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다리
무악재를 지나 통일로를 달리다보니 어느새 임진각에 닿았다. 매번 이곳에 오면 더 갈 수 없는 끄트머리까지 와 버린 듯한 서운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다리를 경계로 북쪽은 미군이 관할하는 통제구역이며 판문점을 가려면 이곳을 통과한다. 첫 검문소에 도착하자 카투사 장교 한 명이 승차했다.
두 달 전부터 준비해 온 판문점 견학이다. 신원조회가 끝나고 난 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부녀회에서 알려드립니다. 판문점 견학이 1월 10일로 결정되었사오니 복장을 단정히 하고 10시까지 아파트 연못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안내방송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국 부대 표지판 주변에 미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유독 희고 애 띠어 보이는 미국 병사가 영내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넣고 있었다. 왠지 반가워 손을 들어 웃어 보였더니 그 병사도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차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추었다. 우린 브리핑을 듣기 위해 내렸다.
6. 25 당시 참전국들의 국기들이 그때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듯 찌푸린 날씨를 배경으로 우중충하게 내리뜨려져 있었다. 우린 건물 안에 들어가 슬라이드를 통한 판문점 실정과 주의사항을 들었다. 카투사 부대의 병사가 시키는 대로 왼쪽 가슴에 게스트 (Guest) 배지를 달고 부대 전용 버스에 올랐다.
비무장 지대에 들어서자 길 양쪽에 대성동 마을 사람들이 경작한다는 평야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서로 매매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풍요로움과 평화스러움은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을 지키는 이들의 당연한 몫이었다고 생각됐다.
자유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지뢰가 묻혀있다는 스산한 갈대밭이 보였고 야산엔 군데군데 나무들이 베어진 채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었다.
휴전 후 많은 포로들이 오가고도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다는데 의아심이 날 정도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작고 허술하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심한 부상으로 동료들의 어깨에 의지하여 이 다리를 건넜을 포로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내 머리를 스쳤다. 어떤 다리에는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둘러 싸여 있기도 했다.
우린 자유의 집 앞에 내렸다. 누런 군복에 빨간 계급장을 붙인 북한 경비원들이 눈에 띄었다.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쪽은 미군들이 촘촘히 서서 경비태세를 취해 우리의 안전을 최대한으로 지켜주었다. 그들이 고맙고 든든하기는 했지만, 우리 땅을 그들에게 맡겨야 하는 서글픔에 콧등이 찡했다.
북한 경비원들은 재빨리 망원경을 창 너머로 들이댔다. 7-8평되는 건물 안에 초록색 융단과 유리판이 깔린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으나, 크고 중대한 회담을 하는 장소치고는 초라했다.
테이블 위엔 2쌍씩 붙은 마이크가 양쪽을 향해 2개씩 나지막하게 놓여 있었다. 마이크 양쪽에 연결된 전선으로 회의장 안에서는 남북의 경계를 표시한다고 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도 금이 그어진 것을 보니 아이들의 땅 뺏기 놀이가 생각나 호기심에 테이블 건너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무심코 창밖을 보는 순간 바로 앞에서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북한 경비원과 눈이 마주쳤다. 한 밤중에 도둑질하다 들킨 강도의 살기어린 눈을 보듯, 내 동공은 초고속으로 확대되어 멈추어 버렸다. 젊은 북한 경비원은 가느스름한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누이를 대하듯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내 얼굴은 마비가 온 듯 웃을 수가 없었다. 설령 놀라지 않았다 해도 ‘북한 경비원을 보고 손을 흔들거나 웃어서는 안 됩니다.’ 하던 주의사항을 명심했기 때문에 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빨리 빨리 나오세요.” 안내 카투사의 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최면에서 풀려난 듯 걸어 나왔다.
자유의 집에 오르니 바로 건너편에 북한의 판문각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망원경과 비디오카메라 등을 총동원하여 들이댔다. 복장을 단정히 하라던 부녀회 안내방송의 또 다른 의미를 실감하였다.
미군 장교가 탄 지프차의 호위를 받으며 살얼음을 밟듯 조심조심 북한 경비초소 앞을 지나 우리 초소에 닿았다. 조금 전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40대 후반쯤 되는 장교가 웃으며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 때 난 엉뚱하게 도끼만행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이곳에서 북쪽을 쳐다보니 숲 사이로 신작로가 나있고, 북한 경비 초소로 승용차들이 오가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다.
휴전선의 노란 경계 표지판이 눈에 띄었지만, 누가 이곳을 분단되었다고 하겠는가. 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 것만 왠지 눈에 물기가 미적미적 괴었다.
미군들은 우리 버스가 지나 갈 때마다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 쪽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이념이 무엇이기에 내 동족보다 너희들이 가깝단 말인가. 난 물끄러미 창밖의 미군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막냇동생 또래의 북한 경비원이 송충이 보다 무섭고 싫었던 것은 몇 십 년 동안 주입된 반공교육 탓일까. 그들의 미소 뒤에 공산당의 허구성이 잠재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나는 잘못일까. 동족의 미소에 외면해야 하는 너와 내가 무엇을 주고받으며 교역한단 말인가.
‘루우 앙드레 살로메’의 볼가강이 내 가슴속에서 맴돌았다.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난 너를 볼 수 있다.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내게 넌 머물러 있다.
(1988년 봄)
첫댓글 귀한 경험을 생생하게 나눠주셨네요. "...왠지 문에 물기기 미적미적 괴었다."
김진아 선생님,
바쁘신데 제 글을 읽으셨네요.
글을 오래 전부터 쓰다보니 오래 된(?) 글은 안 보신 분들이 많아 골라서 실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