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관한 시 모음> 김종길의 '설날 아침에' 외
+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시인, 1926-)
+ 새해 새 아침은
새해
새 아침은
산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 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신동엽·시인, 1930-1969)
+ 새해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意識은
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忠直과 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勞動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祈禱는 나의 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生涯,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구상·시인, 1919-2004)
+ 새해 아침, 행복을 꿈꾸며
새해 아침 우리는
사랑 아닌 것
기쁨 아닌 것 어디에도 없어라
찬물로 세수하고
가지런히 앉은 아침이여!
솟아오르는 희망으로
천길 바다 속 햇살을 길어 올리네
풀 먹인 마음으로
다듬질한 생각으로
때때옷 입고 세배하는 아침이여!
말씀마다 뜻 있고 뜻마다 삶의 양식 되니라
한 알의 씨앗으로
한 해의 꿈을 심는 아침이여!
믿음의 뿌리마다
곧고 반듯한 기도가 되니라
새해 아침 우리는
소망 아닌 것
행복 아닌 것 어디에도 없어라
(이채·시인)
+ 희망하는 기쁨
침묵하는
겨울 산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차디찬
바다 위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하필이면
더 이상은 꽃이 피지 않을 때
흰 눈 나풀거리는 동토凍土에
이글이글
새 해가 떠오르는 건
가장 어두운 좌절 깊숙이
희망을 심으라는 것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숨어있는 평화를 찾으라는 것
희망하는 기쁨,
새해 첫날이 주는 선물입니다
(홍수희·시인)
+ 새해엔
무거운 얼음장 밑을
그래도
냇물은
맑게 흐른다.
그렇다
찬바람을
가슴으로 받고 서서
오히려
소나무는
정정한 것을.
새해엔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어둡고 답답한
땅 속
깊은 곳에서도
지금쯤
새 봄의 기쁨을 위해
제 손으로 목숨을 가꾸고 있을
꽃씨.
그렇다
언젠가
이른 아침을
뜨락에 쏟아지던
그
눈부신
햇살처럼
나도
새해엔
그렇게 살아야지.
(최계락·아동문학가, 1930-1970)
+ 새해맞이 해님
섣달 그믐밤
까만 어둠 속에서
달그락 달그락
햇살을 짠다.
지난해 반성하며
미운 마음
한 줌 걷어내고
베풀어
즐겁던 마음
황금빛으로 짜 넣고
다음 해로 미룬 일
오색실로 무늬 새겨
붉고 둥근 수레에
실어 두었다가
새해 아침
환하게
내다 걸려고
깜깜한 그믐밤에
햇살을 짠다.
(김진향·아동문학가)
+ 해님도 껍질을 벗는다
해님도
날마다 껍질을 벗는다.
아침마다
검푸른 동해바다에
두둥실 두리둥실
떠오르는 해님은
어제의 해님이 아니다.
너른 바다에
반짝반짝 수없이 부서지는
고깃비늘 같은
눈부신 해님의 껍질들을 보라.
초록빛 잎사귀마다
반짝반짝 수없이 부서지는
은빛가루 같은
찬란한 해님의 껍질들을 보라.
새해 아침엔
새 해님이 솟아오른다.
새 기쁨, 새 희망을 안고
수천 수만 개의 해님들이
일제히 치솟아 오른다.
(이국재·아동문학가)
+ 새해 아침에
삼백예순다섯 개의
해를 숨겨 놓고
그 속에
우리들의 꿈도 묻어 놓고,
'새해엔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 보셔요.'
조용히 속삭여 주는
삼백예순다섯 개의
까만 꽃씨들.
새해 달력 앞에 서면
파도처럼 일렁이는 가슴은
희망이 꿈틀거리는
아침 바다.
우리들 마음 속 꽃밭에도
삼백예순다섯 개의
꽃씨를 심고
둥근 해가 떠오를 때마다
곱게 곱게 피어날
우리들의 새해 꿈.
(위영남·아동문학가)
+ 새해 일기장엔
새해 일기장엔
커다란 햇덩이 하나 먼저 그릴래.
은빛 햇살 하늘 가득 풀어놓고
푸른 산 병풍처럼 빙 둘러칠래.
그 안에 옹기종기
우리 동네 정답게 그리는 거지.
맑은 실개천도 돌돌돌 흐르게 하고
지느러미 고운 물고기도 몇 마리
요리조리, 헤엄치게 그리는 거야.
참, 푸른 바람 한 줄기도 잊지 말고
꿀처럼 달콤하게 그려 넣어야지.
그래, 새해 일기장엔
검정 같은 원색은 빼버리는 거야.
은은하고 부드러운 간색으로,
섞이고 어우러져 따뜻하게 살아나는
그런 색깔로 온통 채우는 거야.
무지개 일곱 빛깔도 좋을 테지.
이제 막 눈뜨는 어린 새싹들의
연한 연두 빛깔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하고 은은한 색깔 속
이젠 우리들의 밝은 모습 그리는 거야.
덧니 하얀 순이의 세모진 얼굴에도
함박 같은 웃음꽃 그려 넣는 거야.
맑고 밝은 웃음색 죄다 끌어 모아
날마다 신나게 칠하는 거야.
그래, 그래.
너와 내가 함께 쓸 새해 일기장엔
햇덩이 같은 웃음색만 칠하는 거야.
(문삼석·아동문학가, 1941-)
+ 새해 아침에는 이상해
새해 아침에는 이상해
그냥 여느 날과 마찬가지 날인데
모든 게 예사로 봐지지 않는 것이
만날 보던 건물도
그냥 그 건물 같지 않고
만날 건너던 건널목 신호등도
그냥 신호등 아닌
뭔가 별다른 신호등 같은
생각 드는 것이
어제도 그제도 계속 입던 옷인데
처음 입는 새 옷 같이
자꾸 내려다보이는 것이
골목에서 자주 만나던 강아지까지도
보통 어제 그 강아지일 것 같아
자꾸 돌아다 보이는 것이
늘 듣던 음성의 친구인데도
뭔가 반가운 소리 불쑥 할 것 같아
전화 받는 말이 더듬거려지는 것이
까마득한 동구의 바람인 줄
번연히 깨달으면서도
우리 반쪽에서도 벌쭉 웃으며
달려들 것 같은 착각 자꾸 겹치는 것이
새해 아침에는 이상해
(오하룡·시인, 1940-)
+ 새해에는
새해에는 꽃이 벙그는 이유와
꽃이 아름다운 사연을 오래 얘기할 수 있게 하소서
이 땅 위에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들과
모국어의 향기를 같이 누릴 수 있게 하시고
바퀴벌레와 모기, 개미와 같은
하찮은 생명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소서
눈들어 보이는 것마다
우리들의 첫사랑임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되
길 위에서 서성이는 생각들로 하여
오래 마음 아프지 않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들의 그리움은 올해도 끝이 없을 것이므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배우게 하시고
정녕 사랑으로 하여 고통받지 않게 하소서
밤을 새워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세상이므로
미움, 시기, 욕심, 절망, 분노와 같은
좋지 않은 생각들은 잠시 잊게 하시고
희망, 따뜻함, 파아란 하늘과 같은
마음에 와 닿는 단어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오래 전에 잊혀진 슬픔을 위해서도
가끔씩은 목젖이 아프도록 울게 하시고
질감 좋은 색조로 새벽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마른 들판을 건너 온 겨울바람에도
향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쓸쓸한 등을 보이며 흐르는 저녁강이
깊은 바다와도 만나게 하소서
따뜻한 한 그릇의 시와 포옹하며 뒹굴게 하시고
사랑하는 여인이 단단한 꽃으로 그 자리에 오래 피어있게 하소서
이름 모를 늙은 가수의 느끼한 랩송마저도 사랑하게 하시고
함께 청청한 목소리로 노래하게 하소서
얇은 월급봉투라도 좋으니 그로 하여 기죽지 않게 하시고
작은 베풂으로 인하여 오히려 빛이 나지 않도록 하소서
무엇보다 마음살에 돋아나는 욕심의 잔을 비우게 하소서
주님 !
(양현근·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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