하였으므로 사마선왕은 모든 군대를 이끌고 막고 있는데, 명제가 조칙을 내렸다.
----- 단지 성벽을 굳게 지켜 촉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수 없게 하고, 물러나 싸울수 없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 군량미가 부족할 것이다. 설령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이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아군을 안전한 상태에 놓고 오랜 시일 동안 피곤해진 적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
5월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손권이 거소호(居巢湖) 입구로 공격해 들어가 합비(合肥)의 신성을 향해 나아갔으며, 한편으로는 대장 육의와 손소에게 각각 1만여 명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여 회수와 오소로 들어가도록 했다.
6월 정동장군 만총(滿寵)이 군대를 인솔하여 나아가 이들을 방어했다. 만총은 신성의 수비를 철거하고 적군을 수춘까지 유인하려 했는데, 명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 광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멀리 약양(略陽)을 점거하고 끝내는 외효(隗囂)를 격파했는데, 선제는 동쪽에 합비를 두고 남쪽에 양양을 지키게 하고 서쪽에는 기산(祁山)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군이 이 세 성 아래에서 격파된 원인은 이 세 성 모두가 반드시 다투는 요새이기 때문이오. 설령 손권이 신성으로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니 수비를 굳게 하면 내가 장차 직접 가서 그들을 정벌할 것이지만, 내가 도착할 때면 손권은 아마도 도주했을 것이오!”
가을 7월 19일 명제는 직접 용주(龍舟)를 타고 동쪽으로 정벌하러 갔다. 손권은 신성을 공격했지만, 장군 장영(張潁) 등이 성을 지키며 힘을 다해서 싸워 막았다. 조예의 군대는 합비성으로부터 거의 수백 리쯤 떨어져 있었으며, 손권은 도주하고 육의와 손소 등도 퇴각하였다. 대신들은 대장군 사마선왕이 제갈양이 이끄는 촉나라 군사와 대치하고 있어 승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조예에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으로 가서 사마선왕을 후원해 줄 것을 건의하자, 조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권이 도주했다면 제갈양은 담(膽)을 이미 격파했을 것이고, 대장군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소.”
그래서 조예는 군대를 진격시켜 수춘까지 행차하고, 여러 장수들의 공로를 기록하였는데, 봉작과 포상에는 각각 차등을 두었다.
8월 7일 대규모의 열병의식을 거행하고, 육군(六軍)의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파견하고, 합비와 수춘의 여러 군사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보내고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29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사마선왕관 제갈양은 여러 날을 대치하면서 성채만 쌓은지 수십 일이 지나도록 제갈양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사마선왕은 성채를 굳게 지키고 대응하지 않았다.15) 때마침 제갈양이 질병으로 죽자, 촉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겨울 10월 14일 달이 진성(鎭星;토성)과 헌원성 부근을 침범했다. 27일, 달이 태백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11월 수도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동남쪽으로부터 은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붕 위의 기와가 움직이자, 담당관리에게 조칙을 내려 사형죄라는 조례를 산거하여 사형죄를 감면해 주었다.
3년(235) 봄 정월 8일 대장군 사마선왕을 태위에 임명했다. 19일, 삭방군(朔方郡)을 다시 설치했다. 수도에 큰 전염병이 유행했다. 28일, 황태후(문제의 곽후)가 붕어했다.16) 26일, 수광현(壽光縣)에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3월 11일 문덕곽후(文德郭后)를 장사지내고, 수양릉(首陽陵) 계곡 서쪽에 능묘를 만들었는데, 조비가 생존하던 관례에 따라 철저히 진행되었다.
이때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昭陽殿)과 태극전(太極殿)을 만들었으며, 총장관(總章觀)을 지었다. 백성들은 농업의 적기를 빼앗겼으며, 강직한 신하 양부(楊阜)와 고당륭(高堂隆) 등이 각각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하게 진언했는데(명제는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조예가 비록 권고를 듣지는 않았지만, 항상 대신들에게 매우 너그러웠다.
가을 7월 낙양의 숭양전이 불에 타버렸다.
8월 24일 황자 조방(曹芳)을 세워 제왕(齊王)이라 하고, 조순(曹詢)을 진왕(秦王)이라고 했다. 11일,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숭화전(崇華殿)을 재건하게 하고, 구룡전(九龍殿)으로 명칭을 바꾸게 했다.
겨울 10월 3일 중산왕 곤(袞)이 세상을 떠났다. 26일, 태백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11월 22일 허창궁에 도착했다.
4년(236) 봄 2월 태백성이 다시 대낮에 나타났고, 달이 태백성 부근을 운행하였으며, 또 헌원성 부근으로 운행하였고, 태미성(太微星;사자자리 서쪽의 십성) 구역으로 진입하였다가 나왔다.
여름 4월 숭문관(崇文觀)을 설치하고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불러 임용하였다.
5월 13일 사도 동소(董昭)가 세상을 떠났다. 15일, 숙신(肅愼)이 호시(楛矢;호목으로 만든 화살)를 헌상했다.
6월 1일 조서를 내렸다.
----- 옛날, 우(虞)시대에는 화상(畵象;형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으므로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못하였고, 주대에도 형벌제도는 설치하였지만 법을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많은 왕들의 뒤를 이어 과거의 풍속을 따르려고 생각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거리가 먼 것인가? 법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법을 어기는 사람들 또한 많고, 형벌의 범위가 날마다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간사하고 사악함을 제지할 수 없도다. 이전에 사형에 관한 법령 조문을 검토하고 매우 많은 부분을 삭제한 것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각 군과 국에서 옥살이하는 자가 1년 사이에 수백명을 넘는 것이 어찌 짐의 가르침이 충분하지 못하여 백성들에게 함정이 된 것이겠는가? 담당 관리는 재판에 관해 논의하여 사형을 늦추고, 간략하고 관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 은혜를 구걸하는 자라든지, 변명의 말을 하려는 자를 처벌하고 단죄하는 일은 도리를 추구하여 정을 다하는 수단이 아니다. 현재 재판과 형벌을 담당하는 정위 및 천하의 옥관에게 명하니, 죽을 죄를 범한 자가 있다면 충분하게 재판하여 판결을 내리도록 하라. 모반을 한 자와 직접 다른 사람을 죽인 자 이외에는 모두 그 친족들에게 연락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또 은전(恩典)을 구걸하는 자가 있다면 판결문과 해당 문서를 상주하면 짐은 완전히 사면할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천하에 이것을 포고하여 백성들이 짐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라.
가을 7월 고구려(高句麗)의 왕 위궁(位宮)이 손권의 사자 호위(胡衛) 등을 참수하여 그들의 머리를 보냈고 유주(幽州)에 도착했다. 13일, 태백성이 헌원대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겨울 10월 10일 조예는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15일, 혜성이 대신성(大辰星) 부근에 출현하였는데, 16일 또 동방에 나타났다.
11월 ○일 혜성이 환자천기성(宦者天紀星) 부근을 범했다.
12월 24일 사도 진군이 사망했다. 조예는 행차했다가 26일, 허창궁에 도착했다.
경초 원년(237) 봄 정월 18일 산임현(山荏縣)으로부터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때 담당 관리가 상주하여 위나라는 조대가 다시 바뀌는 삼통설(三統說) 중에서 지통(地統)을 얻었으므로 상나라 조대에 의거하여 12월을 정월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역법을 개정하고 연호를 바꾸어 맹하(猛夏;初夏)를 4월이라 칭했다.17) 의복의 색은 황색을 숭상하여 사용하고 제사에 사용하는 희생에는 흰색 짐승을 사용하였으며, 군사가 행동할 때는 앞머리가 검은 백마를 타고 크고 붉은 기를 세웠으며,18) 조정의 회합에는 순백색의 큰 기를 세웠으며, 태화력(太和曆)을 바꾸어 경초력(景初曆)이라 했다. 춘하 추동 및 매달의 맹(孟;사계의 첫 번째 달)․중(仲;사계의 중간 달)․계(季;사계의 마지막 달)는 하(夏)왕조의 력(曆)과 달랐지만, 교사(郊祀;하늘 신에게 지내는 제사)․영기(迎氣;입춘․입하․입추․입동 날에 천자가 각각 동서남북의 교외에서 사계의 氣를 맞이하는 의식)․약(礿;여름 제사)․사(祠;봄제사)․증(蒸;겨울 제사)․상(嘗;가을 제사로 천자가 행함)․순수(巡狩;천자가 제후국을 시찰하는 것으로써, 3월에는 동쪽으로, 5월에는 남쪽, 8월에는 서쪽, 11월에는 북쪽으로 감)․수전(蒐田;수렵, 봄과 가을에 행함)․분지(分至;춘분․추분과 하지․동지)․계폐(啓閉;啓는 입춘․입하이고, 閉는 입추․입동이다), 연간 행사의 포고, 24절기가 모두 하왕조의 역법에 따랐다.
5월 2일 조예가 낙양궁으로 돌아왔으며, 22일에 대사면을 행했다.
6월 12일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3일, 상서령 진교(陳矯)를 사도로, 상서우박사 위진(衛臻)을 사공으로 삼았다. 11일, 위흥군(魏興郡)에서 위양현(魏陽縣)을, 석군(錫郡)에서 안부현(安富縣)․상용현(上庸縣)을 분할하여 상용군(上庸郡)이라고 했다. 석군을 없애고 석현을 위흥군에 귀속시켰다.19)
담당 관리가 상주했다.
----- 무황제는 혼란스런 세상을 다스려 바르게 하여 위태조가 되었으며, 음악에는 무시(武始)의 춤을 사용했습니다. 문황제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천명을 받아 위고조가 되었고, 음악에는 함희(咸熙)의 춤을 사용했습니다. 폐하는 제도를 만들어 태평스러움을 장려해 위열조(魏列祖)가 되었고, 음악에는 장무(章 )의 춤을 사용했습니다. 이 삼조의 제묘는 만세까지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네 선조의 제묘는 황제의 친속관계가 소원해진 이후에 무너져 주왕조가 후직(后稷)20)․문(文)․무(武) 삼조(三祖)를 제사지내는 제도와 똑같습니다.
가을 7월 2일 사도 진교가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대장 주연(朱然)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江夏郡)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胡質)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이전에 손권은 사자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통하여 요동을 공격하려고 했었다. 위나라측에서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여 여러 군대 및 선비․오환(烏丸)의 군사를 통솔하여 요동 남쪽 경계에 주둔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도장을 찍은 조칙으로 공손연을 불렀다. 공손연은 출병하여 반역을 하였으므로, 관구검은 진군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때마침 열흘간 비가 계속 내려 요수(遼水)가 많이 불어났으므로 조예는 관구검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했다. 오환의 선우 구루돈(寇婁敦)․요서의 오환도독(烏丸都督) 왕호류(王護留)등은 요동에 거주하였지만, 부족을 이끌고 관구검을 찾아와 귀순했다. 14일, 조서를 내려 요동 장수․군사․병마․서민들 중에서 공손연의 협박 때문에 항복하지 못한 자를 사면했다. 26일, 태백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공손연은 관구검이 돌아가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일컬었고, 모든 관직을 설치하였으며, 연호는 소한 원년(紹漢元年)이라고 했다.
조예는 청주․연주․유주․기주의 네 주에 명을 내려, 해선(海船)을 대규모로 만들도록 하였다.
9월 네 주의 백성들이 수재를 당하자, 시어사(侍御史)를 파견하여 순찰하도록 하고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과 재산을 잃은 사람에 대해서는 각기 경우에 따라 관의 창고를 열어 구제하도록 했다. 16일, 황후 모씨(毛氏)가 죽었다.
겨울 10월 13일 달이 화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19일, 도모후(悼毛后)를 민릉(愍陵)에 매장시켰다. 21일, 낙양 남쪽에 있는 위속산(委粟山)에다 단구(丹丘;동짓날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를 만들었다.
12월 19일 동짓날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24일, 양양군에서 임저현(臨沮縣)․의성현(宜城縣)․정양현(旍陽縣)․기현(邔縣)의 네 현을 분할하여 양양남부도위(襄陽南部都尉)를 설치하였다. 26일, 담당 관리가 문소황후(견씨)의 제묘를 세우고자 상주하였다. 양양군에서 약엽현(鄀葉縣)을 분할하여 의양군(義陽郡)에 귀속시켰다.
2년(238) 봄 정월 조칙을 내려 태위 사마선왕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요동을 공격했다.
2월 11일 태중대부 한기(韓曁)를 사도로 삼았다. 21일, 달이 심거성(心距星) 부근을 운행했고, 또 심(心;별자리 이름)의 중앙에 있는 대성(大星) 부근으로 운행했다.
여름 4월 9일 사도 한기가 죽었다. 11일, 패국에서 소(蕭)․상(相)․죽읍(竹邑)․부리(符離)․기(蘄)․질(銍)․용항(龍亢)․산상(山桑)․문(文)․홍(虹)의 십 현을 떼어내어 여음군(汝陰郡)을 만들었다. 송현(宋縣)과 진군(陳郡)의 고현(苦縣)을 모두 초군(譙郡)에 귀속시켰다. 패(沛)․서추(抒秋)․공구(公丘), 팽성군(彭城郡)의 풍국(豊國)․광척(廣戚)의 다섯 현을 합병하여 패왕국(沛王國)이라 했다. 19일, 대사면을 단행했다.
5월 15일 달이 심거성 부근을 운행했고, 또 중앙의 대성 부근을 운행했다.
6월 어양군(漁陽郡)에서 호노현(狐奴縣)을 떼어 다시 안락현(安樂縣)을 설치하였다.
가을 8월 요당( 當)의 강왕(羌王) 망중(芒中)과 주지(注 ) 등이 모반을 일으켰으므로 양주자사는 여러 군대의 병사를 통솔하여 토벌하고 왕예의 머리를 베었다. 24일, 혜성이 장숙(張宿)의 구역에 출현했다.
9월 10일 사마선왕이 양평(襄平)에서 공손연을 포위하여 요동군을 대파하고, 공손연의 머리를 수도로 전하여 해동(海東;요동)의 제군(諸郡)을 평정하였다.
겨울 11월 공손연을 토벌한 공적을 기록하고, 태위 사마선왕 이하의 장사들에게 봉토와 작위 등의 상을 주었는데, 각기 차등이 있었다. 이전에 조예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사마선왕을 파견해 공손연을 토벌하게 하고 병사 4만 명을 내주려고 했는데, 의론에 참여한 대신들은 모두 4만명을 보내는 것은 너무 많으며 싸움에 소요되는 비용을 제공해주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자, 조예는 이렇게 말했다.
“4천 리 멀리 적군을 토벌하러 가는데, 비록 뛰어난 계책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야 마땅하니 전쟁 비용을 계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는 4만명을 출정시켰다. 사마선왕이 요동에 도착할 무렵, 폭우가 계속 쏟아져 즉시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가운데에는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빨리 격파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려 사마선왕을 귀환시키도록 하자는 자가 있었으나, 조예는 말했다.
“사마선왕은 위기를 만나면 변화에 대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니, 공손연을 사로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조예의 예측과 같았다.
24일, 사공 위진을 사도로, 사예교림 최림(崔林)을 사공으로 삼았다.
윤달 달이 심(心)의 중앙 대성 부근을 운행했다.
12월 8일 조예는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병상에 있었다. 24일, 곽씨를 황후로 세웠다. 천하의 남자들에게 작위를 두 등급씩 주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에게 곡물을 하사했다. 연왕 조우(曹宇)를 대장군에 임명했지만, 27일에 파면시키고, 무위장군 조상으로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전에 청룡 3년, 수춘의 농민 아내가 스스로 하늘의 신에 의해 지상으로 내려와 등녀(登女;선녀)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하고, 위나라 왕실을 보호하고 사아가한 기운을 제거하고 만복을 바쳤다. 그녀는 병든 사람에게 물을 먹이고, 물로 환자의 상처 부위를 깨끗이 씻어 주었는데, 치유된 자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조예는 그녀를 위하여 오어전의 중앙에 관사를 짓고, 조서를 내려 그녀의 효험을 칭찬하고 대단히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조예는 병상에 있었으므로 그녀가 바친 물을 마셨으나 효능이 없자 그녀를 죽였다.
3년 봄 정월 1일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에서 돌아와 하내에 도착하였고, 조예는 역마(驛馬)를 이용하여 조서를 전하여 즉시 낙양으로 오도록 명령하였다. 사마선왕이 급히 도착한 후, 조예의 침실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조예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병세가 심하여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그대는 조상과 어린 자식을 보필해 주시오. 짐은 그대를 보았으니, 어떠한 유한도 없구려.”
사마선왕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그날 조예는 가복전(嘉福殿)에서 붕어했으며, 당시 나이가 서른여섯이었다.21) 27일, 고평릉(高平陵)에 안장시켰다.22)
*평하여 말한다. ----- 명제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에 임하여 행동하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지극한 기개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는 분열되었으나, 조예는 선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생각하거나, 왕업의 기틀을 다지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무제를 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관점으로서 헤아리면 이는 아마도 중대한 결점일 것인저!
첫댓글 고구려의 왕 위궁이라면... 이 시대가... 고구려 제 11대왕 동천왕인가요?
명제와 고구려 동천왕이 같은 년도에 황제와 왕의 직위에 오른것 같네요.^^;; 책을 살펴보니깐요...;
같은 시기 맞을겁니다... 관구검과 대결했던 왕이 또 바로 동천 왕이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