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월평’ (<월간문학> 2012, 10월호)
문학 성폭력
정 성 수(丁 成 秀)
이 지상에서 성폭력은 사람과 사람, 그 중에서도 남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다. 문화에서도 예술에서도 문학에서도 성폭력은 너무나도 자주 발생한다. 크고 작은 출세를 위해, 혹은 크고 작은 명예를 위해 어제도 오늘도 사방에서 문학 성폭력, 시의 성폭력은 씩씩하게 무수히 자행되고 있는 중이다.
시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없이, 시와의 오랜 사랑도 없이, 쌓이고 쌓인 상호 신뢰도 없이 그저 동물적인, 아니 세속적인 성욕(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저지르는 시에 대한 성폭력!
어느 날 그렇게 사정없이 성폭력을 감행(?)했으면 적어도 상대방을 끝끝내 사랑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성폭력 피해 당사자는 거의 내동댕이치다시피한 채 이 모임 저 모임에서 감투같지도 않은 감투나 쓰려 하고, 상같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문학상이나 타려고 이리저리 로비(?)를 하러 다니고, 자신의 처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하게도 문단에서 대우나 받으려고 하는 이들은 이 가을날 저 수줍은 단풍잎처럼 부끄러움이라도 탔으면 좋겠다.
자신이 시인이라면 시인답게 우선 먼저 시에 대해 뜨거운 열정부터 쏟아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감투를 쓰려고 하거나 문학상을 바라거나 대우를 받으려고 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이 땅의 시인들이여,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가을날, 자신의 영혼과 온갖 사물들과의 황홀한 교감을 위해 지금 이 순간 뜨거운 피를 흘리시라! 흘리고 또 흘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시퍼런 영혼의 피를 흘리시라!
그러면 그때 비로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시인’으로 탄생하게 되리라…! 우리는 그 피 흘리는 시인에게 눈부신 시인의 관을 씌워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월간문학』9월호(2012)에 발표된 시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두 번째는 한 사람의 평자로서 읽었다.
그럼 우선 성찬경 시인의 시「황산(黃山)」부터 감상해 보기로 하자.
황산! 황산! 황산!/중국 황산에 가기도 전에/나는 헤아릴 수도 없이 여러 번 황산을 마음 속에 그려봤다//이 친교로/황산은 내 마음 한복판에 마치 뚜렷한 기억처럼/형언하기 어려 운 명산으로 자리잡았다/.........../ 현실의 황산은/미리 그려본 모든 환상(幻想)의 황산을/다 포용하고도 남았다//이윽고 황산에 어둠이 내린다/소리없이 황산이 어둠 속에/장엄하게 장 엄하게 가라앉는다//황산이여, 작별이다/아마 내가 그대를/다시 찾는 날은 내 생전 오지 않을 것이다//앞으로 황산은 내 안에서/은은한 여운 닮은 비경으로 남아/나의 미(美)의 이 비의(秘儀)에 얼마나 큰 구실을 할 것인가!
- 성찬경「황산(黃山)」일부
원로시인의 건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동안 현대 한국시단의 병폐 중의 하나가 일종의 조로증이었다.
시는 젊었을 때 쓰고 나이 들어서는 작품은 거의 쓰지 못하면서 권위로만 대우받던 시절은 갔다. 시인은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좋은 시를 써야 진정한 의미의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프로의 프로다운 프로정신이 아니겠는가.
중국 ‘황산’을 예찬한 이 시는 단순한 기행시가 아니다. ‘황산’에서 얻은 이미지는 성찬경 시인의 시적 ‘미(美)의 비의(秘儀)’의 하나의 뿌리 역할을 하게 될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한 시인에게 있어서 대단한 행운에 속하는 일이다.
다음엔 황봉학 시인의 시「불륜」을 보기로 하자.
여자를 훔친 적 있네/담을 넘어 들어가 여자를 훔쳤네/그 여자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빨간 속옷을 입고 있었네/여자를 잡은 내 손은 떨렸고/샅이 벌어진 여자는/빨간 속살이 터져 나왔네/혀를 디밀고 속살을 핥는 나는 전율했고/말초신경이 뻣뻣하게 굳어 왔네//여 드름이 송송 박힌 그 여자/매끄럽고 감촉 좋던 그 여자//주인 몰래 훔친/그 여자//내 생의 첫 불륜이었네.
*여자: 여주 열매의 또 다른 이름.
- 황봉학「불륜」전문
이 시는 ‘여주 열매(여자)’를 의인화시킨 작품이다. ‘여주’는 ‘여지’라고도 부르는 열대 아시아 원산의 관상식물로서 박과의 1년생 덩굴풀이다.
‘여주’에 대한 철저한(?) 의인화는 이 시를 시답게 함과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흥미롭게 읽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시라고 해서 흥미롭게 읽히면 안 된다는 법이 없다.
시가 ‘서사시’에서 서사적 요소가 ‘소설’로 떨어져나간 뒤, 서정적 요소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한 뒤 서정의 극치인 ‘감동’이나 ‘신선한 충격’이 밑받침이 되어주지 못하면 시는 자칫 무미건조해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시도 어떠한 내용이나 형태이든 간에 가능하다면 ‘읽히는 시’가 더욱 좋다는 뜻이다. 만약 단 한 명의 독자조차 읽기를 거부하는 시라면 아무리 대단한(?) 시라 할지라도 그런 시가 대체 이 지상에서 무슨 존재 가치가 있을 것인가.
다음엔 최모경 시인의 시「개나리 꽃가지 흐드러지고」를 읽어보도록 하자.
흐드러진다는 것은/순간을 의미하지/몸을 의미하지/낭창 벙그러진 꽃을 의미하지/내 청춘 을 의미하지/한생에 감추었던 것이 송알송알/피워 내는 것이지//이 시절이 아팠지 않았던 가/이때가 슬펐지 않았으랴/이제는 좋아라/아주 좋아라//노랗게 탄 당신의 입술에/활짝 꽃 이 피는 것을/천안 삼거리면 어떻고/능수야 버들이면 어떠니/바람아 솔솔 흔들어주어라/오 늘이 좋지 않으냐/오늘이 좋지 않으냐.
- 최모경「개나리 꽃가지 흐드러지고」전문
참으로 유쾌한 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삶이나 시를 다루는 솜씨가 그야말로 달관이고 능수능란하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객관적 상관물인 대상을 품안에 안고 자유자재로 즐기고 있다. 이런 것은 그 누구에게나 하루아침에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슬픔과 고독과 자아와의 투쟁과 시와의 피가 튀는 전면전 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그 어떤 것이다. 나는 이 당당한 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한 슬픔과 쓰라린 눈물과 뜨거운 피를 읽는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시인들이여, 독자를 너무 쉽게 보지 마시라. 말은 하지 않아도 독자는 어느 시가 좋고 어느 시가 좋지 않은지, 어느 시가 시다운 시인지 아닌지, 어느 시가 독자를 가볍게 보고 쓴 시인지 그렇지 않은 시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가을에 이 땅의 위대한 시인들이시여, 더욱 멋지게 힘을 내시라! 그것은 시인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자 고독하고 어려운 생애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최선의 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 2012/9월 초
설악산 백담사 만해마을 문인집필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