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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의 왕은 모두 성골인가?
지난 7월24일, 경주중고 24. 15동기회(중24회, 고15회)를 개최햐였는데, 회장단에서, 지난 6월 내가 경주시문화상(문화예술부문)을 수상하였으므로, 나의 약력, 지금까지 수상한 것, 그리고 특강을 부탁하기에, 그때 말씀드린 것을 정리하여 카톡에 올립니다. 특강(신라 상대의 왕은 모두 성골인가)은 시간관계로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내용 전달이 제대로 안된 것 같아 원래 준비한 내용 그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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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수상
- 시간 관계상 나의 약력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동안 수상한 것 중 주요한 몇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면,
1984년 7월, 대한불교조계종 법사 품수하였고,
1991년 12월, 법무부장관상(교정행정발전 유공),
1996년 12월. 수용자교화수기 모집 최우수상,
1997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청소년불자 지도 및 육성 유공),
1997년 4월. 경주시장상(경부고속철도 경주유치 유공) ,
2002년 1월. (사) 한국장애인협의회 감사패(10년간 한국자애인 협의회 후원),
2003년 5월. 제21회 교정대상(수용자 교육교화 유공),
2006년 12월. 자유문학 신인상(수필부문),
2016년 4월. 나라사랑 지도자 교육교안모집 우수상,
2018년 12월. 경주문인협회상(경주문인협회 발전 유공),
2025년 6월. 제37회 경주시문화상(문화·예술부문)을 수상하였습니다.
- 이 중에서 몇 가지 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은 내기 1964년 대한불교조계종으로부터 법사를 품수받고, 경주에서 13년 간, 경주불교중고등학생회, 경주불교청년회 지도법사를 맡아 왔고, 수용자교육교화를 주관하는 교회사(敎誨師)가 되어 홍성, 서울, 안동, 청송, 경주교도소에 근무하면서, 수용자들에게 불교 법회를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홍성불교중·고등학생회를 창립하였고, 홍성, 예산, 안동 불교중·고등학생회,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맡았으며, 홍성, 안동, 청송에서 6개월 과정의 불교교양대학을 개최하였고, 경주에서는 1년 과정의 불교대학을 개최하였는데, 불교교양대학 교재, 불교대학교재를 직접 편찬,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재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청소년 불자 육성 및 신도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수상하였습니다. 이 상을 받음으로 「대한민국국가사회공헌인물보감」에 수록되었으며,
- 경주시장 감사패는 친구들도 잘 알다시피, 1997년 경부고속전철 노선이 도심통과 노선안(현곡- 동국대 정각원 옆-서천 강변-도초역사)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안으로 될 경우, 경주시는 동서로 양분되고, 문화재 훼손, 소음공해, 교통체증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사료되어, 그 문제점을 경주신문 등에 기고하고, 불교계를 중심으로(그 당시 내가 경주불교연합회 대표였습니다) 경부고속철도경주도심우회통과추진위원회를 구성, 2만 202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도심통과 반대운동을 펼쳐, 정부로부터 도심통과노선을 백지화시켰습니다.
- 교정대상은 1973년 경주교도소 재임시절, 불우이웃돕기모임인 등불회를을 창립했는데, 당시 120여명의 직원 중, 86명이 동참하였으며, 평달은 3,000원, 보너스 타는 달은 5,000을 봉급에서 차인하여, 연 2회(음력 설전, 추석전), 13년간 고아원, 양로원을 방문하고 생필품을 전달하였으며, 홍성, 서울(구), 안동, 청송, 경주교도소에 근무하면서, 수용자 불교집회, 정신교육, 수시 상담, 자매결연 주선 등 수용자 교화에 힘썻고, 특히 안동교도소 재직 시, 사비로 검정고시반에 참고서 30권을 기증하고 학습지도를 하여, 고졸 검정고시에 10명이 응시하여, 8명이 합격하였으며, 그중 1명은 경북 수석을 차지하였습니다. 이 상(교정대상)은 법무부 소속 공무원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으로, 수상 후 집사람과 함께 청와대 영빈관 오찬에 초대를 받았는데(당시 대통령은 노무현이었습니다), 중앙지에도 보도되었는데, 보신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경주문화상은 내가 1982년부터 경주신문, 경북매일신문, 경북연합일보에 320여회의 인문학 칼럼을 기고하였고, '자유문학' ‘경북문예(경북문협)’ ‘경주문학(경주문협)’ ‘시와 수필(동인지)’ ‘월간 경주’ 등에 124편의 수필을 기고하였으며, ‘경주문화원에서 발간한 ’경주문화’ 경주예총에서 발간한 ‘예술경주‘에 32편의 논설을 기고하여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였습니다.
- 그 동안 펴낸 저서로는 종교관련 서적 6권(불교교양대학교재, 불교대학교재, 불교의 체계적 정립, 세계종교의 이해, 새로운 비교종교론, 성경의 미스터리를 풀다), 수필집 2권(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평행선), 칼럼·논설집 1권(화랑세기가 들려주는 신라사의 진실), 불교강의 선집 1권(불교는 21세기대안 사상) 등, 10권이며, 위와 같은 공적으로 문화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 이상 수상 내역을 마치고, 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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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주제] 신라 상대의 왕은 모두 성골인가?
들어가며
신라 천년 역사의 시대 구분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는 혈통을 기준으로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고, 상대(시조 혁거세 거서간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는 성골이고, 중대(29대 태종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와 하대(37대 선덕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는 왕호를 기준으로 상고, 중고, 하고로 나누고, 상고(시조 혁거세부터 22대 지증왕까지), 중고(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는 성골이, 하고(29대 태종무열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대 구분이 좀 다르긴 하지만, 시조 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는 성골이고, 태종 무열왕부터 그 이후의 왕들은 진골이라는 것만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강단사학에서는 김부식의 시대 구분을 수용하고 있고,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도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에 내가 경주문화원에 발간한 경주문화 15호에 ‘신라 상대의 왕은 모두 성골인가?’라는 제하의 논설을 기고하였는데, 오늘 제한 된 시간에 내용 전체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꼭 알았으면 하는 부분만 간추려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지금의 사로(현 경주시와 거이 일치합니다)에는 6부촌(양산촌, 고허촌, 진지촌, 대수촌, 고야촌, 가리촌씨)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양산촌은 남천과 북천의 평평한 평야 지대로, 지금의 경주 시가지에 해당되며, 촌장은 일평으로 경주이씨의 시조가 되었고, 고허촌은 남산의 서쪽과 남쪽지역에 촌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의 경주 내남면과 울산 두서면 지역이로, 촌장은 소벌도리로 경주 정씨의 시조가 되었고, 대수촌은 지금 경주 서악동과 모량, 건천읍 지역으로 촌장은 구례마이며, 경주 손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진지촌은 낭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촌장 지백호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고, 고야촌은 지금의 천북면 일대이며, 촌장은 호진으로,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고, 가리촌은 지금의 양남면 등의 동해안 지역에 형성되었던 어촌마을이며, 촌장 지타는 나중에 경주 배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시조 혁거세왕에서 28대 진덕왕까지 신라 상대의 왕을 배출한 세력집단은 6부촌이 아니라, 박, 석, 김, 세 집단이었습니다. 박씨 집단은 혁거세, 석씨 집단은 탈해, 김씨 집단은 알지를 시조로 삼았는데, 이들의 탄생신화를 보면 이주민 집단임이 분명합니다. 이주민 집단은 토착집단인 사로 6촌의 촌장 위에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 이주민 세력들은 사로국, 나아가 신라왕을 배출한 세력이 되기 위하여 세력 동맹을 맺었든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중 박씨 세력은 1대 혁거세왕에서 8대 아달라왕까지 8명의 왕 중, 4대 탈해왕을 제외한 7명의 왕이 나왔고, 석씨 세력에서는 4대 탈해왕과 9대 벌휴왕에서 16대 흘해왕까지 8명의 왕 중, 13대 미추왕을 제외한 7명의 왕이 나왔습니다. 김씨 세력에서는 13대 미추왕과 17대 내물왕에서 28대 진덕왕까지 13명의 왕이 나왔습니다.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부계 종족 내의 계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위계승의 실제를 보면 부자 사이, 종족 안, 종족 사이, 씨족 사이에 이루진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탈해왕(석씨)은 남해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유리왕의 뒤를 이었고, 파사왕(박씨)은 유리왕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탈해왕의 뒤를 이었고, 벌휴왕(석씨)은 석탈해의 손자라는 자격으로 아달라왕(박씨)의 뒤를 이었으며, 미추왕(김씨)은 조분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첨해왕의 뒤를 이었습니다. 유례왕(석씨)은 조분왕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미추왕의 뒤를 이었고, 내물왕(김씨)은 미추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흘해왕(석씨)의 뒤를 이었습니다.
신라에서 김씨 왕위 세습제가 확립된 것은 17대 내물왕 때부터입니다. 이때부터 왕위 계승이 장자 상속으로 이루어 졌으며, 왕권은 그 이전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라의 골품제도
신라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血統)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습니다.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印度)의 카스트제도(Caste制度)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신라의 국가성장과정에서 생긴 역사적 산물이었습니다. 즉, 신라는 연맹왕국(聯盟王國)에서 귀족국가로 바뀌어가고 있던 시기에 정복․ 병합된 각지의 크고 작은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연맹왕국의 지배층을 왕경(王京)인 경주(慶州)에 이주시키고 이들을 중앙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때 이들 세력의 등급․서열을 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골품제도가 제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라국가가 다양한 귀족세력을 재편성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었습니다. 신라는 이렇게 함으로써 지배체제를 구성하는 한편, 지방 세력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가 이처럼 병합된 각 지방 족장세력의 혈연적․족적 유대를 토대로 하여 흡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시킬 만큼 왕권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골품제는 사로국 형성시부터 만들어져온 신분제를 바탕으로 법흥왕 7년(520) 율령을 반포할 때 편성된 신분제로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율령 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을 3등분하였다가 현실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곧 소멸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습니다. 성골(聖骨)은 국왕을 포함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왕족으로 매우 폐쇄적이고 규모도 작았습니다.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한 법흥왕 대에 왕위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왕족 종족을 성골이라 칭하며 편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진덕여왕 때까지는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진골에는 내물왕의 후손인 경주 김씨 혈족뿐만 아니라 박씨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복속한 국가 중 금관가야나 고구려(보덕국)처럼 큰 국가의 왕족은 진골에 편입되기도 하였습니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입니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 시 제기되는 하급 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골품제는 신라의 국가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6세기 초는 이미 법제화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거의 변함없이 신라사회를 규제하는 중요한 근본으로서 기능·작용하였습니다.
성골시대의 개막과 종언
23대 법흥왕은 불교 공인 이후, 불교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강화된 왕권을 기반으로 성골시대를 열었습니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인도의 전륜성왕(고대 인도의 이상적 제왕)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자신을 전륜성왕에 비견하고, 두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 아들의 이름인 동륜과 금륜(혹은 사륜)으로 지으면서 신라왕실을 전륜성왕가로 자리매김하려고 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라 왕실을 아예 부처의 가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곧 부처다’라는 왕즉불(王卽佛) 신앙을 근거로 하였는데, 석가모니가 왕자 출신이었기에 그것은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라 왕실은 해탈을 한 석가모니가 다시 신라왕실에 태어나게 된다는 설정을 하면서 진평왕의 이름은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이었던 정반(혹은 백정)이라 하고, 진평왕의 정비는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 왕비, 그리고 진평왕의 남동생은 석가모니의 숙부들의 이름인 국반과 백반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진평왕과 마야 왕비 사이에서 왕자 석가모니는 끝내 태어나지 않았고, 성골 남자는 한명도 남아 있지 않게 되자,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선덕왕조>에는 덕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덕만이요, 진평왕의 맏딸인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덕만은 성질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덕만을 왕위에 올려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이와 같이 선덕여왕은 핏줄을 잘 타고나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덕만은 진평왕의 맏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덕만 이외에 다른 딸도 있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선덕여왕 지기삼사 편>에는 덕만의 이름과 함께, 「서동요」에 등장하는 선화가 셋째 딸이라고 적고 있고, 『화랑세기』에는 천명이 맏딸이고, 덕만은 둘째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언니 천명공주(天明公主)가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편>에 의하면, 진지왕은 폐위되었으나 태상태후(진흥왕의 왕비)의 명령으로 진지왕의 두 아들-용수와 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ㆍ덕만과 함께 궁궐에서 자랐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이복형제인 줄 알고 있다가 나중에 자신들이 숙부와 조카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명공주는 용춘을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신라 사회에 숙부와 조카 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천명공주에게 싹튼 사랑의 대상은 용춘이었으나, 그는 공주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었습니다.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남자 중에는 용숙(龍叔)같은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용수와 용춘 중에서 ‘젊은 아재(叔)’란 뜻으로 용숙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야왕후가 잘못 알아듣고 진평왕에게 “천명이 용수를 좋아하고 있다.”고 알렸던 것입니다. 왕후로부터 천명의 말을 전해들은 진평왕은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수’라고 생각했습니다.
『화랑세기』는 이를 ‘그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공(용춘)의 형, 용수 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려고 용수를 천명공주의 남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왕후가 천명공주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천명공주는 그만 사랑하는 용춘이 아닌, 형 용수의 아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용수의 아내가 되어서도 용춘에 대한 천명공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화랑세기』는 ‘공주는 제(帝, 진평왕)에게 공의 자리를 떠받쳐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위(位)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천명공주가 공주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용춘의 지위를 높여주었음을 뜻합니다.
한편 13세 풍월주가 된 용춘은 많은 업적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가 낭도를 이끄는 방법은 신분이 아니라 실력과 공(攻)을 위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용춘이 풍월주로서 큰 업적을 이룩하자 진평왕은 용춘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천명에게 왕위계승권을 양보하라고 권했습니다. 『화랑세기』는 ‘이때 천명공주가 효심으로 순종하여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영국의 윈저(Win dsor, 1894~1972)공이 심슨(Simpson)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마저 버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천명공주 역시 사랑하는 용춘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것입니다.
천명공주가 출궁함으로써 왕위는 자연히 용춘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선덕공주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는 남자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언니가 즉위한다면 모르겠지만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용춘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덕공주는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 용춘이 자신의 사신(使臣;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신하. 여기서는 남편이란 뜻도 있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평왕은 선덕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이 정도의 배포라면 왕 노릇을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평왕은 선덕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용춘이 선덕의 사신이자 남편이 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용춘은 선덕의 남편자리를 사양했으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화랑세기』는 ‘여왕은 3명의 남편을 둘 수 있게 하는 삼서지제(三壻之制)를 제도화하여 용춘 외에도 흠반(欽飯)과 을제(乙祭)를 남편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천명은 남성이 즉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여 왕위와 용춘을 모두 놓쳤으나, 선덕은 이런 고정관념에 도전한 결과 왕위와 용춘을 전부 차자하고, 두 남자까지 더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한 최후의 승리자는 천명공주였습니다. 『화랑세기』 는 ‘공(용춘)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선덕에게서)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용춘이 선덕에게 애정이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천명공주는 용수가 죽으면서 자신과 아들을 용춘에게 맡김에 따라 원하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용춘은 아들을 두지 못하였으므로 천명공주와 용수 사이에 난 춘추를 아들로 삼았는데, 훗날 김춘추가 즉위하자 용춘을 갈문왕(葛文王; 왕의 아버지, 장인, 외조부, 형제, 또는 여왕의 남편에게 내리던 칭호)으로 추존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이 3명의 남편에게서 자신의 뒤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 데 반해 천명공주는 비록 자신이 왕이 되지는 못했으나 삼국통일의 주역을 생산하였으니, 천명공주의 인생이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덕여왕이 끝내 후사를 두지 못하자 다음 왕위는 그의 사촌 동생인 진덕에게 돌아갔는데, 28대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의 씨가 남지 않지 않게 되자, 그 뒤를 이어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 받으므로 성골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김춘추는 왜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의 신분이었을까?’하는 점입니다.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를 아버지로, 26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를 어머니로하여 태어났으므로 혈연적으로는 순수한 왕족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김춘추는 성골이 사라진 뒤에야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춘추의 아버지인 용수가 왜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을까?하는 문제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용수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 이유를 찾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성골과 비성골을 구별 짓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용 수와 춘추 두 부자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비성골이 되었느냐?하는 시기와 원인은 전적으로 그의 조부인 진지왕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지왕은 정치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된 왕이다. 『삼국유사』<왕력편>에 ‘진지왕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왜 능(陵)이라 하지 않고 묘(墓)라고 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왕의 신분도 박탈된 후, 그 아들 용수·용춘과 손자인 춘추의 신분도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다고 보아집니다.
애공사가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 무열왕릉 뒷편에는 큰 무덤들이 여럿 있는데, 그 끝자락 왼편에 삼층석탑이 하나 우뚝 서 있습니다. 이 탑이 애공사 탑이라고 불리우며, 그 탑 북쪽에 있는 묘가 진지왕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애공사탑 주변을 최근 신라문화원에서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꽃단지를 조성하여, 요즈음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습니다. 나도 지난 5월 중순 경에 이곳을 다녀왔는데, 시간 내서 한 번 다녀가셨으면 합니다.
맺음말
신라의 골품제도는 신라사회를 규제하는 근본원리였습니다. 신라 상대에는 박․석․김, 세 종족 간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마립간 시대인 내물왕 때부터 김씨 세습제가 확립되었고, 법흥왕 때 성골제도를 두었습니다.
성골과 진골은 별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진골만 있었는데, 법흥왕 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타의 왕족과 차별을 하기 위해 임의로 만들었습니다. 성골집단은 재위(在位)하고 있는 왕을 중심으로 왕과 그의 형제의 가족들로 한정되었으며, 왕위 계승은 이들 성골 집단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28대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의 씨가 남지 않지 않게 되자, 그 뒤를 이어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 받으므로 성골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 상대의 왕은 모두 성골이란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씀은 김관용 지사의 재임시절 역점사업으로 「신라사 대계 32권」을 편찬하였습니다. 「신라사 대계」 편찬은, 신라사를, 정치, 문화, 종교 등, 9개 분야로 나누어,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들로 집필진을 구성하고, 3년여 만에 초안이 나왔는데, 인쇄에 들어가기에 앞서, 초안에 정정할 부분은 없는지, 보문 현대호텔에서 학술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나도 참석하였는데, 집필자가 “신라 상대의 왕은 모두 성골이다“라고 하기에, 앞서 내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김춘추는 혈연적으로 성골인데, 왜 진골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리어 내게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고 내게 질문을 던지기에 “김춘추는 혈연적으로는 성골임에 틀림없으나 조부인 진지왕이 폐위됨으로 진골로 신분이 강등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내용을 각주에 달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참고하겠다는 답변은 들었는데, 아직까지 그 책(신라사 대계)을 보지 못하여 확인은 못하였습니다.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강의한 내용 중에서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가 아는 대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