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커지니 기분이 나쁩니다.’
말은 불자라면서 절에 와서 시주 한 푼 하지 않은 동네 한 년석이 투덜댄다. 절의 광고판도 뽑아서 하천에 쳐박는다.
‘스님은 산중에만 있어야지 시내에 있는 스님은 스님이 아닙니다.’
어지간히 불교를 위하는 척 하지만 포교 한 명 한 적이 없는 무식꾼이 개똥 철학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비록, 지금 시골 절이 공양주가 없는 곳이 많지만, 그것은 잘된 일이라고 하다가 돌연, 불교가 망하려나 보다 하고 헛소리를 해댄다.
요즘, 승속 간에 명색이 불자라고 하는 인간들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한다. 대중선방이나 무문관을 현실 도피처쯤으로 생각하는 무뇌한(無腦漢)도 많다. 뇌가 없다.
선방은 안주하기 위해 있는 처소가 아니라, 대승으로 나아가려는 또 다른 몸부림으로 더욱 강한 내공을 쌓는 수련도장이라고 봐야 한다. 불교인들이 소승과 수행 자체를 혼돈하는 수가 많고, 은연중에 대승의 번거로움보다 소승의 단촐함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가 쇠퇴의 길로 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법화경 신해품에 우리 불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내놓고 있음을 살펴야 한다. 성문제자들은 소승의 열반에 안주하여 자신만의 편함만을 추구하며 거기에 안주한다. 그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귀찮다며 자기 일 아니라고 치부해버린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법화경 한글 해석 원문이다.
“세존께서 옛적에 법을 설하실 때 저희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몸이 피곤하고 게을러서 단지, 공(空)하고 모양이 없고(無相), 지을 것이 없다는(無作) 것만 생각하였는지 보살의 법(法)인, 신통에 즐거워하는 것과 부처님 국토를 깨끗이 하는 것과 중생을 성취시키는 것에는 기뻐하거나 즐거운 마음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하여는 한 생각도 좋아하거나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습니다.”
성문제자의 때늦은 심경고백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잘못됨을 자각하고 자기 본질의 거룩함을 깨달았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하다. 현재적 자각이 중요하다. 그 자각은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불성을 인식하는 일이며, 성불(成佛)로 가는 근본바탕이 된다. 이러한 불자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다.
한편, 대승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공익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에 있다. 소승은 개인의 가치에만 집중하지만 대승은 그렇지 않다. 불교가 대승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이미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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