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명사진 (2015. 06. 23.)
증명사진을 제출해야 할 일이 더러 있다. 지원서를 작성할 때, 어딘가 회원 가입을 할 때, 또는 자격증이나 신분증 등을 만들 때 증명사진의 제출을 요구받는다. 증명사진은 말 그대로 ‘내가 바로 000 맞다’ 라는 의미로 자신을 확인할 대 사용된다. 크기에 따라 명함판, 반명함판, 여권용 등으로 불리지만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제작된 사진을 통칭해 증명사진이라고 한다.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흔하기 짝이 없다. 반드시 사진관을 방문해 찍어야 했던 증명사진이 이제는 언제나 아무 곳에서나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됐다. 촬영을 하고 며칠을 기다려서야 얻을 수 있던 사진을 이제는 즉석에서 가질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수백 장 수천 장을 인화하는 일도 가능해졌고,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인들과 사진을 공유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아날로그 시대에 증명사진 한 번 찍기가 무척 어려웠다. 벼르고 별러 시간을 내 사진관을 방문하고 며칠을 기다려야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관에서 주는 사진은 종이사진 그저 몇 장이다. 몇 장 더 가지려면 웃돈을 얹어주고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며칠을 기다린 끝에 설렘을 안고 사진관을 찾았는데 인화된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낙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다시 찍으려면 돈을 다시 지불해야 하고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아날로그 사진은 찍힌 그대로를 인화할 뿐이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각진 얼굴을 갸름하게 만들 수도 있고, 검붉은 피부를 화사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기미나 주근깨 정도를 없애는 일은 애교 수준이다. 컴퓨터에서 포토샵이라는 사진 수정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부모나 형제도 몰라볼 만큼 전혀 다른 얼굴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사진만 보고 상대를 기억하고 있다가 실물을 보고 놀라는 일도 적지 않다.
최근의 디지털 사진을 포함해 지금껏 꽤 여러 번 증명사진을 찍었다. 어려서는 새로운 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증명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성장해서도 몇 년 주기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인화된 사진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흡족한 경우도 있다. 사진이 만족스러우면 많이 인화해서 오래도록 사용한다. 변한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새로운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만족스럽지 못하면 다소 오래 전의 것이라도 과거에 찍은 만족스러운 사진을 계속 사용하게 된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에는 사진관을 방문하면 그저 한 장이나 두 장을 찍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매무새를 고치고 증명사진을 찍는 자리에 앉으면 사진사가 고정된 카메라를 들이대고 뭔지는 잘 모르지만 카메라에 장착된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는 플래시를 들고 “하나 둘 셋”소리를 내며 촬영을 했다. 최근의 사진관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테리어 배경도 과거처럼 경직돼 있지 않고 다채롭다. 의자에 앉으면 사진사가 일반 휴대용 카메라를 들고 각도에 따라 연속버튼 기능을 활용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댄다. 그리고는 즉석에서 많은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게 해준다.
얼마 전 책의 출간을 앞두고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찾았다. 몇 벌의 옷을 가지고 가서 한 시간 정도 동안 사진사가 연출하는 대로 포즈를 취해가며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20여 장 남짓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를 수 있었다. 선택한 사진은 곧바로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됐고, 휴대전화로도 옮겨졌다. 그래서 내가 참여하고 있는 여러 SNS에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사진을 사용할 일은 의외로 많다. 하여 파일로 저장해둔 상태로 인터넷 상에도 보관을 했고, 칩을 휴대하고 다닌다.
증명사진이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지난해 작고하신 나의 스승님 이야기이다. 대학 은사님이신 학산 조종업 교수님은 대한민국 고전문학계의 큰 별이셨다. 무척 엄한 성격이셔서 학생들 모두가 선생님을 무서워했다. 그러나 가장 존경했고,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엄격하시기도 했지만 개별적으로 찾아뵈면 너무도 인자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우리 제자들은 선생님의 인품을 존경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제자들은 많이 혼나면서도 선생님을 따랐다. 스승의 표상이셨다.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 선생님은 50대 후반이셨다. 내가 휴학하고 군 생활을 하던 중 회갑을 맞으셨으니 내가 처음 뵀을 때가 58~59세쯤일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에서 각종 행사를 하며 팸플릿을 만들 때나 학술지를 발행할 때, 기타 인쇄물을 발행할 때 선생님은 늘 같은 사진을 쓰셨다.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그 증명사진은 아마도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쯤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군 생활 포함해 내가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무려 7년 간 선생님은 고집스럽게 그 사진을 사용하셨다.
노년의 선생님은 노화 탈모로 머리카락 숱이 많지 않으셨다. 안경은 가느다란 금테를 주로 쓰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오래도록 사용하신 그 증명사진 속의 얼굴은 머리카락 숱이 많아 가르마 선이 선명했다. 안경테도 검정색 뿔테였다. 선생님께서는 찍은 지 20년~30년은 됐을 사진을 줄곧 사용하셨다. 그 사진을 이후 언제까지 사용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추측컨대 내가 졸업하고 나서도 몇 년은 더 사용하셨을 것으로 본다.
사진에 담긴 이미지가 너무도 깊이 각인돼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 사진이 연상된다. 한 장의 증명사진으로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꽤나 오래도록 유지하신 나의 스승님! 선생님은 퇴임 후 너무도 가혹한 일을 많이 당하셨다. 그래서 노년을 너무도 혹독하게 보내셨다. 일일이 열거는 하지 않겠지만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을 노년 동안 여러 차례 겪으셨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노년을 보내시다가 지난여름 쓸쓸히 세상을 뒤로 하셨다.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과의 이별을 슬퍼했다. 나도 친인척이 아닌 분의 부고를 받고 펑펑 울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나의 은사님은 그렇게 가셨다. 졸업한 후 생사도 확인되지 않던 많은 동문들 수십 명이 조문을 위해 상가에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선생님의 생전에 꼿꼿하셨던 성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대학 1, 2학년 때 호되게 꾸지람을 당했던 일들을 회고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고 하나같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지난해 이맘때보다 조금 늦은 한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자정리 이자정회(會者定離 離者定會)’라 했다. 누구든 세상 사람은 한 번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게 되고 헤어진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다. 선생님을 다시는 뵐 수 없게 됐다. 전형적인 선비 모습으로 도도하게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 떠나신 나의 선생님! 이제는 앨범 속에 간직된 몇 장의 스냅사진 속에서만 선생님을 뵐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앨범 속 스냅사진이 아닌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아내신 그 증명사진이 더 강한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몇몇 인쇄물에는 선생님이 그토록 오래 사용하시던 젊은 시절의 증명사진이 담겨있다. 사실 나는 선생님께서 그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는 뵌 적도 없으려니와 알지도 못하는 분이셨다. 그러나 내 기억에는 그 사진이 깊이 각인돼 있다. 오늘은 서재 곳곳에 보관돼 있는 대학시절 만들었던 각종 인쇄물을 꺼내봐야겠다. 그리고는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또는 그보다 젊어 보이는 선생님의 사진을 찾아봐야겠다. 1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가 소주 한 잔 부어드리고 와야겠다. 그리운 나의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