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상흔,
시조로 승화
개인이나 국가나 살다 보면 굴곡진 삶의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1950년에 태어나 6·25전쟁과 동갑내기다. 어느덧 내 나이 일흔 6·25전쟁도 70주년을 맞게 된다. 나는 숙명적으로 나라와 함께 공동운명체적인 삶을 살아왔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온 집안이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갓난아기는 데리고 갈 수가 없다고 하여 마루 밑에 눕혀두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혼자 사는 법을 배우게 된 셈이다. 피난에서 돌아와 울다 지쳐 잠이 든 손자를 보며, 가슴 아파하던 할아버지께서 피랍되어 돌아가시는 참혹한 일까지 있었으니, 우리 집안과 나의 어려움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 3·1운동에 참여하셨고, 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굶주린 사람을 위해 창고 문을 여는 등 구휼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말문이 열리기 전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너는 장손이니 할아버지 대를 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반복해서 듣게 된다. 어렸을 때는 무슨 말인지 뜻도 모르고 들었지만, 자라면서 점차 어깨가 무거워졌다.
우리 민족이 개화기에서 광복기, 6·25전쟁을 거치면서 보편적으로 느끼는 삶의 무늬이며 질곡이다. 이러한 아픔을 예지적으로 느낀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시조인들이다. 일제강점기, 그 암울한 시절에 일제는 조선문화말살정책을 내세우면서 우리말 우리글 우리 역사를 없애려고 하였다. 시조를 없애면 조선 문화와 역사, 조선인의 정기를 없애는 지름길이 된다며 온갖 나쁜 프레임을 다 뒤집어씌워 세뇌했다. 이른바 부왜 문인들을 이용하여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으로 시 조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저의를 모르는 조선인들은 저들의 음흉한 의도도 모르고, 시조를 폄하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런 사고를 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천 년 역사를 가진 시조는 국민문학파와 뜻있는 선열들에 의해 조선 문물을 존중하고, 시조를 부흥하려는 운동에 힘입어 질경이처럼 살아남았다. 오랜 세월 핍박받던 시조가 광복을 맞아 꽃 피려는 즈음 안타깝게도 6·25전쟁이 일어난다. 시조인들이 동족상잔의 아픔을 시조로 노래한 것은 불문가지. 그 중심에 노산 이은상이 있다.
노산 이은상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다양한 문필 활동을 한다. 그는 3·1운동이 실패한 이후 국민문학파를 주도하면서 시조부흥운동을 일으켜 실의에 빠진 백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서정시조를 발표함으로써 근대 문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은상은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동아일보에 <사상로맨스>를 연재하였으며, 반일 · 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사우>, <그리움>,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을 노래하며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옥고를 치르는 동안 15편의 주옥같은 옥중시조를 남겼다. 이은상은 나라 없는 서러움과 옥고의 아픔을 체험하면서 자신이 당한 고통을 시적 육화 과정을 거쳐 담백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민족 사상에 근거한 지조와 조국애를 노래하면서 힘없는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유치장에 재 구금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는 날, 광양에서 시국수습군민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광복 공간의 우리나라는 또 다른 혼란기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은상은 <피난도>(1950. 12. 20), 〈조국아〉(1950, 12. 31),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1951. 4. 18) 등을 발표하였고, 1953년 5월 수복된 서울로 돌아와 <못 건너는 강>, <옛 벗은 반가운데〉, 〈숭례문>, <슬픈 역사>, <남산에 오르지 마오>, <강 건너 왔소〉 등 폐허시첩을 남겼다. 그 이후 <고지가 바로 저긴데〉(1954. 12. 31), <다시 우뚝 서본다>(1956, 새해 아침>, <당신과 나〉(1958. 8. 29), <나의 조국 나의 시>(1970. 3. 1), <푸른 민족>(1962. 7), <수석 송>(1977, 6, 25) 등 조국과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시조를 발표했다. 1982년 이은상은 늙고 병든 몸으로 휴전선 155마일을 직접 답사한 후, 자유와 평화와 사랑, 정의를 갈구하면서 42제목 205수를 연작으로 읊은 후 평화시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서사시조집 《기원-분계선을 넘어》를 묶어낸다. 교과서에서 배워 잘 알고 있는 <고지가 바로 저긴데>를 한번 보자.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 이은상,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전문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소요와 불안 속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제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은상은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전 국토를 답사하고 몸으로 체험한 후, 겨레와 나라의 희망을 살리기 위해 1954년 12월 그믐밤에 단 2수 105자의 글자로 된 <고지가 바로 저긴데>를 분연히 읊조렸다. 이 시조는 국민시조로 일컬어질 정도로 애송됐다. 심금을 울리는 시조 한 편으로 우리 민족은 전쟁의 아픔과 상흔을 치유하고, 새 삶을 살기 위한 길라잡이로 삶에 대한 의욕을 드높이고, 민족중흥의 꿈을 꾸게 된다.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보자고
욕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벗아 너마저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의 밝음을 기약함에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
-이호우, <바람벌> 전문
피로 물든 6·25. 이호우는 <바람벌>에서 분단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했다. 이 시조를 읊조려 보면 피를 나눈 동족끼리 다투면서 일어난 전쟁의 상흔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수와 장마다 순이, 무리, 겨레, 벗, 광복지사 등 서로 다른 화자를 등장시켜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눈물 고인 눈으로 보지 말라'고 노래했다. 동족끼리 폭력과 방화, 학살을 멈추지 않았던 무리들에게 차라리 남이었으면 좋았겠다고 소리치고 있다. 미쳐버린 친구에게 미치지 못한 내가 한스럽다고 서러워하며, 조국의 밝음을 기약하다 희생된 광복 지사 들은 차라리 복이라고 자탄하고 있다. 우렁우렁한 화자의 육성은 언제 읊조려도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예는 최성연의 <핏자국>, 박재삼의 <강물에서>, 송선영 〈설야〉와 〈휴전선〉, 김월준의 〈월정리역에서>, 유재영의 <그해 가을 월정리>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25전쟁이 남긴 상흔은 말할 수 없고, 그 트라우마trauma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도 어언 70년. 이쯤에서 남과 북은 갈등과 대립을 멈추고, 평화와 화해의 큰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통 큰 정치지도자들의 결단과 배포가 그립기만 하다.
동강 난 반도가 비에 젖어 우는고나
무참히 잘리운 네 아픔을 보느니
차라리 이내 허리를 잘라냄이 어떠냐
-김철, <동강 난 지도 앞에서> 전문
유월은 풀잎 하나에도
애창곡을 갖고 있어
진초록 건반을
비바체로 치지마는
오늘도
아픈 추억의
후일담을 듣는 것 같다
-홍진기, <6월 25일 비> 전문
아직도 통일은 멀어
목숨에서 잔풀 돋는데
서울역, 도라산역
오고 가는 이 열차가
갈라진
아래윗마을
박음질로 이어줄까
-김민정, <평화열차 DMZ> 전문
평화와 화해를 손짓하는 단시조 3편을 살펴본다. 김철은 중국 연변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시조인이다. <동강 난지도 앞에서>는 화자가 북한에 갔을 때,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담판 장소에서 즉흥 시조로 었다고 한다. 허리 잘린 한반도의 아픔은 남북한 백성들은 말할 것 없고, 해외 동포까지 그 아픔을 공유하고 있음을 본다. '동강 난 반도 가 비에 젖어' 운다면서 차라리 '내 허리를 잘라냄'이 어떻겠냐고 묻고 있다.
홍진기의 <6월 25일 비>는 슬픔을 전제하는 '비'가 제목에 제시되면서 6·25의 상흔을 은유적으로 표출한다. '유월은 풀잎 하나에도/ 애창곡을 갖고 있어 // 진초록 건반을 비바체로 치지마는// 오늘도/ 아픈 추억의/ 후일담을 듣는 것 같다'고 읊조린다. 전쟁의 상흔을 묘사와 진술을 통해 완곡하고 진솔하게 회상하면서 천연덕스럽게 표출하여 그 아픔을 더욱 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민정의 <평화열차 DMZ>는 '통일'의 길이 멀고 멀어 '목숨에서 잔풀'이 돋는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도라산역까지 '오고 가는 이 열차가' 남과 북을 '박음질'로 이어주어 경의선이 개통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조국 분단의 아픔과 휴전선이 없어져 아래윗마을’이 서로 연결 되기를 간절히 기구한다. 이처럼 시조는 짧지만, 강한 메시지로 심금을 울리며, 청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열여섯 새 각시를 빈집에 홀로 둔 채
보던 책 밀쳐놓고 끓는 피 총에 감아
퍼붓는 물동이포탄 그 속으로 뛰어들다
탱크와 자주포가, 곡사포와 기관총이
마주 보며 쏘아대는 승자 없는 불길 속
밤마다 바뀌는 주인 유학산의 핏강이여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명한 상관
그 앞에 몸을 던져 흩어지는 새파란 꿈
갓 스물 볼 붉은 혼이 다부동에 살고 있다
-김덕남, <아버지, 길을 가다 - 격전지 다부동에서> 전문
김덕남의 <아버지, 길을 가다-격전지 다부동에서>는 보다 감성적이고 직설적이다. 화자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무남 독녀로 태어나 60여 년을 살았다. 아버지는 1950년 8월 15일(음) 입대하여 1951년 9월 12일 강원도 양구군 동면지구에서 전사했다. 집에는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닳고 좀이 슨 전사통지서 한 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해가 오지 않았으므로 전사통지서를 차마 믿을 수 없어 오랫동안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1981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아버지의 비석을 찾았을 때, 그제야 어머니는 이곳이 세상의 울음터인 양 통곡하였다. 그 다음 해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아버지와 함께 국립현충원에 배위로 안장해 드린 후 아버지가 전투에 임했음 직한 낙동강, 왜관, 다부동 등 전적지를 순례하였다.' 김덕남은 휴전선 바람편지 - DMZ 을지전망대에서>, <DMZ에 서다>와 같은 전쟁 시조를 발표하여 전쟁 참화를 입은 당사자로서의 감회를 눈물로 기록 하고 있다.
6·25가 나던 해에 태어난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이 시기를 살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고통과 질곡 속에서 살아야 했다. 문학은 아픔을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특히 시조는 민족의 애환을 압축하고 절제하여 새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향점을 제시한다.
–2020. 6. 《월간문학》 6·25전쟁 70주년 특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