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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코스: 상담 주차장-안심사-정암사-문수골 갈림길-중담마을 갈림길-오서정-용못 갈림길
헬기장-쉰질바위 갈림길-성동마을 갈림길-공덕고개 갈림길-오서산(왕복)
☞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광천읍, 장곡면 / 청양군 청라면 / 보령시 청소면
광복절 아침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뜬금없이 자동차 가는대로 도착한 곳이
총남 홍성군 광천읍이다. 광천하면 생각나는게 새우젖 밖에 없는데 사실이지
난 젖갈을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라 관심이 없고, 김이 많이 난다는데 난 김도 그리 안 먹는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 중에 한 사람인 장사익 선생이 이 지역 출신이다.
발길 닿는대로 도착한 광천읍... 아침 9시경이라 배도 고프고 하여 광천역전 앞
허름한 식당에 도착하여 식사를 시키는데 곰팡이 냄새가 캐캐하여 비위가 상한다.
나올까 생각하다 아무데서나 한숟갈 먹지하고 해장국을 시켰는데 나온 밥이 백반이다.
이런 제기럴... 그러면서 주인 아줌마 왈 아침에는 백반이 좋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변명을 늘어 놓는데, 듣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음식도 입에 맞질않아 밥을 물말아 먹고 나와
인근 구멍가계에서 쥬스와 두유 하나를 사고 그옆 제과점에서 빵 2개를 산 다음에
오서산을 향해서 차량을 가지고 간다.
광천읍 담산리 상담마을
오서산 오름길은 여려곳이지만 광천에서 오르는 등산로 중에 가장 알려진 곳이
담산리 상담마을에서 정암사로 해서 올라가는 곳이 비교적 편한 코스라 이곳으로 올라간다.
이곳은 넓은 주차장에 차량이 서너대 밖에 없는데 그 중에 등산객 차량은 내 차 뿐이다
오서산 도로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오가면서 2.8km를 1시간 정도
걷는데 산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벌써 옷은 다 젖어 버리고 얼굴은 익는 느낌이다
정암사 올라가는 도로에서 바라본 오서산의 모습
정암사 입구
정암사 아래에 도착하자 시원한 그늘에 의자가 있고 계곡물이 흐른다.
이곳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수건에 물을 적신 다음에 몸속에 넣고 정암사로 향한다
정암사 (靜菴寺)극락존 삼존불
충남 홍성군 광천면 담산리 오서산북쪽 사면(斜面)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정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로 전통사찰 68호이다.
오서산 아래의 주차장에서 약 2.5㎞ 정도 산길을 오르면 정암사에 이르게 되는데,
전형적 산지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소규모 도량이다
본전인 극락전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탑. 정암사는 백제 성왕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그 근거를 찾기 어렵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결성현(結城縣) 편에 "정암사(正菴寺)는
오서산(烏栖山)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림잡아 조선조 초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찰로
짐작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 산신각, 적묵당, 심검당, 범종루 등이 있으나
거의가 근래에 신축되었거나 증축한 건물들이다.
이곳 정암사에서 시작되는 오서산 등로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해놨다.
말 그대로 일반적인 산행하기는 더 없이 좋은 곳이지만 나처럼 목적산행을
위해 기맥, 지맥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재미없는곳 중이기도 한 곳이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시작되는 데크목 계단이 한없이 나오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발바닥이 바늘로 찌르는듯이 아파오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오늘이야 목적산행도 아니고 시간제약도 받지
않으니 편하긴 하다. 할 수없이 베낭을 벗고 신발과 양말까지 벗은 다음에
발끝에 침으로 피를 좀 뽑고 아스피린 50ml 2알을 먹고 다리를 맛사지
한 다음에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데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다
아차산 갈림길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니 다시 안부 능선이 나오고 우측으로 아차산 가는 길이
나오는데 또다시 발바닥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파 오는데 미칠지경이다.
하는 수 없이 베낭을 내려놓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휴식을 취한다.
7부 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홍성땅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전망이 시작되는데 저 멀리 천수만에서 시작되어
안면도와 홍성, 보령을 에워싸고 있는 천수만이 공천 내륙 깊숙히 들어와 있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앉은뱅이 소나무들이 즐비한 등로를 걷는데 안부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힘든 범여를 응원한다.
다시 베낭을 내려놓고 웃통을 벗은 다음에 휴식을 취한다.
오서산 등로는 억새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지금은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바위에 오르니 보령시 청소면이 한눈에 보이고 성연저수지(용못)가 한 눈에 들어온다.
용못의 유래는 단적골 동쪽에 성골 서북쪽에 맑은 못이 있는데 이 못을 용못이라고 부른다.
층암절벽 아래 맑고 깨끗한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인데, 옛날에는
이 못 속에 용이 살아서 수도를 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데크목 계단에서 바라본 오서산 억새 군락지
이곳이 오서산 8부 능선쯤 되는 곳이다. 우측에 펼쳐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일대가 일대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보령 시가지와 대천 앞바다가 보이고 용못이라 물리는 성연저수지가 뚜렸하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푸른 들녘은 우리네 마음까지도 풍요롭게 채워준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라본 오서산의 스카이 라인은 생각보다도 밋밋하고 각종 인공물을
너무도 많이 설치하여 보기가 좋질않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둬야 멋진 법인데
중담마을 갈림길
오서산 정상가는 스카이라인
오서정 정자가 서있는 자리에 정자는 철거되고 인공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둬야 정말 멋진데 인간의 오만한 탐욕이 자연을 망쳐 버렸다.
이곳 오서산은 전국 5대 억새 군락지 중에 하나이고 인기명산 100대 순위중에 77위에
해당될만큼 멋진 산이라고 한다. 10월~11월에 등산객이 집중된다고 하는데 그때 등산객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 홍성군에서 이런 시설을 설치한 모양인데 스카이 라인을 망쳐버렸다.
마치 동화책에서 나오는 ‘황금닭’이야기 같은 내용처럼...
매일 닭이 황금알을 하나씩 나으니까... 닭은 잡아 한번에 알을 다 챙기려고 하다가 하나도 못 챙긴것처럼...
그리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홍성군 관게자들은 제발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시길...
생뚱맞은 광천에서 설치한 오서산 표지석
지도상에 오서정으로 되어있는 곳에 정자는 온데간데 없고 광천 청년회의소(JCI)에서 새운
생뚱맞은 표시석이 산꾼을 맞이하건만 이 코스를 처음 온 범여는 헷갈리기만 하다.
실제 오서산 정상은 이곳에서 1.3km를 더 가야 하건만 무슨 근거로 이곳에 설치한 이유를 모르겠다.
정상 한곳에 지자체의 경쟁으로 2개의 정상석을 세운 경우는 비일비재하나 분명 이곳은 오서산
정상이 아닌 곳임에도 불구하고 보령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곳에 세웠나...
웃음거리 되지말고 얼른 철거하시요... 등산객들을 유치원생쯤으로 보이시나.
생뚱맞은 오서산 표시석 뒷면
충남에서 계룡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인 오서산은 홍성군에서는 '광천 오서산',
보령시에서는 '보령 오서산'이라고 제각기 자기네 고을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홍성군 광천읍과 보령군 청소면의 경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데, 산 정상의 능선에도
양쪽에서 제각기 만들어 세워 놓은 정상 표지가 따로 서있어서 보는 이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쉰질바위 갈림길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쉰질바위가 나오고 복신굴이 나오며 행정구역상으론
홍성군 장곡면 광성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오서산성이 있었던 터가 나오는데
백제가 신라에 멸망한 후 백제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전초기지 역할을 한 곳이란다.
성터에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기대 복신과 도침의 일대기에 대해 생각한다.
왕족과 불교지도자였던 그들은 왕조 교체기에 구 왕조와의 의리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왕족들에게 새 왕조는 한편으로 기회였다.
통일신라에 협조만 하면 지방 토족으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백제의 정통을 내세우며 산성을 쌓고 피로 맞섰다.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끝까지 왕조와 운명을 함께했다.
이 또한 굽힘을 모르는 까칠한 오서산의 산세 탓인가.
성동마을 갈림길
공덕고개 갈림길
오서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서산(烏捿山:791m)
충남 홍성군 광천읍과 장곡면, 그리고 보령시 청소면과 청양군 청라면에
걸쳐있는 오서산은‘평지돌출형산’으로서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위용과 기상이 빼어나고 신령스런 기운을 지닌 호서제일의영산(靈山)이다. .
『삼국사기』권32에 오서악(烏西岳)이라고 기록되어있고, 당시에는 명산대천을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나누어 국가차원의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백제 때는 오산(烏山)으로 불리며 대사 격에 해당되었고 통일신라에 와서는 중사의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중국지리서인 『한원』의 백제전에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오산(烏山:오서산)과
계람산(鷄藍山:계룡산)을 소개하고 있으며 정암사(淨巖寺) 중수기에는
“금강산,구월산,묘향산에 버금가는 호서지방 최고의 명산으로 수륙(水陸)의 기운이
크게 맞닿아 중천(中天)에 우뚝 여유 있게솟아있다”고 적고 있다.
.
이처럼 오산 또는 오서악으로 불리며 민족의 영산으로서 태양숭배사상과 산악신앙의
중심이 되어왔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오서산(烏栖[棲]山)으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산”으로 비하되면서 영산의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
오서산이 단군조선에서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동안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받들어 진 것은 풍수지리적으로는 물론 그 정기와 위용이
“태양 안에는 세발달린 까마귀인 삼족오가 살고, 신의 사자로서 천상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우리민족의 태양숭배사상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오서산은 영산으로서 민족의 정기를 이어오고 있으나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까마귀 산”으로 잘못 알려졌다. 늦게나마 광천농협과 정암사와 뜻있는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오서산 정기회복운동”에 나서고 있다.
청양군에서 세운 표시석
보령과 홍성에 비해 청양은 郡勢가 약한 탓인지 표시석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오서산 정상에서 시선을 먼바다로 던지면 청정바다 수면 위로 안면도, 원산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서산의 거침없는 조망은 바다 쪽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옛날 해도(海圖)가 부실했던 시기에
오서산은 주변을 오가는 선박들의 등대구실을 했다
홍성군은 옛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한 군이다.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로 995년에 도단련사를 두고, 1012년 지주사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1358년에 목으로 승격하여 1368년 지주사를 두었다가, 1371년 다시 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었고, 1914년 옛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되었다.
결성은 본래 백제의 결기현인데 신라 때 결성으로 고쳐 서림군의 영현이 되고,
고려시대인 1018년 운주에 이속되었다가 1172년에 감무를 두었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 에는 진성을 두고 유민을 정착시켰다.
조선시대 1413년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결성군 및 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하고, 1942년 광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서산군 고북면 대사리와 결성면 와리를 갈산면에,
홍동면 월림·대평·운용리를 광천읍에, 결성면 중리를 서부면에, 홍북면 내법리, 홍동면 구룡리를
홍성읍에 각각 편입하여 현재와 같이 홍성·광천읍, 갈산·결성·구항·금마·서부·은하·장곡·홍동·홍북 등
2개읍 9개면으로 개편되었다.
홍성은 역사적 인물이 참으로 많은 고장이라 일일이 다 열거하긴 힘들지만
유난히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 많은 지역이다.
☞ 백야 (白冶)김좌진 장군(金佐鎭:1889~1930) 약관 31세에 만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서백리아에 출전중이던 일본의 가납연대 (嘉納聯隊) 3,000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 을 전상자로 만든 7일 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룬 1920년 10월 21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 이다.
☞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사가 이 지역 출신이며 조선조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이 지역이 외가인 홍주 노은골에서 출생했다.
☞ 고려말 명장이자 재상이었으며 홍건적과 왜구를 대파하여 흔들리는 고려말 정권 안정에
일조를 하였으며 명나라가 철령과 이서, 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출정하였으나 이 성계가 배신하여 위화도회군을 하여 고려를 멸망시킬 때
끝까지 충절을 지킨 고려 마지막 충신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이 홍주 적동
(현재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출신이다
광천읍의 모습
오서산을 말하면서 광천을 빼놓을 수 없다. 광천은 우리나라 새우젓 집산지 중의 하나.
조선시대 말엽부터 옹암포(독배마을)에서 젓갈시장이 형성되어 1970년대에는 하루
100여 척의 어선들이 들어올 정도로 서해 물류의 요충지였다.
광천 새우젓, 광천 맛김, 남당항 대하. 광천에는 ‘오서삼미(三味)’가 있다.
독배마을 토굴에서 나오는 새우젓은 빛과 향에서 전국 최고로 친다.
21번 국도변에 자리 잡은 독배마을은 새우젓 숙성 토굴로 유명하다.
옛 폐광 터를 개조한 이 굴은 총 30여 개에 이른다.
이 천혜의 저장시설 덕에 광천은 근방에서 남부럽지 않은 풍요를 누렸다.
오죽하면 당시에 ‘광천 독배로 시집 못 간 내 팔자’란 유행가가 있을 정도였다.
광천읍은 젓갈의 마을이라 할 정도로 주변이 온통 젓갈 상가들이다.
광천토굴새우젓 재래시장이 있는가 하면 토굴 새우젓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도 있다.
이 곳에서 판매하는 새우젓은 토굴에서 숙성되어 나온 것들인데 맛과 향이 다른지방보다 월등하다.
광천에서 새우젓 장터가 아루어지기는 고려때 물물교환으로 매매가 형성되었던 때 부터라고 한다.
이때 광천에는 두 개의 장이 이루어졌는데
그 하나가 옹암포구의 새우젓 장이었는데
번창기에는 조선시대말 서해안의 10여개 섬에서 광천장을 보기 위하여
선박들이 새우를 잡아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새우젓 시장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었다.
그 후 1960 년 윤명원씨가 새우젓이 숙성기간 썩어버리거나 맛이 달라지는 것이 큰 고민거리여서,
굴속의 온도가 일정하다는 것에 착안해 산중턱에 토굴을 파서 새우젓을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영상 14 ℃의 일정한 온도에서 약 3개월간 숙성시켜 맛이 들게한 후 팔기 시작하여
그 맛과 향이 타 지방 새우젓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소문이나기 시작하여
광천하면 토굴새우젓으로 유명해져 지금은 김장철이 되면 전국에서 상인, 소비자가 모여 성시를 이루고 있다.
광천토굴 새우젓 재래시장은 광천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고,
또한 토굴 새우젓 상 가는 토굴 가까이 도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광천토굴은
마을뒤편 야산에 암반을 꼬불꼬불 파들어간 토굴이다.
폭과 높이가 각각 2m 정도, 200여m의 20여개의 토굴속에 수백개의 새우젓을 담은 드럼통이있다.
토굴안을 구경할 수도 있고 토굴안에서 새우젓을 구입할 수 있다.
2,500t의 새우젓이 광천토굴에서 만들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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