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며칠 전에 우연히 보게 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즐겨보던 드라마가 아니라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앞뒤의 정황만으로도 줄거리는 대충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회사와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이미 준비한 이혼서류를 내미는 아내의 모습이 화면에 담겨있었다. 자녀들의 학업에도 무심한 남편이 직장동료와 은밀한 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는 아내. 무표정한 아내의 얼굴과 말투 속에는 이미 체념과 무수한 상념을 거쳐 지칠 대로 지쳐있는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가정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무뚝뚝한 남편이 이혼서류를 내밀어놓고 돌아서는 아내의 등 뒤로 나지막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자 예상외의 반응이 아내에게서 나왔다. 미묘하게 떨리는 아내의 감정 연기는 일품이었다. 비록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아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 하나로 파경을 치닫던 한 가정이 화해하게 되고 다시 행복을 찾게 되는 뻔한 결말로 가는 드라마였지만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유독 남다르게 반응했다.
사실 성을 붙여 이름을 부를 땐 조직사회나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통용되는 딱딱함이 있다. 성을 빼고 이름을 부르고 듣는다는 것은 ‘우린 친밀한 관계’라는 설정이 섞여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누구의 아내와 남편, 누구의 아빠와 엄마, 누구의 아들과 딸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빼고 이름이 불려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그나마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곧잘 영어 이름이 불리기는 하나, 나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상대의 진심 어린 마음이 담긴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어본 지 꽤 된 것 같다. 나 또한 친밀하고 다정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네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와 영향을 주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생각해보면 유년기와 청년기의 내 이름 속에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를 낳아주신 생물학적 부모님이 들어와 있었다. 이름 속에 누구네 자제라는 타이틀이 늘 나를 따라다녔고, 장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름 속에 나만의 내 얼굴로 사람들이 불러준 것 같다. 그러나 그것 역시 때론 누구의 엄마와 누구의 아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해서 온전한 내 이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결국 이름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리 붙는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것도 이름을 부르니 부른 사람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존재의 가치와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듯.
어쩌면 내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일 것 같다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창세기 2장 19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라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나를 부른 말이 바로 내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성장해 가는 동안 때에 따라 누구의 자녀와 누구의 엄마로 호칭에 변화가 생겼고, 무엇이 먼저이든 모두 나를 의미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누구의 할머니로 또다시 이름 대신 불리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물론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내 이름이 온전하게 불리게 될 거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거다. 내 몸에 딱 들어 맞는 나무 상자 안에서 비로소 최초로 부모님께서 주신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생명이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한 몸뚱어리 앞에서 고인이 되신, 고 아무개라는 내 이름을 정작 내가 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이렇듯 이름은 결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말하는 인생이란 정의에 한 가지 더 첨부한다면 ‘인생이란 내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이름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내가 살아있던 시절에 담기는 것이기에 과연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내 이름을 무엇으로 기억 속에 저장할지….
한국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내 이름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나님을 만나고 세례받은 지 만 십일 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나의 이름을 되새겨 본다. 누구의 자녀도 아내도 그리고 누구의 엄마도 떼어내고 오롯이 나만을 떠올리는 이름을 불리길 바라던 나. 이제는 되려 내 이름 안에 무언가의 수식어가 들어와 있으면 한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넘쳐나는 사랑이 담긴다면…. 창세기 32장 27절에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구절이 있다. 그러면서 28절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으로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이름의 변경은 성품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사와의 은혜로운 만남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은 이스라엘이 된 야곱처럼, 누구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지에 따라 또 다른 인생관을 지니고 삶을 바라보는 자세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로 인해 언행 심사를 숙고하고 나의 삶을 통괄하시는 그분께서 계시기에 겸허히 삶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눈과 마음도 지니게 되었고, 그 사랑으로 인해 나눌 수 있는 베푸는 사랑도 깨닫게 되었다.
골로새서 4장 5절과 6절에는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내게 크리스천들의 말은 쾌적하고 친절해야 하며 소금과 양념처럼 맛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자애로운 사랑을 통해 앞으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 안에도 그분의 사랑이 멈추지 않는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소중하고 다정하게 불러야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새삼 되돌아보게 된 나의 이름이지만 지금 내 이름 속에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계신다고 확신에 찬 소망 또한 가져본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장 7절-
-2018. 8. 4 언제 어디서나 이름이 불리는 행복한 느낌이 들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